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서로 마음을 열어 고민과 아픔을 나누고 치유하며 행복을 모아내는 게시판입니다.

도올의 금강경 오해 38

도올은 석가여래의 말이 方便임을 이렇게 말한다.

(6-8분절의 [강해] 후미) 인도문명과 중국문명이 파미르고원이라는 지형상의 조건 때문에 격절되고 차단되어 완벽하게 교섭이 없던 시절, 붓다가 살아있던 그 시절 그 즈음에, 중국에는 老子니 莊子니 하는 성인이 살고 있었다. “莊子” ‘외물편’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통발은 물고기를 잡기 위한 것이다.

물고기를 잡으면 통발은 버려야 한다.

올가미는 토끼를 잡기 위한 것이다.

토끼를 잡으면 올가미는 버려야 한다.

우리 인간의 말이라는 것은

뜻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그 뜻을 잡으면 말은 버려야 한다.

말을 버릴 줄 아는 사람,

나는 언제 그런 사람과 더불어 말해 볼 수 있을 것인가?

筌者所以在魚/ 得魚而忘筌/ 蹄者所以在兎/ 得兎而忘蹄/ 言者所以在意/ 得意而忘言/ 吾安得夫忘言之人, 而與之言哉!

莊子의 제일 마지막 말은 매우 아이러니칼하다: “말을 버릴 줄 아는 사람과 더불어 ‘말을 한다’.” 여기에 바로 방편의 본질이 있는 것이다.

붓다는 장자가 죽은 약 4·5세기 후에 장자를 만나러 중국에 왔다. 이 두 위대한 영혼은 그리운 만남의 회포를 풀었다. 이것이 바로 인류문명사의 가장 위대한 轉機의 출발이었다. 이것이 실크로드의 출발이요, 이것이 격의불교의 시작이요, 이 지구상에 존재했던 가장 대규모의 문명교류의 시발이었다.

같은 시간, 전혀 다른 공간에서 이 두 거인들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중국인의 프라이드요, 한 사람은 인도인의 프라이드다. 주앙쯔는 승가를 만들지 않았지만 그는 결코 싣달타에 뒤지는 인물이 아니었다. 사실 중국인의 불교이해는 모두 이 老莊사상의 틀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중국불교가 그 궁극에 있어 “禪”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도, 결국은 불교이해의 老莊的 한계를 노출시킨 사건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인의 지혜의 프라이드로써는 라오쯔·주앙쯔가 있다. 인도인의 지혜의 프라이드로써는 싣달타가 있다. 과연 우리 조선인의 지혜 프라이드는 어디에 있을까? 이제 오는 21세기에는 우리도 주앙쯔·싣달타·예수를 뛰어넘는 우리 지혜의 후손들을 많이 많이 길러내자! 함께 힘내자!

- 도올은 과거 인도의 싣달타와 중국의 노·장자가 세운 ‘지혜의 프라이드(자랑스런 사상의 생각인가?)’가 아직 조선인에게 없음을 부러워하며 미래를 기약하는 비장한 각오의 희망을 말하고 있다. 이런 다소 민족적 열패감에 사로잡힌 말을 하는 건, 단언컨대 도올이 분명 이 장자의 ‘외물’편의 말이 가르키는 뜻을 장자의 생각으로 바르게 알아보지 못한 ‘所以’다.

도올이 해석한 이 장자 ‘외물편’의 해석글이 장자가 세운 뜻으로 바르게 해석한 말글일까? 만약 장자가 석가여래가 깨달은 깨달음과 꼭 같은 뜻의 깨달음을 깨달았단다면, 이 해석은 석가여래가 자신의 말을 뗏목에 비유한 말을 두고 도올이 앞에서 오해의 이해를 말한 것과 꼭 같은 오해의 해석이기 십상이다.

앞에서 도올은 석가여래가 자신의 깨달음인 ‘궁극적 진리’를 진술한 이 금강경뿐만 아니라 그의 경전들이 단지 자신의 깨달음인 ‘궁극적 진리’를 진술한 ‘몇 가지 통찰’에 지나지 않는 말들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장자가 석가여래와 같은 이 ‘궁극적 진리’를 깨달은 이라면 분명 장자의 이 ‘외물편’도 ‘궁극적 진리’애 대한 통찰 중 하나이지 싶다.

