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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금강경 오해 29

도올은 이렇게 말한다.

如理實見分 第五

제5분 진리대로 참 모습을 보라

[강해] “如理”는 “理와 같이” “理대로”라는 뜻이다. 그런데 불교에서, 그리고 물론 이것은 한역불교에서 더 뚜렷이 발견된 개념이지만 “理”라고 하는 것은 “事”와 대비되어 나타난다. 事는 인연의 사실들이다. 理는 그 인연의 사실들을 일으키고 있는 연기 그 자체를 말하는 것으로 그것은 서양철학의 본체론과는 다르지만 본체론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理는 眞如의 세계며 그것은 生滅의 세계가 아닌 生滅을 일으키고 있는 그 자체의 세계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의 언어는 오로지 生滅의 세계에 한정되는 것이며 眞如의 세계에서는 언어가 격절된다. 본 분에서 말하는 “相”은 바로 언어와 관련되는 것이다. “如理”는 곧 언어를 격절시킨다는 뜻이다.

“實見”에서의 “實”은 역시 부사적 용법으로 “여실히”의 뜻이다. 그러니까 “여실하게 본다”의 뜻이다. 그런데 나는 “그 참 모습을 보라!”라고 번역하였다. 언어가 격절된 그 자리에서 그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뜻이다.

- 금강경 다섯 번째 分의 제목인 如理實見에 대한 해석이며, 이 分의 總意를 말하고 있다. 도올은 이 제목을 “진리대로 그 참 모습을 보라!”고 해석하며 ‘如理’는 ‘언어를 격절시킨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分은 언어가 격절, 끊어진 그 참 모습을 보이니 보라는 分이며, 언어가 끊어진 그 참 모습을 언어·말한다는 分이란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분명 이 의미일 텐데, 이 말이 좀 이상하지 않나? 언어·말이 끊어진 세계랄 게 있다면, 이 언어·말이 끊어진 어떤 그냥 모습은 언어·말로 언어·말할 수 없고, 그 어떤 참 모습은 언어·말로 언어·말할 수 있다는 것인가? 진리대로 ‘참 모습’을 보란다니 하는 말이다. 큰일이다. 이렇게 眞如의 세계를 보인다는데, 눈 벌겋게 뜨고도 이를 못 본다면, 진짜 쪽팔리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안심하시라. 이런 줘도 못 먹는 작은 쪽팔림은 그래도 소승의 보리살타인 진리의 진실이지만, 여기 도올처럼 진여의 세계가 뭔 격절시킬 것이 있단다고, ‘언어가 끊어진 세계’라고, 한때 한양의 지가를 올리는 큰 구라를 치는 대승의 보리살타 짓을 하는 것보다는 아주 작은 진리의 진실이니. 헐!

如理實見이라는 말은 이런 해괴한 의심을 내게 하는 말아 아니다. 언뜻 들으면 “진리대로 그 참 모습을 보라!”니 죽고 사는 생멸의 이 개떡 같은 세계가 아니라, 이런 생멸이 끊어져 없는 眞如의 진짜세계를 보이는가 보다, 이것만 보면 곧바로 천당인가 보다라고 생각하고 혹하여 눈에 불을 켜고 이 여리실견분을, 아니 이 금강경 전체 내용을, 아니 온 천지를 샅샅이 뒤져보지만, 천만에! 없다. ‘진리대로 참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본 사람있음 내놔 보시라. 해운대 바닷모래 수에 해운대 바닷모래 수를 곱한 수로 나눈 힉스만큼 작은 물질의 소립자를 찾는단 대도, 이 우주의 분자 수에 이 우주의 분자 수를 곱한 수 배만큼의 큰 우주물질을 찾는단 대도, ‘진리대로 참 모습’, 곧 진리의 진실은 눈에 띄지 않는다. 왜냐면 진리는 이 진리에 의한 진실로써 이 진실의 相에 감춰져 육안으론 비쳐지지 않기 때문이다.

진리는 이 두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 맘으로 인식해 알아보는 것이다. 그게 그 말이란다면 할 말은 없다. 다만 구태여 불교가, 이 금강경이 있는 까닭은 오직 진리인식이라는 이 한 생각의 맘이 격발하길 기도하는 이 부처며 금강의 몸으로써, 이 부처며, 이 금강의 몸이 곧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임을 아는 이 깨달음의 진리인식이므로 이를 말하지 않는 말이란다면, 이는 구태여 불교가, 이 금강경이 있는 까닭과는 아득한 진리의 진실일 뿐이다. 굳이 언어란다면 이 언어가 진리의 진실로써 ‘如理實’, 곧 眞如의 세계임을, 如理實見이라는 이 말이 이 如理實·진리의 진실로 드러난 말임을 말해야지 다른 말을 한다면 진리인식이라는 한 생각이 격발하기엔 아득한 말이다. 에구, 이 말이 더 아득하다.

