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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수업의 교사

손까리따스 수녀 2018. 0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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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jpg


지방에 가면 낯설은 것이 여러 가지이지만 그 중의 하나가 대중 교통이다. 대도시처럼 수시로 버스가 오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약속 시간에 맞추거나, 목적지를 가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그래도 가끔 실수를 한다. 그 동네 사람들이나 기사님이 알려주는 지명과 인터넷에 나와 있는 공식 지명이 다를 데가 있어 목적지에 내리지 못하고 방송에만 귀 기울이다가 종점까지 간적이 있다. 날은 어두워진 산골의 버스 종점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기사님이 ‘버스 잠깐 쉬고 다시 출발합니다’라고 하신다. 순간 종점이 시점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끝이라고 생각하는 종점이 모든 것을 시작할 수 있는 시점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준 스승이 있었다. 


   난 강의를 다니면서 늘 이야기한다. 내게 호스피스를 가르쳐 준 스승은 앞서 돌아가신 많은 환자들이었고 유일한 교재도 그분들이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호스피스 현장에 오래 있었다고 해서 내가 말기 암이 걸려본 것은 아니다. 게다가 죽어본 것은 더욱 아니다. 그러기에 말기 암환자로서 우리와 함께 머물다가 하늘 나라로 옮겨 가신 그 분들은 진정 나의 스승이고 교재이다. 


   유난히 덥고 모기가 극성이던 어느 여름 날 밤, 아니 새벽 세시쯤 중년의 아저씨가 병실에서 복도로 걸어 나오셨다. 간암 말기이신 그 아저씨는 얼굴도 황달이 심했고 복수 때문에 배도 볼록 나와 있었다. 오랜 투병으로 치아도 몇 개 빠졌지만 늘 씨익 웃는 모습이 매력적이신 분이었다. 간호사실 앞에 있는 노트에 뭔가를 오래 쓰시더니 또 그냥 병실로 들어가셨다. 노트 한 장 분량을 가득 채운 내용은 내게 인생수업이라는 또 한 과목의 귀한 공부를 시켜 주었다. 


   ‘모든 이들의 종착역 종점, 우리 자신이 생각해 본 종점, 과연 모든 것이 끝인가. ‘아니다.’라고 나 자신은 이야기하고 싶다. 종점은 출발선의 시작이라고, 우리의 인생은 끝이 있으면 시작이 있다. 모든 이들이여, 종점에 다 왔다고 조급하거나 초조해 지지 말자. 여유를 갖고 또 시작을 음미해보자. 모든 이들은 죽음을 맞이함으로 인생의 종점에 다가온 줄 안다. 그러나 두려워마라. 종점은 축복이다. 앞으로 전개될 미지의 세계에 대한 시작이며 축복의 문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종점에 다다르자. 지난 일에 만족은 못할망정 한 점의 부끄러움이라도 주님께 내려놓고 용서를 빌듯이 우리의 인생을 새로 시작해보자. 즐거운 마음으로, 피는 꽃도 예쁘지만 지는 꽃 또한 피는 꽃 못지않게 예쁘다.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깃들길 바라며....‘


  하늘 나라에 먼저 올라가 계신 수 많은 스승님들을 생각하면 입가에 미소가 슬며시 번진다. 그리고 우리들과 귀한 삶의 마지막 시간들을 인생수업으로 남겨주셔서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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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까리따스 수녀 가톨릭 마리아의 작은자매회
손까리따스 수녀 1990년 가톨릭 마리아의작은자매회 입회해 1999년 종신서원했다. 갈바리호스피스, 춘천성심병원, 모현호스피스 등을 거쳐 메리포터호스피스영성연구소에서 사별가족을 돌보면서 사별가족돌봄자들을 양성한다. 또 각 암센터 및 호스피스기관 종사자, 소진 돌봄 및 예방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호스피스 교육을 하고 있다.
이메일 : egoeim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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