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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과 단심(丹心), 노자의 선택은?

이인우 2015. 05.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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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명장면】노자, 그 잃어버린 이야기

 노담일사(老聃逸事)<상>

 


이 이야기는 고대 중국 주(周)나라 경왕(景王) 연간(B.C 545~520)에 왕실 사관(史官)을 지낸 노담(老聃)이라는 사람의 약전(略傳)이다. 나, 이생이 공자께서 ‘노자’(老子)를 만났다는 전래 설화의 진위를 추적하던 중에 듣게 된 전승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 노담은 생애의 전모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에 관한 전승들도 대부분 그 신빙성을 자신할 수 없다.① 그래서 약전의 제목을 노담의 ‘잃어버린’, 혹은 ‘잊혀진’ 이야기란 뜻의 <노담일사>(老聃逸事)라 하고 <공자, 노자를 만나다> 편의 부록으로 삼는다. 한 편의 ‘문화사’로 읽는다면 시간의 낭비는 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생(李生) 

 


1. 내력(來歷)

노담은 어릴 때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귀 모양이 특이했던 듯 하다. 그의 자(字)로 여겨지는 담(聃)은 ‘귓바퀴가 없을 정도로 귀가 늘어졌다’는 뜻의 글자이다. 그의 관직으로 추정할 때, 공자보다 한 세대 위, 즉 약 15~20살 정도 나이가 위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담의 출신지는 중국 남방의 초(楚)나라 고(苦)현 지방으로 알려져 있다. 고현은 원래 진(陳)나라 상(相)땅이다. 진나라는 소국으로 초나라의 보호국이었다가 서기전 479년(공자가 돌아가신 해이기도 하다) 초나라에게 합병 당했다. 담은 상 땅이 진나라에 속한 시절에 태어난 사람이다. 이 상 땅이 나중에  초나라에 흡수되었기에 후대 사람들은 노담을 초나라 사람이라고 여겼다.

 

노담의 성씨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그가 약소국 진나라 출신으로 주왕실의 태사(太史;고대 중국에서 천문역법(天文曆法)을 관장하는 벼슬)라는 고위직에 오른 것으로 보아 최소한 서민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나라 공실의 성은 규(女+爲)씨이다. 규는 고대의 성스러운 왕인 순(舜)의 성이다. 어쩌면 그의 집안은 낙양으로 진출한 진나라 공족의 후예였을지 모른다. 또는 중원의 공력 높은 무사(巫史) 가문이었을 수도 있다.

노담의 집안이 언제부터 주나라 수도 낙양에 살게 되었는 지도 알 수 없으나, 고조나 증조부 대부터 주왕실의 사(史)를 세습하였던 것 같다. 이 집안에는 비전(秘傳)하는 양생술(養生術)이 있어서 담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함께 장수하였다. 그런 탓에 늙도록 왕실에 충성한 할아버지는 귀족들로부터 장로(長老)의 예우를 받았다. 담의 아버지는 태사의 지위에서 은퇴한 뒤에도 후배 사관들에게 ‘노사’(老師)라 불리었다. 이런 자랑스런 가계 때문에 담은 어렸을 때부터  ‘장로의 손자 담’,  ‘노사의 아들 담’이라고 불리었다. 나중에는 그 자신도 매우 장수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담을 존칭하여 ‘노담 선생’이라 불렀다. 노자(老子)라는 존칭은 아마 여기서 처음 유래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노담의 직책은 왕실 사관(史官)이었다. 사(史)는 본래 고대 원시사회의 무축(巫祝)에서 비롯되었다. 무축은 모계(母系) 중심의 원시농경사회에서 신에게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고 사냥과 전쟁의 유불리를 점치는 사제자(司祭者)이자 주술자였다.

이 제사장 집단에서 무사(巫史)가 나왔고 유(儒)와 사(史)가 분화 되었다. 유가 이 집단에서 제전(祭典)을 실행하는 층의 후예라면, 사는 축도문을 낭송하고 이를 기록(정확히는 기억)하는 층의 계보를 잇고 있다. 그들은 고도의 상징과 의식을 통해 자신들이 신과 닿아있음을 자부했다. 그들이 사용한 은유로 가득 찬 주술적인 언어들은 집단의 ‘공동기억’으로서 가문 안에서만 전승됐다. 이들은 무축의 시대가 가고 왕권의 시대가 오자 세력을 잃고 하층계급으로 전락해 갔다. 그러나 소수는 그 비전(秘傳)한 지식으로 권력을 가까이서 보좌했고, 정치력을 갖춘 자는 권력의 한 축이 되기도 했다. 왕실의 사(史)가 본래 모계(母系) 사회의 성직자였음을 암시하는 노담의 시가 지금도 전해진다.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        

 이를 일컬어 신비한 암컷이라 한다.

 신비한 암컷의 문이여!

 이를 일컬어 만물의 근원이라 한다. 

 이어지고 이어져 영원한 듯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다.  