‘궁극적 진리’는 도올이 노상 말하는 석가여래의 관심인 ‘소박한 인간의 윤리’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궁극적 진리’가 인간의 윤리로써의 궁극을 말한 거라고 한다면 이 또한 진리의 진실인 말이라 진리의 진실이라고 말할밖에 없지만, 이 ‘궁극적 진리’는 사람성품의 삶으로서의 윤리뿐만이 아니라 이 모든 성품들의 삶인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 곧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의 과거 현재 미래로써의 총체적 작동인 이 삶의 모든 이치를 한 꿰미에 꿴 윤리, 이 진짜이치로써의 ‘궁극적 진리’를 말하는 것이란다면, 이 장자의 ‘외물편’의 말들은 ‘궁극적 진리’를 통찰한 뗏목으로써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이다. 그러나 도올의 이 ‘외물편’ 해석은 物이 단지 人間의 外物로서 인간의 목적물이며 그 목적물을 취득할 수 있는 도구로만 말해, 이런 ‘인간의 소박한 윤리’로써의 삶만을 말하는 것이어서 ‘궁극적 진리’로써의 통찰인 뗏목이며 방편을 말한 말은 아니지 싶다.

통발이나 올가미나 말 등이 있는 까닭의 ‘소이’를 인간이 이루었다면 마땅히 이를 버릴 줄 알아야한다며, 이를 버릴 줄 아는 사람하고나 말하고 싶다는 뜻을 장자가 말한 거라고 이해하여 해석한다면 이는 장자가 이 말을 한 뜻과는 아득한 생각의 이해로 해석한 연기의 실상이다.

석가여래의 깨달음을 노·장자의 깨달음을 담은 말의 뜻으로 굳이 격의한 것이란다면, 이는 사실 격의한 것이라고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왜냐면 모든 언어문자는 진리의 진실을 표상한 진리의 진실이므로 석가여래의 깨달음을 함의한 말도, 노·장자의 깨달음을 표현한 말도, 또 어느 누구의 어떤 형식의 말인 언어문자랄 지라도 모든 말의 언어문자는 이 ‘소이’로써의 인연·인과 작동이므로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모든 언어문자는 각각의 언어며 문자로써의 독립적 개체로 실재하는 실체랄 것이 없는 ‘所以’작동 중으로써의 中道이다. 하나의 언어문자는, 하나의 단어는, 하나의 문장은, 하나의 이야기는 이들 각각의 독립적 개체로써의 소승적 작동인 ‘소이’ 성품이며 동시에 이들은 총체적 전체로써의 대승적 작동인 ‘소이’ 성품의 삶으로 작동하는 中道로써 연기의 실상인 진리의 진실인 것이다. 그러므로 도올이 말하듯 중국인들의 불교이해는 딱히 노·장사상의 틀속의 ‘소이’로써만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만은 없는, 중국인 전체의 의식체계를 당시 불경 번역인들은 불교로 이해한 것이다.

이제는 중국불교를 구태여 중국의 어떤 특정사상으로 세운 ‘격의불교’라고 부르지 말자. 중국불교는 어떤 특별한 뜻의 格으로 석가여래의 깨달음이라는 뜻을 格, ‘바로잡아 세운’ 것이 아니다. 格意, 구태여 ‘뜻을 바로잡아 세웠다’는, 또 혹 ‘생각을 바르게 했다’는 이 ‘격의’란다면, 이는 단지 당시 지나치게 사변적 관념의 內的으로만 기울어진 불교를 형상의 外的인 것도 온통 불교라는 가르침의 뜻인 생각이라고, 이 석가여래의 깨달음이라는 한 생각을 ‘바르게 세운 격의’란 말이지 싶다. 구태여 노·장의 인식체계만으로 불교를 격의한 것은 아니란 것이다.

도올이 ‘중국인의 불교이해는 모두 이 老莊사상의 틀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결국은 불교이해의 老莊的 한계를 노출시킨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은 언뜻 들으면, 그렇다면 老莊的 사상은 불교를 완전하게 이해하는 데 있어 ‘한계’가 있어 중국인들은 불교를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로 들리기 십상이다.

이는 도올의 말꼬투리를 잡아 비판만 하려는 나쁜 생각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말이다. 도올의 말을 들은 이대로가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우리 대한민국의 불교는 대체 뭐란 말인가? 한계가 있는 중국어의 불교를 보고, 이 불교를 이해하여 알고 있는 이 뜻의 우리의 불교는 그럼 뭐란 말인가?

