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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금강경 오해 73

도올은 이렇게 말한다.

18-6. “須菩提! 於意云何? 恒河中所有沙, 佛說是沙不?” “如是, 世尊! 如來說是沙.”

18-6. “수보리야! 네 뜻이 어떠하뇨? 저 갠지스강에 있는 저 모래를 부처가 말한 적이 있느냐? 없느냐?” “그로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그 모래를 말하신 적이 있사옵니다.”

[강해] ·····. 이 分 전체의 주제는 육안을 넘어서는 심안의 문제라는 일관성을 잃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과거에 언급되었던 상투적인 개념의 틀을 새롭게 사용하는 자세가 변주의 색다른 다양성을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 이 분절은 석가여래가 갠지스강의 모래를 말한 적이 있었나 없었나를 수보리에게 묻는 말이 아니다. 이 항하의 모래가 보리살타의 부처로써 여래임을 말하는 것이다. 肉眼-天眼-慧眼-法眼-佛眼으로 비쳐진 항하의 모래와 같은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의 뜻인 법으로 이 보리살타의 부처인 여래법을 설명할 수 있냐고 묻고 대답하는 것이다.

18-6. “수보리야, 뜻으로 말하면 어떤 것이냐? 항하로 흐르는 작동중으로 있는 모래는 부처인데, 이 부처를 恒河中所有沙로 설명할 수 있느냐, 없느냐?” “보리살타의 이 恒河中所有沙의 모래이므로, 세존. 여래를 이 恒河中所有沙의 모래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항하중’이라는 ‘항상 물이 흐르는 작동중’이라는 뜻으로 석가여래가 깨달은 뜻을 담은 보리살타란 말을 뜻한 것이다. ‘所有沙’는 당근 부처로써 ‘항하중소유사’란 말은 보리살타의 부처인 여래라는 뜻이다.

도올이 말하듯 ‘이 分 전체의 주제는 육안을 넘어서는 심안의 문제라는 일관성을 잃지 않고 있다.’라고 생각하여 육안과 심안을 다른 것으로 보는 건, 이 금강경의 금강을 아직 바르게 보지 못한 것이다. 이 금강경 전체는, 아니 모든 경전은 이 금강경의 금강인 보리살타의 부처인 여래, 곧 진리의 진실이라는 법을 일관되게 설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법을 수많은 인식인 肉眼-天眼-慧眼-法眼-佛眼의 眼이며, 이 인식의 객체인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을 비유한 갠지스강의 모래 등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즉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모든 성품의 삶이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로써 총체적 인연·인과의 작동성으로 작동하는 중도·여래·열반의 보리살타인 연기의 실상임을, 진리의 진실임을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의 뜻으로 거듭거듭 설명하는 것이다. ---

도올은 이렇게 말한다.

18-7. “須菩提! 於意云何? 如一恒河中所有沙, 有如是等恒河, 是諸恒河所有沙數佛世界, 如是寧爲多不?” “甚多. 世尊!”

18-7. “수보리야! 네 뜻이 어떠하뇨? 하나의 갠지스강에 있는 모든 모래, 그 만큼의 갠지스강이 있고, 이 갠지스강들에 가득찬 모래수만큼의 부처님세계가 있다면, 이는 많다고 하겠느냐 많지 않다고 하겠느냐?” “너무도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강해] 여기 佛世界는 佛眼으로 보이는 세계일 것이다. 여기 갠지스강의 모래에 대한 과장된 형용을 많은 사람들이 문학적 상상력에 의한 과장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나 도올은 생각한다: 그것은 과학적 사실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世界란 현대물리학이 말하는 물리적 우주가 아니다. 물리적 우주는 물론 그 무한대의 시공연속체를 전체로 하면 하나밖에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세계는 “삶의 세계”(umwelt)인 것이다. 존재가 인식하는 세계요, 나의 감관이 구성한 세계요, 나의 행업이 지어 놓은 세계다. 나에게 있어서 세계는 실제적으로 이러한 삶의 세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말하는 우주도 알고 보면 이러한 “삶의 세계”의 총화에 불과한 것이다. 한 집안에서도 부인의 세계가 다르고 아들의 세계가 다르고 딸의 세계가 다르고 나의 세계가 다르다. 부인의 세계가 인식하는 부엌과 나의 세계가 인식하는 부엌은 완전히 다른 공간이다. 그리고 그 속에 들어와 있는 바퀴벌레가 인식하는 또 다른 세계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그 우리를 구성하는 그 무한한 “나”의 數는 실로 한강의 모래수만큼의 한강들에 가득찬 모래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이다. 바로 이 세계들의 중첩구조를 불교에서 “연기”라 말하는 것이다.

