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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자 공자

이인우 2015. 09.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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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 변혁에 실패하고 망명 길에 오르다

 


子曰 齊一變 至於魯 魯一變 至於道

 자왈 제일변 지어로 노일변 지어도

 

 공자가 말하였다.  제나라가 한번 혁신하면 노나라에 이르고, 노나라가 한번 혁신하면 도(道)에 이를 것이다!   

- ‘옹야’편 22장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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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 중에서


1. ‘혁명가 공자’

공자는 51살때 노나라 정치에 참여했다가 56살에 망명을 떠났다. 그는 노나라 집권 귀족을 상대로 정치적 변혁을 시도했고, 위협을 느낀 세력에게 밀려났다. 스스로 떠나지 않았다면 죽임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망명은 거의 탈주에 가까왔다. 기득권자를 상대로 변혁을 시도한 이상 충돌은 필연. 출세한 사유(師儒)의 안온한 삶을 바랐다면 굳이 벌일 필요가 없는 충돌이었지만, 그는 스스로 전선(戰線) 속으로 들어갔다. 왜였을까? 철학의 실천이었을까? 혁명아의 대욕(大欲)이었을까?

 

공자는 왕도(王道)라 칭한 도덕정치를 꿈꾸었다. 공자가 살던 시대는 춘추(春秋)의 종막이자 전국(戰國)의 전야②였다.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힘과 간계가 득세하고 있었다.  그 동란(動亂)의 시기에 공자는 구세안민(救世安民)을 소리높여 외쳤다. 그는 자신의 왕도를 두 가지 방면에서 실현하려 했다. 당시 노나라는 삼환이라고 불리는 소수 귀족가문이 4대째 임금을 제치고 국가의 거의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다. 이른바 참주(僭主)였다.


공자는 이 비정상적인 참주정치를 종식시키고 도덕성과 능력을 갖춘 사대부(士大夫)들이 백성을 위한 정치를 주도하는 군주정으로의 복귀를 정치적 이상으로 삼았다. 그는 이미 군주를 교육하여 인정(仁政)으로 이끌 지식인 집단을 양성하고  있었다. 두번째는 바로 그 체제혁신을 평화적으로 이루어내는 것이었다. 양호가 군사력을 갖고도 실패한 체제 전환을 공자는 오히려 비폭력의 방식으로 달성하고자 했다. 동시대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음 그 자체 같은 이런 측면이야말로 바로 공자라는 사람이 품었던 이상(理想)의 비상함이었다.

 

공자는 변혁이 실패하자, 호족 세력의 적이 되었다. 이상을 버리고 굴복하지 않는 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위대한 사상을 태동한 한 인간의 여정은 그렇게 도망치듯 시작됐다. 비록 그것이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릴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유리표박(流離漂泊)은 14년이나 계속되었다. 정치적으로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못하는 노쇠한 나이가 되어서야 그는 출세한 제자들의 보증으로 겨우 귀국이 허용되었다.  그의 인생은 철저한 실패였기에 삶 자체가 하나의 사상이 될 수 있었다.  사상이란 본디 패배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2. 휴삼도(墮三都)의 배경

공자가 노나라 국정에 참여하여 사구의 벼슬에 있은 지 2년째 되던 서기전 498년, 노나라 조정은 일대 개혁령을 발동했다.

 

 대부는 자기 집안에 무기를 쌓아두지 못하고(家不藏甲), 읍은 백치의 성벽을 쌓지 못한다.(邑無百稚之城)③

  

임금이 아닌 사람은 독자적인 군사용 성벽을 쌓지 못하고 사병(私兵)을 양성해서도 안된다는 법령이었다. 그런데 노나라에서 백치(100치는 약 1 km의 길이에 해당한다)가 넘는 성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 대부는 집권세력인 삼환(三桓) 가문 밖에 없었다. 조정이 집권당의 근거지를 없애라고 한 이 경천동지할 법령은 곧  ‘세 읍을 허문다’는 뜻의 ‘휴삼도(墮三都)④’라 불렸다. 삼도는 물론 계손, 숙손, 맹손씨의 본읍인 비(費)읍, 후(后)읍, 성(成)읍을 가리켰다.


휴삼도는 당시 사구로서 국정을 대리하고 있던 공자가 삼환의 동의를 받아 주도한 것이었다. 삼환이 자기들의 성읍을 허무는 휴삼도에 동의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가신들이 주인에게 반기를 들고 본읍을 점거하는 사태가 빈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계손씨의 경우 2년째 가신 공산불요가 비읍에서 농성 중이었다. 계환자로서는 성채를 무너뜨리고라도 반도(叛徒)를 축출하는 일이 시급하고 절박했던 것이다. 

 

앞에서 몇차례 언급했지만, 노나라 국정은 계손, 숙손, 맹손씨 등 삼환이라 불리는 세 가문이 틀어쥐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계손씨 집안이 실질적 집권자였다. 삼환은 노환공의 세 아들 집안을 말한다. 맏형인 장공이 죽은 후 일어난 세 형제의 후계분란을 막내인 계우(季友)가 수습하면서 계손씨가 국정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계손씨의 장기집권은 계우의 증손인 계손숙(계무자)의 대에 이르러 실질적으로 시작됐다. 계무자는 노나라 국군을 3군(軍)으로 확대하여 그 중 1군(당시 1군의 군사 수는 1만 2500명)을 자기 가문이 차지하는 방법으로 군권을 장악했고, 그의 손자인 계손의여(계평자)는 3군을 다시 2군으로 재편하여 그 1군을 독점했다. 나머지 1군도 맹손과 숙손이 분점토록 함으로써 군권과 조세징수권이 임금으로부터 완전히 삼환에게 넘어갔다.⑤ 삼환은 또 각자 자기들의 영지에 군사시설을 짓고 사병을 길러 유사시에 대비했다. 이처럼 철통같이 구축된 삼환의 전제가 벌써 60여년이나 계속되는 중이었다.

