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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금강경 오해 76

도올은 이렇게 말한다.

非說所說分 第二十一

21-1. “須菩提! 汝勿謂如來作是念, 我當有所說法. 莫作是念. 何以故? 若人言如來有所說法, 卽爲謗佛. 不能解我所說故. 須菩提! 說法者, 無法可說. 是名說法”

21-1. “수보리야! 너는 여래가 ‘나는 마땅히 설한 법을 가지고 있노라’고, 이 같은 생각을 지었다고 말하지 말라. 이 같은 생각을 지어서는 아니된다. 어째서 그러한가?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설한 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곧 부처를 비방하는 자라. 내가 설한 바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라. 수보리야! 법을 설한다 해도, 설할 법이 아무것도 없나니, 그래서 비로소 법을 설한다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 非說所說이란 제목은 ‘설하는 자도 없고 설되어지는 자도 없다’는 해괴한 뜻의 말이 아니다. 이는 보리살타의 여래인 불법은 이 불법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불법으로 ‘말해 진 것’, 즉 말은 여래의 불법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래의 불법인 보리살타의 사람에 의해 ‘말해 진 것’이라는 뜻이다.

앞 分에서 보리살타의 여래를 ‘무엇을 유도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본분은 이 ‘유도하는 것’으로써의 보리살타의 여래를 실재하는 실체랄 것으로 짐작할까 염려하여 이것이 아님을 설명하는 것이다. 즉 보리살타의 여래인 불법이 뭘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보리살타의 여래인 불법으로 무엇이 ‘유도된 것’이라고 사람이 생각하여 말한 것이란 것이다.

이 분절은 모든 언어로써의 말이란 것은 물론 보리살타의 여래인 불법이라는 이 말조차 보리살타의 여래인 부처로써의 사람에 의한 생각으로부터 여래한 말로써, 이와 같은 모든 존재와 현상이 보리살타의 여래인 부처로써 연기의 실상임을 말하는 분절이다.

21-1. “수보리야, 너는 여래가 이런 생각으로 지어진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 나는 설해진 법에 따라 있는 것이라는 이런 생각을 짓지 말라. 왜냐면 지혜의 사람이 설해진 법으로 있는 여래라고 말하는 건, 여래의 부처가 설한 바의 까닭인 나임을 이해하지 못한, 卽爲의 謗佛(석가여래의 깨달음으로 설명된 부처가 아닌, 이미 진즉에 알려져 있던 부처라는 개념)인 것이다. 수보리야, 설명한 여래의 부처라는 법으로서의 이것은 실재의 실체로써의 법이랄 것이 없음을 설명한 것이다. 이 여래의 부처라는 이름으로 법을 설명하는 것이다.

석가여랜 분명히 我所說故(말한 것의 까닭이 나)라고 정연한 인과논리로써의 진리의 진실을 말하여 진리의 진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을 도올처럼 이해하여 해석하는 건, 이 말이 말이란 것이 사람인 나로 말미암아 드러나는 이 인과작동으로써의 연기의 실상임을 보이는, 저 言者所以在意 식의 어법임을 미쳐 모른 것이다. 이는 분명 사람과 말이 인연·인과로써의 작동성으로 작동하는 보리살타의 여래로써 연기의 실상인 진리의 진실임을 밝힌 말이다. 이 진리의 진실이라는 법은 ‘사람이 말을 하는’ 등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이 이 법으로 작동하는 작동성임을 설명하는 것이지, 사람이며 말 등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이 실재의 실체랄 이 법으로 실재의 실체랄 것으로 만들어지는 건 아닌 것이다. 이 보리살타의 여래인 불법으로 설명하는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이 실재의 실체랄 것으로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석가여래가 깨달아 말한 여래의 부처가 아니라, 그 전에 있던 개념의 여래며 부처란 것이다.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은 이 보리살타의 여래법으로써 이 여래법을 이름한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 이 여래법을 설명하는 것이란 것이다.