--- 석가여랜 보리살타의 부처인 여래법이라는 오직 이 하나의 법으로 항하강의 모래 수만큼의 항하에 있는 모래 수로도 비교할 수 없는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 곧 과거 현재 미래로써의 세계가 오직 이 하나의 여래법으로 작동하는 작동성으로써의 보리살타임을 설명하는 것이다.

18-7. “수보리야, 뜻으로 말하면 어떤 것이냐? 하나의 如인 보리살타는 항하중에 있는 모래와 같은 이 보리살타의 항하로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모든 항하로 있는 모래수의 부처세계이니, 이와 같은 부처세계는 많다고 할 수 있느냐, 없느냐?” “엄청 많습니다. 세존.”

도올이 [강해]에서 ‘연기’에 대한 설명을 간단히 했다. 매우 좋은 설명이긴 하지만 이는 ‘연기에 의한 실상’을 말한 말이지 ‘연기’가 법으로써 법작동성임을 설명한 말로는 2프로 부족이다. 우선 전체적 문맥에서 보다는 이 전체 문맥의 전체 문맥성으로 작동하는 단일 문맥을 살펴보자.

[강해]의 첫마디 ‘여기 佛世界는 佛眼으로 보이는 세계일 것이다’라는 가정의 말은 이후의 말도 역시 가정이라 믿을 만한 말이 아니라서 이를 두고 뭔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만, 도올의 부처에 대한 인식이 애초에 어긋났으므로 이를 말하지 않을 수는 없다.

‘佛世界는 佛眼으로 보이는 세계’라는 말은 이미 불세계와 불안이라는 눈이 실재의 실체로 따로 어디 있는 것으로 규정한 생각의 말이다. 이는 이 세계가 세계성으로 작동하는 중인 여래세계로써 보리살타의 부처세계·불세계며, 이 불세계를 불세계로 알아본 눈으로써의 인식이라는 뜻의 佛眼임을 모르고 한 말이다. ‘佛世界는 佛眼으로 보이는 세계’가 아니다. 즉 뭔 부처의 눈이랄 게 있어야만 볼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불세계는 보리살타의 부처세계인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이 세계가, 저 항하강의 작동성으로 흐르는 작동중의 모래와 같은 실제 작동성으로 작동중인 보리살타의 이 연기며, 이 보리살타의 관념적 정지·부동태로써의 실상인 모래로써의 부처가 불세계이다. 즉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은 여래로써 보리살타의 부처인 연기의 실상인 것이다. ‘여기’ 본분절의 불세계는 이를 말하는 것이다. 불안은 다만 이 불세계를 불세계라고 알아본 상대적 인식으로써의 불안인 것이다. 불세계는 불안으로써의 인식이며, 불안으로써의 인식대상이 불세계인 것이다.

불교의 금강경인 금강은 가정이나 추측이 아니라 분명한 생각으로 선 금강 같은 법이다. 설령 가정이나 추측이란 대도, 이것이 오직 연기의 실상이라는 금강법임을 밝힌 것이다.

도올이 불교를 문학적 상상력으로써의 사실이라기 보다는 과학적·물리학적 사실이기를 더 바라는 것 같다. 구태여 불교의 이 금강경이 선 까닭은 분명 “삶의 세계”이다. 이 ‘삶의 세계’가 문학적 상상력은 ‘삶의 세계’로써 사실이 아니고, 과학적·물리학적 사실만이 이 ‘삶의 세계’인 것처럼 생각해 말하는 건,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이 삶의 작동성으로 작동하는 보리살타로써의 부처로써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이라는 이 금강의 여래법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생각의 말이다.