 

당시 호족들은 비대해진 경제력과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에 필요한 집사(執事) 집단을 고용했다. 집사의 업무가 점차 전문화되면서 육예(六藝)⑥에 능통한 사(士)가 우대되기 시작했다. 이들 사족 가운데 일부는 주군을 더욱 밀접하게 보좌하게 되면서 조정 대신에 비견하는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세력있는 가신(家臣)의 등장이었다. 임금의 신하가 경대부(卿大夫)라면, 경대부의 가신은 신하의 신하라는 의미에서 배신(陪臣)으로 불렸다.


주인의 권세가 커지면, 그 수하의 위세도 함께 커지기 마련이다. 세대를 이어 세력을 키운 가신 중에는 경제력과 무력, 인망 등에서 주인을 추월하는 집안이 나오기 시작했다. 주종관계가 상호의존 관계로 바뀌었다가 마침내 역전되는 사례도 생겨났다. 이른바 하극상(下克上)이었다. 노나라의 경우 임금을 제치고 국권을 장악한 집안이 신하인 계손씨이고, 계손씨를 제거하고 그 집안을 차지하려 한 사람은 그 집의 가신이던 양호였다. 30여년 전에도 남괴라는 계손씨 집안의 대부가 비읍을 거점으로 주인 집에게 반기를 들었고, 2년 전에는 숙손씨의 가신 후범이 역시 주군에 대항했다.  ‘참월’과 ‘반란’은 노나라 뿐만 아니라 여러나라에서 경쟁하듯 벌어지고 있었다. 바야흐로 고대 중국은 격렬한 계급변동이 벌어지는 대동란의 시대로 들어선 것이다. 

 

3. 비읍과 후읍이 철거되다

삼환의 수장인 계환자의 승계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총신 양호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죽음 일보 직전까지 내몰렸었다. 이어서 동생 계오가 등을 돌렸고, 가신 공산불요가 비읍에서 반란했다. 계환자가 명실공히 삼환의 수장임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내부의 반대자부터 다스려야 했다. 그러나 아직 자신의 막부(幕府)조차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설사 군사적 해결에 성공한다 해도 막대한 출혈을 입는다면 오히려 반격의 빌미가 될 수 있었다.


“우리 집안이 자멸하기를 기다리는 자들은 노나라에서 차고 넘친다. 그렇게 이겨서는 이긴 것이 아니다.”

이때 계환자에게 계책을 낸 사람은 아마도 아들 비(훗날의 계강자)였을 것이다. 

‘남의 칼을 빌려 적을 제거한다.’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였다. 위기에 처한 아버지와 함께 가문을 짊어지고 가야 할 계강자도 공산불요 문제를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 계강자는 숙손과 맹손을 비롯한 다른 족벌들을 끌어들여 국가의 이름으로 공산불요를 치는 계책을 도출했을 것이다.

“사구인 중니(仲尼)로 하여금 군명을 받들게 하고, 그 제자인 중유(仲由·자로)를 우리 가재(家宰)로 삼아 국군을 지휘케 한다면, 다른 가문들이 병력을 내놓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공산씨가 이에 맞선다면 이는 군명을 거역하는 것, 역적을 면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본읍인 비읍을 철거하는 것은 계환자의 입장에서는 벼룩 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격이지만, 안방을 뺏으려는 도둑을 잡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먼저 자기 팔을 내주고 적의 목을 치는 것이니, 계환자에게 휴삼도는 고육계(苦肉計)였다.

 

휴삼도가 발령되자, 가장 먼저 행동에 나선 사람은 숙손주구(숙손무숙)였다. 숙손씨의 수장이 된 지 얼마 안 되는 숙손무숙은 직접 가병을 이끌고 가 자신의 본읍인 후성을 단숨에 허물어 버렸다. 무숙은 아버지 숙손성자가 죽고난 뒤 종족 내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후계자의 지위를 잃을 뻔했다. 게다가 가신 후범이 후읍을 근거지로 삼아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큰 곤욕을 치렀다. 무숙은 가문 내부의 적들에게 경고를 보내기 위해 맨먼저 자기 성을 철거해 버린 것이다.


계손씨 막부의 재상이 된 자로는 이무렵 계손과 맹손씨 연합군을 이끌고 비읍으로 출동했다. 공산불요는 자로의 공격로를 우회하여 곡부를 역습했다. 비읍군이 곡부를 향해 쳐들어오자, 계환자는 임금 정공을 데리고 곡부에서 동북쪽으로 5리 정도 떨어진 무자대(武子臺·계무자가 유사시를 대비하여 축성한 군사시설)로 들어갔다. 계환자가 임금과 함께 무자대에 들어간 것은 비읍군이 무자대를 칠 경우 임금을 공격한 반도로 몰기 위한 것이었다. 이 심리전은 먹혀들어 비읍군은 무자대 공격을 놓고 강온파로 분열했고, 협공을 당한 끝에 고멸성 싸움에서 격퇴됐다. 공산불요, 숙손첩 등 비읍군 지도자들은 모두 제나라로 망명했다. 비읍으로 출동했던 자로는 예정대로 비읍의 성벽을 허물고 무기를 환수했다. 이로써 노나라에서 가장 큰 세 군사기지 중 두 개가 철거되고 맹손씨의 성읍만이 남게 되었다. 맹손은 삼환 중 가장 세력이 약한 집안이며, 수장인 맹의자는 공문의 일원이었다. 휴삼도는 거의 완수되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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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 중에서

