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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공동체일까

휴심정 2017. 0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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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디마을.jpg » 반디마을 주거공동체 전경. 네 가정의 주거 공간과 카페, 공방, 커뮤니티센터 등이 어우러져 있다. 사진 정동철전도사 제공)



본회퍼에게 배운 지혜


결혼을 전제로 교제 중이던 자매가 내게 물어왔다.

“선교단체 간사들은 사임 이후 대체로 목회자가 되던데 당신도 그럴 건가요?”


짧은 질문에서 긴 여정의 운명을 가를 기운을 느꼈다. 눈치를 보니 그녀는 목회자 아내로 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목회자가 될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그러나 결정된 미래는 아니니 아니라고 대답해도 될 것이었다. 순간 지혜가 떠올랐고 나는 대답했다.


“미래의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야. 목회자가 된다면 결코 혼자 결정하지 않을 거야. 이제부터 중요한 결정은 우리 것이므로 함께 기도하며 결정할 거야.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가 되고싶은 마음은 있지만 미래의 당신이 사모가 되고 싶지 않다면 나도 목회자는 안 될 거야.”


위기의 순간을 모면한 나는 그녀와 결혼했고, 선녀의 옷을 숨긴 나뭇꾼 마냥 아이 셋이 생긴 후 목회자가 되었다. 물론 그때의 약속처럼 중요한 결정의 순간마다 아내에게 기도할 시간을 주었고 아내의 의견을 경청했다. 그래서 지금 내 모습은 아내가 결정한 인생이다. 돌이켜보면 그 순간의 대답에 공동체의 동력이 될 이상(理想)의 생성-발전-소멸에 대한 열쇠가 있었다.


누구나 마음에 품은 이상 하나 쯤은 있을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경우 그 과정에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강력한 알고리즘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음성에 의한 확신이니까 융합보다 설득, 기다림 혹은 고난이 더 어울리는 단어로 엮인다. 그런 이유로 공동체의 중심에는 그 이상에 걸맞은 사상가가 존재한다. 그리고 공동체는 그 이상에 공감하거나 거부하면서 형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공동체적인 삶에 관심을 가진 후 여러 선배 공동체들의 역사를 접하게 되었다. 그들의 신기한 공통점은 공동체를 시작한 1세대는 대체로 분열했다는 점이다. 물론 나는 분열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성숙으로 이끄는 또 다른 길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헤어짐은 아프다. 나는 이미 공동체의 논의 과정에서 한 차례 아픔을 겪었기에 또 그런 아픔을 대면할 용기가 없었다. 이번엔 정말 시작이 되었고 결혼과 같은 삶이 갈라서는 것은 데이트하다 헤어지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깊은 고통이 예상되니 정말 잘해보고 싶었다.


지혜를 찾던 중 책에서 길을 보았다. 내가 아내에게 말한 대답을 지지해주는 문구가 본회퍼의 글에도 있다. 그는 《신도의 공동생활》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동체를 사랑하는 사람은 공동체를 허물고,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공동체를 세운다. 공동체는 이상이 아니라 사람이다.”


공동체는 이상의 결합이라기보다 인격적 연합이라는 말이 아닐까? 공동체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 동체의 이상을 사랑한다는 말일 것이다. 형제를 사랑하여 공동체를 세운들 그 공동체에 이상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그 공동체에 걸맞은 이상을 하나님이 부어주실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이 믿음이 아닐까? 그리고 공동체는 하나님의 음성을 함께 듣는 과정에서 새로운 하나가 되어 부르심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결혼과 참으로 비슷하다. 누가 결혼을 이상(비전)의 결합이라 여기는가? 결혼엔 로맨스가 필요하다. 사람을 사랑해야 결혼이 가능한 것이고, 이상은 그 가정의 역량에 맞게 생겨나고 자라고 사라질 것이다. 어쩌면 1세대가 겪은 분열의 고통은 사상가 중심의 이합집산이 낳은 결과인지도 모른다. 이상에는 동의하였으나 동상이몽인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공동체는 분열한다. 또한 이상이 고상하나 이를 지탱할 역량이 없을 때 실망하여 공동체는 분열한다. 그 실망은 사상가뿐 아니라 구성원들의 역량부족 때문일 수도 있다. 본회퍼는 과감하게도 그런 이상을 가진 자가 이상을 실현하려는 욕심에 사로잡혀 공동체를 깨뜨린다고 말한다.