‘연기’란 말은 ‘恒河中’으로써의 보리살타를 격의한 말이다. 이를 단순히 ‘세계들의 중첩구조’라고만 말하는 건, 항하의 모래들이 쌓인 ‘所有沙’의 형상만 말한 것으로, 이 ‘항하중소유사’란 말의 뜻으로 보리살타의 부처인 여래로써의 연기의 실상이란 말에 담긴 석가여래가 개달은 뜻을 바르게 이해하여 진술한 말이랄 수 없다. 이 ‘세계들의 중첩구조’가 이 ‘세계들의 중첩구조’로 작동하는 작동성이라는, 이 ‘세계들의 중첩구조’의 속을 바르게 생각해 말해야 한다.

이 분절은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서의 세계인 이 모든 성품의 삶이 오직 이 하나의 보리살타인 如一로써 一體同關인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임을 설명하는 것이다.

도올의 이 [강해]는 연기인식을 매우 넓고 깊게 할 수 있는 설명이긴 하지만 삶의 공간적 연기인식일 뿐, 삶의 시간성으로써의 연기인식은 매우 희미해, 구태여 불교의 금강경의 금강인 이 보리살타의 부처인 여래로써의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을 바르게 아는 연기·진리인식의 깨달음엔 아득한 생각의 말이다. 그러나 이 생각의 말을 하는 도올은 물론 이 말이 이미 진리의 진실이니, 여기서 진리의 진실을 바르게 알아보는 진리인식의 깨달음이 바르게 격발한다면, 구태여 불교의 이 금강경이 선 까닭은 지척인 것이다. ---

도올은 이렇게 말한다.

18-8. 佛告須菩提: “爾所國土中所有衆生若干種心, 如來悉知. 何以故? 如來說諸心, 皆爲非心, 是名爲心.

18-8.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그 많은 부처님 나라에 살고 있는 중생들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는 다 아느니, 어째서 그러한가? 여래가 설한 갖가지 마음이 모두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로소 마음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강해] “중생들의 갖가지 마음”이라는 표현에 내가 윗절에서 말한 “삶의 세계”의 의미가 잘 드러나고 있다. “갖가지”라는 우리말 속에는 “온갖 종류”라는 “種”의 뜻이 포함되어 있어 “若干種”의 번역어로 썼다.

여기서 말하는 “心”이란 원어로 “citta-dhara”인데 이것은 실로 “의식의 흐름”(flow of consciousness)을 뜻한다. 과거의 경험에 기초한 의식 및 무의식이 현재·미래로 흘러가면서 우리의 의식작용이나 행동을 규정하고 있다는 의미의 맥락에서 사용되는 것이다. 眞諦는 “心相續住”(마음이 서로 끊임없이 흘러가면서 어떤 아이덴티티를 유지한다)라고 아주 좋은 번역을 내었고, 玄奘은 “心流注”(의식의 흐름)라 번역했으니, ·····.

불교는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心의 流注로 본다. 거대한 마음이 흘러가고 있는 세계가 곧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세계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물리학적 우주도 알고 보면, 물리학자들의 마음이 흘러가고 있는 우주인 것이다. 우리는 너무도 과도하게 그 하나의 세계에 객관성을 부여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불교라는 것은 이 세계를 인식하는 우리의 마음의 상태를 전환 시키려는 거대한 사회운동인 것이다. ·····.

--- 도올이 앞 분절에선 과도한 공간적 연기인식만을 말해 찜찜하게 하더니, 이 분절에선 또 맘, ‘의식의 흐름’이라는 시간성에만 사로잡힌 연기인식을 말하고 있다.

불교는 분명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心의 流注’로 알아보는 건 맞다. 그러나 이 ‘心’은 사람의 맘으로써 이 맘이 아니라 보리살타라는 범어에 담긴 석가여래가 생각하여 깨달은 뜻을 격의한 말이다.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모든 성품의 삶, 곧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로써의 과거 현재 미래가 사람의 생각으로 이러저러한 것임을 표상한 말이 아니다. 이 ‘심’은 사람이 이 맘에 의하여 삶을 유지하듯,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모든 성품의 삶, 곧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로써의 과거 현재 미래는 온통 작동성으로 작동하는 삶으로써의 ‘심’인 이 보리살타임을 말하는 것이다.