 谷神不死(곡신불사)/是謂玄牝(시위현빈)/玄牝之門(현빈지문)/是謂天地根(시위천지근)/綿綿若存(면면약존)/用之不勤(용지불근)②

 

제사자에서 왕의 정치적 자문관이 된 사는 일상적으로는 조정과 왕실의 제례와 의전에 관한 전거와 기록의 관리를 담당하며, 유사시에 천문(天文)과 복서(卜筮), 점사(占辭)를 행하고 해석함으로써 정치에 참여하였다. 사관으로서 노담이 맡았던 주요 직책 중에는 왕실도서관인 수장실(守藏室)의 장관직도 있었다. 당시 왕실 도서관이 소장한 하은주(夏殷周·고대 중국의 3대 왕조) 시대의 전적과 기물들은 오직 왕실과 왕명을 받은 자만이 열람·사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수장실 장관의 권위는 매우 높았다. 노담은 또 ‘주하사’(柱下史)라는 직책을 겸하였다. 주하사는 말 그대로 ‘기둥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왕의 자문에 응하는 시어사(侍御史)의 직책’이었다. 왕을 정치적으로 보필하는 근신(近臣), 나아가 특별한 사랑을 받은 총신(寵臣)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요직이었다.  노담과 같이 높은 지위를 부여받은 사관은 그 광범위한 지식과 충성심을 바탕으로 현실 정치에 깊숙히 개입하기도 했다. 왕실 소속의 세습 사관 겸 정치자문관으로서 담의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잠언이 있었다.

 

 도(道)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 하지만,           

   하지 않음이 없다.                                         

 만약 임금이 이를 잘 지킨다면                       

 만물은 저절로 교화되리라.                        

 교화를 억지로 하려고 든다면                     

 우리가 이름없는 통나무가 되어 못하게 하리라.

 이름없는 통나무는

 대저 또한 욕심이 없을지니,                            

 욕심내지 않고 고요하여                                 

 천하는 저절로 안정하리라.                             

 道常無爲(도상무위)/而無不爲(이무불위)/侯王若能守之(후왕약능수지)/萬物將自化(만물장자화)/化而欲作(화이욕작)/吾將鎭之以無名之樸(오장진지이무명지박)/無名之樸(무명지박)/夫亦將無欲(부역장무욕)/不欲以靜(불욕이정)/天下將自定(천하장자정)③

 

nojaedit.jpg

*노자. 출처 : 위키피디아


2. 영광의 시절

노담이 태사일 때 주나라 국왕은 경왕(景王)이었다. 그는 27년간 재위하며 군왕의 자질을 발휘했던 아버지 영왕(靈王)으로부터 군주의 도를 배웠다. 노담은 이런 경왕에게 두 가지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첫째는 일종의 비밀업무로서 ‘제왕학’과 ‘군사학’을 연구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태자에게 그것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주나라는 외적을 피해 낙양으로 동천(東遷)하면서 사실상 천하의 주인으로서 권위와 힘을 상실했다. 왕국은 작은 영토로 축소되어 이웃한 강력한 제후국인 정(鄭)나라와 진(晉)나라에 의지하여 겨우 천자(天子)의 지위를 유지했다. 따라서 지각 있는 왕이라면 왕자(王者) 본래의 권좌와 위력을 되찾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미 영락한 작은 나라에 불과한 왕실이 몇배나 힘이 센 제후국들을 별다른 무력도 없이 통어(統御)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경왕은 부왕인 영왕의 뜻을 이어받아 주왕실의 이런 서글픈 처지를 바꿔보고 싶었다. 노담 집안은 그런 왕실의 ‘비밀 두뇌’였다.

“왕실이 저 사나운 제후들을 말과 개처럼 부릴 지혜를 강구하시오! 왕도(王道)를 회복할 길을 반드시 찾아주시오!” 그런 지침을 받은 노담 집안이 찾아낸 치도(治道)는 무엇이었을까? 

 

 없는 힘으로 있는 힘을 다스린다

  

바로 성인(聖王)의 도(道), 즉 무위(無爲)의 치(治)였다. 무력(無力)으로 유력(有力)을 아우르고, 없음(無)으로 있음(有)를 덮고, 부드러움(柔)으로 굳셈(剛)을 감싸고, 약함(弱)으로 강함(强)을 이끄는 고도의 정치술이었다. 노담이 간절한 마음으로 왕에게 무위(無爲)의 덕의 중요성을 가르친 글 한편이 전해진다.

 

 천하에 물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없으나       

 굳고 강한 것을 공격하여 이기는데              

 물과 바꿀만 한 것이 없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긴다.                    

 천하에 이를 모르는 사람이 없으나            

 능히 행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이런 까닭에 성인이 말하기를                 

 나라의 오욕을 짊어지는 자                     

 그를 일컬어 사직의 주인이라 하며              

 나라의 불행을 떠매고 가는 자                      

 그를 일컬어 천하의 주인이라 한다.                

