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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붓다 공자, 한자리에 앉을수 없나

길희성 2011. 09. 10
조회수 31154 추천수 1

   종교마다 가는 길은 달라도 오르는 산은 똑같은 정상
 같은 하나를 달리 보고 딴 이름으로 부르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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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예루살렘 순례중 겟세마네동산에서 함께 노래하는 다종교 여성수도자 삼소회 회원들     사진 조현

 

 

종교가 다수 존재한다는 사실은 자기 종교의 진리 주장을 하는 신자들에게는 무척 곤혹스러운 일이다. 이 다수 종교들이 일천년 이상이나 된 유구한 전통을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 종교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배타주의적 진리 주장을 제외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종교란 근본적으로 개인이 느끼는 감정이나 경험 같은 것으로서 어떤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진리를 내포하거나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식의 견해이다. 마치 입맛이 사람마다 다르고 옷 입는 취향이나 미적 감각이 각자 다르듯이, 종교들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한다 해도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단지 윤리만도 지식만도 철학만도 아닌 그 무엇

 

도덕적 판단에 대해서도 그러한 입장을 취하는 이론이 있다. 선악의 판단이나 가치 판단은 개인의 느낌이나 경험 정도이지 결코 객관적 지식의 문제나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라는 주장이다("emotive theory"라고 부른다). 도덕 판단이나 가치 판단은 객관적 사실에 대한 판단이 아니기 때문에 지식의 범주에 들기 어렵고 그렇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이론이다. 도덕이나 가치의 문제는 사실의 세계와는 무관하고 단지 주관적 느낌이나 태도의 문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실생활에서 매우 중요하고 결정적일 수 있는 윤리, 도덕, 가치관에 대해서도 이런 식의 주장을 할 수 있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나 초월적 실재에 관여하는 종교의 경우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는 더욱 쉬울 것이다. 종교는 워낙 일반적 상식이나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며, 때로는 "믿음"이라는 것을 강요하면서 이성에 폭력을 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종교가 진리 주장을 전혀 하지 않는다거나 필요없다거나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은 문제에 대한 안이한 태도나 회피일 뿐, 진지한 문제 해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종교가 상식적 진리나 과학적 지식 같은 비교적 확실하고 객관성을 띤 진리를 주장한다거나 그럴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또 종교에서 진리의 문제가 전부라거나 가장 결정적이라는 말도 아니다. 사실 종교에서 초월적 경험이나 신비적 체험을 뺀다면 종교는 교리나 형이상학은 될지언정 생명력이 사라질 것이며, 사람들의 마음을 끝없이 매료하고 사로잡은 힘 같은 것도 사라질 것이다. 종교는 단지 윤리만도 아니고 지식만도 아니며 철학만도 아니다. 종교는 그런 것들로 환원할 수 없으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루돌프 옷토의 유명한 표현을 빌리자면, 종교는 말로 할 수 없는 어떤 "두렵고 매혹적인 신비"(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의 감정 같은 것을 기저에 깔고 있다.

 

자기 종교의 진리 주장에 대해서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자각

 

그럼에도 종교를 순전히 개인적 느낌, 혹은 여럿이 공유하는 경험, 심지어 종교사회학자 에밀 뒤르깽의 이론대로 어떤 집단적 흥분 같은데서 유래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견해들은 모두 자칫하면 종교를 하나의 주관적 환상, 자신의 욕망이나 바람을 투사한 희망사항(wishful thinking) 정도로 만들기 쉽다. 종교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이런 견해를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종교는 진리를 주장하되 초월적 진리를 주장하지 상식적 진리나 이성적 진리 정도만을 주장하지는 않으며, 종교적 진리나 사상을 순전히 우리의 느낌이나 정서, 순간적 직관이나 개인적 체험뿐이라고 생각하는 신앙인은 별로 없을 것이다. 신의 계시든, 깊은 명상이든, 그 밖의 어떤 탈아적/몰아적 경험이나 신비 체험이든, 종교는 일반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특별한 경험에 근거해서 초월적 진리를 주장한다.

