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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금강경 오해 13

일반 조회수 1220 추천수 0 2017.06.09 20:43:16

도올의 금강경 오해 13

도올은 말한다.

‘1-4. ·····, 敷座而坐. ·····, 자리를 펴고 앉으시거늘.

산스크리트 원문을 보면, “이미 마련된 자리에 앉아, 양다리를 꼬고, 몸을 꼿꼿히 세우고, 정신을 앞으로 집중하였다.” ·····라고 구구한 문자를 늘어 놓았다. 什(구마라지바의 略)의 위대성은 바로 문자의 간결함과 상황적 융통성이다.

특정의 자리에 앉는다는 것보다는 불특정의 장소에 방석이나 돗자리를 깔아 자리를 만드는 것이 보다 더 상황적이고 자연스런 맛이 있다. ·····. 금강경의 설법은 선정이나 삼매에 들은 자가 비의적으로 내뱉는 주문이 아니다. 그냥 편하게 방석위에 앉은 자가 또렷한 제정신으로 말하는 일상언어인 것이다. 什의 번역의 위대성은 바로 이러한 자연스러움에 있는 것이다. 빈 공간에 자리를 까는 행위는, 바로 그 자리를 깔음으로써 그 자리를 聖化(sacralization)시킨다는 제식적 의미를 지닌다. 즉 그 주변에 성스러운 공간이 창출되는 것이다. “자리를 깐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성화의 행위인 것이다.

그런데 “坐” 즉 “앉았다”함은 무엇인가?’(P138)라고 말한다.

도올은 석가여래나 예수라 할지라도 그 삶이 여니 사람들과 다름없는 평범하고 상식적인 것임을 매우 강조한다. 여기서도 석가여래가 식후에 ‘자리에 앉는다’는 일상적인 일을 가지고 이런저런 비의적 설명을 주워섬기는 건 질색이란 것이다.

도올이 위 인용문에서 보듯 금강경은 ‘선정이나 삼매에 들은 자가 비의적으로 내뱉는 주문이 아니’란 건 맞다. 그렇다고 금강경이 진즉에 말한,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이 연기의 실상으로써 진리의 진실이라는 비의를 밝혀 증명한 일상언어로써의 선정으로 지혜작동한 冊임을 도외시하고, 인용문에서처럼 대책없이 자연스러운 일상사로만 이해하여 진술하는 건, 이 ‘自然’이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이 진리의 진실이라는 비의의 금강을 표상한 말임을 말하지 않고, 대책없이 자연스러운 일상사로만 진술하는 건, 구태여 불교가, 이 금강경이 선 까닭과는 아득한 사유의 진술이다. 이는 저 ‘선정이나 삼매’는 인간이, 특히 특정의 인간이 ‘들거니 나오거나’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중중무진의 시·공간, 곧 이 삼세가 총체적 인연·인과로 작동하는 보리살타로써, 이 인연·인과로써의 선정이며 지혜삼매의 바라밀로 ‘또렷한 제정신’의 삶을 사는 일상적 작동임을 모르고 ‘선정이나 삼매에 들은 자’라고 말하여, 이 선정이나 삼매가 사람이나, 특정한 사람이나 드나들 수 있는 무엇으로 사유하여 진술하는 건, 도올이 이 금강의 지혜에 얼마나 아득한지를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금강경은 ‘선정이나 삼매에 들은 자가 비의적으로 내뱉는 주문’인가? 맞다. 금강경은 석가여래의 일상의 선정삼매로써 이 일상의 선정삼매가 금강의 반야로 작동하는 연기의 실상임을 말하여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이 보리살타로써 진리의 진실이라는 깨달음을 기도한 秘義의 주문이다.

이 언어문자의 금강경적 개념이 분명하지 않다면 당연히 금강경을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말하니 오해의 진리의 진실일밖에.

석가여래나 예수가 아니라, 비단 구걸하고, 밥 먹고, 발 닦고, 자릴 펴는 따위, 어느 누구의 어떤 일상적 행위의 삶일지라도 진리의 진실로써 聖化임을 표상하는 제식적 의미를 내포한 것이므로, 이 ‘성화로써 제식적 의미’를 갖는다고 말하는 도올의 말을 따라가 보자. 정말 이 일상이 금강경적 성화의 비의임을 증명하는지, ‘또렷한 제정신’으로 살펴보자.

‘그런데 “坐” 즉 “앉았다”함은 무엇인가? ····· 예수가 다섯 개의 떡덩이와 물고기로 5천명의 무리를 먹이신 사건이다. 예수에게 복음의 진리를 들으러 모인 갈급한 심령 5천명! ·····.

