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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한 뿌자리 노인의 일생

청전 스님 2012. 11. 12
조회수 12381 추천수 1
국띠1 copy.jpg » 십년 전의 뿌자리 노인. 사진 청전 스님.

뿌자리란 사원지기를 말한다. 물론 인도의 힌두교에서 일컫는 말이다.
인도의 길고 긴 역사에서 거의 모든 게 힌두교 종교 영향 안에서 어떤 문화나 철학 문학이 생겨났고, 심지어 마을까지도 사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유구한 전통의 인도 토착 종교에 처음 접할 때는 사실 거부감도 있었다. 어딜 가나 힌두교 사원이나 탑 조그만 사당까지, 심지어 집집 마다에도 신당이 있다.  

지금부터 글 쓰려는 이야기는 히말라야 오지 고산 산중 마을의 한 사원지기 이야기이다. 십년 전 그때가 11월이었다. 우연히 산행 중에 한 조그만 사원을 거쳐 가는 길목에 이르렀다. 그 때 필자는 마지막 국띠 마을(2.640메타)에서 하루 묵고는 까다롭기로 이름난 국띠패쓰(GUKTI PASS, 5.040메타)를 넘어 뒤쪽 팡기(PHANGGI) 계곡으로 나가는 산행 길이었다. 그 옛날엔 그 쪽 계곡과 이쪽 계곡의 주민들은 고개를 넘어 오가며 살아왔단다. 고개 넘으면 그곳에도 이름 있는 힌두성지로 띨로크나쓰(TRILOKNATH)라는 곳으로 이어지는데, 또한 불교도들도 가르샤 팍빠(GARSHA - PHAKPA)라는 이름으로 양 종교의 신도들은 어떤 갈등 없이 조화롭게 참배가 그치지 않는 유별난 지역에 닿는다. 물론 필자는 마날리 고개 넘어 진즉 티벳 스님들과 들러 본 곳이기도 하다. 

마을에서 근 십리나 떨어져 있는 곳에 우리식으로 말하면 빼어난 명당자리에 제법 오래된 그러나 약간은 어설픈 힌두 사원이 있다. 규모는 작지만 꽤 오래된 사원임을 알아차린다. 마을 신전인데 왜 이리 외딴 곳 멀리에 있을까? 
배낭을 부리고는 고즈넉한 풍경과 사원 뒤 설산 풍광에 피로를 풀고 있는데, 저 아래쪽에서 뭐가 움직이는 게 보인다. 사람이다. 우리 쪽으로 올라오고 있다.  이 길은 거의 사람이 오가지 않을 길일 텐데 누가 올라오는 것일까. 가까이 다가오는데 보니 지팡이 짚고 힘들게 한 노인이 바로 이 사원에 올라오는 것이다. 무슨 일로 이 가파른 길을 오를까? 

국띠2 copy.jpg » 사원에서 본 앞 산 새벽 일출. 사진 청전 스님.

올라와 숨 돌리는 시간에 겨우 사진 한 장 찍은 게 지금 와서는 너무너무 아쉽기만 한다. 그 분의 땀 베인 얼굴에 더 이상 카메라 초점을 맞추고 사진 찍을 엄두가 안 났으니, 그 분의 눈은 이미 사람 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눈 속에 이미 신이 있는 그런 눈이었다. 소박한  얼굴모습 자체부터, 이 세상을 초탈한 무욕 무심의 눈동자를 어떤 글로써 표현 할 수가 있을까! 그 어느 수도자가 이런 눈동자를 가질까. 필자도 얼추 공부한다며 수행한다는 성직자들을 보아오면서 이 세상을 살아오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 산골 노인을 대하면서 스스로 주눅이 들어버렸다. 어떤 말을 할 수가 없었으니까. 내 눈에는 적어도 이 노인은 이미 사람 몸 가진 신이 되어 버린 것이다. 비록 꾀죄죄한 옷차림에 볼품없는 자태에서 경외심이 우러나는 것은 무슨 힘일까. 그대로 세상을 초탈한 모습이다.

