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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금강경 오해 78

도올은 이렇게 말한다.

淨心行善分 第二十三

23-1. “復次須菩提! 是法平等無有高下, 是名阿耨多羅三貓三菩提.

제23분 깨끗한 마음으로 선행을 하시오

23-1. “이제 다음으로 수보리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있지 아니하니, 그래서 이를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 것이다.

--- 모든 언어는 진리의 진실을 표상한 진리의 진실이므로 이 진리의 진실은 어떤 언어로도 표상할 수 있어 석가여래가 깨달은 진리의 진실이라는 이 금강법의 뜻·義를 무상정등각이라는 언어의 意·개념으로 格義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 이 分이다. 그러나 바르게 따지고 보면 이 分만이 아니라 온갖 불전들은 온통 이 금강의 법을 설명하여, 이 설명으로 이를 실증하는 것이다.

이 分의 제목인 淨心行善이란 사구게부터가 이미 이를 증명하여 밝힌 말이다. 이 제목은 ‘정심’으로 진리의 진실인 ‘진실’을, 보리살타의 ‘보리’를, 여래의 ‘여’를, 연기의 실상의 ‘실상’을, 선정지혜의 ‘선정’을, 부처를 표상한 것이며, ‘행선’으로 ‘진리’를, ‘살타’를, ‘래’를, ‘연기’를, ‘지혜’를, 불성 등을 각각 표상한 것이다. 즉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의 삼천대천세계가 보리살타의 여래인 불성의 부처로써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의 부동태임을 이 ‘淨心, 모든 존재와 현상이 독립적 개체로써 깨끗하고 분명하여 맑은 맘’이라는 이 말뜻으로 표상한 것이며,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이 실제 시·공간적 인연·인과의 작동성으로 작동중인 보리살타의 여래인 불성의 부처임을 ‘行善, 착하고 정당하게 잘 작동중’이라는 이 말뜻으로 각각 표상한 것이다. 즉 석가여래의 깨달음은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이 이 淨心行善으로써의 뜻으로 작동하는 작동성으로써 보리살타의 여래라는 법임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를 대책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선을 행하시오’라고 인간의 윤리로 해석한단 대도, 이것이 진리의 진실임을,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 보편하는 진리의 진실임을 설명하지 않는다면, 이는 구태여 불교의 이 금강경이 선 까닭과는 아득한 말일 밖에 없는 연기의 실상으로써 진리의 진실인 것이다. 이 ‘정심행선’을 도올처럼 ‘깨끗한 마음으로 선행을 하시오’란다면 이는 진리의 진실을 생각하여 말한 말이랄 수가 있을 것인가?

석가여래는 이 보리살타의 여래법이란 대도, 이 법은 이 모든 존재와 현상과 같은 무상정등각으로써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 보편하는 법칙으로써의 무상정등각임을, 이 법칙으로써의 무상정등각에 대한 이름이 이 모든 존재와 현상임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 여기 등장한 법이 뭔 법이란 말인가? 석가여래가 앞 分에서 ‘조그만큼의 법도 얻은 바가 없는’ 이 법이란 것인가? 이 없는 법이 뭔 평등일 것이며, 고하랄 것이며, 아닐 수 있는 것일 것인가? 이럼에도 이런 뭣도 없고 뭣도 아닌 법을 이름하여 무상정등각(더 이상 없는 바른 깨달음. 도올의 2-3 [강해])이라고 한다고? 아니다. 무상정등각은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을 일컬은 말로써, 설령 ‘더 이상 없는 바른 깨달음’이란 대도, 이 깨달음은 보리살타의 여래인 부처로써의 무상정등각임을 설명하는 것이다.

23-1. (이 이름의 무상정등각이)거듭 뒤를 잇는 (무상정등각법인)것이다, 수보리야. 이(무상정등각법, 곧 불)법은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 보편하는)평등이므로 (상대적 인식인)高下(등의 실재의 실체랄 것으)로 있을 것이 없는 것이다. 이(무상정등각법으로 작동하는 여래)를 무상정등각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무상정등각은 일기일회로써의 부처인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곧 이 하나의 존재와 현상이 일어나기 전의 삼세인 과거 현재 미래로써의 이 一期가 총체적 인연·인과의 작동성으로 한번 작동하여 모인 一會로써의 이 일기일회가 보리살타의 여래로써 무상정등각의 부처인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인 것이다. 이 일기일회의 법을 불법이라고 하는 것이며, 여기 是法은 이 불법으로써, 앞 22分에서 거론한 少法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와 현상은 일기일회로써의 무상정등각인 소법으로써 소승적 보리살타의 여래인 독립적 개체로써의 부처이다. ----

도올은 이렇게 말한다.