 

적어도 그러한 경험을 통해 주어진 것, 얻어진 것, 접한 실재나 세계가 아무리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경지라 해도, 그것이 단지 심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론을 수용할 종교인이나 신비주의자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강한 종교 경험을 한 사람들 가운데는 경험을 통해 접한 세계가 일상적인 현실 세계보다도 더 리얼한 참된 실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더군다나 신비경험을 한 사람들이 자기들이 경험한 초월적 세계를 언어로 표현하고 전달할 때는 -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으며, 타인과 공유하지 않고 홀로 끝까지 침묵을 지키면 종교는 성립되지 않는다 - 진리 주장 내지 인식적 주장은 피할 수 없게 된다. 물론 종교들은 초월적 경험을 언어로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을 자각하고 있다. 이런 자각이 깊으면 깊은 수록 종교는 문자주의의 유혹을 벗어나며, 자기 종교의 진리 주장에 대해서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동서양 신비주의 문헌들은 예외 없이 이런 경향을 보인다. 다만, 인간의 종교적 경험보다는 하느님의 계시를 주장하는 이른바 "계시 종교들"에는 이런 겸손이 별로 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초월적 신의 계시라 해도, 그것이 우리 인간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경험을 매개로 해서이며 인간의 언어를 통해 해석되고 표현되고 전달된다. 아무도 신의 뜻 그대로를 전달할 수는 없다. 계시도 특정한 역사적, 문화적 제약 속에 사는 특정 인간의 경험과 언어를 매개로 하여 주어지는 한, 계시종교도 한계를 인정하면서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계시된 진리의 문자적 절대성을 주장하는 것이 신에게 폭력을 가하는 우상숭배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같은 계시 종교들의 일반적 현상

 

여하튼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는 한 진리 주장은 불가피하다.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려는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가 어떤 진술을 하든, 우리는 그와 동시에 자기 말이 참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거나 믿으면서 하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하는 사람은 없다. 종교적 언어, 교리적 언어가 아무리 초월적 진리를 전한다 해도, 그리고 상징이고 메타포라 해도, 모종의 진리 주장은 피할 길이 없다.

 

문제는 종교들이 전하는 진리가 매우 다양하다는 데 있다. 이런 종교적 진리 주장들이 문자적 진리가 아니고 상징이라 해도, 그 상징이 가리키고 뜻하는 바를 말로 포현하는 한, 진리 주장은 피할 수 없으며, 진리주장의 차이에서 오는 종교 간의 대립과 갈등 역시 피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종교적 진리가 신의 계시라든가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깊은 명상적 체험에 근거한다고 주장하면 주장할수록, 진리주장은 더 초월적 권위를 띠면서 독단성과 절대성을 가지게 된다.

 

자기들만이 아는 진리가 일반적 지식에 적용되는 합리성의 기준을 초월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특히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처럼 유일신 신앙에 기초한 계시 종교들이 안고 있는 일반적 현상이다.

 

그렇다면,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다양한 진리주장의 내용은 상이하지만, 그것들이 기초하고 있는 종교적 경험, 신비 경험 같은 것은 동일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신비주의 경험에서 종교의 진수를 보면서 종교들의 심층적 일치를 믿는 종교학자들이나 종교사상가들이 흔히 이런 입장을 취한다. "종교는 여럿이지만 신비주의는 하나다."라는 말은 이런 입장을 잘 대변해 준다. 여기서 신비주의는 물론 절대적 실재와 하나가 되는 신비적 일치(unio mystica)의 경험을 말하는 것이지, 신비주의적 언어나 문헌 같은 것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신비주의자들의 언어와 문자는 교리나 교설 못지않게 다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비주의자들의 신비적 합일의 체험에 관한 언사가 하나라는 말이 아니라, 그러한 언사로 표출된, 혹은 표출되기 이전의, 순수한 신비적 경험 자체가 하나라는 주장이다. 진리 주장을 하는 종교들의 다양한 교리와 교설을 넘어서 불가언적 신비경험 그 자체에서 종교들의 일치를 보려는 견해이다.