 

4. 실패로 끝난 휴삼도

성읍 철거는 순조로울 듯 했으나 의외의 복병이 나타났다. 맹손씨의 가로(家老)인 공렴처보가 성읍의 철거를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공렴처보는 기민한 첩보전과 양동작전으로 양호의 반란을 진압한 주역. 당시 그는 양호를 제압한 뒤 주군인 맹의자에게 “이 참에 계손과 숙손까지 처단하면 맹손씨가 정권을 잡을 수 있다”며 역쿠데타를 제안했을 만큼 노회한 책사였다.


“우리 맹손은 삼환중 가장 약세입니다. 그런데 계손과 숙손이 성을 허물고 무기를 반납했습니다. 이는 기회입니다. 소신은 성을 철거하지 않고 버틸테니, 주군은 제 핑계를 대고 모른 체 하십시오.”

“무슨 이유를 대려고?”

“성읍은 제나라 국경과 가깝습니다. 국방에 필요한 요새라고 하면 굳이 허물자고 고집하지 못할겁니다.”

공렴처보가 계손과 숙손의 가신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했다.

“삼환의 본읍을 일시에 모두 허무는 것은 스스로를 무장해제하는 어리석은 일일세.”

계환자와 숙손무숙도 맹의자를 불러 함께 의논했다.

“아무래도 다 허무는 것은  불안하다. 휴삼도는 처음부터 양날의 칼이었다. 임금이 다른 족당과 결탁해 우리를 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마침 임금이 제나라와 회맹하러 가고 없으니 서둘 일도 아닙니다.”

“임금이 돌아와 재촉하면 어쩌지요?”

“공렴처보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우린 그냥 모른체 합시다. 병력이 없는 임금으로서는 별 도리가 없을 겁니다.”

골칫거리 비읍 문제를 해결한 계환자는 표현을 하지 않고 있었을 뿐, 이미 마음이 바뀌어 있었다.  ‘휴삼도는 비읍 문제가 해결된 이상 계속할 실익이 없다. 우리 삼환이 새롭게 전열을 정비하려면 성읍의 무장은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유리하다.’


계환자를 비롯한 삼환의 세 수장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진 철거에 들어갈 줄 알았던 맹의자가 차일피일하며 성을 허물지 않자, 자로가 나섰다

"휴삼도는 국가의 명령, 두 성이 철거됐는데 대부께서는 어찌 명령을 따르지 않습니까?”

맹의자는 이미 가문의 안위를 우선하기로 결심한 터라 자로에게 공렴처보를 핑계로 둘러댔다.

“공렴처보가 성문을 걸어 잠그고 고집을 부리고 있으니 난들 어쩌겠소? 그리고 성읍은 국방의 요충입니다. 제나라의 탐욕을 막기 위해 꼭 필요하다는 여론도 높지 않습니까?”

맹의자가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자, 자로는 계환자에게 맹의자를 성토하고 계환부가 나서서 성읍 철거를 주도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계환자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싫다는 것을 굳이…”

“휴삼도는 우리 계씨의 계책이 아니었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비읍의 철거로 우리 목적은 이미 달성됐다. 그대는 이제 이 일은 그만하고 다른 집안 일에 주력하게.”

오히려 휴삼도의 일에서 손을 떼게 된 자로가 포기하지 않고 휴삼도의 당위성을 계속 역설하고 다니자, 계환자는 불쾌감을 넘어 휴삼도의 완결을 고집하는 공문(孔門)의 의도에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다.

 

한편, 제나라에서도 시비를 걸어왔다. 제나라로 망명한 노나라 사람들이 제나라 귀족들을 들쑤신 결과였다. “휴삼도의 의도가 무엇인가? 왜 잇따라 노나라 사람들이 우리 제나라로 넘어와 실정(失政)을 호소하는가? 혹시 지난번 회맹을 뒤엎을 모종의 계략이라도 꾸미고  있는 것인가?”


노나라 조정은 제나라의 의심을 풀고 제나라로 달아난 반도들에 대한 입장을 전달할 필요가 있었다. 그해 가을이 끝나고 겨울로 접어들 무렵 노정공은 황(黃)땅으로 가 제경공에게 지난번 협곡에서 한 맹약을 재확인했다. 진나라 주도의 북방동맹에서 노나라가 탈퇴하는 후속조처들도 취하기로 했다. 망명자들에 대한 조정의 입장도 아울러 전달했다.


그러나 정공이 회담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도 성읍은 철거되지 않고 있었다. 휴삼도를 주도한 자로는 계환자의 신임을 잃고 사실상 해임 상태에 있었다. 정공을 호종하고 있던 공자는 곡부로 돌아오는 길에 성읍에 들러 공렴처보에게 성문을 열고 임금을 맞이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공렴처보는 주군의 직접 지시가 없는 상태에서 임금을 맞이할 수 없다며 성문을 열지 않았다. 일개 배신이 주군에 대한 충성을 내세워 군주의 영입을 사실상 거부하고 있었다. 임금이 신하의 가신조차 제대로 징치할 수 없는 것이 당시 노나라 정치의 실상이었다.


