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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 대한 회의와 불신

휴심정 2015. 0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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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기도를 정말 들으실까?  

 [복음과상황] 은애 청파교회 청년부
 
 

한 달 전 쯤, 청년부 예배의 공동체 기도를 맡아주겠냐는 청년부 임원의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난색을 표했더니 다른 이에게 기도를 부탁하겠다는 메시지를 다시 받았다. 앗싸!

그로부터 며칠 후에는 ㄱ단체의 ㅇ목사님에게서 현장 기도회에서 대표기도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아니, 내가 뭐라고 현장 기도회에서 대표기도를…!’ 한 차례 신앙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던 사이라 내 입장을 전달하기가 수월했다. 일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가 없어서 기도가 어려우며, 기도문을 작성하여 읽을 수는 있지만 그건 스스로 자기기만적인 행위라고 느끼기 때문에 곤란하다 전했더니, 어려운 부탁을 했다 하시며 정성스런 답변을 주어 감사하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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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도를 못/안 한다
그렇다. 나는 기도를 못/안 한다. 처음부터 기도를 안 하거나 못하지는 않았다. 기존에 나에게 기도란, 절대자에게 무엇인가를 의뢰하는 행위였다. 교회에서 순서에 맞춰 혹은 급작스레 전지전능하신 분에게 읍소가 필요할 때 쿡 찌르면 자동재생 되는 것이었다. ‘하느님, 아, 제발, 좀…’ 정도랄까?


그런데 어느 순간, 절대자의 전지전능하심에 대한 믿음이 깨지고 ‘과연 이런 것을 의뢰해도 되는 걸까?’ 하는 혼란스러움이 생기고 말았다. 아빠가 암에 걸린 것이다.

7년 전, 아빠가 대장암 4기 확진을 받았다. 확진 시점에 이미 몸 곳곳에 전이가 진행되고 있었다. 첫 수술이 11시간이 넘게 걸렸고, 드라마에서나 보던 중환자실에 처음 가보았다. 그리고 5년간의 암 투병이 이어졌다. 날씨가 맑았다 흐렸다 하듯이 암환자의 몸 상태는 맑았다 흐렸다를 반복한다. 맑은 날이 영영 안 올 거 같다가도 불현듯 해가 쨍쨍 뜨곤 한다. 그럴 때면 뭔가 희망이나 기적 같은 것을 실감하게 된다. 물론 찰나에 끝나버리고 말지만 말이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 이후로는 절대적으로 흐린 날이 많아진다. 별 수 없다. 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너무 늦게야 알았다.


우리나라 50대 남성의 사망 원인 1순위는 ‘암’이다. 이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범인(凡人)으로서 그저 흔하게 겪을 수 있는 상황일 뿐이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달랐다. 나름 신실하시다는 친척들도 달랐다. 병은 죄이고, 병자는 죄인이었다. 병자에게 직접적으로 표현하는지 까지는 차마 확인을 못했지만, 가족들에게 위로랍시고, 격려랍시고 “기도하면 아빠 암이 다 나을 거야. 하느님이 기도를 들어주실 거야”라는 말을 줄기차게 들어야 했다. 얼핏 은혜롭게 들릴 수 있지만 그저 교회의 흔한 이중언어일 뿐이었다. 바로 “이제 교회 열심히 다니고 봉사 열심히 해야지”라는 말이 한 세트처럼 한결같이 따라왔기 때문이다.


위로도 격려도 되지 않는 그런 권면을 듣고 나면, 오히려 마음의 짐이 존재감을 한껏 드러낸다. 새벽에 병원 휴게실에 나와 앉아 내 믿음이 부족해서 우리 가족에게 이런 어려움이 생긴 거라고 자책하면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고 싶었다.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무의식에서 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눈물이 나오지 않았던 걸까? ‘왜 이런 고난이 생기는 건가요?’ ‘우리 가족에게 고난이 필요한 것이었나요?’ ‘정말 저희 가족과 제 믿음이 부족해서 이런 일이 생긴 건가요?’ ‘하필 이런 방법이어야 했나요?’

기도라고 말하기 무색한 기도를 했었다. 그날은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나의 하찮은 신앙심을 조롱하고 자책하는 게 전부였다.


누군가가 모든 것은 다 하느님의 뜻이라며, 병을 통해 가족들을 하나로 묶어주시니 감사하다는 기도를 ‘우리 대신’ 꽤 자주 해주었다. 그 기도를 듣고 억울하다 못해 쌍욕이 치밀기도 했다. 이웃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하느님의 선물로 여기라고 강요하는 알량한 신앙심이 내가 경험한 교회의 현실이었다.