물론 이 말은 이 말을 듣고 보는 것에서, 이 말의 앞뒤를 넘어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서의 세계에 보편하는 이 간단한 인과논리가 진리의 진실임을 바르게 알아보는 진리인식의 깨달음을 기도하는 말임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도올은 이 분절을 석가여래 자신이 뭔 설한 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자기의 뭔 설한 바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를 비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말한다. 비록 이 법이 석가여래가 말하기 전은 물론 이후의 이 과거 현재 미래에 보편하는 법이긴 한 것이지만, 이를 생각해 말한 이는 분명 사람인 석가여래로써의 지혜이다. 그러나 이를 바르게 알지 못한 도올의 이 생각의 말 역시 마땅히 진리의 진실이다. 모든 언어문자는 진리의 진실을 표상한 진리의 진실이므로. ---

도올은 이 분절을 성경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강해] ·····. “곧 너는 나를 비방하는 자라!”(卽爲謗佛) 이제 다음의 성경 구절을 보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나니라

·····. 이 말씀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사건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예수의 죽음이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의 色身의 無化를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는 나는 너희에게 길을 보여주고, 진리를 설하며, 생명을 얻게하여 준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예수는 길을 말하지 않았다. 예수는 진리를 말하지 않았다. 예수는 생명을 말하지 않았다. 예수는 곧 길이며 진리며 생명이었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인간의 언어가 격절된 곳에 서있는 성령이다. a가 곧 b라고 하는 것은, a라는 주어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내가 곧 길이라는 것은 내가 없어지고 길만 남는다는 뜻이다. 예수가 있고 또 길이 있다면 예수는 영원히 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곧 길이라는 것은 나의 無化 즉 無我를 의미하는 것이다.

또 예수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말한 것은 예수의 죽음을 전제로 한 것이라는 맥락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예수의 죽음은 곧 금강경이 說하는 無我인 것이다. 즉 예수의 我가 죽고, 예수의 말을 듣는 나의 我가 죽을 때만, 길과 진리와 생명은 현현하는 것이다. 운운.

--- 예수의 이 말씀을 본 분절을 보고 생각해 낸 도올은 탁월한 보살님이다. 본절은 대충 ‘내가 말한 바를 깨닫지 못하고 내 말을 말하는 건 나를 비방하는 것’이란 뜻이긴 하다. 그렇다면 대체 예수가 말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는 말은 뭔 뜻인가?

구태여 불교의 금강경이 선 까닭의 금강은 이런 말의 언어문자가 곧 진리의 진실임을 곧바로 바르게 알아보는 것이다.

이 말은 예수로부터 여래한 인과작동인 연기의 실상이므로, 이 말은 하나님인 진리의 진실로부터 잉태한 이 예수로부터 탄생한 말이라는, ‘a가 곧 b’라고 하는 이 정연한 인과논리로써 진리의 진실이다. 이런 간단한 하나의 인연·인과논리가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에 보편하는 진리의 진실인 금강이라고 아는 앎의 깨달음이 석가여랜 물론 예수의 기도가 아닐까?

도올은 이 길이니 진리니 생명이니 하는 이 상대적 인식의 관념적 허상이 예수가 말하며 죽음으로 없어져 버린 無我일 때라야, 이 예수의 말을 듣는 나라는 이 我가 또 죽음으로 없어져 버린 無我일 때라야, 이것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현현이라고 한다. 이렇게 분명히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앞에서는 왜 예수가 길이니 진리니 생명이라는 말을 입도 뻥끗 안 했다고 앞뒤 없이 말을 하는 것인가? 성령이 언어가 격절된, 말을 하는 사람이 죽어야만, 어디 하늘나라 저 멀리, 말을 하는 인간이 갈 수 없는 어디에 꼭꼭 숨어 있다 나오기라도 하는 것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지금 ‘성령’이라고 말한 이 성령이란 말은 말이 격절된 것인가?

길이니 진리니 생명이니 따위의 관념적 부동태들은 이 부동태로써의 실제 작동성으로 작동하는 이 성령으로써의 보리살타인 여래의 부처, 곧 진리이며 길이며 생명으로써의 작동성으로 작동하는 것에 대한 이름으로써의 진실인 것이다.

無我란 말은 因이 緣·果로, 이 연·과가 다시 인으로 서고 사라져 없어지는 헤아릴 수 없는 시·공간적 작동성으로 작동중인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는 그러므로 실재의 실체랄 것이 없는 我임을 표상한 말이다. 누차 말하지만 이 무상·무아 등, 불교적 관용어들은 석가여래가 깨달은 뜻을 담은 말인 보리살타의 여래인 부처라는 말을 격의한 말들이다. 이 격의의 법을 바르게 알아야 이 법으로써의 작동성으로 작동하는 내가 아버지나라, 곧 진리의 진실로 거하는 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 역시 석가여래와 같이 오직 이 기도의 말씀을 하다가, 이런 것들을 실재의 실체랄 것으로 믿는 이들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아무 씨잘데기 없는 환상공망의 말을 떠드는 미친 놈이라고. 헐! ---

도올은 이렇게 말한다.

21-2. 爾時, 慧命須菩提白佛言: “頗有衆生於未來世, 聞說是法, 生信心不?” 佛言: “須菩提! 彼非衆生, 非不衆生. 何以故? 須菩提! 衆生衆生者, 如來說非衆生. 是名衆生.”