맹의자로부터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의도적으로 회신을 늦추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겨울의 매서운 추위가 시작되고 있었으니 임금이 스스로 물러서기를 기다린 것이다.

정공과 공자가 성읍의 철거를 포기하고 곡부로 말머리를 돌리는 순간, 휴삼도는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⑦

곡부로 돌아오는 임금의 행렬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정공은 내내 말이 없었고, 뒤따르는 공자의 수레도 적막했다.

 

5.  호족세력의 반격

삼환의 배신들인 훈구 사족들은 애초부터 휴삼도의 정치적 의도가 자신들의 겨냥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들은 휴삼도가 주인 집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기반도 허무는 단초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었다. 이들은 자로가 계씨의 가재가 되어 물갈이 인사를 단행하자, 기득권 사수라는 공통의 목표 아래 결집했다. 내부 반란자를 제거하기 위해 동의하기는 했지만, 삼환의 수뇌들도 휴삼도가 그 이상으로 비화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다. 주인들의 그런 속마음을 읽은 계환자의 가신들은 더욱 떠들어댔다.


“아무래도 이 정책은 너무 나갔습니다. 공산씨나 후범세력만 솎아내면 될 것을 성까지 허물 일은 아니었습니다!”

“분명 우리 계환부를 근본적으로 무너뜨리려는 음모입니다!”

“공문에는 자기가 제일 잘난 줄 아는 자들이 넘쳐납니다. 이번 사건은 공문이 우리(기존 사족)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조직적으로 벌인 일이 틀림없습니다!”

음모의 주체로 자로를 지목하는 사람 중에 공백료(公伯寮)라는 자가 있었다. 그가 계환자를 찾아가 자로를 참소한 것도 이때였다.

“휴삼도의 최종 목표는 삼환의 타도였음이 분명합니다. 주군께서는 자로에게 속지 마십시오.”

공백료 등이 자로 제거를 밀모하고 있다는 정보를 들은 자복경백(子腹景伯)이 공자에게 달려왔다.

“선생님. 공백료가 계씨에게 자로를 해치라고 충동질을 하는 모양입니다. 공백료 하나 쯤은 제 손으로 그 시체를 시장통에 늘어놓을 수 있습니다!”
자복경백이 분을 못참고 곧 뛰쳐나가 일을 벌일 듯이 하자, 공자가 타일렀다. “모두 천명이다. 도가 장차 행하여지는 것도 명일 것이며, 도가 장차 이뤄지지 않아도 천명이리라. 어찌 공백료 따위 때문에 천명이 바뀐다 하랴…”(子曰 道之將行也與, 命也, 道之將廢也與, 命也, 公伯寮其如命何) -‘헌문’편 38장⑧


계환자가 자신을 경질하려는 것을 알게 된 자로는 계강자에게 후배 자고(子羔)를 비읍의 책임자로 추천하고자 공자와 상의했다.

“선생님, 계씨가 저를 해임하려는 이유는 뻔합니다. 순순히 물러서주면 구가신들이 반드시 보복하려 들 것입니다. 자고(子羔)를 비읍에 보내 만일에 대비하려 합니다. 자고는 아직 젊지만 재능이 출중하며 저를 몹시 추종합니다.”

그러나 그런 자로를 공자가 만류했다.

“아니다. 위험한 일에 남의 자제를 끌어들이는 것은 인(仁)이 아니다. 자고는 지금의 상황을 다룰 수 있을 만한 경륜이 없다. 오히려  크게 다칠 수 있다.”  (子路使子羔爲費宰.子曰 賊夫人之子) -‘선진’편 24장⑨


공자는 이때 이미 사태가 역류하고 있음을 통찰하고 있었다. 더이상의 희생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특히 젊은이들은…  실패는 성읍에서 돌아올 때 이미 예감된 바였다. 삼환의 훈구사족은 그 때 재결집의 기회를 잡았고, 수장들은 칼끝을 내부에서 외부로 돌리는 명분을 쥐었다. 이는 휴삼도를 참주 퇴치의 서막으로 삼고자 했던 공자와 자로의 의도가 수포로 돌아가고 있음을 의미했다.

 

6. 숨은 입안자

휴삼도의 실패가 공자의 망명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은 이 계책의 배후에 공자가 있었음을 웅변하고 있다. 휴삼도의 전말 속에 시종 부지런한 움직임이 느껴지는 자로의 배후에서 우리는 공자의 그림자를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앞에서 나, 이생은 휴삼도의 계책을 내고 자로를 계손씨의 재로 천거한 자는 계환자의 아들 계강자라고 추정한 바 있다. 표면적으로는 그렇지만, 휴삼도는 자로를 비롯하여 계강자와 친했던 공문의 문도들에 의해 입안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공자와 계환자는 서로 경원하는 사이이지만, 아들 계강자는 공문의 젊은 준재들을 가까이 했다. 자기 집안을 휘두르고 있는 훈구사족들을 내치고 자기와 가까운 신진사류들로 물갈이하고 싶었을 것이다. 공문의 젊은이들 중에도 계강자와 같은 실력자를 통해 입신하고 싶은 이들이 많았다. 공자 학단이 사관(仕官)의 학교인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욕구였다.

계강자나 자로나 양쪽 모두 서로가 필요한 시기였다. 고육계 같은 계책은 그럴 때가 아니면 도출되기 어려운 특단의 대책이다.