 天下莫柔弱於水(천하막유약어수)/而功堅强者莫之能勝(이공견강자막지능승)/以其無以易之(이기무이역지)/弱之勝强(약지승강)/柔之勝剛(유지승강)/天下莫不知(천하막부지)/莫能行(막능행)/是以聖人云(시이성인운)/受國之垢(수국지구)/是謂社稷主(시위사직주)/受國不祥(수국불상)/是謂天下王(시위천하왕)④

 

또한 노담은 강력한 제후의 군사력을 역용(逆用)하여 약한 왕실의 안녕을 지키고, 제후의 군사지휘권을 왕의 통제하에 두어 그것으로 제후를 복종시키는 용병술도 깊이 연구하였다.

“도(道)로써 덕(德)을 넓혀 지(智)와 무(武)를 복종시켜라!”

“제후가 병기를 제멋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라! 제후가 함부로 행군하지 못하게 하라! 제후가 병권을 성왕에게 바치게 하라!”

  

 무릇 아무리 좋은 병기(兵器)라도                                   

 상서롭지 못한 기물(器物)일 뿐이다.                               

 만물이 다 싫어하는 바이니,                                         

 도(道)를 지닌 자는 병사(兵事)에 몸을 두지 않는다.    

 병기는 도무지 상서롭지 않은 것이니                            

 군자의 기물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을 때 쓰는 것이니                                         

 사용함에 초연하고 담담해야 한다.                          

 이겨도 아름답지 않으니                                     

 승리를 찬양하는 자는

 사람 죽이기를 즐기는 것이다.                                    

 무릇 살인을 즐기는 자가                                             

 어떻게 천하의 지지를 얻겠는가.                                 

 사람을 많이 죽였으면                                                   

 슬픔과 자비로 애도해야 하니                                        

 전승(戰勝)의 의식,                                                    

 상례(喪禮)를 따르는 것이 도리일진저.                       

 夫佳兵者(부가병자)/不祥之器(불상지기)/物或惡之(물혹오지)/故有道者不處(고유도자불처)/兵者 不祥之器(병자 불상지기)/非君子之器(비군자지기)/不得已而用之(부득이이용지)/恬淡爲上(염담위상)/勝而不美(승이불미)/而美之者(이미지자)/是樂殺人(시락살인)/夫樂殺人者(부락살인자)/則不可得志於天下矣(즉불가득지어천하의)/殺人之衆(살인지중)/以哀悲泣之(이애비읍지)/戰勝(전승)/以喪禮處之(이상례처지) ⑤

 

경왕은 주실 중흥(周室 重興)이란 자신의 염원이 태자 시대에서는 꼭 이뤄지기를 희망했다. 담은 경왕의 간절한 뜻을 받들어 태자를 가르치는데 충심을 다했다. 경왕이 이를 흡족히 여겨 태자 수(壽)에게 노담을 교부(敎父)라 부르게 하니, 노담이 경왕 부자 앞에서 태자에게 바친 시가 전해진다.

 

 사람이 싫어하는 바가 셋이 있으니                         

 어려서 부모를 잃는 고(孤·고아)요,                      

 같아 살 배필이 없는 과(寡·과인, 과부)요,                            

 사람으로서 굶주리는 불곡(不穀·먹을 곡식이 없음)이니 

 그래서 왕공(王公)은 이를 자신의 칭호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물의 이치란                                           

 덜어내면 더해지고                                                   

 더하려면 오히려 줄어듭니다.                                     

 이는 오래전부터 내려온 가르침이지만                        

 지금 다시 이를 가르치고자 합니다.                           

 교부(敎父)의 이름으로                                              

 오직 이 한 말씀을 그대에게 바칩니다.                        

 人之所惡(인지소악)/唯孤(유고)/寡(과)/不穀(불곡)/而王公以爲稱(이왕공이위칭)/故物(고물)/或損之而益(혹손지이익)/或益之而損(혹익지이손)/人之所敎(인지소교)/我亦敎之(아역교지)/吾將(오장)/以爲敎父(이위교부)⑥

 

태자는 총명하여 충실한 학업으로 왕의 기대에 부응했다. 왕실은 평안했고 미래는 밝게 빛나고 있었다. 바야흐로 주왕실 중흥의 시대가 곧 도래할 것 만 같았다. 노담의 가슴에도 뜨거운 자부와 웅지가 뭉게구름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3. 비극의 시작

“담 선생!”

“노담 선생!”

수장실(守藏室)로 당직 사관이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무슨 일이길래 이리 급히…”

“큰일났습니다. 태자 전하께서 급서하셨다고 합니다!”

노담의 손에 들려있던 도필(刀筆)이 쨍그러니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서기전 522년 주나라 경왕 18년, 태자 수(壽)가 왕후에 이어 갑자기 죽었다. 노담의 나이 40대 후반 때 일어난 청천벽력같은 사건이었다. 태자의 요절은 그 자체로 왕실의 비극이자 노담에게도 커다란 좌절이었다.