21-2. 이 때에, 혜명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했다: “세존이시여! 퍽으나 많은 중생들이 미래의 세상에서 이 법이 설하여지는 것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겠습니까? 아니 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수보리야! 그들을 중생이라 해서도 아니되고 중생이 아니라고 해서도 아니된다.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중생, 중생이라 하는 것은 곧 중생이 아님을 여래가 설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로소 중생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강해] 여기 “慧命”이라 한 것은 산스크리트어로 “ayusmat”인데, 이것은 제2분 1절에 “長老須菩提”라 했을 때의 長老에 해당하는 ·····. (이)는 “장수하고 계신”이란 형용사인데 경어적 호칭으로 쓰이고 있다. “具壽,” “大德,” “尊者,” “慧命”이 모두 같은 말의 한역 술어이다. 운운.

--- “慧命”이란 말은, 지금 내가 하는 이 말이 보리살타의 여래로써 ‘지혜의 생명’으로 작동하는 작동성임을 표시한 말이다.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은 지혜로써의 관념적 부동태로써, 이 부동태로써의 지혜는 실제 시·공간적 인연·인과의 작동성으로 작동하는 생명 작동중인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이므로 이를 표상한 말이다. “具壽,” 역시 모든 존재와 현상의 ‘구’는 ‘수’로서의 생명 작동성으로 작동중이며, “大德,”도 삼세가 온통 인연·인과의 ‘덕’작동성으로 ‘크게’ 작동중이며, 그러므로 “尊者,” ‘가장 귀하고 높은 이것’으로써의 보리살타의 여래인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이라는 이 법을 이런저런 말뜻으로 격의하여 표상한 한역 술어들인 것이다. 지금 이렇게 진술하는 이것이 곧 이 ‘혜명’인 것이다. 이는 이 ‘혜명’ 이하의 언어문장을 구태여 보지 않아도 이것이 곧 진리의 진실임을 바르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이런저런 말의 뜻을 생각하여 이렇게 저렇게 말하는 성품의 지혜·보리살타인 여래라 그침없이 생각하고 말하는 연기의 실상인 것이다.

본절은 수보리가 석가여래가 보리살타의 여래인 부처라는 말에 자기의 깨달음을 담아 말했는데 이를 듣고도 아직 잘 몰랐는지, 사실은 본절 기자의 속뜻이겠지만, 공연히 미래사람을 끌어들여 묻고 있는 것이다. 이 연기의 실상으로써 진리의 진실이라는 이 법은 이해하기가 꾀까다로운데, 이 법을 설명한다고 바르게 알아들을 수 있겠냐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석가여랜 앞에서 이미 四相의 중생이 보리살타의 여래이므로 과거 현재 미래로 실재하는 실체랄 것이 없는 연기의 실상인 하나의 ‘대덕’인데, 뭔 이를 아는 신심이 생기니 안 생기니나 점치고 있냐고, 제발 자신이 말로 증명하는 자신의 깨달은 이 뜻을 바르게 알아보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21-2. 이 때에 지혜작동으로 수보리보살이 말했다. “세존, 그렇더라도 미래세에 있는 어떤 중생이 이 여래의 불법을 설명하는 걸 듣고 信心이 생기겠습니까, 안 생기겠습니까?” 세존불이 말했다. ‘수보리야, 저 미래세의 중생은 중생이 아니고, 중생이 아닌 것도 아니다. 왜냐면 수보리야, 중생은 중생이라는 이것이 여래이기 때문에 실재의 실체랄 중생이 아니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이 여래의 관념적 부동태인 이름이 중생인 것이다.

중생으로써의 이 삼세가 온통 진리의 진실이므로, 즉 사람으로 비유하지면 이를 안 머리만 이것이 아니라 팔다리며 오장육부의 온 몸과 맘의 내가 온통 진리의 진실인 것과 같이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가 온통 이것이므로 미래의 이것이 생기냐 안 생기냐를 묻는 건, 이 진리의 진실이란 법을 바르게 알지 못한 것이란 것이다.

도올이 이 分을 해석한 뜻이 중생이 無我라서, 영원히 살 수 없고 죽어 없어지는 무아의 중생인 우리는 죽은 이후의 나인 이 무아를 생각할 수가 없으므로 당근 말할 수도 없어, 이 무아의 현현이나 실천하자는 뜻의 말이란다면, 분명 잘못 이해한 것이길 빌겠지만, 이는 불교뿐만 아니라 기독교로 격의한 이 금강의 뜻·義를 바르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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