처음부터는 아니더라도 공자도 결국 이런 움직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공자는 그런 움직임을 보다 넓고 큰 시야로 이끌었을 것이다. 혁명가들은 보통사람들이 보기 어려운, 아니 보지 않는 곳까지 내다보는 눈과 그 지평선 너머 보이지 않는 곳에 아주 광대한 세상을 그려보는 담대한 심장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승의 안위와 희로애락을 한자락 바람처럼 여기고는, 역사 속에 서 있는 거인을 꿈꾸는 자. 아마도 그 무렵의 공자가 그랬으리라.


공자는 자로가 계손씨 가신들을 지휘하는 가재(家宰)가 되게 하고, 그의 운신의 폭이 최대한 넓어질수 있도록, 그리하여 자신의 숨은 계획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계환자와 유화 무드를 이어갔다.  노나라 조정에서 휴삼도가 공식 제기되기 전에 공자와 계환자와의 개인적 관계에 대한 이례적인 언급이 사서(史書)에 등장하는 것은 이런 정황을 시사하려는 사가의 의도가 틀림없다.


“공자가 계손씨 아래의 관직에 있으면서 3개월 동안 실수가 없었다.”

사서는 이 문장 바로 다음에 공자의 말이라며 휴삼도를 기록하고 있다.

“(공자가) 말하기를, ‘대부의 가(家)마다 군사를 숨기지 못하고 읍에는 백치의 성을 없앴다.’라고 하였다.” ⑩

공자를 주어로 삼은 이 사록(史錄)은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숨기려 한 것일까?

 

공자는 벼슬하기 전에 제자 자로를 비롯해 여러 사람들에게 종종 이런 질문을 받았다.

“선생님이 정치를 한다면 무엇으로 시작하시겠습니까?”(爲政 子將奚先)

그때 공자가 한 대답의 의미를 모르고서는 휴삼도를 둘러싼 공자의 저의를 우리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겠다(必也正名也)" -‘자로’편 3장

 

노나라의 정치에서 이름을 바로 세우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었겠는가.

또한 공자는 노나라 개혁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선언했다.

 

   “노나라가 한번 변혁의 기회를 잡으면 도에 이르리라!”(魯一變 至於道) -‘옹야’편 22장

 

공자에게 휴삼도는 삼환의 집안 정리나 제자들의 취직자리 마련 따위의 일이 아니라 노나라 정치개혁의 도화선이었다.

공자가 이상으로 삼는 주공의 정치는 호족들에 의한 참주정을 타도하고 군주정을 회복하는 일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었다. 그 참주정을 비폭력적으로 종식시키기 위한 가장 좋은 대책이 실행되게 되었는데도 이를 회피했다면 과연 그것이 공자라는 사람의 필야정명(必也正名)이었을까? 나, 이생은 공자가 조정에 서서 휴삼도를 발령할 때,  그의 가슴은 정명의 사명감으로 뜨겁게 불타고 있었으리라 확신한다.

 

7. 망명

공자 망명의 결정타는 제나라의 이간책에 정공이 굴복하고 공자를 배신한 것이었다.

서기전 497년, 공자가 55살되던 해 제나라는 아름다운 무희 80명과 준마 120필을 위시한 막대한 선물을 노나라에 보냈다. ⑪


이 사절단을 인도해 온 사람들은 노나라에서 제나라로 망명했다가 계환자의 사면을 받은 대부와 사족들이었다. 제나라가 이들을 노나라에 돌려보내면서 엄청난 양의 뇌물을 안겨 보낸 것이다. 뇌물의 대가는 노나라가 진나라 주도의 북방연맹에 이어 초나라 주도의 남방연맹에서도 탈퇴하는 것이었다. 이런 외교노선 전환이 성립되면 초나라를 통해 제나라를 견제하려는 공자에게는 일대 타격이었다.


이 계책은 친진파로서 제나라와의 관계 개선이 절실했던 계환자와 휴삼도의 과정에서 밀려난 삼환의 구사족들이 사면을 바라는 제나라 내 망명자들과 손잡고 추진된 것이었다. 훈구사족들의 목적은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한 공문을 노나라 정계에서 일소하는 것이었다. 공자와 자로의 숙청이었다. 이들은 제나라 권신 여미에게 은밀히 뇌물을 먹이고 말했다


“제나라가 노나라 조정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으면 계씨 정권을 승인해주고 활용하십시오. 그리고 초나라의 영향력을 노나라 조정에서 몰아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제나라파인 공구 일당을 먼저 조정에서 쫓아내야 합니다.”

“방법은?”

“노나라는 지금  여러차례에 걸친 난리로 민심이 흩어지고 물자도 많이 부족합니다. 임금과 그 측근들에게 뇌물을 듬뿍 안긴 뒤 정나라(초나라 동맹국)와의 화평을 깨라고 요구하십시오. 정나라와의 동맹이 깨지면 초나라가 노나라와 멀어지게 되고 제나라는 노나라 정치를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저희들은 물론 눈엣가시인 공구를 쫓아낼 수 있게 되고요.”