“그동안 제후들 몰래 연구한 제왕학(帝王學)을 꽃피워 줄 성군의 재목이었는데… 아, 주실(周室)의 천록(天祿)이 진정 여기까지인가…” 

태자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면 만개할 것이 분명했던 노담의 영화도 꽃을 피워보지 못한 채 사라지는 운명이 되고 말았다. 더욱이 태자의 죽음이 장장 17년에 걸친 골육상쟁의 서막이 될 줄이야…

  

경왕은 태자와 왕후가 잇따라 죽는 슬픔 속에서도 군왕으로서 사고의 중심을 잃지 않았다. 우선 새로 정비를 맞아 적자를 생산하는 일을 서둘렀다. 경왕에게는 태자 말고 여러 명의 서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 맏아들 조(朝)는 장자로서 책임감이 강하고 기상도 늠름했지만, 경왕은 왕위만큼은 적자로 이어지길 원했다. 그래서 경왕은 곧 새 왕후를 맞아 새로 2명의 아들을 얻었다. 맹(猛)과 개(빌 개)였다. 그런데 이 무렵부터 경왕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경왕은 자신의 수명이 다해가고 있음을 느끼자, 비로소 태자가 어린아이에 불과한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맹은 이제 겨우 세살박이가 아닌가. 이리같은 제후들과, 호시탐탐 왕권을 노리는 노회한 공족들 틈바구니에서 저 아이가 제대로 임금자리를 지켜낼 수 있을까…”

게다가 왕후 집안을 중심으로 새 외척세력이 형성되고 있었다. 몇몇 탐욕스런 귀족들이 작당(作黨)을 부채질하고 주도했다. 왕은 불안감으로 잠 못이루는 날이 늘어만 갔다.

 

“노담, 어찌하면 좋겠소?”

“…”

노담은 죽은 태자의 스승으로서 다른 왕자들이 태자의 지위를 논하는 문제에는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친구이자 서장자(庶長子) 조의 사부인 빈기(賓起)를 추천했다.

“그런 일은 저보다 빈기가 믿을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장자의 스승이니…”

태자가 죽은 후 맏아들 조에게 허전한 마음을 의지해온 경왕은 마침내 서자이나 이미 장성한 성인인 맏아들로 태자를 교체하기로 결심했다.

“조의 기상이 실로 할아버지 영왕(靈王)을 닮았다. 왕실의 중흥을 도모하려면 이 길뿐이다…” 

경왕은 조를 태자로 삼기 전에 중단한 결단을 하나 더 내렸다.

“태자의 외척들이 순순히 찬성할 리는 없을 터…”

태자 맹 형제를 에워싼 외척과 귀족들을 먼저 제거하지 않으면 태자 교체는 말도 꺼내기 전에 수포로 돌아갈 것이 뻔했다.

그들은 강력한 제후국인 진(晉)나라를 배후세력으로 갖고 있었기에 왕으로서는 더욱 두려운 존재였다.

고민하는 경왕의 귀에  빈기가 속삭였다.

“폐태자를 하려면 우선 맹 왕자의 훈육을 맡고 있는 하문자(下門子)의 입부터 막아야 합니다. 다른 죄를 씌어 하문자를 먼저 내치십시오. 그런 다음 망산에서 여름 사냥대회를 열어 공경(公卿)들을 모두 초대하십시오. 왕의 부름에 선(單)공과 유(劉)공(외척의 후견 세력)도 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냥하는 틈을 보아 둘을 처단한 뒤 즉시 태자의 교체를 명하신다면 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그렇게 왕의 비밀작전이 착착 진행되어 마침내 사냥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경왕은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궁을 나와 사냥터와 가까운 왕족 집에 머물렀다. 그런데 여기서 또다시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경왕이 갑자기 심장발작을 일으켜 죽고 만 것이다.

왕자 조와 빈기의 입장에서 보면 이 ‘붕어’(崩御)는 매우 의심스러운 것이었지만, 암살의 증거 또한 찾을 수 없었다.

“살해자가 있음에 틀림없건만…”


사자굴에 들어갈 뻔 한 사실을 깨달은 태자당은 즉시 왕자 맹을 새 왕으로 추대하고 선씨와 유씨가 섭정이 되었음을 공표했다. 그리고 바로 군사를 보내 빈기를 척살하고, 조정 안팎에 포진해 있던 선왕의 측근과 총신들은 물론 서왕자들과 가까운 백공(百工· 왕성 안에 살며 왕족과 귀족들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각종 물품을 제작·공급하는 세습적인 상공(商工)집단을 말한다.)들까지 축출하고 그 자리에 자기 세력을 배치했다.