五餠二魚! 이것은 혼자 먹기에 딱 좋은 분량이다. 5병2어를 혼자 먹는다는 것은 분명 小乘이다! 5병2어로 5천명이 다 함께 먹는 것이야말로 大乘이다. 나는 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설화처럼 小乘과 大乘의 갈림길을 잘 말해주는 강력한 상징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사복음서에 공통으로 나오고 있는 이 설화를 잘 뜯어보면 이 소승과 대승의 갈림길을 말해주는 결정적인 예수의 한마디를 모두가 간과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 떡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다. 이때 예수는 말씀하신다.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결정적인 한마디가 있다.

“이 무리들로 하여금 앉게 하라!”

여기서 가장 중요한 멧세지는 배고파 들뜬 오천명의 무리로 하여금 모두 같이, 함께 앉게 한다는 것이다. 한 마음으로 한 잔디위에 앉게 하라! 배고픔에 들뜬 마음을, 성나서 싸우려는 마음을, 복음의 소식에 기쁜 마음을 가라앉히고 앉아라! ····· 앉아라! ····· 제사장도 앉고, 배고픈 자도, 배 부른 자도 앉아라! 보통 “일어나라!”는 외침은 “북돋음”이요. 無爲가 아닌 有爲로의 외침이다. ·····.

다섯 개의 떡덩이와 두 마리의 물고기로 5천명을 배불리 먹이기 전에 예수가 요구한 것은 “앉으라!”라는 명령이었다. 바로 “앉음”의 “一心”이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가 5천명에게 공유될 수 있는 大乘의 비결이었다.

서서 듣는 진리가 있다. 그러나 금강의 지혜는 앉아서 들어야 들린다. 모든 성난 가슴을 가라앉히고, 북돋아진 모든 양기를 가라앉히고 들어야 들린다. 聲聞도 獨覺도 菩薩도, 三乘 모두가 같이 앉아야 들리는 지혜인 것이다.’(P139~140)

도올은 이 ‘자리에 앉는 행위’는 ‘또 다른 일을 하기 위한’ 前작동임을 말하고 있다. 석가여래의 ‘앉음’은 설법을 위한 것이며, 예수의 ‘앉음’은 오병이어로 오천의 무리를 배불리는 기적을 행하기 위한 것이란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앉음’은 앉기 전후로 연기한 실상이다. 전후의 일 역시 이것으로써,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은 중중무진의 연기며 진리의 중도며 실상이며 진실이다. 구태여 불교의 이 금강경이 있는 까닭은 오직, 이 진리인식의 깨달음일 뿐이다. ‘자리에 앉는 행위’는 진리의 진실이다.

도올은 여기서 희유한 상상을 한다. 마치 옛날 만백성을 사랑하는 임금이나, 요즘의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가 할 법한 상상이다.

5천명에게 단지 5餠2魚의 식량밖에 없더라도 다 똑 같은 양으로 분배해서 먹어야 훌륭한 사람 대승이지, 혼자 독식하면 못된 소승사람임을 말한 설법이 금강경이며, 예수가 단 한명의 식량분밖에 안 되는 오병이어를 갖고 다투지 말고 조용히 앉아서 내가 똑 같이 나누어주길 기다리라는, 꼭 ‘콩 반쪽도 나누어 먹으라’고 옛날 우리 가난의 시절 아버지에게 귀가 닳도록 듣던 훈교같은 말씀의 뜻이 이 ‘오병이어’라는 것이다.

이 도덕교과서 같은 말씀이 금강경이며 신약성경이란 말인가? 단지 이훈교의 말을 말하기 위해서 ‘앉음’이 있었고, ‘앉음’을 명령했달지라도, 이것이 진리의 진실을 증명한 것임을 진술하지 않는 도올은 이것이 진리의 진실임은 믿어 말하지만, 이것이 연기의 실상으로써 진리의 진실인 까닭을 진술하지 않으니, 이는 이 까닭을 모른 것이다. 제발 여기서 알아 깨달으면 좋으련만.

예수가 실제 오천명의 허기를 오병이어로 어떻게 배부르게 했는지, 그냥 눈꼽만큼씩 똑 같이 나눴는지를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은, 그런 일은 하느님의 영역이니 사람의 일이 아니므로 믿음으로만 해결될 일이라고 치부하는 건, 기독의 성화 행위가 아니다. 아니, 기란다면 그건 그의 일이니, 그 일은 제쳐두고 그가 기라고 살펴 안 이 앎이 진리의 진실임을 아는 그의 이 깨달음을 다만 기도할 뿐이다.