23-2.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修一切善法, 則得阿耨多羅三貓三菩提.

23-2.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는 것으로써 일체의 선한 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

먁삼보리를 얻으리라.

--- 아·인·중생·수자가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이므로 이 사상으로 실재하는 실체랄 독립적 개체랄 것이 없는 대·소법적 작동성으로 작동하는 보리살타의 여래로써 연기의 실상이므로 단적으로 ‘없다’고 할 수는 있단 대도, 대체 이것들과 ‘일체의 선한 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과 뭔 상관이 있단 것인가? 누가 선한 법을 닦아 이를 얻는다는 것인가? 내가? 네가? 아니면 이 四相들이? 다들 착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라고? 아니다. 이 금강경 어느 分이나 그렇듯 이는 대·소승적 보리살타의 여래법을 설명하는 것이다.

23-2. (연기의 실상인)것이므로, 아는 아랄 것이, 인은 인이랄 것이, 중생은 중생이랄 것이, 수자는 수자랄 것이 없는, 일체(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는 (보리살타의)선법으로 꾸며지고 다스려지는 (修작동의 여래)법칙으로 얻어지는 무상정등각이다.

보리살타나 여래는 다 법이다. 보리살타는 대승·대법으로써의 법인 大善法이며, 여래는 소승·소법으로써의 법칙인 소선법이다. 그러나 이는 실재의 실체랄 것이 아니라 이 四相의 대·소와 같은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으로서의 부동태일 뿐, 실제 시·공간적 인연·인과의 대·소 작동성으로 작동하는 연기의 실상인 것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불상의 후광이라는 불꽃은 이를 표상한 것이다. 불꽃은 보리살타이다. 이 불꽃속의 불꽃이 여래이다. 이 보리살타의 여래가 부처이다. 그러나 불꽃은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으로 타오르는 작동이므로 실재의 실체랄 것이 없는 것이다. ---

도올은 이렇게 말한다.

23-3. 須菩提! 所言善法者, 如來說非善法, 是名善法.”

23-3. 수보리야! 이른바 선한 법이라고 하는 것은 선한 법이 아니라고 여래가 설하였으니 이를 이름하여 선한 법이라 한 것이다.”

--- 선한 법이라는 것도 無我라 없는 것이라고 한 대도, 이 법이 뭔 아닐 것인가? 뭐든 없으면 아닌 것인가? 이 없는 건 아닌 것이라는 이 까닭을 논리적으로 밝히기는 꾀까다롭다. 그러나 이보다도 이 한 생각이 이 말로 초월하는 까닭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만큼 까다롭지는 않다. 구태여 불교의 이 금강경이 선 까닭은 이런 인과적 논리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이 한 생각과 이 말이 일기일회의 무상정등각으로써 서로의 작동성으로 작동하는 보리살타의 여래인 이 불성의 부처임을 바르게 알아보는 이 깨달음이다.

이를 수식으로 보자. 예컨대 1+1=2란다면 누구나 아는 수식의 수리이다. 그러나 이 모든 수들의 수리는 도무지 수리적 증명이 불가능한 것이다. 여기 1이 1인 까닭의 수리를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 1은 모든 수가 수리로 작동한 一期一會의 1이다. 一期로써의 모든 수라니, 대체 1이라는 수가 현재랄 지라도, 이 1의 과거로써의 수는 어떤 수이며, 이 미래로써의 수는 어떤 수일 것인가? 현재 드러나 있는 이 1이라는 수를 증명할 수 있는 첫 수부터가 오리무중인 것이다. 이는 소위 옛날, 아니다, 오늘도 있는 소피스트들의 아주 합리적인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조금만 생각하면 바로 알 수 있는 사람의 허망한 인지능력이다. 사람은 이 허망의 인지능력을 희망의 인지능력으로 사는 삶이다. 없음의 因을 있음의 緣으로 하며, 있음의 因을 없음의 緣으로 하는 무상정등각의 삶이다. 이 인연으로써의 상대적 인식인 관념적 허상의 무상정등각이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서의 세계인 중중무진의 시·공간, 즉 삼세의 과거 현재 미래인 것이다. 이 삼세는 총체적 인연·인과의 논리적 작동성으로 작동하는 중도·여래·열반의 보리살타인 부처로서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이라는 이 법으로써, 이 법을 바르게 아는 진리인식이라는 이 깨달음의 기도로 구태여 불교의 이 금강경은 서있는 것이다.

