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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밭에서 일하는 겨울 수행

법인 스님 2017.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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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인 배추씻기-.jpg » 김장 배추 절임 작업을 하는 법인 스님(사진 왼쪽)


올겨울 해인사 선원에서 지낼 동안거 참선수행을 접었다. 겨우내 암자를 지켜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내 나름에 맞는 새로운 수행을 해보고 싶어서다. 대중처소에서 정진하는 일은 대체로 만사가 순조롭다. 정성스러운 외호 덕분에 잠자고 먹는 일에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화두에 전념하면 된다.


 나의 동안거는 이미 십여 일 전부터 시작했다. 아침 9시까지 산 너머 농장으로 출근한다. 내년 1월 중순까지 이어지는 절임배추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아침과 저녁은 좌선과 독서 시간이다. 참선과 노동의 일치라거나 노동선 같은 거창한 명분은 없다. 다만 몸 살림을 통하여 마음을 깨우고 싶고, 구체적인 현장에서 이치를 증험하고 싶고, 내면 깊은 곳에 깃들어 있는 산중귀족 근성을 말끔히 걷어내고 싶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수월한 김장을 위해 절임배추가 유행이다. 먼저 올 9월에 손수 심은 수천 평의 밭에서 토실토실 자란 배추를 트럭에 실었다. 이 일이 가장 힘들다. 주문에 따라 어떤 날은 무려 1800포기를 뽑는다. 허리가 아프고 근육이 욱신거린다. 이른 새벽에 농장의 바깥양반은 바닷물을 길어 온다. 청정한 물에 절반으로 가른 배추를 열두 시간 담근다. 이어 걸러낸 배추에 소금을 알맞게 절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지하수에 두 번 정도 깨끗이 씻어낸다. 그리고 포장과 택배 발송. 이 과정에서 허리와 어깨가 온전할 리는 없다. 20㎏ 한 상자는 대략 칠팔 포기의 배추가 담긴다. 운송비 포함 3만5천원이다.


법인스님-.jpg » 전남 해남 배추밭에서 김장 배추를 나르는 법인 스님(맨오른쪽)


 상자에 담긴 절임배추를 보노라니 대견스럽기 그지없다. 엊그제 작은 모종을 옮겨 심었는데 이제는 웃음이 넘치는 가정에서, 혹은 외롭게 사시는 분들의 식탁에서 맛있는 김치로 결실을 맺게 되다니. 김치는 예부터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사랑받은 음식이기에 정이 더 간다.


 절임배추 작업을 하면서 어쭙잖게 거듭거듭 실감하고 공감하는 이치는 두 가지이다. 먼저 어느 한 존재는 무수한 다른 존재들의 도움과 은혜로 성장하고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배추를 뽑고 절이고 씻는 손길에서 알 수 있다. 작년은 태풍이 와서 배추농사를 망쳤다. 올해는 바람님, 비님, 햇볕님이 잘 도와주었다. 바닷물과 소금이 건강하니 배추가 간이 잘 맞는다. 또 이 배추를 맛있게 먹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즐겁고 정성스럽게 손질하니 그야말로 배추 한 포기에 자연과 사람이 협동하고 상생하는 삶이 깃들어 있다.


 또 하나의 이치는, 모든 존재는 결코 ‘한 묶음’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 사백 포기가 담긴 ‘한 트럭’이라거나, 칠팔 포기가 담긴 ‘한 상자’가 아니라는 사실. 저마다 한 포기, 한 포기의 고유의 존재라는 사실, 그러므로 한 포기는 그 자체로 존엄하며 존중받아야 하지 않는가. ‘우리들’은 한 묶음으로 묶여질 수 없는 존재다. 올겨울에 나는 배추 한 포기에서 ‘개인 있는 전체’의 화엄세상을 화두로 삼아 전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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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인 스님
16세인 중학교 3학년 때 광주 향림사에서 천운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으며, 대흥사 수련원장을 맡아 '새벽숲길'이라는 주말 수련회를 시작하면서 오늘날 템플스테이의 기반을 마련했다. 실상사 화엄학림 학장과 <불교신문> 주필, 조계종 교육부장을 지냈으며, 전남 땅끝 해남 일지암 암주로 있다.
이메일 : abcd369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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