“앉음”의 이 성화의 행위로써 진리의 진실을 표상한 진리의 진실이듯 ‘5餠2魚로 5천의 무리를 먹였다’는 말은 진리의 진실을 표상한 진리의 진실이다. 이 말의 형상인 언어문자는 수많은 형상의 말소리들이 연기한 실상이며, 이 형상의 문자 역시 수많은 점·선들로 이루어진 중중무진의 중도며, 이 말의 뜻 역시 기다.

떡과 물고기는 떡과 물고기로 허기를 채우는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은 이 떡과 물고기로 허기를 채우는 삶으로써의 연기의 실상임을 상징한 뜻이다. 오병이어는, 이 연기의 실상인 인간성품은 마땅히 이 떡과 물고기로 주린 육체의 배를 채우는 삶일 뿐만 아니라 오병의 오온으로 드러나는 관념적 허상으로써의 상대적 인식인 二魚작동으로 靈體의 주림을 채우는 삶이라는 뜻을 표상한 말이다.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靈肉이 안팎으로 온통 다 이 오병이어로써의 삶인 연기의 실상임을 표상한 말로 이를 깨닫는 진리인식의 격발을 기도한 말이 ‘5餠2魚로 5천의 무리를 먹였다’는 말의 뜻이다. 오천은 왜냐고? 이 이어작동에 의한 오병·오온이 헤아릴 수 없는 겹겹의 千으로 쌓이는 중중무진의 중도로써의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이 연기의 실상으로써 진리의 진실임을 뜻한 오천인 것이다.

‘5餠2魚로 5천의 무리를 먹였다’는 말은 말의 형상인 언어문자로든 말의 뜻으로든 온통 안팎으로 전부 다 완전 진리의 진실이다.

도올이 제물로 올려진 이 말이 갖고있는 ‘성화의 비의’를 말하지 않고 떠들고 다투지 말고 조용히 앉아서 적더라도 서로 나누어 먹는 따스한 공동체로써의 도덕적 삶을 가르치기 위한 ‘앉음’이라고만 말하는 건, 설령 이를 위한 ‘앉음’이란 대도 이것이 진리의 진실임을 말해야 ‘성화의 행위’인 것이지 그냥 이렇게 사람 삶의 한 형식이라고만 말하는 건, 진리인식의 깨달음과는 아득한 것이다.

또 ‘바로 “앉음”의 “一心”이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가 5천명에게 공유될 수 있는 大乘의 비결이었다.’고 말하여 마치 예수가 오병이어를 이만오천병만어로 뻥튀기하는 기적을 발휘했다고, 아닌가? 다 같이 한 맘으로 앉아만 있으면 배고픈 게 해결되는 精神一到何事不成을 말하는 것인가? 허면 저 대승은 뭐지? ‘5천명에게 공유될 수 있는 大乘’이라니, 오천명이 다 같이 굶어 죽자는 一心으로 뭉치자는 거야 뭐야? 오천은 분명 대승이다. 오병도, 이어도 대승이다. 그러나 오천은 육천보다 소승이며, 오병이어는 육병삼어보단 소승이다. 대·소승이란 말은 다만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써 그 진리의 진실임을 인식하는 개념일 뿐이지, 인간으로 하여금 그 말뜻으로써의 삶을 실천하라는 명령이나 멧세지가 아니다. 단 이 말뜻의 삶을 추구하는 건 오직, 그대가 선택한 의지의 삶일 뿐이다.

도올의 대·소승에 대한 오해는 이미 앞에서(금강경 오해 4) 언급했으므로 여기서 더 할 것은 없다. 다만 아무리 적은 거라도 다 같이 나누는 것이 대승이라고 말하는 이 사유의 말이 바로 대·소승적 연기의 실상임을 바르게 보시라.

또 도올이 有·無爲를 말하는 것을 바르게 보시라. ‘앉음’으로 맘을 떨쳐 일으키는 건 무위요, ‘일어섬’으로 맘을 가라앉히는 건 유위라고 말하는, 이 얼척없는 사유의 말을 하는 이 연기의 실상으로써 진리의 진실을 바르게 보시라.

‘앉음’은, ‘앉음’이라는 말은 이것으로써의 실재의 실체랄 것이 없는 연기의 실상으로써 진리의 진실이다.

도올은 자기의 말에 대한 이 말이 ‘상황적 융통성’을 발휘한 방편의 말임을 모른 것이라고 지청구하지 마시라. 제아무리 깨끔한 언어문자로 ‘상황적 융통성’이 풍부한 말을 한 대도, 이것이 진리의 진실을 사유하여 말한 것이 아니라 다만 진리의 진실로만 사유하여 말한 것이라면, 이는 종교를, 금강의 지혜를 알아 말한 것이 아니다.

도올은 “통석”이라는 제하에 이런 말도 한다.