기도에 대한 회의, 불신이 더 깊어졌다
선언적으로 말할 수 있기까지 정말 오래 걸렸지만, 이제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병과 죽음은 하느님이 내린 징벌이 아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사글세방이라도 얻기 위해서는 중노동에 시달리는 것 외에 달리 방도가 없다. 그저 매일 산적한 육신의 피로와 끊이지 않는 불안을 잊기 위해 소주 한 병을 털어 넣을 뿐이었다. 그 다음날도 생계를 급급하게 이어가기 위해서는 불안의 원인에 대해서 고뇌하기보다는 당장 손발을 바삐 움직여 한 푼이라도 벌어야 했으니까. 그게 못 배우고 가진 것 없는 내 부모의 삶이었다.


누구든 아플 수 있고 누구나 죽는다. 죽음 또한 삶의 일부분이다. 물론, 관계는 살아있는데 관계의 대상만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 괴리에서 슬픔이 느껴지는 것은 분명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애초에 누구나 죽음이 깃든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삶의 끝에 일단락으로 죽음이 존재하는 것은 고정불변의 이치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누구도 이 이치를 피해갈 수 없다.


이제와 돌아보니 주위에서 쏟아진 권면의 홍수에서 왜곡된 하느님의 뜻을 분명히 거부하고 단호하게 굴지 못했던 것이 가장 억울하고 마음이 아프다. 함께 울어주고 이웃을 위해 기도하던 사람들의 진정성을 의심하기는 정말 싫었지만, 우리 가족이 처한 환경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고 나타내고 가르치려고 하는 몇몇 사람들로 인해 그렇게 기도에 대한 깊은 불신이 생겨버리고 말았다. ‘우리의 기도를 정말 하느님이 들으실까?’ ‘하느님은 모든 기도를 받으실까?’ ‘정말 하느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일하시는 분일까?’ 하는 질문들만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폭력적인 권면들을 피하기 위해 비교적 ‘안전한’ 교회로 옮기기도 했지만 기도에 대한 회의가 완벽히 사라지지는 않았더랬다.


큰 수술 두어 번, 시술 수십 번이 더 이어지고 “암 환자”가 아빠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거부할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저 남은 시간을 알뜰히 살뜰히 보내는 데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무 긴 시간을 삶에 집착해서 도리어 삶을 소중하게 여기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시간들이 너무 아깝다. 이제 나는 그저 평생을 후회와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부터는 아주 본격적으로 기도를 안 하기 시작했다. 아빠의 1주기 예배를 마치고 가정의 번성을 위해 방언을 받으라던 친척 어른들 말에 기함을 하며 고함을 질렀다. (정말로 질렀다!) 심지어 그들은 방언을 하며 경건 생활을 열심히 하면 아빠가 천국에서 기뻐할 거라며 남은 가족들을 격려했는데, 그 말은 나에게 우리 아빠에 대한 모욕처럼 들렸다. 내가 함께 삶을 나눴던 우리 아빠는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는 무슨 알레르기 마냥, ‘기도’하면 깊은 불신부터 꿈틀댔다. 가끔 기도를 해야 하는 자리에 나서야 할 때면 그냥 정형화된 기도문을 써서 읽었다.


간절했다, 정성을 다해 기도문을 준비했다
그런 내가 2014년 4월 16일을 기점으로 점차 달라졌다. 그날, 국가와 자본의 폭력이 집대성된 세월호 침몰 사고가 발생했다. 매주 집회와 기도회를 챙겨서 찾아가는 정도밖에 할 수 없었던 시민으로 그저 먹먹함을 나눌 뿐이었다. 어딜 가나 탄식과 신음소리가 이어지는데도 나는 여전히 기도를 할 수 없었다.


우리 아빠의 죽음은 생로병사라는 자연의 이치로 볼 수 있지만, 세월호 침몰 사고는 여러모로 이치에 어긋나는 사건이다.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 왜 침몰 이후 단 한 사람도 구조될 수 없었는지, 왜 아직까지 저 바다에 있는 사람들이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는지…. 게다가 우여곡절 끝에, 지난한 과정을 거쳐서 구성된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마저 세금 도둑이라고 비난 받는 세상이다. 분명 실마리가 보이는데도 손발은 묶여 있고, 국가와 자본은 그 실마리를 외면하고 있다. 함께 울며 기도하겠다던 한국교회마저 금세 현장의 희생자들과 실종자들, 그리고 그 가족들과 생존자들을 잊어가고 있다. 정말이지 한탄스러워서 눈물이 난다.


