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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금강경 오해 37

도올은 이렇게 말한다.

6-7. 何以故? 若取非法相, 卽著我人衆生壽者. 是故不應取法, 不應取非法.

6-7. 어째서 그러한가? 만약 법이 아니라고 하는 상을 취해도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법을 취하지 말 것이며, 마땅히 법이 아님도 취하지 말 것이다.

[강해]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철학이 표방하는대로 우리 인간의 언어체계는 實在의 정확한 그림이 될 수가 없다. 實在世界를 긍정적으로 표현해도 다 부족한데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논리의 구사는 논리 그 자체의 법칙을 따를 수밖에 없지만, 그 논리의 법칙은 실재세계의 모습과는 무관한 또 다른 께임일 뿐이다. 이 양자의 정합성에서 세계를 규명하려는 모든 노력은 궁극적으로 헛된 것이다. 모든 언어철학은 궁극은 허무다. 트락타투스의 마지막 말은 무엇이었든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할 지어다.”

- 석가여래는 계속해서 여래의 보리살타인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는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로 작동하는 작동태로써의 삶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 인간의 육근에 비쳐지는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이 진리의 진실이라는 이 법이라고 안대도, 또 이 법이 아니라고 안대도, 이는 우리의 육근에 비쳐지는 이런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들, 곧 이 아·인·중생·수자라는 독립적 개체의 소승이며 동시에 통합적 전체로서의 대승적 작동에 사로잡혀 사는 이 지혜작동의 보리살타로서 연기의 실상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연기의 실상인 까닭으로 法이든 非法이든, 이런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을 실재의 실체로 취하여 아는 건 여래의 보리살타에 상응한 앎의 깨달음이 아니라고,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서의 세계인 이 모든 성품의 삶이 여래로써 보리살타라고 아는 이 진리인식의 깨달음이 아니라고 석가여래는 말하는 것이다.

“왜냐면 非法이라는 相을 취하는 지혜작동이란 대도, 이 지혜작동은 四相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의 如來는 이 사상이라는 따위의 법을 취하여 상응하는 것만도 아니며, 이 사상이 비법이라고 취하여 상응하는 것만도 아니다.”

도올이 是故不應取法, 不應取非法이라는 석가여래의 말을 “그러므로 마땅히 법을 취하지 말 것이며, 마땅히 법이 아님도 취하지 말 것이다.”로 풀어, 석가여래가 수보리에게, 또는 모든 사람들에게 대·소승적 실제의 이런 삶을 살지 말라고 하여 이를 듣는 이들로 하여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하는 해괴한 명령을 내린 거라는 말은 아니겠지만, 이런 생각이나 말만이라도 취하지 말라고 하는 석가여래의 명령이라고 알아 말한 거란 대도, 이는 구태여 석가여래가 이 말을 하는 의도와는 아득한 사유의 말이다. 설령 이 한문의 말을 문법에 딱 맞게 우리말로 풀었단 대도, 이는 부처의 부처성으로써의 진리의 진실을 말한 것이 아니다. 이 말은 분명코 사람으로 하여금 까닭없는 四相 따위가 뭐라고, 그런 것을 취하여 집착한 삶을 살지 말라고 석가여래가 제자들에게 지시하는 말이 아니다. 너며 너희들이며 중생이며 수자라는 등 대·소승적으로 육근이며 오온에 비쳐지는 이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의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의 세계, 곧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는 이 사상 등, 대·소승적 不動의 관념이며, 실제 이 대·소승적 작동의 총체인 이 맘으로써의 중도·여래·열반의 보리살타인 연기의 실상임을 가르쳐 말하는 것이다. 온통 이 보리살타로써의 연기의 실상인 부처란 것이다. 법이란 대도 비법이란 대도, 옳다란 대도 그르다란 대도, 사상도, 12연기도 온통.

이 四相은 실재의 실체랄 것이 없는 것이다(이렇게 말한 대도 이 ‘없다’는 실재의 실체가 아니라 ‘있다의’ 상대로 인식되어지고 말해지는 이 작동의 지혜인 보리살타로서의 연기에 의한 실상임을 바르게 보시라). 이 四相은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들의 삶이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로써 독립적 개체의 소승이며 동시에 통합적 전체로써의 대승으로 작동하는 보리살타의 연기에 의한 실상을 구태여 또 네 개의 상대적 相으로 나누어 이를 표상해 설명한 말일 뿐이다. 저 12緣起의 12라는 숫자도 이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하나의 연기작동을 12가지의 작동태로 분류하여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이 여래임을, 보리살타임을, 열반임을, 진리의 진실임을, 연기의 실상임을 아는 이 깨달음의 금강을 설명한 말일 뿐이다.