 

언어와 문자를 초월한 신비적 합일 체험이 가능할까

 

이러한 주장에는 한 가지 커다란 전제가 깔려 있다. 즉 신비적 합일의 체험이란 언어와 문자를 초월하는 경험이며, 언어를 전해 매개로 하지 않는 직접적 경험, "순수" 경험이라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순수 경험이 과연 가능한가가 문제가 된다. 이에 대해 종교학자들이나 신비주의 이론가들이나 종교철학자들 사이에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언어에 의해 매개되지 않은 순수경험의 가능성에 대해 대체로 회의적이다. 인간의 종교적 경험이 아무리 순수하고 초월적이라 해도, 인간이 인간인 한 위대한 신비주의자들도 자기들이 딛고 사는 땅과 몸담고 사는 세상, 그들의 시대와 역사, 문화와 종교 전통의 언어를 완전히 초월하지 못한다고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비주의자들의 경험 역시 동일한 순수경험이기보다는 상이한 경험들일 것이며, 거기서도 종교들의 궁극적 일치는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물론 신비주의자들의 경험 자체는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신비 경험 이후에 회상되고 반성된 언어들뿐이기 때문이다. 이 언어는 물론 신비주의자들이 몸담고 있는 특정한 종교 전통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기에 신비경험 역시 상이하게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과연 언어에 의해 매개되지 않은 직접적 경험, 언어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난 순수한 경험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다.

 

설령 언어에 의해 해석되지 않는 경험이 가능하다 해도, 그것을 경험이라 할 수 있을까? 가령 언어를 전혀 모르는 어린아이에게도 경험이라는 말이 의미 있게 적용될 수 있을까? 특정한 시간과 공간, 문화와 역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특정한 종교 전통의 지배적 영향 아래 살 수밖에 없는 신비주의자들의 경험이 이런 모든 역사의 우연적 요소들을 초월할 수 있다고 믿기는 어렵다. 무엇보다도 신비경험을 유발하는 각종 명상법이나 수행법 자체가 특정 종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나는 인간의 영혼 깊이에 숨어 있는 신성과 영성의 순수성과 보편성을 믿지만, 그것을 자각하고 실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적 제약들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신비주의자들도 역사적 조건 속에 살고 있는 구체적 인간이며 유한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영성과 감성은 동일

 

따라서 나는 종교 간의 궁극적 일치를 교리나 사상도 아니고 종교적 경험이나 신비적 경험도 아닌 종교가 추구하는 대상, 즉 신 혹은 실재 자체에서 찾고자 한다. 우리가 종교경험을 통해 접하게 되는 실재, 신비적 경험을 통해 하나가 되고자 하는 실재, 우리의 종교 경험을 유발하는 실재 자체에서 찾는다는 말이다. 물론 이 실재는 어느 종교, 어느 신비주의자에게도 완벽하게 주어지거나 경험되지 않는다. 그리고 궁극적 실재, 초월적 실재는 종교마다 달리 개념화되고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유일신 종교들의 하느님, 힌두교의 브라흐만, 도가의 도나 원기, 유교의 태극이나 천(하늘) 등이 예들이다. 그렇다면 이런 개념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연 그런 상징어들이 가리키고 지향하는 궁극적 실재 자체는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개념들의 배후에 있는 종교적 경험이 차이와 다양성을 면치 못한다면, 그런 경험들을 유발하는 궁극적 실재 자체는 혹시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것은 결코 입증된 이론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설이다. 단적으로 말해, 모든 종교가 하나의 궁극적 실재, 동일한 실재에서 왔고 그것을 지향하고 있을 것이라는 가설이다. 교리도 상징도 종교적 경험도 모두 동일한 실재에 대한 다양한 접촉과 경험에서 비롯되고 그것을 지향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입증될 수 있는 성질의 가설은 아니지만, 그것을 뒷받침해줄 만한 상황과 그 개연성을 높여줄만한 현상들을 우리는 인류 종교사를 통해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우선 가장 일반적으로, 우리는 적어도 호모 사피엔스의 출현 이래 모든 인간의 인간성 - 지성, 감성, 도덕성, 영성 등 - 은 거의 같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종이나 민족들이 처한 지리적 환경이나 삶의 조건이 달라서 상이한 문화를 건설하고 상이한 종교들을 낳았지만, 영적 존재, 종교적 존재로서의 인간(homo religiosus)의 인간성과 종교성, 그의 영성과 종교적 감성과 감각 - 나는 이것이 "종교적 인간"에 선천적이라고 생각하지만 - 은 대체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특히 구약 성서의 대 예언자들, 인도 우파니샤드의 현자들과 석가모니 붓다,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그리스 철학자들,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 중국의 노자, 공자, 묵자가 출현한 이른바 "기축 시대"라고 명명된 (철학자 야스퍼스가 사용한 용어) 시기에 이르러서 인류의 도덕적, 영적 수준은 일제히 비약적으로 고양되는데, 종교를 비롯한 인류의 정신문명은 그 때 이미 기본적 패턴과 방향이 잡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다수 고등종교들의 두 가지 유형