이런 이해의 불교는 불교를 몰라도 한참 모른 이해의 말이다. 중국어로 번역된 불교가 설령 노·장적 인식체계를 표상한 언어문자를 많이 썼단 대도, 이는 이 언어문자의 내용인 뜻이며 그 형상이 온통 안팎으로 보리살타로써 연기의 실상임을 석가여래가 깨달은 대로 바르게 보라는 기도의 말로 쓴 것이지, 노·장적 사상의 뜻으로 실재하는 실체로써의 불교로 잘못 알아보라고 쓴 건 아닌 것이다. 우리의 불교는 이 한문의 뜻으로만 안 ‘소이’의 불교니 구태여 불교가 선 까닭의 ‘소이’와는 아득한 불교가 되고만 것이다.

도올은 앞에서 석가여래의 깨달음이 석가여래의 독창적 깨달음이 아니라 석가여래 이전의 과거 사람들의 역사적 결과물로서의 깨달음이라고 말한 바 있다. 맞다. 석가여래의 깨달음은 역사적이다. 그러나 나는 석가여래의 깨달음은 단순한 석가여래 과거만의 역사에 의한 깨달음이 아니라 석가여래, 그의 모든 과거 현재 미래라는 이 삼세로써의 중중무진인 이 역사가 총체적으로 작동한 결과의 깨달음이라고 말했다. 석가여래의 깨달음인 이 진리인식의 한 생각이 이것임을 바르게 보는 것에서 이 생각으로서의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이라는 이 모든 성품들의 삶도 이것임을 아는 한 생각의 깨달음을 기도한 이가 석가여래라고 말한 바 있다. 노·장자의 사상이 이 깨달음의 사유가 아니란다면 석가여래의 깨달음과는 같지 않은 뜻의 깨달음이다.

석가여랜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모든 성품의 삶은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로써 총체적 인연·인과로 작동하는 중도·여래·열반의 보리살타인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임을 깨달은 것이 분명하지만 노·장자도 이를 이렇게 깨달은 건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모든 언어문자가 진리의 진실이므로 이 장자의 ‘외물편’이 진리의 진실임을 바르게 살펴보자.

장자의 ‘외물편’이 석가여래가 자신의 말을 뗏목에 비유한 것과 같은 뜻의 말, 즉 방편으로써의 ‘궁극적 진리’를 통찰한 이야기의 말이란다면, 그래서 석가여래가 깨달은 뜻을 노·장자의 사상을 뜻으로 세워 격의한 ‘석가여래가 깨달은 뜻’이라고 한다면, 도올이 이해한 장자의 이 ‘외물편’의 해석이 문법적으로 맞는 건지는 몰라도, 이는 노·장자의 사상으로 이해한 것이거나 석가여래의 깨달음과는 완전 아득한 연기의 실상이다.

중국인들은 이 세계로써의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인 이 모든 성품의 삶을 ‘物’로 보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대표 사상가인 장자의 이 ‘외물편’이 ‘궁극적 진리’로써의 통찰이란다면, 장자는 분명 이 ‘物’이라는 말이 가진 개념으로 유·무형적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모든 성품들의 삶을 표상한 것이다.

장자는 말하는 것이다.

통발이라는 것이 있는 까닭의 所以는 물고기가 있기 때문이다. 물고기는 통발을 모른다./ 올무라는 것이 있는 까닭의 所以는 토끼가 있기 때문이다. 토끼는 올무를 모른다./ 말이라는 것이 있는 까닭의 所以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뜻은 말을 모른다./ 나는 사람의 所以이므로 편안하다. 말을 모르는 뜻처럼 나는 나를 모르는 사람이므로, 사람인 이 나들과 더불어 이 所以로 말하는 것이다.

