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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들이 나를 살게한다

이승연 2018. 10. 31
조회수 2333 추천수 0

냄새-.jpg

 

딸아이가 한국을 무척 그리워합니다. 이 어미의 욕심은 함부르크에서 태어나 여기서 자라는 딸이 한글을 알고 한국말을 할 뿐만 아니라 한국을 그리워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욕심이 너무 과하다고 주변의 교포들은 얘기했지만 우리 가족과 친지들의 사랑, 한국의 냄새, 맛, 소리들을 내 자식이 모른다면 견딜 수 없이 외로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한 돌이 지났을 때부터 거의 빠짐없이 해마다 한국을 다녀왔지요. 어미의 욕심으로 딸은 이제 그리움이 주는 아픔도 함께 지니게 됐네요. 이미 채워진 것은 더 이상 그리움이 아니고, 그래서 우린 계속 그리워할 것을 만들어 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움은 ‘그리다’라는 말에서 온 것 같습니다. 마음에서 그리고 있으니 그리움입니다. 몸과 마음 깊이에 있지 않는 것은 생기 있게 그릴 수도 없고, 그리워할 수도 없는 것 같습니다. 몇 년 전 타계한 현대무용의 거장 피나 바우슈는 그녀의 창작의 힘이 어디서 나오느냐는 질문에 그리움이라고 답했지요.

 

 그런데 그리운 것들은 대부분 말로는 설명이 되질 않습니다. 엄마가 그리워하는 여름의 소리가 무엇인지, 가을의 색깔이 무엇인지 들어보지도 않고 보지도 않고서야 알 턱이 없겠지요. 사무치게 그리운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창호지로 들어오는 아늑한 겨울 햇빛과 온돌입니다. 따스한 색깔의 장판지가 깔린 정갈한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책을 읽는 그 편안함! 비가 많이 오는 축축한 함부르크의 겨울날 배라도 아프면 정말 내 작은 몸 하나 비빌 곳이 없어 서럽기조차 한데 뜨거운 물을 담은 고무 물주머니를 배에 대고 털목도리로 칭칭 감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파슬리-.jpg

 

 한 동네에서 20년 이상을 살다 보니 단골이 된 터키 아저씨의 야채가게 ‘당근’과는 각별한 이웃이 되었습니다. 가게 문을 닫기 전에 장을 보지 못할 듯 한 날엔 제가 아침 출근길에 장을 봐놓으면 아저씨는 제 물건을 다른 터키 가게에 건네놓고 저는 퇴근길에 거기서 찾아갑니다. 날마다 새벽 도매시장에서 떼어오는 채소와 과일들은 물론, 꽃들도 싱싱하고 향기도 진합니다. 

 

 며칠 전 파슬리를 사려고 한 단 꺼내서 버릇처럼 향을 맡았더니 전혀 파슬리의 냄새가 나질 않았습니다. 어찌 파슬리 향이 전혀 안 난다고 했더니 주인 아저씨는 양동이에 꽂혀있는 거의 스무 단이나 되는 파슬리를 한 단씩 꺼내 맡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한 단을 맡던 얼굴이 환해지며 제 코 앞으로 들이 밀었습니다. 아, 파슬리의 독특한 향! 아저씨의 얼굴이 활짝 피고, 제 마음도 고마움과 기쁨으로 활짝 열렸습니다. 말이 많지 않은 이런 소소한 정성이 사람이 더불어 사는 일상에 향기를 주며 마음을 따스하게 해줍니다. 제가 독일을 떠난다면 이 터키 아저씨 가게가 무척 그리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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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연
어머니는 압록강가에서, 아버지는 동해바닷가 흥남에서, 이승연은 한강가에서 자랐다. 서울에서 공업디자인과 도예를 전공하고 북독일 엘베강 하구의 항구도시 함부르크에서 회화를 전공한 후 30여년 간 작가로 활동하다 2011년부터 심리치유사로 일한다. 독일인과 혼인해 성년이 된 딸이 하나 있다.
이메일 : myojilee@t-online.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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