 

둘째, 다신론이나 다령 숭배가 극복된 이후의 대다수 "고등" 종교들은 기본적으로 단 하나의 궁극적, 근원적 실재로써 우주만물과 다양한 현상들을 설명하고 파악한다는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 그리고 쉬바나 비슈누 신앙의 대중적 힌두교에서처럼, 궁극적 실재를 우주를 창조하고 주관하는 인격신으로 보는 전통이고, 다른 하나는 다양한 이름과 형태를 지닌 우주만물과 현상계가 이름도 형태도 없는 원초적/원천적 실재로부터 전개되어 나온 것으로 파악하는 형이상학적 일원론(metaphysical monism)의 전통이다. 서양의 신풀라톤주의, 인도 우파니샤드의 사상, 도가의 도 사상이나 신유가의 태극/무극 사상이 그러하며, 불교는 엄밀한 의미에서 형이상학적 일원론은 아니지만 다양한 현상계를 하나의 원리로 파악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일원론적 사상 계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여하튼 중요한 점은 이들 사상이 인류를 포함하여 모든 존재가 단 하나의 궁극적 실재에 의해서 존재한다고 보는 일원적 사고를 공유한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고 둘이 아니며, 궁극적인 형이상학적 실재 내지 원리 또한 하나이지 여럿이 아니다. 만물은 이 궁극적 실재에서 하나로 통하고 통일된다. 인류 종교사와 문명을 지배해 온 유일신 신앙과 형이상학적 일원론은 우리의 가설, 즉 온 인류의 종교사가 결국 동일한 실재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동일한 실재를 지향하고 있을 것이라는 가설의 개연성을 높여주고 있다. 비록 궁극적 실재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그것들은 아마도 동일한 실재를 여러 시각에서 달리 보고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 산행의 종착점은 죽음이 아니라 절대적 생명 동참

 

위의 두 가지 사실 말고도, 우리는 비교종교학이 밝혀주고 있는 대로 보다 구체적인 종교들 사이의 유사점이나 공통점들을 열거할 수도 있다. 세계 종교들에서 발견되는 유사한 교리나 사상, 유사한 종교 경험이나 현상들, 공통된 문제의식이나 구조나 역사적 패턴들 같은 것들이다. 자세한 논의는 이 글에서 피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가 상이한 종교 전통과 다양한 상징체계를 통해 여러 가지 이름의 궁극적 실재와 다채로운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가 지상의 제약을 훌훌 털어버리는 날 다 같이 산 정상에서 만날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도 좋을 것 같다. 산에 오르는 길은 비록 다르지만 우리는 도중에 자기 식으로 가끔씩 정상의 모습을 힐끗힐끗 쳐다보면서 환희를 느끼기도 한다. 그러면서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정상을 향해 나아간다.

 

어떤 사람은 가까운 길로, 어떤 사람은 먼 길로, 어떤 종교는 힘들고 험준한 길로, 어떤 종교는 평탄하고 쉬운 길로 산정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산을 오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산을 오르고 있으며, 마침내 모두가 한 정상에서 만나 기쁨을 나눌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그 때 우리는 의심의 여지없이 하느님을 직접 눈으로 볼 것이며(visio dei) 궁극적 실재 자체와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경지에 푹 잠겨 무한한 행복을 맛 볼 것이다. 우리 산행의 종착점, 우리 인생의 최종 운명(destiny, destination)은 죽음이 가져다주는 단멸의 허무가 아니라 절대적 생명에 동참하는 것이리라.

 

 

나는 이런 희망으로 세계 종교사를 공부하고 있으며, 이런 희망 가운데 심도학사에서 도반들과 함께 영적 등산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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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희성
동서양 종교와 철학을 넘다드는 통찰력으로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서울대에서 철학을 미국 예일대에서 신학을, 하버드대에서 비교종교학을 공부한 서강대 명예교수. 한완상 박사 등과 대안교회인 새길교회를 이끌었고, 최근엔 사재를 털어 강화도에 고전을 읽고 명상을 할 수 있는 ‘도를 찾는 공부방’이란 뜻의 심도(cafe.daum.net/simdohaksa)학사를
열었다.
이메일 : heesung@sog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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