여미가 무릎을 쳤다

“좋은 꾀로다. 얼마의 뇌물이면 노나라 임금과 신하가 다같이 얼이 빠질까? 하하하”

 

제나라 사절단이 곡부성 남쪽 문 앞에 이르러 무희들이 아름다운 옷을 차려입고 강락무(康樂舞)를 추며 가져온 각종 뇌물과 준마를 보란듯이 진열해 놓고는 노나라 조정의 입성 허가를 기다렸다. 내막을 알고 있는 계환자는 성문 밖으로 나가 이들의 춤을 구경하며 망명자들과의 밀약을 확인했다. 미녀와 막대한 뇌물이 성 밖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들은 정공은 탐심이 솟구쳤다. 정공은 뇌물을 죄다 삼환에 빼앗길까 싶어 서둘러 그들의 입궐을 명령했다.  

정공이 뇌물을 받아 먹고 제나라 요구를 수용한 것은 공자에게는 중대한 정치적 패배였다. 국정의 대리자였던 공자의 실각은 자명했다. 문제는 자로였다. 정치적 보호막인 공자의 실각은 자로에게는 바로 신변의 위기를 불러올 수 있는 것이었다. 공백료처럼 그동안 자로에게 반감을 품어온 계환자의 가신들 중에는 공공연히 자로를 해칠 뜻을 밝히고 있는 판이었다. 자로는 제나라 사절단 속에 자기가 밀어낸 구 사족들이 대거 포함돼 있는 것을 보고는 곡부를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선생님, 저는 노나라를 떠나겠습니다.”

“혼자 어디로 간단 말이냐? 떠난다면 같이 떠나야지.”

공자는 임금 정공과의 관계를 분명히 할 필요를 느꼈다.

‘떠날 때 떠나더라도 군자는 명분있게 떠나야 한다.’

“임금이 교제를 지내고 나면 제육을 대부들에게 나눠주는 관례가 있다. 이는 군신간에 믿음을 다지는 것이다. 임금이 나에 대한 믿음이 남아있는 지 여쭤보련다. 군신간에 의(義)가 사라지면, 사(士)는 그  그 군주를 버릴 수 있다.”

 

공자의 뜻을 전달받은 정공은 사흘동안 조당에 나오지 않았다. 교제를 지내고 난 뒤 대부들에게 나눠주는 제육도 공자에게는 보내지 않았다. 정공은 자신의 의사를 그런 식으로 표현했다. 더이상 삼환과 각을 세우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제나라의 압력을 핑계삼아 공자를 버린 것이다.

이로써 공자도 정공의 변심을 확인했다.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지만, 세력없는 임금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었다. 다만 예로써 결별하지 않은 것이 유감일 뿐이었다.


공자와 자로는 마침내 출국을 결행했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두 사람을 따라나선 제자는 20대의 젊은이들인 안연, 자공, 염구 정도였다. 공자 일행은 수레 한 대에 불과했다.

공자 일행이 위나라를 향해 갈 때 악사 한 사람이 뒤쫓아와 공자를 전송했다.

“선생님은 죄가 없습니다.”

공자는 그에게 “노래를 불러도 되겠는가?”라고 물은 뒤 함께 작별의 노래를 부르고 떠나갔다.⑫

 

gongja24.jpg

*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 중에서


8. 무성(武城)의 현가(弦歌)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게 된 사정에 대해서는 사마천이 그의 사서에 기록해 놓았기에 후대 사람들이 대강을 알게 되었다. 거기에는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듯한 부분도 적지 않게 포함돼 있다. 공자가 유가의 조종이 된 뒤에 만들어진 신화가 사실처럼 전승되고 있었기에 후대의 기록자로서는 진위를 가리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지금까지 나, 이생이 한 이야기는 공자의 행적을 좇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채집한 사실과 합리적 추론들을 취합하여 정리한 것이다. 그 중에 특별히 제나라 지방에서 들은 이야기를 따로 덧붙인다. 더 진실에 가까운 사실들이 후대의 눈밝은 문도에 의해 발굴되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공자가 휴삼도로 정권을 잡을 것 같자 제나라로 망명온 양호와 공산불요 등의 추종자들, 숙손씨의 망명자 등이 노나라 내의 가신세력들과 손을 잡았지요. 계환자도 자신에게 전향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사면을 약속했다고 합니다. 계환자는 반대 세력이 제나라 조정과 연계되는 것을 아주 두려워했습니다. 계손씨는 전통적으로 진나라 족벌들과 가까운 사이였으니까요. 노나라 망명자들은 사면을 받기 위해 제나라를 끌어들였고, 제나라는 기꺼이 이 집단의 후견자가 되었습니다. 제경공은 사면을 받아 돌아가는 이들에게 각종 ‘비밀 임무’를 주는 동시에 노나라 조정을 회유할 뇌물을 듬뿍 안겨보냈습니다. 노나라 임금과 귀족들이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선물이었죠. 그 선물 보따리 중에는 미희 80명과 준마 120필이 특히 인기가 많았다지요? 이들은 이 뇌물을 계씨와 임금에게 바치고 본래 자리로 착착 복귀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몰아낸 자들에게 보복을 다짐했지요. 그들의 살부(殺簿) 맨 앞 자리에 자로의 이름이 있었다고 합니다.


공자의 망명은 개인적으로는 자로를 구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던 겁니다. 안연과 자공, 염구 등 20대의 제자들이 스승을 보좌하기 위해 따라나섰습니다. 짐이 단출했던 것으로 보아 망명이 그리 오래 가지는 않으리라 여겼던듯 합니다.

자로의 후원자인 계강자가 곧 후계자가 될테니까요. 그러나 그런 기대는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고  4년 뒤에 계환자가 죽고 계강자가 섰지만, 공자는 그로부터 10년이 더 지나서야 겨우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계강자 역시 집정이 되고 보니 공자가 더욱 두려워졌던게지요.”

