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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대사도 두 손 든 커피

원철 스님 2013. 09. 25
조회수 27901 추천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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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수종사의 찻집  사진 이병학




커피 내리기-.jpg

커피 내리기  사진 <한겨레> 자료



커피콩 푸기-.jpg

커피콩 푸기  사진  <한겨레> 자료



1. 커피가 대세다 


 한류를 말할 때 늘 빠지지 않는 가수는 싸이다. 그의 노래 ‘강남스타일’은 빌보드 차트 2위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 노래의 도입 부분은 한 손에 커피를 든 채 파라솔 밑에서 유머스러운 표정으로 졸다가 깨어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노랫말 역시 커피로 시작된다.


 “커피 한잔의 여유를 아는 품격있는 여자… 커피 식기도 전에 원샷 때리는 사나이”


 두 얼굴의 커피라는 절묘한 대비를 통해 여유와 바쁨이라는 현대인의 양면적 삶을 동시에 그려낸 수작이라고 하겠다. 문 닫은 가게가 리모델링을 통해 다시 문을 열면 셋 중에 한곳은 커피집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커피문화는 이제 대세로 자리잡았다. 유명 커피집에서는 잔 받침을 뒤집거나 커피잔을 이마까지 들어올려 ‘명품’임을 확인하는 모습도 더러 접하는 풍경이다. 커피값이 하도 비싸 ‘사향고양이의 배설물에서 채취한 원두’라는 답변을 기대하고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우리 가게는 물컵도 명품’이라는 대답이 돌아오더라는 이야기는 대세의 극치가 보여주는 또다른 허세의 풍속도이기도 하다.  



2. 커피에서 온고지신을 배우다 


 오래전에 일본 불교 진언종의 총본산인 고야산 성지를 찾았을 때 일이다. 사찰 진입로를 따라 양쪽에 자리한 12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오래된 영탑공원 안을 걷다가 돌로 만든 커다란 커피잔과 마주쳤다. 다소 생경한 광경인지라 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일본 유명 커피회사인 유시시(UCC)그룹에서 세운 위령탑이었다. 


함께한 지인은 그 회사 제품인 ‘우에시마 커피’는 연륜이 환갑줄에 이르렀으며, 유시시는 캔커피를 세계 최초로 개발한 회사라는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유시시 커피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것도 그때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끼 낀 전통 부도와 사각형이 주종인 비석의 숲 속에서 현대적 디자인의 둥근 커피잔 영탑은 또다른 이미지 공간을 연출했다. 그 틈 사이로 과거와 현재가 말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옛 전통을 이으면서도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는 온고지신의 또다른 현장이기도 했다.     



3. 주체적인 커피문화로 수용되다


 이제 우리의 커피문화 역시 추종적 답습형을 벗어나고 있다. 기존의 서구식인 수동으로 원두를 가는 기계인 핸드밀에 만족하지 않았다. 두부콩을 갈던 솜씨를 발휘하여 원두 콩을 소형 맷돌로 갈기도 했다. 한약재용 절구를 이용해 찧는 방법으로 손맛을 더해 맛과 향을 배가시키기도 했다. 커피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하려는 실험이 여기저기서 시도되었다.  


 서울 도심의 어느 절을 찾았을 때 한약재를 손으로 갈아내는 도구를 사용하여 커피콩을 분쇄한 뒤 핸드드립으로 내려 준 커피를 마신 호사를 누린 적이 있었다. 최근 공중파의 인기 프로그램인 <아빠! 어디 가?>의 무대가 되었던 강원도 강릉 현덕사의 ‘커피 템플스테이’는 사발만한 다완(차 그릇)에 반쯤 채운 커피를 말차(분말녹차를 물에 타서 마시는 차)처럼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마시는 예법을 선보이기도 했다. 매스컴의 영향으로 얼마 전에 그 절을 몇년 만에 다시 찾게 되었다. 규모도 커지고 스님도 주변에 많이 알려진 인물이 되었지만 다듬어지지 않은 어눌한 말투와 ‘뭔가 도와주고 싶도록 만드는’ 그 소박함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강릉은 해마다 10월 말이면 커피축제가 열린다. 한국 커피 1세대 원로들이 이곳에 하나둘씩 정착하면서 새로운 ‘커피 메카’로 불리게 된다. ‘보헤미안’ 주인장의 명성은 서울 안암동에서 익히 들은 터이다. 개운사에 들를 때마다 이미 주인이 떠나버린 지하의 그 커피집을 고려대장경연구소 종림 스님과 함께 가끔 찾곤 했다. 하지만 강릉 커피는 그런 외부적 요인과 함께 간과할 수 없는 그 도시만이 가지는 내부적 요인이 합쳐진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즉, 예부터 유명한 초당두부를 만들면서 콩을 갈던 솜씨가 커피콩 가는 솜씨로 응용될 수 있는 저변문화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까지 불러일으킨다.       