‘如’는 말뜻대로 ‘같다, 대로’라는 뜻이다. 그래서 ‘如理’가 ‘理대로’란다면, 대체 이 ‘理’가 뭔가? ‘“理”라고 하는 것은 “事”와 대비되어 나타난다. 事는 인연의 사실들이다. 理는 그 인연의 사실들을 일으키고 있는 연기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라는 도올의 이 말은 ‘理’가 理임을 언어라는 인연의 지혜 작동인 理에 의해 드러낸 事로써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인 것이다. 즉 理를 언어로 드러낸 事이므로 理·事와 언어는 끊어진 것이 아니라 언어는 理로써의 연기·진리선상의 실상이며 진실인 事이다.

도올은 理와 事의 개념을 분명하게 해석해 내고 있다. 그러나 이 개념은 실재의 실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개념으로 작동하는 연기의 실상인 것이다. 理로써의 연기, 진리, 지혜와 事로써의 실상, 진실, 선정은 이 뜻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지, 이 뜻이나 언어문자로 실재하는 실체랄 것이 없는 無我로써의 보리살타인 연기의 실상이며 如理實인 진리의 진실이다.

언어는 理며 事의 實이다. 언어는 진리·진여의 세계와 격절되거나 격절시킬 수 없는 진리·진여대로 참 모습인 事實이다. 理와 事實로 설명하여 말하지만 理와 事實로 하나인 연기의 실상으로써 진리의 진실이다. 이 언어뿐만이 아니라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 곧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가 온통 이것이니 오직 이것으로, 구태여 불교가, 이 금강경이 손가락질하는 대로 바르게 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如理實見’, ‘理대로 事實이 드러나니’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이 이 사실로 드러난 진리·진여를 바르게 알아보란 것이다. 여기 이 금강경의 이 分뿐만이 아니라 온 천지가 이 일임을 바르게 알아보란 것이다. 如는 진짜 엄밀히 말하면 보리살타, 즉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로써의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의 세계가 총체적 인연·인과의 지혜로 작동하는 중도·여래·열반의 이 보리살타를 표상한 말이다.

도올은 理는 ‘인연의 사실들을 일으키고 있는 연기 그 자체를 말하는 것’으로써 ‘理는 眞如의 세계며 그것은 生滅의 세계가 아닌 生滅을 일으키고 있는 그 자체의 세계’라고 말해 ‘그 자체세계’로써의 진여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것으로 말하지만, 진여라는 말로 표상한 진여·진리의 실제는 따로 있을 것이랄 게 없다. 지금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 이 생멸상을 바르게 보시라. ‘相’은 ‘이 相이 相對的임’이란 것이다. 생과 멸이며, 리와 사 따위,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은 온통 이 상대적 인식의 相으로써, (진)리의 상대인 (진)실이며 연기의 상대인 실상이며, 보리의 상대인 살타이며, 선정의 상대인 지혜임을 단적으로 표상한 언어문자가 相이다. 이렇게 相對的인 것으로 알고, 또 이렇게 말하지만 이 相 하나하나인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는 연기의 실상이라는 오직 이 하나의 相인 것이다.

生滅은 진리·진여의 작동태로서의 진실이다.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은 오직 이 生이며 滅로써의 지혜로 작동하는 선정으로써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인 것이다.

진리·진여의 참모습이랄 것이 설령 ‘언어가 격절된 그 자리에서 그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단 대도, 다만 이 사유의 이 말이 오직, 이 사유가 이 말로 초월한 작동의 지혜로써 연기의 실상임을, ‘언어가 격절된 그 자리에서 그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라’라는 이 말이 있는 여기에서 이 말의 형상 그대로가 연기의 실상임을, 진리의 진실임을 바르게 알아보시라. 구태여 불교가, 이 금강경이 있는 까닭은 이 사유며 이 말이 격절되어 끊어진 상대적 인식으로 일어난 如來로써 진리인식이라는 이 한 생각이니, 오직 이 한 생각을 격발하시라.

모든 언어문자는 연기의 실상으로써 연기의 실상을 표상한 연기의 실상이다. 이를 말하지 않고 도올은 ‘언어가 격절’된 그 자리에서 진리의 진여를 볼 수 있다고 하니, 그렇다면 도올의 언어가 빨리 끊어져야 그 실상을 볼 수 있을 텐데, 언제 언어문자를 격절하여 그 실상을 보일라는지 따라가 보자.

분명하게 말하지만 이 금강경을 설하는 석가여랜 자기만이 眞理의 眞實인 如理實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선남자 선여인들이 생각하는 무상정등각이라는 따위의 이 한 생각조차도 이것임을 밝혀 ‘언어가 끊어진 자리’에서나 볼 수 있는 그 실상이랄 것은 어느 자리라고 따로 있을 수 없는 無我임을 분명 말했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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