 

공자가 노나라를 떠난 뒤 몇가지 사실이 분명해졌다. 노나라에서 삼환의 참주정을 혁파하려 한 사람은 공자말고 양호가 있었다. 양호는 혁명의 과실을 자기가 차지하려 해 세인의 지탄을 받았지만, 공자는 그런 흔적이 전혀 없었다. 공자가 시도한 혁명에는 그 어떤 정치적 이해나 배려가 고려돼 있지 않았다⑬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집권자가 된 계강자가 진실로 전율을 느낀 것은 바로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가 아니었을까.

 

  공자가 어느날 제자 자유가 다스리는 무성(武城)을 방문했을 때였다. 곳곳에서 현가(弦歌·거문고나 비파를 타며 부르는 노래)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공자가 즐겁게 웃으며 말했다.

 “좋구나, 그런데 왠지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쓴 것 같구나.”

   자유가 반문했다.

 “예전에 선생님은 ‘군자가 도를 배우면 남을 사랑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다스림이 쉽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공자가 이 말을 듣고 제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방금 자유가 한 말이 옳다. 아까 내가 한 말은 농담이었다. 하하하…” -‘양화’편 4장⑭

  

누군가가 이 일화를 전해 듣고 나, 이생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공자라는 사람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그에게는 변혁(變革)이라는 것도 무성(武城)의 현가(弦歌) 소리가 울려퍼지는  이상주의자의 꿈 속 같으니 말입니다.”

나는 진심으로 그의 말에 동의한다. 





<원문 보기>


  *<논어명장면>은 소설 형식을 취하다 보니 글쓴 이의 상상력이 불가피하게 개입되었다.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논어를 새롭게 해석해보자는 글쓴 이의 취지를 살리면서 동시에 독자들의 주체적이고 다양한 해석을 돕기 위해 원문을 글 말미에 소개한다. 소설 이상의 깊이 있는 논어읽기를 원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2014년 11월호 연재부터 <논어> 원문보기에 인용할 한글 번역본은 <논어정의>(이재호 정해,솔)와 <한글세대가 본 논어>(배병삼 주석, 문학동네)이다. 표기는 이(논어정의)와 배(한글세대가 본 논어)로 한다. 이밖에 다른 번역본을 인용할 때는 별도로 출처를 밝힐 것이다. 영문 L은 영역본 표시이다. 한문보다 영어가 더 익숙한 분들의 논어 이해를 추가하였다. 영역 논어는 제임스 레게(James Legge. 1815-1897. 중국명 理雅各)본을 사용하였다.

 ***<논어>는 편명만 표시하고, 그 외의 문헌은 책명을 밝혔다.

 

   ①옹야편 22장

 子曰 齊一變 至於魯 魯一變 至於道(자왈 제일변 지어로 노일변 지어도)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제나라가 한번 변하면 노나라의 정치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고, 노나라가 한번 변하면 선왕(先王)의 도에 이르게 될 것이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제나라가 한번 변하면 노나라에 이를 것이요, 노나라가 한번 변하면 도에 이를 것이다.

 L-The Master said, “Ch’i, by one change, would come to the State of Lu. Lu, by one change, would come to a State where true principles predominated.”

 

  ②동주시대는 보통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양분한다. 전국시대는 진나라가 조, 한, 위 세나라로 분립하는 서기전 403년을 기점으로 삼는다. 공자가 살던 5세기는 춘추시대의 말엽이었다. 강력한 7개의 약육강식하던 전국시대는 서기전 221년 진시황이 전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③휴삼도라 불리게 된 이 법령에 대해 <춘추공양전>은 노정공 12년, 사마천의 <사기> ‘공자세가’는 노정공 13년에 있었던 일로 기록하고 있다. 대체로 12년설이 정설로 보고 있다.

 

   ④<춘추좌씨전> 노정공 12년조에 휴삼도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⑤ 서기전 537년에 있었던 일이다. 공자가 15살 때의 일이다.

 

 ⑥ 육예(六藝)

    보통 예(禮)·악(樂)·사(射·활쏘기)·어(御·말몰기)·서(書·문자)·수(數) 등의 지식이나 기술을 말한다.

 

 ⑦ <춘추좌씨전>노정공 12년조에 있는 사실을 근거로 재구성했다.

 

 ⑧헌문편 38장

 公伯寮소(참소할 소)子路於季孫 子腹景伯 以告曰 夫子固有惑志於公伯寮 吾力 猶能肆諸市朝(공백료소자로어계손 자복경백 이고왈 부자고유혹지어공백료 오력 유능사제시조) 子曰 道之將行也與 命也 道之將廢也與 命也 公伯寮其如命何(자왈 도지장행야여 명야 도지장폐야여 명야 공백료기여명하)

 이-공백료가 자로를 계손씨에게 참소하니, 자복경백이 (이 사실을) 스승에게 아뢰었다. “계손씨께서 참으로 공백료의 참소에 뜻이 미혹되고 있는데, 제 힘이 그래도 공백료 따위는 머리를 베어 그 시체를 저자거리에 내다버릴 수 있습니다.”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정도가 장차 세상에 시행될 것도 명운이고, 저어도가 장차 폐지될 것도 명운이니, 공백료가 그명운을 어찌하겠는가?”