진제나 현장이 말한 “心相續住” “心流注”란 말은 이 뜻의 말이다.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은 상대적 인식의 맘으로써 서로를 존재하게 하는 총체적 인연·인과의 작동성으로 작동하는 연기의 보리살타인 실상의 부처, 곧 연기의 실상이며 보리살타의 부처라는 이 여래로서의 법을 표상한 말이다. 즉 ‘물리학적 우주도 알고 보면, 물리학자들의 마음이 흘러가고 있는 우주인 것’으로써 물리학자 맘대로의 우주가 아니라, 물리학적 우주는 물리학적 우주성으로 작동하는 연기의 보리살타인 맘이며, 물리학자는 물리학자성으로 작동하는 연기의 보리살타인 맘으로써, 물리학적 우주도, 물리학자도, 이 상대적 인식작동성으로 작동하는 연기의 실상으로써 보리살타의 부처인 것이다.

불교는 분명 우리 인간의 인식인 생각을 전환하는 ‘거대한 사회운동’임엔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이런 이 모든 존재와 현상에 대하여 ‘과도하게 객관성을 부여’하고 있는 이 생각을 전환 시키는 게 아니라,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가 온통 주·객관의 상대적 인식으로써 총체적 작동성으로 작동하는 중도·여래·열반의 보리살타인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인 부처라는 이 一體인식의 생각인 同關으로 전환하게 하는 ‘거대한 사회운동’으로서의 기도인 것이다.

이 분절은 이를 설명하는 것이다.

18-8. 석가여래부처님이 말했다. “수보리, 너는 엄청 많은 국토의 작동성으로 작동중에 있는 중생중에서도 몇 안 되는 맘의 보리살타로 선 부처의 여래이지만, 이 수많은 국토중의 중생을 다 아는 것이다. 어째서 알 수 있냐면, 여래의 도는 모든 보리살타의 맘으로 모든 게 된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이지, 이 보리살타의 맘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래라는 이름의 이것은 보리살타의 맘이 만든 것이다.

이 분절의 해석이 까다롭다. 에구, 한문은 다 까다로워. 우짰든지 이 분절은 앞 분절의 항하를 국토로 바꾸어 여래의 부처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항하 속의 모래만큼이나 많은 항하, 그 항하 속의 모래만큼이나 많은 항하로써의 국토가 작동성으로 작동하는 작동태로써 이 보리살타의 부처인 여래세계는 甚多, 엄청 많은 種子 작동성으로 작동중인 보리살타의 부처인 대·소승적 여래이므로, 이 엄청 많은 불국토세계로서의 중생성품 중의 사람성품은 다 이 여래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는 총체적 인연·인과의 대·소승적 種작동성으로 작동하는 보리살타의 부처인 여래가 거듭 겹겹이 쌓이는 연기의 실상이므로, 여래인 사람성품의 너는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을 다 안다는 것이다. 왜냐면 보리살타의 부처를 표상한 여래는 諸心皆爲, 곧 너의 모든 맘의 보리살타가 모든 함으로서의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이 된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을 말하는 것이므로, 여래는 이 육근에 비치지 않는 ‘제심’의 맘이 아니고, 이 ‘제심’의 맘이 만든 ‘皆爲’인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의 이름이기 때문에 사람인 너는 이 이름의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을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이라고 다 안다는 것이다.

실력도 없으면서 한문문자들을 일일이 눈치 보자니 헷갈린다. 간단히 말하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국토의 인연·인과 작동성으로 작동하는 사람성품의 너는 당근 여래이므로, 이 국토의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의 중생들을 여래라고 다 안다는 것이다. 어째서 다 안다냐면, 여래의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은 우리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의 맘이 아니라, 이 사람 맘에 의하여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의 이름으로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 사람은 이 이름의 여래를 다 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은 이 세계로부터 온 여래로써 이 여래의 세계를 이름하여 이 세계를 다 안다는 것이다. 대·소승적 작동성으로 작동하는 사람과 세계는 一切唯心造인 諸心皆爲란 것이다.