오리무중의 모든 수는 총체적 인연·인과의 작동성으로 작동하는 연기의 실상으로써 부처이다. 헐!

여기의 說과 같은 說자는 노상 나오는 말이다. 이 불전의 說이란 언어를 일률적으로 ‘말하다, 설명하다’ 따위의 뜻으로만 보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다. 아니지 싶다. 왜냐면 모든 불전의 말이 석가여래가 한 말로부터 여래한 말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는 자기가 한 말이니 무턱대고 믿으라는 말이 아니라, 자기도 여래고, 다들 보리살타의 여래로써의 법임을 설명하는 말이므로, 이 법의 설명으로 맞는 말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23-3. 수보리야, 이른바 보리살타의 선법이라는 이것은 (법작동성으로써의)여래이므로 (실재의 실체랄)선법이 아니라 (선법으로)유인되(어 작동하)는 것이다. 이(선법으로 작동하는 여래)를 선법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마치 불꽃속의 보리살타에게서 튀어나온 여래의 부처이듯, 사람에게서 튀어나온 이 착한 법이라고 규정한 이름의 법이란 대도, 이 착한 법은 사람의 삶으로 유인되어 작동하는 여래로써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인 이 ‘정심행선’, 곧 보리살타의 여래를 이름하여 무상정등각이고 한다는 것이다. ---

도올은 이렇게 말한다.

[강해] 참으로 우리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보슬비와도 같은 잠언이다. 2절에서 “선한 법”을 이야기 하고, 또 사람들이 “선한 법”이라는 말을 실체적으로 받아들일까봐 무서워서 제3절에서 친절하게도 그 “선한 법”을 다시 해설한 것이다. 그 논리의 간곡함이 실로 정연하다 하겠다.

불교는 초윤리적이라고 말한다. 원효가 요석공주와 파계를 했다해도 윤리적인 흠이 되지 않는다. 중광스님이 걸레짓을 하고 다녀도 그것은 세간에서 비윤리적인 행위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러나 “초윤리”와 “비윤리”는 반드시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다. 초윤리는 윤리를 통해 달성되는 것이다. “비윤리”는 상식적인 악이다. 다시 말해 불교가 초윤리성을 강조하는 것은 윤리의 파괴가 아니라, 윤리의 고착성과 협애성에 대한 경고다. 초윤리적일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윤리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고도의 수련을 요구하는 것이요, 또 때 묻지 않은 우리의 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 석가여래의 깨달음은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서의 세계인 이 모든 성품의 삶, 곧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의 과거 현재 미래가 온통 인연·인과의 논리적 작동성으로 작동하는 중도·여래·열반의 보리살타로서 연기의 실상인 진리의 진실이므로, 이 모든 성품의 삶은 완전 자유며 평화며 자비며 사랑의 작동성으로 작동하는 무상정등각이라는 이 깨달음으로써의 무상정등각이다. 이 깨달음의 법, 곧 깸의 因에 달라붙어 내달리는 緣으로써의 이 因緣法을 이 무상정등각 등 수많은 이 언어문자의 상대적 인식인 실제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오직 이 금강의 법을.

그러나 도올은 이를 바르게 생각하여 말하고 있지 않다.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이 온통 진리의 진실임을 분명하게 밝혀 증명해주니 석가여래의 말씀은 정말 도올의 말마따나 ‘참으로 우리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보슬비와도 같은 잠언’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진리의 진실을 말한 말이래서가 아닌, 뭔 인간의 윤리로써의 ‘선한 법’이랄 것이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고, 사람들이 실체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 무서워서, 이를 간곡함으로 실로 정연하게 (사실 석가여래의 말은 요즘 현대어법에 비춰보면 암만해도 그 간곡함은 몰라도 정연한 논리의 문법일 수는 없지 싶다. 사유를 통한 다양한 개념의 언어가 저 때는 훨 적어 오늘날처럼 정연한 논리이지는 아니지 않았을까?) 말했다고 해서 ‘보슬비와도 같은 잠언’이란다면, 석가여래가 깨달은 뜻·義을 도올은 甚하게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도올이 구태여 일어선 불교를 얼마나 오해하고 있는 지를 여기 [강해]에서 아주 정직하게 실토하고 있다.