결국 기독교가 마지막으로 남겨야 할 한 단어는 ‘사랑’이다. 공동체 이상의 종착역도 ‘사랑’이다. 기차가 종착역에 도착했는데 타고 온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우린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이상과 사랑은 본래 함께할 수 없는 충돌하는 단어라기보다 과정과 목적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사랑이 목적이고 이상이 과정인 것이다. 그래서 순서가 바뀌면 공동체가 깨어진다. 사랑한다는 고백으로 공동체가 되었으나 어느 순간 이상의 도구인 것을 깨닫게 되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다. 우리는 사랑에 항복하여 희생할 수는 있어도 이상을 이루려고 사람을 이용해선 안 된다. 그래서 오랜 기다림이 필요하다 구성원 모두가 사랑에 항복하는 기간만큼….


‘무엇을 위한 공동체인가’에 대한 긴 대답

울산에서 첫 실험의 시기에 우리 공동체에게는 역사적인 연대가 있었다. 한 가정의 이주로 드디어 출발이 된 것이다. 이상의 결합이 아니었으니 출발은 쉬웠다. 그러다 판이 커질 즈음 이웃에 사는 자매가 이상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아직은 공동체의 기차가 시속 20km미만이니 이게 아니다 싶으면 뛰어내릴 수도 있겠지만 속도가 빨라지면 어림없는 일이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궁금증이었다. “도대체 오빠가 무엇을 하려는지를 잘 모르겠어요”라는 그녀의 고백은 물러서기 위한 의심이 아니라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 확신을 가지려는 갈망이었다.


말보다 글이 필요한 순간이라 편지를 쓰기 시작했는데 A4용지로 7장을 쓰고 나서야 타이핑을 멈췄다. 지금 그 편지를 10년 전 폴더에서 찾아서 읽어보니 우습기 그지없지만 분명한 맥락은 있었다. 


첫째, 선택은 너의 몫이니 남편이나 주변 사람에게 위임하지 말아라. 둘째, 공동체의 이상은 구성원이 함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므로 나의 이상에 의존하지 말아라. 셋째, 내가 어떤 이상을 가졌는지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면 좋겠다. 이렇게 세 가지로 요약이 된다. 혹시 공동체를 꿈꾸며 선택의 기로에 있는 이에게 도움이 될까하여 10년 전 편지의 일부를 공개한다.


◯◯에게.

갈림길….  너의 인생에 이런 갈림길이 몇 번 정도 있었을까? 그때마다 너는 용기를 내어 선택을 해왔고 그래서 지금의 네가 있는 거겠지? 앞으로의 인생에도 이런 갈림길은 수도 없이 만나게 될거야. 두렵겠지만 선택을 피할 수는 없단다. 《모험으로 사는 인생》이라는 책의 저자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모험하는 인생은 둘러가거나 다시 출발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을 수는 있어도 실패하는 건 아니라고 조언해준다. 중요한 선택일수록 결정은 쉽지 않지만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하는 것을 믿으면 오히려 기대감이 생기기도 한단다. 그는 사랑이며 우리의 아버지여서 탕자의 잘못된 선택도 존중하고 기다려주시지 않으시는가? 또한 형들의 모략에 빠진 요셉의 길을 곧게 하사 그의 가족과 민족을 구원하지 않으셨는가?