이 분절의 若干種心이란 말과 諸心皆爲라는 말은 보리살타의 부처인 여래라는 진리의 진실을 각각 다른 뜻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제심개위’란 말은 암만해도 도교의 핵심언어인 無爲라는 말에 함의된 뜻의 도를 비판적으로 수용한 말이지 싶다. 헐!

혹 이 분절을 보고 사람만이 사람의 객체인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을 알 수 있는 것이지 사람의 객체인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은 사람을 알 수 없는 것 아니냐고 한다면, 이 이는 사람중심적 인식에 사로잡힌 人三昧人이다.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모든 성품의 삶은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로써 총체적 인연·인과의 빛으로 빛나는 隨照返照로써의 상대적 인식작동인 중도·여래·열반의 보리살타인 연기의 실상으로써 진리의 진실인 부처이다. 대박!

암만 말을 해도 생각에 미치지 못한다. 소인은 한문실력만 젬병이 아니라 한글실력도 꽝이다. 오직 이 말을 듣고 보는 작동성으로써의 자신이 곧 보리살타의 부처임을, 저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로써의 大通歷史線上으로 작동하는 작동성으로 우뚝 선 연기의 실상인 여래임을 바르게 보시라. 헐!

석가여래가 이 말을 한 까닭은 아마도 당시의 사람들이 여래(범어-따다가따라고 함)라는 말의 개념을 실재의 실체라고 믿는 이 생각에 사로잡혀 집착하는 맘을 바로 잡기 위하여 한 말이지 싶다.

이를 도올처럼 항하사처럼 많은 부처님나라에 살고 있는 중생들의 갖가지 맘은 맘이 아니기 때문에 이 갖가지 맘을 석가여래가 다 알 수 있다고, 뭔 맘이 아닌 맘이라 비로소 맘이라고 이름할 수 있다고, 해괴한 이해의 말을 하는 건, 참말 해괴한 생각의 말을 하는 해괴한 보살님이 아닐 수 없다. 석가여랜 이 세상 모든 걸 다 아는 이가 아니다. 단지 이 세상 모든 것에 보편하는 同關논리로써의 一體인 진리의 진실을 바르게 안 이다. ---

도올은 이렇게 말한다.

18-9. 所以者何? 須菩提!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18-9. 그 까닭이 무엇이뇨? 수보리야!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강해] ·····. 덕산은 배가 심히 고파 참을 수가 없었다. 때마침 노상에서 한 노파가 빈대떡을 자글자글 부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돈은 없지, 끼웃끼웃 거리고 있는데, 노파가 말을 걸었다. ·····. “여보게 청년! 난 말이지 옛날부터 금강경에 있는 이 말이 뭔 뜻인지 궁금했거든. 거 중간쯤 어디께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이란 말이 있지 않나?” 고개를 끄덕이는 덕산에게 노파는 대짜고짜 다꾸친다. “야 이 눔아! 근데 넌 지금 뭔 마음(心)을 점(點) 하겠다는 게냐?”

이 노파의 한마디는 금강경에 관한 한 더 이상없는 아뇩다라 天下의 名言이다. ·····. 과연 덕산은 뭐라 말했을까? 이놈들아! 뭘 꾸물거리는 게냐! 내 책을 보아라! ·····.

아마도 이 이야기는 픽션이 아닐 것이다. ·····. 우리나라 절깐 앞에서 빈대떡을 팔고 있는 조선의 할머니 중에, 지금도 금강경을 암송하고 있는 분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덕산 같은 큰스님에게 이와 같은 통찰력있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지혜를 가지신 분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들은 단지 침묵할 뿐인 것이다.

지혜는 지식의 단계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성의 교만이나 오만을 불식하지 않으면 우리는 금강경의 지혜로 영원히 입문할 수 없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불행하게도!

--- 이 분절은 一體同關이라는 제하의 마지막 절이다.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중중무진의 시·공간, 곧 삼세의 과거 현재 미래는 온통 총체적 인연·인과의 작동성으로 작동하는 맘의 보리살타인 부처로써의 여래로써 연기의 실상이라는 꼭 같은 이 하나의 법으로 작동하는 동관의 일체법임을 말하는 것이다.