맷돌에 커피갈기-.jpg

맷돌에 커피 갈기   사진 원철 스님




커피 가는 맷돌등-.jpg

전통 맷돌과 절구



4. 깨 볶는 실력와 커피콩 볶는 솜씨는 같다 


 경남 합천 해인사 일주문 근처에서 차문화원을 운영하는 해외파 바리스타 주인장은 가마솥을 사용하여 직접 볶은 원두로 만든 것이라고 하면서 덤으로 한잔을 더 줬다. 


주방의 솥 온도를 충분히 올리지 못한 까닭에 원하는 맛을 제대로 얻지 못했노라고 아쉬워했다. 하지만 노천의 부뚜막에 큰솥을 걸고 참나무 장작불을 이용한다면 고온도 충분히 가능하며 또 ‘불맛’까지 가미되어 상업적으로도 승산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하긴 원두 볶는 실력이나 옛날 할머니들의 깨 볶는 솜씨나 알고 보면 그게 그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절에도 온도와 시간의 절묘한 조화가 깨의 고소함을 좌우하는 노하우였다. 참기름을 짜는 용도와 깨소금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볶는 온도와 시간이 달랐다.  멀리서 소포로 부쳐온 커피콩은 가게에서 마신 원두에 비해 항상 볶은 정도가 약했다. 미루어 보건대 커피 역시 바로 먹는 것과 오래 두고 마실 것은 가공법에서 당연히 차이를 둔 것이었다.    



5. 깨 볶는 기계로 커피 볶는 기계를 만들다


 수입품 일색이던 커피콩 볶는 기계의 국산화에 성공한 기업도 원래 깨 볶는 기계를 만들던 회사였다. 그 기계를 만들게 된 동기는 사소한 것이었다. 어느 날 방앗간 앞을 지나는데, 나이가 들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기름을 짜기 위해 손으로 오랜 시간 힘들게 깨를 볶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이후 자동으로 깨 볶는 기계를 만들어 보급했다고 한다.


세월이 흘렀다. 커피가 유행할 징조를 보이던 90년대 끝 무렵이었다. 어느 커피수입 회사의 독일제 커피기계가 탈이 났다. 제대로 수리하려면 해외에서 기술자가 오든지 그 나라로 기계를 보내든지 해야 할 형편이었다. 시간과 비용이 만만찮았다. 고심하던 회사는 재야 실력자인 그를 알아보고 수리를 요청했다. 보란 듯이 수입품을 사용하지 않고 자체 기술로 단숨에 고쳤다. 그것을 계기로 아예 그 기계를 직접 만들어볼 것을 권한 것이다. 가만히 살펴보니 깨 볶는 원리나 커피콩 볶는 이치는 같은 것이었다. 주저 없이 수월하게 로스팅 기계를 만들 수 있었다. 수입품 일색이던 국내 시장을 일거에 평정하고 이제 해외 시장까지 넘보게 되었다. 


 어쨌거나 결론은 깨 볶는 기계를 만든 아저씨는 커피콩 볶는 기계도 만들 수 있고, 깨를 잘 볶을 수 있는 아주머니라면 커피콩도 잘 볶을 수 있으며, 두부콩 맷돌을 잘 돌리는 할머니는 커피콩도 잘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한 것이라 하겠다.  



6. 대세는 성인도 어찌할 수 없다


 수도원의 커피처럼 차 역시 잠을 쫓는 효능에서 시작되었다. 절집에는 달마 대사와 차나무에 대한 전설이 전해온다. 그 옛날 달마 대사가 참선을 하고 있는데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게 졸릴 때 눈꺼풀이라고 하더니 정말 그랬다. 참아도 참아도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었다. 비몽사몽간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떼낸다면 졸음이 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졸음을 이겨내지 못하는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나서 망설임 없이 눈꺼풀을 잘라 마당으로 던져버렸다. 얼마 후 그 자리에서 새싹이 돋더니 이내 나무로 성장했다. 그리고 좁고 긴 푸른 잎이 나오기 시작했다. 혹시나 하고 그 잎을 따서 우려 마셨더니 잠이 확 달아났다. 이것이 차나무의 시원인 셈이다.      


 이후 천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제자들의 잠을 쫓아주는 커피열매가 찻잎을 대신하여 그 자리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이를 본 달마 대사는 혀를 끌끌 찼다. 하지만 대세는 성인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인지라 꾹꾹 참아야 했다. 하긴 내심으로는 제자들이 그동안 나름대로 ‘절집 스타일’의 커피를 창조하려는 노력을 가상히 여기던 터였다.     


 원철 스님/해인사 문수암 암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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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
해인사로 출가했다. 오랫동안 한문 경전 및 선사들의 어록을 번역과 해설 작업, 그리고 강의를 통해서 고전의 현대화에 일조했다. 또 대중적인 글쓰기를 통해 세상과의 소통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이메일 : munsua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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