전광석화처럼 새 왕 체제가 들어서고 2달 뒤 경왕의 장례식이 거행됐다. 장례식이 끝나고 새 왕의 정식 즉위식이 거행되기 전에 또다른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장자 조를 지지하는 왕족들과 숙청된 백관 및 백공 세력이 연합하여 왕궁을 기습 공격한 것이다. 선대 두 왕의 직계 왕자들도 모두 조의 편에 가담하니 전세가 단숨에 서장자 쪽으로 기울었다. 선씨와 유씨 등은 맹과 개 형제를 들쳐업고 이웃한 제후국인 진(晉)나라로 달아나 구원을 요청했다. 이 내전의 와중에 태자 맹이 놀라 죽자 척신들이 동생 개를 추대하니 이 사람이 경왕(敬王)이다. 호족들이 어린 이복동생 개를 즉위시켰다는 소식을 들은 조도 즉각 왕위에 오르니, 주나라 수도 낙양에 두 명의 왕이 동시에 들어서게 되었다. 낙양에는 두 개의 성이 있는데 서쪽에 본래의 왕성(王城)이 있고  동쪽에 새로 쌓은 성주(成周)성이 있었다. 사람들은 왕성에서 즉위한 조를 서왕(西王), 동쪽 성주에 들어간 개를 동왕(東王)이라 불렀다.


한쪽은 비록 서자이긴 하나 선왕이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는 명분이 있었고, 한쪽은 선왕의 유지가 없는 갓난아이지만 정비 소생의 적통이란 명분이 있었다. 약점과 명분이 뒤섞여 어느 쪽도 온전한 정통성을 주장하기 어려웠다. 낙양사람들은 두 왕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줄을 잘 못 섰다간 온 집안이 역적으로 떼죽음을 당할 수도 있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어느쪽이든 빨리 승부가 나기만을 바랐다. 노담의 상황은 더욱 안좋았다. 개인적인 친분으로는 서왕자들과 가까운 사이였지만, 태사로서 서자들에게 적통의 계승자를 제치고 왕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선왕의 총애를 받은 사람으로서 어린 왕자를 허수아비삼아 권력을 농단하는 귀족들을 추종하기엔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동왕 세력이 불러들인 진나라 군대가 낙양에 진군했다. 낙양은 진나라 군대를 사이에 두고 왕성의 서왕파와 성주의 동왕파로 갈려 사활을 건 대치에 들어갔다. 오늘 서왕파의 군대가 기세를 올리면 내일은 동왕파가 만세를 부르는 격이었다. 어느 쪽에도 가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진나라 군대의 노략질까지 당하게 된 백성들은 남부여대하여 피난을 떠났다. 노담의 가족도 전화(戰禍)를 피해 낙양을 떠났다가 전선(戰線)에 가로막히자 고향인 남쪽 진(陳)나라를 향해 피난길에 올랐다.

이 내란이 장기화되면서 궁중의 관리, 악사, 공장(工匠)들도 낙양을 떠나 중국 전토로 흩어져 갔다. 음악을 사랑한 공자가 사방으로 비산(飛散)한 악사들의 운명을 전해 듣고 안타깝게 여긴 마음이 후세에 전해질 정도였다.


‘태사지는 제나라로 가고, 아반간은 초나라로 가고, 삼반료는 채나라로 가고, 사반결은 진(秦)나라로 가고, 고방숙은 하(河)로 들어가고 파도무는 한(漢)으로 갔고, 소사양과 격경양은 발해 너머 갔느니… -<논어> ‘미자’편 9장

 

이복형제간의 맹렬한 왕위 다툼은 5년을 끌었다. 싸움은 진(晉)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장기전을 펼친 동왕의 승리로 끝났다. 서기전 516년 서왕은 주왕실의 내전을 종식시키기로 한 진나라의 대공세에 밀려 지지세력을 이끌고 마침내 초나라로 망명했다. 주왕실의 정통성이 자신에게 있음을 확신했던 서왕은 이 때 주나라 왕실 수장고에 있던 창업이래의 수많은 전적(典籍)을 가지고 초나라로 갔다.  주나라 왕실 전적의 남천(南遷)은 중국문화사의 일대 사건이었다.⑧ 당시까지 중원 문화권의 밖에 존재하는  ‘오랑캐’ 지역(초나라)이 갑자기 쏟아진 높은 수준의 외래문화와 문물을 흡수하여 급속하게 ‘중화’(中華)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서왕 조는 비록 왕위싸움에 져서 주나라 봉건질서 밖의 초나라로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으나, 자신이 그토록 자부한 `천자의 나라’가 그 문화적 영토를 양자강 이남의 남쪽 지방까지 확장시키는 예기치 못한 기여를 ‘중국’에 한 셈이 되었다.

서왕은 망명하면서 각 제후국에 이러 조칙을 내리고 떠나갔다.