장자의 이 말은 모든 존재와 현상이라는 이 ‘일의 所인 까닭의 以’를 말해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가 이 ‘所以’로써의 작동인 지혜의 中道로써 연기의 실상임을 말한 말이다. 마치 물고기와 통발처럼, 토끼와 올가미처럼, 뜻과 말처럼,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은 총체적 ‘소이’의 인연·인과로 작동하는 지혜의 중도로써 연기의 실상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자는 자기는 물론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모든 성품의 삶이 이 ‘所以, 일의 까닭으로 작동하는’ 中의 道, 곧 中道로써 연기의 실상임을 알았으므로, 자기의 삶은 물론 이 모든 성품의 삶에 대한 의심이 풀려 편안하므로 자유롭게 함부로 더불어 이 말을 할 수 있어 말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방편의 뗏목을 단순히 통발이나 올무, 말이나 나(吾)로만 알아보는 건 석가여래가 자신의 말을 뗏목에 비유한 뜻을 모른 이해다. 이 오해를 풀기위해 우선 이 ‘외물편’의 ‘外物’이라고 제목을 뽑아 몇 가지의 ‘物’의 ‘所以’를 말한 장자의 속내를 더듬어 보자.

‘外物’이란 말의 뜻을 ‘마음에 접촉되는 객관적 세계의 모든 대상’이라거나 ‘바깥 세계의 사물’이라는 사전적 의미로만 본대도, 이는 이미 주관적 내부의 所以로써의 ‘상대적 대상의 사물’이라는 의미다. 이 ‘外物’이라는 말의 제목은 이미 內며 無物이라는 말의 所以로써의 작동인 지혜의 中道로써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이므로, 이 ‘外物’이란 말로 장자는 ‘궁극적 진리’의 통찰을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物者所以在外 得外而忘物.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모든 성품의 삶이라는 이 物이 있는 까닭의 所以는 이 物의 바깥인 內의 無物이 있기 때문이다. 이 內며 無物은 外며 物을 모른다. 內·外며 物·無物 등, 이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의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은 이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의 지혜로 작동하는 所以로서 연기의 실상이므로 이를 통찰할 수 있는 연기의 실상이다.

석가여래의 깨달음의 말을 기록한 경전들은 온통 이 ‘궁극적 진리’로써의 통찰이라고 말한 도올의 말은 맞다. 그러나 이 통찰의 말 한마디에서 인간만의 윤리를 볼 뿐,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가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이 세계의 所以로 작동하는 지혜의 중도·여래·열반의 보리살타로써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임을 바르게 알아보라는 이 기도의 금강경이 곧 석가여래의 깨달음으로 바르게 알아보지 못하는 所以는 대체 뭔가? 말의 뜻에 사로잡혀 이 말의 뜻이 이 말의 뜻으로 가르키는 이 중도·여래·열반의 보리살타인 所以의 지혜작동으로서의 연기며 진리를 도올이 바르게 알아보지 못한 所以다. 내가 이 所以로써의 작동인 지혜로써 연기의 실상임을 바르게 보는 것에서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이 이것임을 깨닫는 진리인식이라는 이 한 생각의 격발이 저 깊고 깊은 중중무진의 시·공간으로부터 如來한 한 생각임을 바르게 알아보시라.

방편이며 뗏목이란 말이 곧 연기의 실상임을 바르게 보시라.

便者所以在方 得方而忘便/ 筏者所以在江 得江以忘筏.

모든 말의 형상인 언어문자며 그 무형의 뜻은 온통 안팎으로 이 所以로써의 지혜로 작동하는 연기의 실상이다. 이런 모든 말의 언어문자는 물론 이런 모든 말의 언어문자의 所以인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모든 성품의 삶은 이 所以로써의 총체적 작동인 지혜의 중도·여래·열반의 보리살타로써 연기의 실상이다. 그러므로 도올처럼 비록 이 장자의 ‘외물편’이나 석가여래의 금강경을 오해한 말조차 저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로부터 여래한 중도의 열반인 보리살타로써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이다. 다만 이를 바르게 사유한 所以의 말이 아니라 석가여래와 장자의 생각과는 아득한 사유로서의 所以인 말일 뿐이다.

장자가 뭔 물고기를 잡으면 통발을 잊으랜다고 ‘옳다, 통발은 필요조건일 뿐 절대조건은 아니니, 이런 필요조건으로 사는 건 사람윤리가 아니므로 이런 삶을 살면 안 된다.’는 해괴한 뜻쯤으로 알아 본단다면 이는 구태여 장자가 이 ‘외물편’으로 말한 所以의 까닭을 전혀 모른 연기의 실상이다. 석가여래가 자신의 말을 뗏목에 비유했단다고 이 말로 뭔 뜻의 깨달음을 얻어 저 언덕에 이르기만 한다면, 이 말은 방편이니 이런 말을 버릴 줄 아는 사람살림을 해야 한다고 해괴한 사유의 말을 하는 이 방편의 말이 곧 사유의 所以로 작동하는 지혜의 보리살타인 연기의 실상임을 바르게 보시라.