‘심령(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p141)

“마음이 가나하다,” “심령이 가난하다,” “정신이 가난하다”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 나는 이 숙제를 풀 수가 없었다. ·····. 나는 소꿉장난할 시절부터 품어왔던 이 의문을 ····· 금강경을 강의하면서 비로소 풀게 되었다.(p142)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결여”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가난하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서 줄 것이 없다는 것”이다. 뿌루샤(purusa, 정신.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즉 인간존재의 결여인 것이다. 프뉴마(바람, 목숨, 영혼, 유령, 마음의 상태 등)의 가난은 직설적으로 프뉴마의 결여를 말한다. 그것은 곧 “我相의 결여”를 말하는 것이다. 내어 줄래도 내어 줄 마음이 없는 것이다. 보일래야 보일 마음이 없는 상태, 이것이야말로 “無我”인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無我의 상태에 도달한 사람이여 복이 있도다 함이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내세울 나”가 없다는 것이다. 곤궁하고 가난하고 찌들리어 핍박을 받지마는, 그러기에 마음이 비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

진정으로 복을 받을 수 있는 자는 마음이 가나한 자요. 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이 없는 자인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애통해 할 수 있고, 그들이야말로 온유할 수 있고, ·····, 그리고 그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할 수 있는 것이다.’

복음서의 저 말을 이렇게 안 이 말은 진리의 진실이다. 그러나 저 복음서의 가난이 이런 뜻인지는 여기서 밝힐 것까지는 없지만, 無我를 이렇게 알아 말하는 금강의 지혜가 아님은 밝혀야 한다.

푸뉴마나 뿌루샤 따위의 말들이 뭔 뜻인지는 난 모르겠다. 또 그걸 아는 건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다. 금강의 지혜는 그런 뜻을 몰라도 금강의 지혜를 캐는 연금술만 알면, 이 푸뉴마나 뿌루샤 따위, 모든 언어문자가 진리의 진실, 금강의 지혜인 건 단박에 알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 형상의 문자는 수많은 점·선들이 연기한 실상이며, 동시에 하얀 종이와 연기한, 그리고 이것뿐인가? 점선은 점선대로, 종이는 종이대로 제각각의 인연은 저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를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인연의 인과작동으로써 연기의 실상인 진리의 진실이다. 이 하나의 문자형상에서 진리의 진실을 한 눈에 보라는 손가락질이 이 금강경이며, 구태여 불교가 있는 까닭이다.

푸뉴마나 뿌루샤, 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이며 無我 따위의 말이 어떤 의미의 뜻으로 풀어진대도 이 뜻으로서의 진리의 진실임을 바르게 보아야 하는 것이지, 이 뜻으로써의 삶을 추구하는 건 구태여 불교가, 이 금강경이 있는 까닭이 아니다. 설령 저런 뜻의 無我의 복 받은 사람이 되었단달지라도 이것이 진리의 진실임을 바르게 알아야 하는 것이지, ‘아무것도 내줄 것이 없는’ 복 받은 사람이 되는 목표를 달성하는 게 구태여 불교가, 이 금강경이 있는 까닭이 아닌 것이다. 분명 無我는 我랄 것이 없는 가난임엔 틀림없다. 그러나 이 말은 내가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명령의 말이 아니다.

이 無我는 보리살타를 표상한 말이다.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로써의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은 총체적 인연·인과작동의 보리살타이므로 이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我로 실재하는 실체랄 것이 없는, 다만 이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으로 드러난 선정지혜로써의 無常인 我를 표상한 말이 無我인 것이다. 이 진리의 진실인 我를 말한 것이지, ‘곤궁하고 가난해도 마음이 비어져’ 이런 것을 알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허망한 사람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대체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할 수 있’는 어떤 실재의 실체인 것인가? 맘은 이미 청결하고 화평한 것이다. 맘은 이 ‘청결하고 화평’하다는 이 생각이며 이 말의 ‘때와 불화’로 작동하는 이것이므로 이미 청결이며 화평이다.

도올이 이 금강경을 얼마나 오해하고 있는지는, 이미 다 밝혀졌다. 사실 다른 종교들도 마땅히 이러리라 짐작은 하지만, 구태여 불교며 선이 선 까닭은 아주 간단한 것이다.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로써의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은 총체적 인연·인과로 작동하는 연기의 실상으로써 독립적 개체며 동시에 통합적 전체세계로써의 대·소승적 작동인 진리의 진실임을 아는 이 깨달음의 기도이다.

나는,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은 뭔 까닭인지 분명하게 드러난 것인가?

도올이 이를 바르게 사유하여 바르게 말하지 않는 한, 그는 금강경을 사유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금강경으로 생각하고 금강경으로 말하는 금강경일 뿐이다.

도올은 끝내 금강경을 말하지 않고 금강경으로 말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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