18-9. 이 여래의 까닭이 뭐냐 하면, 수보리야,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하는 삼세는 보리살타의 맘으로 작동하는 작동성이므로 실재의 실체랄 것이 없는 不可得인 연기의 실상으로써 진리의 진실인 이 보리살타의 부처라는, 이 한 몸으로 통하는 一體同關의 여래인 것이다.

도올은 덕산이 용담을 만나게 되는 기연으로써의 어떤 식당노파와의 조우를 장황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노파가 묻는 여기의 이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을 어떻게 해석하든, 이 해석의 것으로 실재하는 실체랄 것은 없는 不可得인 것이다. 즉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실재의 실체랄 것이 없는 과거 현재 미래성으로 작동하는 작동성으로써의 인연·인과인 연기의 실상이다.

여기의, 모든 경전의 ‘심’이 그렇겠지만, 이 ‘心’은 보리살타를 격의한 말로써 과거 현재 미래가 총체적 인연·인과의 작동성으로 작동하는 이 보리살타로써의 부처인 연기의 실상임을 표상한 말이지만, 이를 사람 맘의 생각으로만 이해하여 다만 사람 생각으로써의 과거 현재 미래라 ‘얻을 수 없는’ 불가득이라고만 이해하는 건, 인간중심적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집착이기 십상이라, 이 과거 현재 미래로써의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인 시·공간이 주·객관이라는 상대적 인식의 인연·인과로 작동하는 총체적 작동성으로써의 맘·보리살타로써 연기의 실상인 진리의 진실이라고 바르게 아는 진리인식의 깨달음과는 아득한 이해의 말이다.

덕산은 이를 바르게 몰라 노파의 물음에 바르게 응답하지 못하고 노파가 가르쳐 준 용담을 찾아간다. 노파 역시 자신의 물음에 답을 말해 주지 않는다. 노파가 용담에게 가는 길을 가르쳐 주며 ‘맥직거’라고 했다고, 이게 용담에게 가는 길이 아니라 자기의 물음에 대한 답이라고 하며 이를 구구하게 설명해 대지만, 사실 바르게 보면, 이미 노파의 물음에, 아니 벌써, 노파와 덕산의 조우는 물론 그에 앞서고 앞서고 앞선 모든 일의 시·공간들이 온통 답인 것이다. 헐! 소위 선불교의 공안이란 것은 일정한 답이 없다. 꼭 같은 걸 물어도 흔히 다른 응답이기 일쑤다. 이 까닭은 분명, 석가여래가 자신의 깨달음을 이미 있던 개념의 말에 담아 이 말로, 곧 보리살타며 부처며 여래(따다가따)라는 말로 자신이 깨달은 법을 담아, 이 말로 설법했으므로, 도리어 사람들이 이 말에 담긴 석가여래의 법을 실재의 실체로 알아 마침내 석가여래의 정신이 도로아미타불로 사라졌으므로, 이를 염려해 구태여 이 말들을 기피하고 수많은 언어문자로 석가여래가 깨달은 뜻을 격의해 전법한 것이 공안임이 분명하다.