알고 보니 아래 국띠 마을에서 매일 신전에 버터불과 향을 올리러 올라오고 내려가는 뿌자리(사원지기) 노인이다. 그런데 이 길이 평탄한 길이 아닌 힘든 오르막 내리막의 가파르고 비탈진 길인 것이다. 그 정성과 신에 대한 헌신의 순수한 마음과 행동이 바로 이 노인의 삶과 얼굴을 만든 것임을 알아 차렸다. 십리 길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이 험한 길을 오르내리는 한 인간의 헌신적인 삶을 반복하는 사원지기였다. 

그 땐 필자도 가야 할 산행 길이 멀었기에 그 노인이 사원에 들어가 인도 특유의 냄새 찐한 향을 올리고 기름 등을 켜는 것만 멀찍이에서 보는 걸로 하고는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이후 히말라야 구석구석을 쏘다니기고 그 이름 있는 성지란 곳의 사원들을 다 돌아다녔어도 순수한 인간 혼을 지닌 그 노인장 이상 가는 맑은 사두나 사원지기를 다시 볼 수가 없었다. 아니 그 많은 유럽의 성당이나 회교도의 모스크에서, 동남아의 많은 사원의 스님들이나 성직자로 봉사하는 그 누구에서도 영성이라 할 인간 본래의 때 묻지 않은 혼이 베인 모습을 못 만난 것이다.

그러다가 나 개인의 히말라야 나그네 인생길에 그 노인을 한번은 더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옛날부터 있어오다가 이번에 실천으로 옮겼다. 가는 길목엔 달하우지(DALHOUSIE)란 영국통치 시절부터 하기 휴양지로 이름난 산정, 그 주위의 카지아르(KHAJJIAR) 숲 속, 또 거기서 하루길 더 가면 브라흐마우르(BHARMAUR)란 고색창연한 1400년의 향기가 베인 힌두 사원을 구경하기로 했다. 이 주는 어느 곳이나 히말라야 산줄기가 늘어져 있어 굽이굽이 계곡 길이며 짙은 숲으로 참 운치가 있다.  그리고 지금 우기 끝난 히말라야의 힘찬 가을이 아닌가. 히말라야 계곡 늦가을 산중의 곧게 뻗은 전나무 잣나무 소나무들의 기운이 저절로 느껴지는 그런 때이다. 자연은 이렇게 스스로를 장식하며 우리 인간을 위한 존재자 인듯하니 그 얼마나 고마운 숲인가. 아름답기는 또한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예전엔 20여 킬로를 걸어갔지만 요샌 마을 6킬로 전까지 길이 나 있다. 물론 비포장 먼지 나는 길이다. 마을에 들어서니 십년 전 옛날과 변한 게 거의 없는데 전기가 들어간다는 거 외엔 똑같다. 걸어가며 동행 된 한 마을 사람 집에서 잘 수 있었다. 서툰 힌디로 뿌자리 노인을 만나고 싶다하니 몇 일간 내려올 수가 없는 뿌자(헌공 예배) 기간이라 사원에 묵는단다. 이튿날 어둠이 가시기 전 사원으로 올라 부쳤다. 예전엔 그리 힘들지 않았는데 이번엔 여러 가지로 힘이 든다. 벌써 나이 탓일 게다. 먼동이 터오는 새벽의 찬 기운으로 애를 먹으며 사원까지 정말 힘들게 올라갔다. 높은 고산지대라서 이미 주위는 얼음판이다.

반갑고 또 그 안에 얼마나 변했을까 하는 설레는 마음으로, 십년 전에 만난 그 노인 영감 뿌자리를 다시 만난다는 생각에 숨 좀 돌리자마자 향 연기 찐하게 베인 안에 들어갔다.  그러나 다른 한 노인이 경전을 외우고 있다. 그 옛날의 노인을 물으니 맙소사 몇 년 전에 이 미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여든 아홉이었단다. 아쉽다. 좀 일찍 와 봤었더라면.............스스로 내가 복이 없어 그 숭고한 참 인간 모습을 끝내 놓쳤음을 한탄 한다. 하긴 꼭 모습을 본다고, 그 노인의 형상에 영성이 있는 것은 아닐 터지만 몹시도 아쉬운 마음으로 내려와야만 했다. 