간절해질 수밖에 없다. 그 많은 의문들이 무엇 하나 해결되지 않은 현 상황은 고통을 가중하고 있고, 가중되는 고통은 간절함을 더한다. 나는 일하시는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일하시기를 기도하는 기만이라도 저지르고 싶어졌다.


며칠 전, 결국 청년부 예배 공동체기도 담당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기도자 섭외에 난항을 겪던 임원들이 서로 돌아가면서 기도를 하기로 결정했고, 임원 중 한 사람인 나에게도 차례가 돌아왔다. 어떻게 기도문을 작성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변함없이 고통 속에 탄식하고 신음하는 이웃들을 위한 기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론 여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신에게 무언가를 요청한다는 게 기만적이라고도 느껴지지만, 그래도 정성을 다해 기도문을 준비했다. 그렇게 준비해온 기도문을 읽는데 어이가 없게도 울컥했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내 생각들을 정리하여 글로 만들고 그걸 읽는 것뿐인데도 목구멍이 멨다. 정말 간절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


세상살이를 버티다보면, 당신이 우리와 함께하시는지 깊은 의문이 듭니다.

그러다가 문득 주님의 형상을 한 지체들을 만날 때는 주님이 함께하심을 절절히 느끼며 깊은 위로를 받습니다.

탄식과 신음소리가 그치지 않는 세상에서도 주님의 형상을 한 소중한 이들을 곁에 두게 해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평화와 안식은 영영 내 것이 아닌 양 멀게만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하느님 나라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우리의 소망을 외면치 않으시고 주님의 형상을 한 이들로 하여금 이 땅의 하느님 나라 소망을 놓치지 않도록 도우시니 감사합니다.

이름 없이 얼굴 없이 하느님 나라를 위해 애쓰는 이 땅의 핍박당하는 예수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식민지의 청년으로 산 예수가 성전을 엎었듯이, 바리새인들에게 가감 없이 독사의 자식이라고 칭했듯이, 이방인 여성에게도 기적을 행했듯이, 세리들과 식탁을 나눴듯이, 정의와 평화를 위해 애쓰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짓이겨진 마음을 돌봐주시고 당신의 눈물로 위로해 주십시오.

누군가의 고통과 슬픔은 누군가에게 조롱당하고, 자식을 잃은 부모는 정치적 지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지나가는 행인에게 뺨을 맞고, 어느 기간제 교사는 죽어서도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순직 인정이 되지 않고, 아직도 저 바다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온갖 이념 논리로 국가기관은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아무렇지 않게 앗아갑니다.

이런 세계를 묵묵히 살아가다보니 어느덧 폭력에 점점 무뎌져 갑니다.


이런 스스로를 돌아볼 여유도 허락하지 않고 자본과 국가는 폭력에 앞장섭니다.

자본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 세계에서 특히 절규와 통곡이 넘치는 현장에서 여전히 고통 받고 있는 내 이웃을 돌아볼 수 있도록, 주님, 우리에게 한 톨의 여유와 용기를 허락해 주시길 간구합니다.

누구든 하느님의 정의와 은혜를 온전히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 고통에서 우리를, 우리의 이웃들을 건져주실 것을 믿습니다.
 

고유한 자신의 모습대로 환대 받는, ‘저마다 자기 몫의 삶을 충만히 누릴 수 있는 세상’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 땅에서 이뤄질 하느님 나라를 고대하며, 이 땅에 살아있는 모든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청파감리교회 김기석 목사님의 2014년 6월 20일 부활절 예배 주일 설교문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은애
청파감리교회 청년. ‘소개’ 말고 ‘소원’을 말하자면, 세계평화와 기본소득보장 정도를 꼽을 수 있겠다.(신이여허락하소서!)
 
 *이 글은 <복음과 상황>에 실린 것입니다.

http://www.gosc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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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도그마의 감옥을 박차고 나와 깨달음과 행복을 위한 고무 찬양이 난발하는 곳, 그래서 더욱 알아지고 깊어지고 열리고 사랑하게 되고 행복해지는 곳, 단 1분도 쉬지 못하는 마음이 쉬는 곳, 잠시 뒤면 소란이 다시 몰려올지라도 1분만이라도 온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 휴심정 休心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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