 배-공백료가 자로를 (집정자인) ‘계손’에게 무고하였다. 자복경백이 전하면서 말했다. 계손께서는 공백료를 깊이 의심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제가 힘을 써서 (공백료의 목을) 처형장에 내다 걸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마는. 선생님 말씀하시다. 도가 장차 이뤄지는 것도 운명이요, 도가 장차 없어지는 것도 운명이다. 공백료 따위가 그 운명을 어찌한단 말이냐!

 L-The Kung-po Liao, having slandered Tsze-lu to Chi-sun, Tsze-fu Ching-po informed Confucius of it, saying, “Our master is certainly being led astray by the Kung-po Liao, but I have still power enough left to cut Liao off, and expose his corpse in the market and in the court.” The Master said, “If my principles are to advance, it is so ordered. If they are to fall to the ground, it is so ordered. What can the Kung-po Liao do where such ordering is concerned?”

 

 ⑨선진편 24장

 子路使子羔爲費宰.子曰 賊夫人之子.(자로사자고위비재 자왈 적부인지자) 子路曰 有民人焉 有社稷焉 何必讀書然後爲學. 子曰 是故惡夫녕(아첨할 녕)者(자로왈 유민인언 유사직언 사필독서연후위학. 자왈 시고오부녕자)

 이-자로가 자고를 비란 고을의 장관으로 삼으니, 스승께서 (이 일을 두고) 말씀하셨다. “남의 자식을 그르치는구나.” 자로가 말하였다. “(비 고을에는) 백성도 있고 사직도 있으니, 어찌 반드시 글을 읽은 뒤에야 학문을 한다고 하겠습니까?” 스승께서 (자로의 이 말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런 까닭으로 말재주가 있는 사람을 미워하는 법이다.”

 배-자로가 자고로 하여금 비 땅의 책임자로 삼았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남의 자식 또하나 잡겠구나. 자로가 말하였다. 백성과 관료가 있고 사직이 있으니, 꼭 반드시 책을 읽어야 배웠다고 하겠습니까? 선생님 말씀하시다. 이래서 내가 말만 번지르르한 놈들을 미워한다니까!

 L-Tsze-lu got Tsze-kao appointed governor of Pi. The Master said, “You are injuring a man’s son.”  Tsze-lu said, “There are (there) common people and officers; there are the altars of the spirits of the land and grain. Why must one read books before he can be considered to have learned?” The Master said, “It is on this account that I hate your glib-tongued people.”

 

 ⑩ <춘추공양전> 정공 12년조

 孔子行乎季孫 三月不違 曰 家不藏甲 邑無百稚之城 於是帥師墮후 帥師墮費.(공자행호계손 삼월불위)(왈 가부장갑 읍무백치지성 어시수사휴후 수사휴비)

 

 ⑪ <사기> ‘공자세가’

 

   ⑫ 이상의 내용은 <사기> ‘공자세가’, <춘추좌씨전> <수사고신록> 등을 바탕으로 구성한 것이다.

 

 ⑬ 시라카와 시즈카, <공자전>

 

 ⑭ 양화편 4장

 子之武城 聞弦歌之聲.(자지무성 문현가지성) 夫子莞爾而笑曰 割鷄焉用牛刀(부자환이이소왈 할계언용우도)

 子游對曰 昔者 偃也聞諸夫子曰 君子學道則愛人 小人學道則易使也(자유대왈 석자 언야문제부자왈 군자학도즉애인 소인학도즉역사야)  子曰 二三子 偃之言 是也 前言 戱之耳(자왈 이삼자 언지언 시야 전언 희지이)

 이-스승께서 무성에 가서 거문고와 비파를 타면서 노래를 부르는 소리를 들으셨다. 스승께서 빙그레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닭을 잡는 일에 어찌 소 잡는 칼을 쓰고 있는가.” (이 말을 듣고서) 자유가 대답하였다. “예전에 제가 스승님께 들은 말이 있사오니 ‘군자가 도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가 쉽다’고 하셨습니다.” 스승께서 대답하셨다. “젊은이들아, 자유의 말이 옳다. 조금 전에 내가 한 말은 농담일 뿐이다.”

 배-선생님, 무성에 가시다. 거문고를 타며 노래하는 소리를 듣고는, 빙그레 웃으며 말씀하시다. 어째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것 같구먼. 자유가 (발끈해) 말하였다. 전에 제가 선생님께 듣기로, “군자가 도를 배우면 사람을 아끼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쉽게 부려진다”고 하셨잖습니까. 선생님 말씀하시다. 얘들아 자유의 말이 옳다. 앞의 말은 농담이었느니라.

 L-The Master, having come to Wu-ch‘ang, heard there the sound of stringed instruments and singing. Well pleased and smiling, he said, “Why use an ox knife to kill a fowl?” Tsze-yu replied, “Formerly, Master, I heard you say,- ‘When the man of high station is well instructed, he loves men; when the man of low station is well instructed, he is easily ruled.’” The Master said, “My disciples, Yen‘s words are right. What I said was only in s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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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우
한겨레신문에서 20여년간 여러 부서를 돌며 기자 생활을 했으나 그리 유능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현재 한겨레라이프 편집장이다. 만 50살에 문고리 더듬듯 지천명의 뜻을 새기다가 내친 김에 <논어>를 읽기 시작했다. 공부도 일천하고 생각도 앝은데 마음만 앞서서 덜컥 소설이란 도망갈 구멍을 만들어놓고 공자 이야기를 쓰게 됐다. 좋은 뜻으로 저지른 일이니 부족하더라도 너그러이 보아주시길.
이메일 : iwl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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