◯◯아. 너의 선택이 어떠하든 그리스도의 사랑이 너를 견인한다는 것을 잊지 않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주님이 너를 실패의 자리에 방치하지 않음을 믿으면 좋겠어. 만약 선택이 어려워 결정을 다른 사람에게 위임하게 되면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게 된단다. 네가 분별력이 없다면 그때부터 너의 인생은 너의 주변 사람들의 결정과 권유의 따라 흘러가게 될 거야. 네 남편이 인생의 동반자이지만 그에게 선택을 위임하지는 말아라. 남편이 확신에 차서 네게 권유할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은 남편에게 말씀하시듯 네게도 말씀하시는 분이셔. 응답이 더디 오더라도 우린 기다릴 수 있다. 이번 갈림길에서의 선택은 어느 것도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것을 선택해도 하나님이 너의 자유를 존중하시므로 우리 또한 그 선택을 존중함에는 불편함이 없다. 다만 선택을 통해 너에게 드러난 두려움의 문제가 극복되기를 바랄 뿐이다. 선택의 기로에서 어느 정도의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단다. 이것을 긍정적으로 보면 신중하다 하겠지만 아무것도 결정을 못할 만큼의 긴장이라면 이 선택을 위임한 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 일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과 우리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며 너를 사랑하고 너의 자유를 존중한단다.


◯◯아,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된 이유는 너의 이상적 의문에 답하려는 의도이지만 선택과 두려움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 넘어가면 앞으로도 그 긴장은 여전할 것 같아서 서두에 이 내용을 담았어. 공동체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생각해. 새로운 일들과 사람들이 끝없이 도전해 올 것이고 그때마다 우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고 갈림길에서 고뇌하겠지? 그건 대체로 개인적인 기도와 함께 회의를 통해 결정될 거야. 그런 날들이 두려움의 연속이 된다면 그건 너무 슬플 것 같구나. 나는 우리 앞에 열린 갈림길이 건강한 기대감이길 바래. 네 남편과 난 여러모로 생각이 닮아 있다. 우리는 전혀 다른 배경에서 자랐고 학창시절 학교에서 마주친 일도 없었다. 내가 포항에서 간사로 있을 때 수련회에서 몇 차례 마주 쳐서 알게 된 거란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대화할 때마다 참으로 개운한 느낌을 많이 받았단다. 분명한 이상, 명쾌한 행동, 견고한 의지… 서로 호감을 가지고 큰 일을 꿈꾸게 되는 건 결코 오랜 시간의 사귐이 있어야 가능한 게 아니라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우린 오랜 시간 저마다의 배경에서 하나님 나라를 갈망해 왔던 거지. 이후에 신학대학원을 같이 다니게 되었고 오가는 차 속에서 이미 와 있는 하나님 나라를 실현할 교회와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즐겨했다. 그렇게 2년이 쌓여서 여기까지 온 거야.


나에게 이상을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언제나 ‘하나님 나라’이다. 나는 그의 나라가 이 땅에 왔다고 말하는 성경의 가르침이 사실인지 실험해보고 싶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한결같은 주장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 왔다”였다. 중요한 것은 그의 나라는 시작이 되었고 언젠가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이 되겠지만, 지금도 그 나라는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아주 구체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음을 증명하고 싶고 이를 위해 공동체적인 삶을 살고 싶어. 공동체는 우리 삶에서 피상성을 깨뜨려 준다. 서로의 삶에 개입하고 채워주고 용서하는 것이 모두 실제화되어 우리의 말과 삶이 일치하도록 훈련시킨단다. 우리의 삶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드러나게 한단다. 물론 나도 두렵다. 나의 죄성은 나로 하여금 웬만하면 섞이지 말고 은둔하라고 일러준다. 그래야 편하다고…. 그러나 나는 평안한 삶을 살고 싶어. 하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누리는 평안의 삶. 그런 삶에 대하여는 구체적으로 이런 저런 생각이 많다. 하지만 더 구체적으로 나의 이상을 밝힐 수는 없단다.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있어도 내 이상이 우리의 이상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 아내와 나는 계획이 많았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계획일 뿐 너희 가족의 계획은 아니잖니? 그래서 네게 묻고 싶다. 너희 꿈은 무엇이냐? 할 수 있다면 그것을 공유하고 싶다. 그런 날들이 이어지면 주님이 우리에게 한 음성을 들려주실 테고 우리는 함께할 이상을 갖게 되지 않을까? 