도올은 ‘불교는 초윤리적이라고 말한다’는 말에 동의하여 이렇게 생각하여 말한다. ‘초윤리는 윤리를 통해 달성되는 것이다. ·····. 불교가 초윤리성을 강조하는 것은 윤리의 파괴가 아니라, 윤리의 고착성과 협애성에 대한 경고다. 초윤리적일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윤리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고도의 수련을 요구하는 것이요, 또 때 묻지 않은 우리의 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불교는 분명 초윤리적인, 곧 인간의 사회적 생물학적 삶의 규율인 이 윤리를 뛰어넘은 초월로써, 이 모든 존재와 현상에 보편하는 윤리로써의 진리라는 진실을 추구하여 이를 바르게 아는 진리인식의 깨달음이므로, 이 깨달음은 분명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이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 작동하는 윤리의 삶을 초월한 초윤리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올은 이 진리의 진실이라는 초윤리적인 것을 생각하여 말하지 않는다. 단지 불교가 초윤리성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사회적 ‘윤리의 고착성과 협애성에 대한 경고’이기나 한 것이며, 고도의 윤리적 수련을 통해서 달성되는 뭔 ‘진정한 윤리’이기나 한 것이며, 이는 또 뭔 ‘때 묻지 않은 우리의 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고 맘 닦는 수련타령으로나 불교의 이 초윤리성을 말하고 있다. 맘에 뭔 때며, 때 아닌 것이 묻고 안 묻을 것이 있단다고, 이 초윤리가 때 묻지 않은 우리의 맘이 전제되어야한단 말인가. 또 불교가 뭔 이런 진정한 윤리로써의 초윤리를 위하여 고도의 윤리수련을 가르치기나 하는 것이란 말인가. 구태여 불교가 선 까닭은 이것이 아니다. 오직 진리인식이라는 이 깨달음의 기도이다.

원효와 중광을 보자. 원효가 요석공주와 쎅스를 하여 설총을 낳은 게 破戒인가? 뭔 파계인가? ‘계’는 중국인들이 이 언어문자의 개념을 ‘경계하여 지켜야 할 규칙’이라는 뜻으로 정했단 대도, 불교적 용어로 쓰인 뜻은 좀 다르다. 이런저런 수많은 이름의 ‘계’로 등장하는 이 뜻은 이런저런 수많은 이름이 갖는 뜻으로써의 작동성으로 작동하는 규칙의 법인 ‘계’로써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을 표상한 언어문자인 것이다. 이 이런저런 개념을 갖는 ‘계’로써의 법인 진리의 진실을 지키거나 안 지키는 건 인간의 절대자유의지이다. 불교의 교단중 하나인 조계종단이 이런저런 ‘계’를 지키기로 했다면, 이는 그 종도들의 의지일 뿐 불교가 가르키는 진리의 진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먼 당신이다. 인간의 윤리라는 ‘계’ 역시 이것이다. 이 ‘계’가, 분명 호도된 것이기 십상일 테지만, 기독교의 원죄와 같은 것이란다면 이 ‘계’의 인간은 이 ‘계’의 종일밖에 없는 삶이다. 이건 아니다. 인간은 보리살타의 여래로써 절대자유의지의 삶을 사는 부처이다.

이렇다면 원효가 무슨 파계를 했단 것인가? 불교종단의 규칙을 파계한 것인가? 진리의 진실인 보리살타의 여래라는 이 법의 ‘계’를 파계한 것인가? 중광 역시 어떤 의미의 걸레짓을 하는 삶을 살았든, 이는 오직 중광이 선택한 절대자유의지로써의 삶인 ‘계’이다. 이들은 분명 이 ‘계’의 윤리에서 저 윤리로 초월한 삶의 윤리를 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저들의 삶을 도올이 생각하여 말하고 또 내가 이를 받아 생각하여 말하는 이 초월의 윤리적 삶이듯이, 각각의 절대자유의지의 삶으로써 ‘계’인 것이다.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은 이런 초월적 작동의 삶으로써 총체적 인연·인과의 작동성으로 작동하며 중중무진의 시·공간으로 ‘거듭 이어져 나오’는 이 復次로써 연기의 실상인 진리의 진실이라는 ‘계’이다.

구태여 불교의 이 금강경이 선 까닭은 사람이 생물학적 사회적 법칙으로써의 ‘계’를 파하나 지키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어떤 존재와 현상에도 이끌려 때 묻지 않는 淨心으로 오직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을 파괴하며 생성작동하는 行善으로서의 진리의 진실인 이 금강의 ‘계’를 바르게 아는 진리인식의 깨달음일 뿐이다.

도올의 이 금강경에 대한 오해 역시 이 금강이다. 다만 이 금강을 석가여래가 생각하여 말한 대로 바르게 생각하여 말하지 않고 인간의 사회적 윤리로 이해하여 말하는 건, 이 금강을 바르게 오해한 금강으로서의 ‘정심행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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