도올은 이를 말하지 않고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사람의 말을 인용하여 사람의 말의 논리로서는 도무지 이 세계를 규명할 수 없다 하고, 그래서 인간이 세계를 규명하려는 모든 노력은 헛된 것이라고, ‘언어철학의 궁극은 허무’라고 말하는 건, 이미 석가여래가 이 금강경을 통하여 언어뿐만 아니라 이 언어를 창조한 인간을 포괄하는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모든 성품의 삶이 연기의 실상으로써 진리의 진실이라고 규명한 이 법을 까맣게 모른 헛소리다. 이는 육근에 비쳐지는, 언어를 포함하여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이 단지 상대적 인식의 허상으로 비쳐진 관념적 부동으로서의 법일 뿐임을 마치 실재의 실체로써의 법으로 아는 앎에 사로잡혀 있는 까닭이다.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는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로써 총체적 인연·인과로 작동하는 중도·여래·열반의 보리살타인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이므로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는 이를 표상한다. 그러므로 모든 언어는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를 표상한 연기의 실상으로써 진리의 진실인 뗏목이다.

마땅히 이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말 할 수 없어 침묵하여 말을 버린단 말인가? -

도올은 이렇게 말한다.

6-8. 以是義故, 如來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6-8. 이러한 뜻의 까닭으로, 여래는 항상 말하였다: ‘너희들 비구들아, 나의 설법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아는 자들은, 법조차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이 아님에 있어서랴!’”

- 석가여래는 진리의 진실인 여래로써의 보리살타를 말하는 자기의 말이 연기의 실상으로써 이 연기의 실상으로 드러난 뗏목과 같음을 알라고, 곧 나와 너희들을 소통케 하는 공존의 보살인 언어를 뗏목에 비유하여 언어 등,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이 연기의 실상임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뜻으로써의 까닭을 여래라고 항상 말하는 것이다. 너희들 비구들은 알아야 한다. 내가 말하는 여래라는 법은 뗏목으로 비유된 것임을. 이 여래의 법은 尙으로 應하는 捨이다. 항차 여래의 법이 아니라고 한단들 이 尙應捨의 법이 아니겠느냐?”

여래로써의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은 관념적 부동으로써의 恒尙이며, 이 항상은 시·공간적 작동으로 버려져 사라지며 또 다른 새로운 존재와 현상의 시·공간으로 드러나는 항상의 중중무진인 보리살타로써 연기의 실상이라는 이 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법이 아니라고 하는 이 상대적 인식일지라도 오직 이 법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코 앎이나 말 등, 뭘 내버려야 금강의 사람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 이를 이렇게 아는 이 깨달음의 금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尙應捨로써의 이 법인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가 노상 버려지기만 하는 捨로써 허무란다면 이 상대적 인식인 관념적 허상에 사로잡혀 저 허무의 밤하늘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찬란한 尙의 별에 눈감고 사시라. 이는 오직 그대의 자유의지로써의 삶이니. 그러나 이 허무의 삼천대천세계,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를 내 몸으로 삼아 우주여행을 꿈꾸는 尙(生, 삶의)應(여래, 보리살타인)捨(死, 滅)로 산단면 이 또한 행복한 보살님이다.

도올은 이 금강의 지혜를 말하지 않고 엉뚱한 오해를 낳는 보살님이다.

도올은 이 분절을 이렇게 말한다.

[강해] 여기 비교적 길었던 第六分의 총결론이 제출되고 있다. 앞서 이 책의 冒頭에서 내가 말했듯이 종교는 교설이 아니다. 부처님의 설법 그 자체가 종교가 아니요, 그 설법조차도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편에 불과한 것이다. 아무리 귀한 휴지라도 밑을 닦으면 버려야지, 그것이 귀하다고 주머니에 넣어 보관하면 쿠린내만 계속 날 것이다. ·····. 뗏목(筏)의 비유는 참으로 기발한 것이다. 강이 많은 지역에서 생활한 인도사람들에게서 생겨난 지혜의 비유인 것이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 할 때에 우리는 뗏목과 같은 수레(乘)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하자! 어렵게 뗏목을 구했고, 뗏목은 아주 훌륭한 나무로 곱게 다듬어져서 잘 만들어져 있었다. 내가 이 강을 건너기 위해 이 뗏목을 얼마나 어렵게 구했던가? 그래서 뗏목이 저쪽 언덕에 도착을 했는데도, 뗏목이 좋고 뗏목이 아름답고 뗏목이 귀하여 그냥 뗏목속에 주저앉어 있다면 도대체 어느 날에 피안의 땅을 밟을 것인가?