곁들여 함께하는 사진은 옛날 필름 사진이라서 그 분의 깊은 내면의 뭐가 제대로 나올 리가 없을 것이다. 아쉽기 짝이 없다. 내려올 때 함께한 마을 아저씨 얘기가 돌아가신 그 노인의 삶을 상상 할 수 있게 한다. 즉 이십대에 결혼 했는데 아기도 가지기 전에 부인이 죽은 뒤로 자원해서 이 마을 사원의 뿌자리를 평생 해오다가 근 구십 나이에 죽었다는 말에 그 노인의 삶이 이해가 갔다. 그러니까 칠십년 가까이 자기가 믿는 신에게 헌신 하며 일생을 희생하는 삶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폭설이 내릴 때를 재외하곤 하루도 빼먹지 않고 사원에 향을 올리고 불을 밝힌 노인의 삶이라니, 이 마을 밖을 나간 적이 없었다고 한다. 몇 년 전 늦가을 몸져눕고는 다시 못 일어나 끝내 한 많은(?) 삶을 마친 것이다. 마지막 노인이 죽은 뒤 마을 사람 모두가 참석하여 그 먼 사원까지 시신을 운반하여 신전  앞에서 화장을 치렀다는 얘기에 깊어지는 내 사념은 끝없는 나락에 빠져 들어갔다. 

국띠3 copy.jpg » 사원 근경. 사진 청전 스님.

이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다. 유감스럽게도 대부분 자기 종교 외에는 이웃 종교는 부정하기 십상이다. 아예 서로 종교가 다르다고 혐오하며 비방과 온갖 방해까지 하곤 한다. 한 신을 두고도 각 종파별로 신의 이름까지도 달리 부르는 꼴이라니. 필자는 늘 역사적으로 종교가 가장 많은 사람을 죽여 왔다는 폭력에 분노가 인다. 사랑과 자비를 행해야 할 종교가 돈과 권력으로 힘을 갖출 땐 여지없이 민중을 힘들게 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항상 힘 있는 정권에 빌붙고 결탁해오면서 말이다. 종교를 빙자해서 그 많은 전쟁을 해왔고 수많은 사람을 죽여 왔다는 게 이 지구상의 그 잘난 종교들인 것이다. 또 사람을 죽일 때는 자기들 신의 이름으로 가장 잔인하게 죽인 것도 바로 종교라는 포장지를 둘러 쓴 우리들 사람이었다. 

필자는 이 이름 없는 한 사원지기 노인의 삶은, 때가 되면 진리라고 온갖 장광설을 내뱉는 어떤 성직자보다도 또 시간이 되면 매너리즘에 빠진 예식을 집전하는 화려하게 치장한 수도자보다도 훌륭하고 숭고한 삶이었다고 확신한다. 바쁘기만 한 우리네 현대판 성직자, 그들이 과연 침묵의 힘이나 내적인 영성을 얼마나 갖추고 살까? 요즘 대부분의 성직자들의 이면에는 자기 먹고 살려는 직업으로 속화 되어버린 장사 속 종교로 변질 시켜 논 꼴이기도 하니까. 

참고로 그 국띠 마을 조그만 신전의 이름은 까일랑 사원이며, 안에는 힌두교 깔리 여신을 모시고 있다. 이번에 찍어 온 사진을 보면 그 소박한 사원에 더욱 애정이 갈 것이다. 필자로서 적어도 이 몸 버릴 때까지 그 이름 없는 히말라야 산골 영감 한 뿌자리 노인을 잊을 수 없으리라.

2012년 겨울 입구에서 생명 가진 모든 이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기원 드립니다.

비구 청 전 두 손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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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전 스님
가톨릭 신부가 되기 위해 광주 대건신학대에 다니다 송광사 방장 구산스님을 만나 출가했다. 1988년 인도로 떠나 히말라야에서 달라이라마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매년 여름 히말라야 최고 오지인 라다크를 찾아 고립된 티베트 스님들과 오지 주민들에게 약과 생필품을 보시하고 있다. 어느 산악인보다 히말라야를 많이 누빈 히말라야 도인.
이메일 : cheongjeon9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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