“왕실이 혼란할 때 선씨와 유씨의 무리들이 천하를 착란시켜 한결같이 불순한 짓만을 자행하면서 ‘선왕의 후사에 어찌 정해진 규정이 있었던가? 오직 내 마음내키는대로 할 뿐이니 누가 감히 나를 토벌하겠는가?’라고 하면서 하늘의 버림을 받은 무리들을 거느리고서 왕실에 혼란을 조성하고(…) 선왕의 명을 가탁해 거짓을 자행하는 데도 진나라는 부도(不道)하여 저들을 도와 그 끝없는 탐욕을 멋대로 부렸다. 지금 나는 난리를 피해 형만(荊蠻·초나라)으로 도망하여 몸을 의탁할 곳이 없으니, 나의 형제친족인 제후들은 하늘의 법을 따라 나의 성공을 돕고 교활한 자들을 돕지 말라. 선왕의 명을 따라 하늘의 벌을 부르지 말고서 부덕한 나를 용서하여 위난의 평정을 도모한다면 나의 소원이 이뤄질 것이다…”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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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목숨과 바꾼 단심(丹心)

내전이 끝나자 전장으로 변했던 낙양에 오랫만에 평화가 찾아왔다. 낙양을 떠났던 사람들도 하나둘 돌아와 본래의 생업을 되찾았다.  한편에선 피바람이 불었다. ‘줄을 잘못 선’ 많은 사람들이 반역죄와 부역죄로 처단되거나 투옥과 유형을 감수해야 했다. 비록 구체적인 혐의는 없다할지라도 서왕파와 조금이라도 가깝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은 목숨이 위태로왔다.

낙양으로 불려들어온 노담의 목숨은 풍전등화였다.

“적통을 폐하고 서자를 받들려고 했던 ‘역적 중의 역적’ 빈기란 놈과 가까운 사이가 아닌가? 너도 그와 한패가 틀림없으렸다!”

그런 의심 속에서 노담은 제발로 낙양에 온 것을 천번만번 후회했다.

‘차라리 서왕을 쫓아 초나라로 갈걸 그랬나…아, 동쪽 바닷가로 가서 이름을 바꾸고 숨어살았다면 이런 위태로움은 없을 것을…’

서기전 515년 노담이 나이 50대 중반에 맞이한 인생최대의 위기였다. 그런데 이 위기 속에 노담을 구한 건 다름아닌 그가 지닌 ‘지식’이었다.  서왕이 수많은 왕실 전적을 가지고 망명하는 바람에 새로운 지배세력은 권위와 정통성을 과시할 의전과 제례의식 거행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른 시일 안에 왕실 전적을 보완해 제후국들에게 체통이 깎이는 일을 최대한 막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고전에 정통한 학자들이 다수 필요했는데, 노담은 그 대표적인 학자였다.

용케 화를 피한 동료들이 노담에게 권했다.

“노담선생.  서왕쪽과 맺었던 과거 친분은 모두 부인하세요. 낙양을 떠난 것도 진나라 군대의 약탈을 피해 떠났다가 서왕파의 군대에 막혀 돌아오지 못한 것이라고 사정하세요. 거짓말로라도 서왕을 따라가지 않은 것이 금상(今上)을 사모한 증거가 아니냐고 하세요. 사람은 일단 살고 볼 일이 아니요?”

“나는 선왕의 지극한 은총을 입은 몸. 그 아들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이는데 내가  어느 편을 들어야 옳았단 말이요? 나는 그저 선왕을 기리며 여생을  살고 싶을 뿐이오.”

“선생의 마음을 우리가 왜 모르겠소. 그러나 금상은 여기 낙양에 있고 서왕은 천리밖 오랑캐 땅에 있소이다.”

제자들도 노담을 붙들고 간청하다시피 조언한다.

“선생님! 텅 빈 수장실을 전적으로 채우라는 성화가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애꿎은 사관 하나가 매를 맞아 죽기도 했습니다.”

“…”

“지금 섭정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제후들에게 뽐내고 싶어하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전고(典故)를 몰라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후들에게 비장한 전적을 보내달라고 읍소를 해야할 지경인데, 우리 수장실에서 이 업무를 감당할 분은 선생님 밖에 없습니다. 선생님이 한번 허리를 굽혀 주신다면 미력한 저희들은 겨우 한시름 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디 이 점을 살펴주십시오.”

죄인의 신분으로 낙양에 끌려오다시피했던 노담은 결국 서왕을 공개적으로 부인했고, 그 대가로 사면을 받아 수장실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일실된 전적을 보충하고 새로 바쳐지거나 복사된 전적을 감수하는 일을 맡았다. 그것은 매우 깊고 넓은 지식을 요하는 작업이었지만, 노담에게는 더이상 `학문‘이 아니었다. 비루한 목숨값이었다. 그에게 독서와 연찬은 목숨을 유지하는 수단이 아닌 한, ‘누군가의 찌꺼기를 핥는’  더럽고 부끄러운 일에 지나지 않았다.

  

5. 늙은이의 노래

어느 화창한 봄날 성주성의 축성이 끝났다.  여러 나라에서 차출돼 온 역부들은 고향에 돌아갈 기쁨에 성을 돌며 ‘성주풀이’를 지어 불렀다. 왕과 신하들은 제단을 쌓고 신에게 축성을 고한 뒤 군신(君臣)이 더불어 영화를 누리게 해달라고 빌었다. 서약식이 끝나자 대부 이상의 관리 출신 ‘사면자’들은 왕실이 베푸는 잔치에 참석하라는 명을 받았다. 왕과 섭정들 앞에서 충성스런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시간이었다. 함께 나온 수장실의 동료가 노담에게 넌즈시 말했다.