우리가 사업체라면 우리의 사업을 설명하고 너희가 우리에게 투자하면 될 일인데 우리는 인격이고 동체라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갈망해야 한다는 조건만 있을 뿐이다.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 음성을 함께 분별하여 앞으로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 우리가 먼저 정해 두면 반칙이 아닐까? 그러기에 우리의 사업에 투자하지 말고 우리에게 투자해 보렴. 우리 역시 너희가 어떤 사람들인지 잘 모른다. 얼마나 영향력이 있을지? 뭘 잘하는지, 얼만큼 해낼 수 있는지…. 그런 것을 보고 너와 함께한 것이 아니란다.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는 너희의 마음 하나를 보았을 뿐이다. 네 남편이 오니 따라오는 너의 삶은 싫다. 나는 지금 너를 부르고 있단다. 그러니 너도 우리를 보렴…. 우리의 능력, 계획, 실현 가능성이 아닌 우리 존재를 보렴. 우리를 우여곡절 끝에 여기까지 인도해내신 주님의 능력을 보렴. 너희의 삶과 우리의 삶이 공동체의 삶이 되어 그의 나라를 실현하고 확장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길 바란다. 너의 불안한 지난 날과 앞으로의 갈등들을 생각할 때 미리 정보를 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구나. 일이 이렇게 급박하게 진행될지 우리도 짐작치 못했단다. 우린 이런 모험에 익숙해서 그런지 기대감에 들떠있어. 너의 잠 못 드는 밤은 생각치도 못하고….


◯◯아. 어떤 선택을 해도 나름의 기쁨과 고난이 있겠지? 그러니 이번 선택은 어떤 것도 죄는 아니라고 생각해. 그러니 두려워 말아라. 하나님은 좋은 선택을 하지 않았다고 너의 인생을 고달프게 하실 분도 아니다. 이쯤에서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간다 해도 우리는 괜찮다. 그래도 여전히 너를 사랑하며 소중한 동역자라 여기니 선택함에 부담이 없었으면 한다. 이렇게 길게 쓰게 될 줄 모르고 시작한 편지가 7페이지에 달했구나. 교정도 못하고 보낸다. 아침에 시작했는데 점심을 넘겼네…. 배가 고파서 그만 써야겠어. 뭘 말해야 할지 모르는 나라서 그때 그때 질문을 하면 열심히 대답할게. 많이 물어보렴.


― 2007년 6월 22일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길 기대하며…, 동철 오빠 씀



지금 반디마을 사람들은 공동체의 이상과 규칙을 정하는 일에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냥 한 곳에 모아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그런 결정의 순간에 기도와 회의를 거듭하지만 결정이 쉽지 않은 일들은 충분한 시간을 들여 모두가 공감하기를 기다린다. 어떤 사안은 없어지기도 한다. 우리는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 세대와 이 지역을 위해 우리에게 할 일을 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정동철

1971년생으로 울산대학교에서 산업디자인을 공부한 뒤 IVF(한국기독학생회) 캠퍼스간사로 14년 동안 섬겼다. 지금은 ‘디자인잇다’ 대표로 일하면서, 몸 된 교회 전도사로 섬긴다.


 이 글은 <복음과상황>(http://www.goscon.co.kr/)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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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도그마의 감옥을 박차고 나와 깨달음과 행복을 위한 고무 찬양이 난발하는 곳, 그래서 더욱 알아지고 깊어지고 열리고 사랑하게 되고 행복해지는 곳, 단 1분도 쉬지 못하는 마음이 쉬는 곳, 잠시 뒤면 소란이 다시 몰려올지라도 1분만이라도 온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 휴심정 休心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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