아무리 어렵게 예수님을 만났다 하더래도 진정한 신앙인은 예수를 버려야 한다. 아무리 전지전능한 여호와 하느님을 만났다 하더래도 우리는 여호와 하느님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만 참으로 예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요, 그래야만 참으로 여호와 하느님의 아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方便”의 사상은 결코 간단한 사상이 아니다. 인류최고의 지혜를 결집한 두 마디인 것이다: 황 삐엔!

- 참말 귀에 쏙쏙 들어오는 달작지근한 말씀이다. 그러나 도올이 말하듯 ‘종교는 교설이 아니다’라면 그럼 종교는 뭐란 말인가? 깨달음으로써의 저 언덕이란 말인가? 대체 깨달음이 뭐란 말인가? 도올은 이 책의 앞머리에서 ‘금강경이 불교의 구극적 진리라 말할 손가? 금강경은 불교를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독교든, 불교든, 이스람교든, 유교든, 도교든, 모든 敎(제도)를 통틀어 그 이전에 敎가 소기했던 바의 가장 궁극적 진리에 대한 몇가지 통찰을 설하고 있을 뿐이다. 금강경은 교리가 아니요 그것은 통찰이다.’(P32)라고 말한 바 있다.

이 금강경이 불교뿐만 아니라 여타 종교들이 소기하는 ‘궁극적 진리’에 대한 몇 가지 통찰을 설하고 있다고 크게 칭찬하는 말은 듣기에 좋다. 그러나 비록 ‘몇 가지 통찰’이란 대도 이 금강경이 ‘궁극적 진리’를 ‘설하고’ 있단다면, 이는 불교를 말한 것임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금강경은 불교를 말하지 않는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지 않은가? 설마 이 책 전체가 ‘궁극적 진리’를 깨닫는 방편인데 그 중에서 단편적인 한마디의 오류만 꼭 찝어 말하는 건, 이 책 전체로 지향하는 ‘궁극적 진리’를 보지 않고 꼬투리나 잡으려는 소인배짓이라고 한단다면, 이는 내 마지막 말을 보지 않고 오히려 나의 꼬투리나 잡으려는 성급함이다.

도올이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하는 이것이 곧 진리의 진실이다. 왜냐면 이 ‘안 맞는’ 도올의 이 사유의 이 말은 1500여 년 전의 시·공간적 통역사인 삼세가 총체적 인연·인과의 지혜로 작동하여 만들어진 이 금강경으로부터 如來한 연기의 실상으로써 진리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는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 과거 현재 미래로의 온통인 중도·여래·열반의 보리살타로써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인 부처다. 그러므로 설령 말의 앞뒤가 같대도, 다르대도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은 진리의 진실로써 진리의 진실을 표상하는 진리의 진실인 것이다.

이 금강경이 비록 ‘궁극적 진리에 대한 몇 가지 통찰’이긴 하지만 이는 부처를 가키는, 종을 가르키는, 하느님을 가르키는, 진리의 진실을 가르키는, 우리가 우리를 가르키는, 내가 나를 가르키는 敎다.

도올의 앞뒤가 안 맞는 이 말조차 금강경이며 불교다. 헐!

본분절의 석가여래가 자신의 말을 뗏목에 비유한 것은 이것이다. 강물을 건너 저 언덕에 이르는 깨달음이 구태여 불교가, 이 금강경이 있는 까닭이긴 하지만 이 까닭의 깨달음인 진리인식이 격발하면 이 뗏목이며 석가여래의 말뿐만이 아니라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모든 성품의 삶이 온통 이 뗏목으로써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인 보리살타의 여래임을 안 것이다. 이 뗏목은 강물이라는 온통의 진리·연기인 方에 드러난 진실·실상의 便이다. 방편의 뗏목, 내 삶으로써의 方인 강물에서 유유히 노니는 한마디 한마디 말들인 便의 뗏목, 나의 한마디 말, 이것이 곧 이 진리의 이 진실이다.

도올은 ‘방편사상은 결코 간단한 사상이 아니’라 ‘인류최고의 지혜를 결집한 두 마디인 것이다: 황 삐엔!’이라며 ‘설법조차도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편에 불과한 것’이라고 뭔 엄청난 것으로 말하지만 정작 그 까닭은 상세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 이는 마치 종교의 종을 ‘궁극적 진리’라고만 말하지 그 ‘궁극적 진실’의 금강인 敎를 몰라 말로 밝히지 못하고 이런저런 말들의 뜻이나 헤아리는, 구태여 불교가, 이 금강경이 있는 까닭의 앎과는 아득한 앎을 가르키는 보살님이다.

도올은 이 방편의 뗏목을 장자의 말로 가르킨다. 이는 다음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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