노파가 한 말이 뭔 천하의 명언일 건 없다. 도올이 말한 대로 절집 아래 수많은 식당의 주인노파들 중에 금강경 한 토막 못 암송하는 이는 드물 수도 있다. 내가 알기로 도올이 아는 조선시댄 어쩐지 모르지만, 요샌 반야심경 한 소절 외우는 이도 드물다. ‘수리수리마수리’라는 소리라면 모를까. 설령 그런 암송하는 이들이 많다고 한 대도 대체 ‘암송’이 뭔 대단할 것이 있을 것인가? 구태여 불교의 금강경의 금강이 선 까닭은 의미의 뜻을 바르게 알자는 깨달음인데, 암송이 뭔 대단할 게 있을 것인가? 더구나 안대도 허투루 알기가 십상이라 진리인식의 깨달음과는 십만팔천리인데. 이런 현실을 두고 진리인식의 깨달음을 깨달은 지혜의 노파들은 많고 많은데 ‘침묵할 뿐’이라고 말하는 도올의 심뽄 뭔 심뽄지 알 수가 없다. 우짰든지 구태여 불교의 금강경의 금강이 선 까닭은 노파가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이라고 물은 말이 천하의 명언일 건 없다. 이 말의 뜻은 아무리 설명해 봐야 설명일 뿐이지, 이 설명을 하고 듣는 이 작동성으로써의 너와 내가, 또 설명을 하게하고 듣게 하는 이 도구로써의 작동성으로 작동하는 이 말이, 또 이 말의 상대인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이 온통 이 보리살타의 부처인 여래로써 연기의 실상임을 바르게 알아볼 수 없단다면, 아무리 천하에 이름 난 말이란 대도, 구태여 불교의 금강경의 금강은 바르게 알아보지 못한 말짱 꽝인 것이다. 이를 바르게 알아보는 진리인식의 깨달음은 명언이 아니라 어떤 말도 진리의 진실이므로 모든 말에서 격발할 수 있는 것이다. 저 노파가 저 금강경의 한 소절이 아니라 덕산에게 “에구, 배가 디게 고픈가 보구만”이라고 말했단다고 금강경의 금강에 관한 한 명언이 아닐 건 없는 말이다. 수많은 공안의 말은 그래서 있는 것이다.

도올이 자기의 뭔 책을 보라고, 소인은 아직 못 봤지만, 보면 뭔 대단한 게 있을 거라고 자기의 앎을 자랑하지만, 그건 다만 자신의 앎의 말일 뿐, 저 노파의 말에 지나지 않는 말일 뿐이다. 말 속의 말의 의미가 아니라 말맘이라는 이 뜻의 의미를 알기란 쉽지 않다. 말을 하는 작자의 맘을 넘어 석가여래의 깨달음인 석가여래의 맘을 깨닫기는 어려울 것인가?

도올이 마지막으로 ‘지혜는 지식의 단계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성의 교만이나 오만을 불식하지 않으면 우리는 금강경의 지혜로 영원히 입문할 수 없는 것이다. 불행하게도!’라고 말했지만, 이 말은 불행하게도 이 금강경의 금강인 지혜의 보리살타, 곧 진리의 진실을 바르게 아는 깨달음과는 아득하여 영원한 말이다. 도올의 말대로라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성, 곧 ‘지식의 능력이나 그 활용’에 있어 교만하거나 오만한 사람은 금강경의 금강을 불행하게도 영원히 모른다는 것 아닌가. 글쎄,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태여 불교의 금강경의 금강이 선 까닭은 인간의 지성뿐만 아니라 돈 명예 권력 따위, 어떤 것을 갖고 교만과 오만을 떨며 갑질을 한단 대도, 이조차 온통 연기의 실상으로써 진리의 진실이므로, 이런 이들이라고 이를 바르게 아는 진리인식의 깨달음이 일어나지 않으란 법은 없다. 금강경은 지혜, 슬기로운 인간, 곧 ‘사리를 밝히고 잘 처리하여 가는 재능’(새한글사전, 한글학회 1977)을 가진 윤리적 사람을 만들기 위해 있는 경이 아니다. 누차 말하지만 이는 금강의 법, 곧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모든 성품의 삶으로 보편하는 법으로서 연기의 실상인 진리의 진실이라는 이 법을 설명으로 증명하여 밝힌 것이 이 금강경이며 모든 경전들이다.

이를 바르게 생각하여 바르게 말하지 않는 도올은 이 불교의 금강경의 금강법을 바르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앗참, 여기서의, 아마도 경전들 대부분이겠지만, 지혜란 말은 보리살타의 부처인 여래를 격의한 말이지 인간의 슬기로운 삶만을 지칭한 말은 아니다. 모든 존재와 현상은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 작동하는 삶으로써의 지혜인 슬기로움이다. 저 육바라밀의 지혜바라밀인 보리살타의바라밀다를 바르게 알아보시라. 온통 보리살타의 同關으로 통하는 작동으로써의 바라밀인 一體의 부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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