도올의 이 ‘금강경 강해’라는 책이 있는 까닭의 所以는 석가여래의 깨달음이 있기 때문이다. 석가여래의 깨달음은 도올의 이 ‘금강경 강해’라는 책을 모른다. 혹 석가여래가 모른다고만 알아보는 건 인간중심적 사유에 사로잡혀 구태여 석가여래가 깨달았다는 깨달음을 바르게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장자가 구태여 物 을 앞에 말하고 사람으로서의 나를 뒤에 말하는 이 세심한 배려의 통찰을 바르게 보시라. 더구나 도올의 이 ‘금강경 강해’란 책을 누군가 보고 책속의 말의 뜻을 얻었단다면 이 책의 내용인 말을 잊어버려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게 대체 사람살림으로 될 일의 所以인가? 공자님이 ‘아침에 도를 얻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란다고 했다고, 햐! 도가 좋기는 엄청 좋은 건가 보다며 생명의 도를 얻기도 전에 죽음의 도를 생각할 것인가? 이 말씀은 도를 알면 사람의 삶은 생사 따위, 이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의 所以로 작동하는 지혜의 中庸인 도로써 연기의 실상임을 바르게 보아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이 진리의 진실인 中庸이므로 죽음조차 기쁨의 中庸보살이라는 이런 의미의 뜻을 말한 말씀이다.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모든 성품의 삶은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로써 총체적 인연·인과의 所以로 작동하는 지혜의 방편이며 뗏목으로써의 중도·여래·열반의 보리살타인 연기의 실상이다. 제발 우리 사람성품의 이 사유의 말이 뗏목의 방편이란다고 함부로 내팽개치지 말고 이를 중도의 보리살타인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이라고 바르게 살피시라. 구태여 불교가, 이 금강경이 선 까닭인 이 바른 믿음의 한 생각은 오직 이 바른 믿음의 한 생각을 희망해야만 하는 所以로 얻을 수 있을 뿐임이니.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수
공지 게시판 글쓰기에 관한 안내입니다 [3] admin 2011-07-08 547353
2396 일반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newimagefile yahori 2017-12-13 49
2395 일반 도올의 금강경 오해 39 seolbongchang 2017-12-09 191
2394 일반 가라 옛날이여 오라 새날이여 imagefile jjang84 2017-12-07 194
2393 일반 함께가 소중하지요 imagefile yahori 2017-12-07 194
2392 좋은 글 행복한 사진 진보와 보수는 2원론적 사고-34 joochang 2017-12-07 216
» 일반 도올의 금강경 오해 38 seolbongchang 2017-12-04 284
2390 좋은 글 행복한 사진 신념과 이념의 함정-33 [2] joochang 2017-12-02 434
2389 일반 눈 오시고 비 오는 동안... imagefile yahori 2017-11-29 424
2388 일반 도올의 금강경 오해 37 seolbongchang 2017-11-25 386
2387 좋은 글 행복한 사진 교만과 자기도취는 우리가 역행하게-32 joochang 2017-11-23 667
2386 일반 철모르는 어린이처럼 단순해지기 imagefile jjang84 2017-11-21 464
2385 일반 도올의 금강경 오해 36 seolbongchang 2017-11-17 564
2384 일반 떠나고, 헤어지면, 잊히기도 십상... imagefile yahori 2017-11-16 621
2383 일반 세첸코리아에서 인도 성지순례단을 모집합니다~ lovelee71 2017-11-15 628
2382 좋은 글 행복한 사진 종교는 인간의 불안을 조종 이용하며-31 joochang 2017-11-12 434
2381 일반 도올의 금강경 오해 35 seolbongchang 2017-11-11 401
2380 일반 오늘도 저렇게 떠나가고... imagefile yahori 2017-11-08 681
2379 일반 나뭇잎 러브레터 imagefile jjang84 2017-11-06 805
2378 일반 도올의 금강경 오해 34 seolbongchang 2017-11-05 653
2377 일반 나무가 미련 없이 잎을 버리듯 imagefile jjang84 2017-11-01 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