“까짓 웃으라면 웃고, 춤을 추라면 춥시다. 기왕이면 왕이 직접 보고들을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요.”

또다른 친구가 말했다. 

“하늘에도 눈이 떠다니고 땅밑에도 귀가 있소. 괜한 소리말고 주는 술이나 받아마시고 조용히 있다가 갑시다.”

노담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래, 더이상 ‘학문’도 없고, 학문으로 봉사할 성왕도 없다. 내가 무엇때문에 형편없는 왕자들의 개같은 싸움에 내 소중한 목숨을 던져주랴. 만세를 부르라면 실컷 불러주자, 만세! 만세! 만만세…’

이 잔치날에 노담이 지어 불렀다는 노래가 전해지고 있다.

  

  뭇사람들은 즐거워하네                  

  큰 잔치상을 받아 들고                       

  봄날의 누대에 오른 듯 하네.              

  나는 홀로 조용하네                            

  아무런 느낌없이                             

  아직 웃는 것을 모르는 갓난아이처럼.

  나는 홀로 우두커니 서 있네                

  마치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처럼.         

  뭇사람들은 다 잔치를 즐기는데           

  나는 홀로 떨어져 있네.                      

  나는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는 사람              

  세상사람들은 다 밝다 하는데              

  나는 홀로 깜깜하고                            

  세상사람들 다 총명하다 하는데          

  나만 홀로 어둡네.                              

  고요하기가 바다같고                         

  맑은 바람처럼 머무는 곳 없네.           

  뭇사람들은 다 높이 받들건만             

  나의 뜻은 홀로 낮은 곳에 처하는 것    

  나는 홀로 뭇사람들과 다르니             

  산다는 것의 본질을 귀히 여기노라.      

  衆人熙熙(중인희희)/如享太牢(여향태뢰)/如春登臺(여춘등대)/我獨泊兮(아독박혜)/其未兆(기미조)/如孀兒之未孩(여상아지미해)/루루兮(루루혜)/若無所歸(약무소귀)/衆人皆有餘(중인개유여)/而我獨若遺(이아독약유)/我愚人之心也哉(아우인지심야재)/沌沌兮(돈돈혜)/俗人昭昭(속인소소)/我獨昏昏(아독혼혼)/俗人察察(속인찰찰)/我獨悶悶(아독민민)/澹兮其若海(담혜기약해)/요兮若無止(요혜약무지)/衆人皆有以(중인개유이)/而我獨頑似鄙(이아독완사비)/我獨異於人(아독이어인)/而貴食母(이귀식모)

  

잔치에 참석은 하고 있지만, 마음은 진심으로 즐겁지 않다. 그래서 아직 웃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갓난아이처럼 웃어도 웃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술을 마신다. 잔치가 무르익어 흥청거리자 노담은 조용히 따로 떨어져 나와 홀로 술잔을 기울인다. 우두커니 서서 춤추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또 한 잔, 또 한 잔을 마신다. 바람이 따스하게 불어오니 꽃이 흐드러진다.

하늘은 높고 푸르고 흰구름은 어디선가 일어나 어디론가 흘러간다.

  

      학문을 끊어 근심의 뿌리를 잘랐으니    

  이제 나에게 ‘네’와 ‘예’에 무슨 차이가 있으랴                             

  선과 악의 차이는 또 얼마란 말이냐                                

  사람들이 두려워 하는 바를 나도 두려워 한다.                            

  아, 생(生)의 도(道)                           

  아득하여 다 깨달을 수 없구나…

     絶學無憂(절학무우)/唯之與阿(유지여아)/相去幾何(상거기하)/善之與惡(선지여악)/相去若何(상거약하)/人之所畏(인지소외)/不可不畏(불가불외)/荒兮(황혜)/其未央哉(기미앙재)⑩

 

진심으로 충성하는 ‘예’와 마음을 감추고 대답하는 ‘예’의 차이가 굳이 얼마나 된다고 이러나? 저마다 선을 주장하는 데 과연 그 선이 말하는 악과는 또 얼마나 차이가 지나? 나는 또한 그 이치를 안다고 할 수 있는가? 나, 담은  ‘예’든 ‘네’든 개의치 않으련다. 이제 더는 선악을 묻지 않으련다. 나는 지금 승자를 따를 뿐이다. 나도 별 수 없는 인간, 뭇사람들이 두려워 하는 것을 나도 두려워 한다.

 

그렇다, 나도 남들처럼 죽음이 두려웠을 뿐이다. 인생이란 아직 다 건너지 못한 강, 다다르지 못한 평원을 가는 것과 같다. 나의 삶은 천명을 따르고 있는가? 거스르고 있는가? 옳다는 것은 무엇이고, 틀린 것은 또 무엇인가? 나는 아직 그 멀고 깊은 끝을 보지 못했다. 삶의 여정(道)이여, 이치(道)여, 참으로 멀고 아득하여 나는 알 수가 없구나….


<하편 계속>



<원문 보기>


① 노담의 신상에 관한 최초이자 가장 유명한 기록은 사마천의 기록이다. 

 “노자는 초나라 고현 여향 곡인리 사람이다. 성은 이(李)씨, 이름은 이(耳), 자는 담(聃)이다. 주나라 수장실의 관리였다. 공자가 주나라에 갔을 때, 노자에게 예를 물었다.(…)” 老子者, 楚苦懸여(갈 여)鄕曲仁里人也, 姓李氏, 名耳, 字聃, 周守藏室之史也. 孔子適周, 將問禮於老子.(하략) -사마천, <사기> ‘노자한비열전’

그러나 사마천 자신도 당시 전해져 온 노자에 관한 전승을 사실로 확신하지 못했다. 일례로 노담의 성이 이씨라는 것에 대해서는 ‘한나라 초기에 이씨 성을 가진 실세 가문이 노자의 가계를 차용한 ’것’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이다. 사마천은 또 공자 사후 1백여년 뒤의 인물인 주나라 태사 담이 노자가 아닐까 하고 의심하여 그에 관한 사록(史錄)을 덧붙여 놓았다.

 “공자 사후 129년 후 기록에 따르면, 주나라 태사 담이 진헌공을 배알하고 말하였다.(…) 어떤 사람은 바로 이 태사 담이 노자라 하고, 혹자는 아니라고 하였다. 세상사람들도 그것이 그런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 自孔子死之後百二十九年, 而史記周太史담見秦獻公曰(…) 或曰담卽老子, 或曰非也, 世莫知其然否. -사마천, <사기> ‘노자·한비열전’

 

   ② <노자> 6장 전문

 

 ③ <노자> 37장 전문

 

 ④ <노자> 78장 부분. 전문은 다음과 같다.(이하《 》이 완결된 부분이다.)

 天下莫柔弱於水(천하막유약어수)/而功堅强者莫之能勝(이공견강자막지능승)/以其無以易之(이기무이역지)/弱之勝强(약지승강)/柔之勝剛(유지승강)/天下莫不知(천하막부지)/莫能行(막능행)/是以聖人云(시이성인운)/受國之垢(수국지구)/是謂社稷主(시위사직주)/受國不祥(수국불상)/是謂天下王(시위천하왕)/《正言若反(정언약반)》

 

   ⑤ <노자> 31장 부분. 전문은 다음과 같다.

 夫佳兵者(부가병자)/不祥之器(불상지기)/物或惡之(물혹오지)/故有道者不處(고유도자불처)/《君子居則貴左(군자거즉귀좌)/用兵則貴右(용병칙귀우)》/兵者 不祥之器(병자 불상지기)/非君子之器(비군자지기)/不得已而用之(부득이이용지)/恬淡爲上(염담위상)/勝而不美(승이불미)/而美之者(이미지자)/是樂殺人(시락살인)/夫樂殺人者(부락살인자)/則不可得志於天下矣(즉불가득지어천하의)/《吉事尙左(길사상좌)/凶事尙右(흉사상우)/偏將軍居左(편장군거좌)/上將軍居右 (상장군거우)/言以喪禮處之(언이상례처지)》/殺人之衆(살인지중)/以哀悲泣之(이애비읍지)/戰勝(전승)/以喪禮處之(이상례처지)

 

 ⑥ <노자> 42장 부분. 전문은 다음과 같다.

 《道生一(도생일)/一生二(일생이)/二生三(이생삼)/三生萬物(삼생만물)/萬物負陰而抱陽(만물부음이포양)/沖氣以爲和(충기이위화)》/人之所惡(인지소악)/唯孤(유고)/寡(과)/不穀(불곡)/而王公以爲稱(이왕공이위칭)/故物(고물)/或損之而益(혹손지이익)/或益之而損(혹익지이손)/人之所敎(인지소교)/我亦敎之(아역교지)/(强梁者不得其死(강양자부득기사))/吾將(오장)/以爲敎父(이위교부)

 

   ⑦ <좌전> 노소공 22년조

  

 ⑧ 김학규, <공자의 생애와 사상>

 

 ⑨ <좌전> 노소공 26년조

 

 ⑩ <노자> 20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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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우
한겨레신문에서 20여년간 여러 부서를 돌며 기자 생활을 했으나 그리 유능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현재 한겨레라이프 편집장이다. 만 50살에 문고리 더듬듯 지천명의 뜻을 새기다가 내친 김에 <논어>를 읽기 시작했다. 공부도 일천하고 생각도 앝은데 마음만 앞서서 덜컥 소설이란 도망갈 구멍을 만들어놓고 공자 이야기를 쓰게 됐다. 좋은 뜻으로 저지른 일이니 부족하더라도 너그러이 보아주시길.
이메일 : iwl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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