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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의 인간병균들

양태자 2020. 03. 27
조회수 5035 추천수 1

베네치아의 전염병



12-.jpg » 페스트가 창궐하던 중세 베네치아에서 페스트로 죽은 조검들을 치우는 모습을 담은 사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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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국으로부터 오는 많은 관광객들로 늘 붐비는 곳이 있다. 바로 수상도시인 이태리의 베네치아다. 몇 백 년 전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었던 적이 있었다. 이때 이 도시도 죽음과 삶이 뒤엉킨 지옥처럼 변하고 말았다. 왕성하게 무역업을 하던 교역 도시였고, 또 동양 문명과 아프리카로 향하는 관문이었기 때문에 전염병 전파속도가 본토 유럽보다 더 빨랐다. 단 한 번에 스쳐가고 사라질 전염병이 아니었다. 자그마치 1348-1630년 사이에 20번 넘게 페스트가 나돌았다. 페스트 병균은 쥐들이 주로 옮겼기에 확산방지에 더 힘이 들었다. 베네치아의 거의 모든 다리 위에는 쥐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이 쫙 깔린 적도 있었다. 쥐떼는 가게들이 즐비한 곳으로, 많은 알곡식들을 싣고 정박하고 있는 배에도 마구 나돌아 다녔다. 정기 장터는 쥐들의 축제장소가 되어버렸다; 가게의 저울, 밀가루, 곡식, 육류, 생선을 요리조리 옮겨 다니며 마구 균을 퍼뜨렸으니 손을 쓸 틈도 없었다.


먼저 유랑인들이나 거지들이 하나 둘씩 병들기 시작했다. 가난한 이들이 밀집해 있었던 서쪽에서부터 전염병이 순식간에 번져 나갔다. 상대적으로 동쪽에 살았던 부자들은 그래도 좀 안전한 편이었다. 당시의 뒷골목 집들은 더럽고 오물도 많았고, 어둡고 습기가 차 곰팡이가 피던 곳 이었다. 낡아 빠진 집들이 즐비한 베네치아의 뒷골목을 외국 관광객에게 운치 있다는 이유로 오늘날도 방치되고 있는 곳이다. 물론 더러운 오물은 더 이상 없었지만, 이곳에서 그 당시의 분위기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필자도 이 베네치아를 여러 번 여행했었는데, 뒷골목의 집들 외관이 아직 왜 그리 초라하냐고 물어 보았다. 관광객들을 위해 함부로 고칠 수 없게 법적으로 규정되어 있단다. 내부 구조만은 마음대로 고칠 수 있단다. 바깥이 초라해 보여도 들어가 보면 거의 다 현대식 구조로 변형 되어있다. 독일도 마찬가지다. 백 년 이상 된 집 내부는 마음대로 수리가 가능하지만 바깥구조는 건물 색깔 하나 - 같은 색 일지라도 옅고 짙은 색까지 - 마음대로 변경 할 수 없다. 역시 법적인 조치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전염병이 돌지 않았던 평상시에 옹기종기 모여 살았던 정감 어린 곳이었지만, 일단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자 이 지역이 취약지대 일 순위가 되어버렸다. 이런 골목집에 살았던 이들은 주로 베를 짜는 사람, 뗏목 젓는 사람, 초 만드는 사람, 염색 하는 사람, 운하 청소부, 일일 노동자, 어부, 죽은 이를 옮기는 직업을 가진 염장이, 쓰레기 치우는 청소부, 창녀 등 주로 가난한 이들이 다닥다닥 붙어살았다. 그들에게 전염병의 확산은 시간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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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사이에 유대인들은 자신들만 모여 사는 게토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 게토는 아침에 문을 열었고, 외출했던 유대인들은 밤 12시가 되면 게토로 반드시 들어가야 했다. 12시 이후에 게토 밖에 나와 있으면 벌과금을 물어야 할 정도로 심하게 통제를 받았다. 만약에 두 번 벌과금을 무는 경우에는 두 달 동안 감옥살이를 해야 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유대인들 중에 의사들은 예외였다. 베네치아 부자들이 실력 있는 유대인 의사들에게 치료 받는 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게토는 비좁았다. 불어난 유대인들이 바글바글 모여 살았다. 가난한 서쪽의 베네치안 인들보다도 4배나 더 많은 유대인들이 게토 안에 살았는데 놀랍게도 유대인들 게토에서는 단 13명만이 페스트로 죽었다. 베네치아의 같은 달동네에서 천 여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음에도 이곳만 유독 적은 희생자 수를 낸 건 하나의 기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1347년-1353년 사이에 창궐했던 페스트 때문에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죽었다. 1348, 베네치아에서 일 만 명 가량이 죽었다. 죽은 시체는 개가 못 파 뒤집을 정도로만 땅을 파고 그냥 대충 흙으로 덮었다. 죽은 전염병 환자들을 사람들이 선뜻 나서서 묻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하루하루 불안감 속에서 보냈고 감염되지 않았던 이들이 할 수 있었던 예방책은 식초로 온몸을 씻는 것이 고작이었다. 특히 수상도시 베네치아 - 바다를 통해 사방으로 배가 드나들 수 있는 지형 - 는 시문(市門)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더욱 속수무책이었다


1630년대에 베네치아에 다시 페스트가 퍼졌다. 몇 백 년이 지나서 또다시 저주스런 전염병을 겪게 되었다. 아직까지 전염병에 대한 약도 없는 때였다. 시민들은 전염병의 근원을 신의 저주로 돌렸다; 인간이 회개를 해야 된다는 것이다. 윤리적인 생활을 강조했던 것이 치료법 중 하나였다. 문란한 생활 금지는 물론 심지어 너무 남의 시선을 끄는 옷을 입는 것까지 통제했다. 신의 노여움을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에이즈라는 병이 처음 알려졌을 때도 어떤 특정종교에서 신의 징벌이라고 한 적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신앙에 매달리는 사람들도 늘어났기에 성당은 기도 하는 사람으로 넘쳐났다. 부적이나 성수에 매달리기도 했다. 물론 당시 의사들도 이런저런 방법으로 약을 만들어 팔아 보았다. 별 효과 없이 전염병은 더 크게 번져가기만 했다. 부자들은 몸에 있는 열과 습기를 밖으로 배출 시키기 위해서 의사들을 불러서 사혈을 해보았지만 신통치 않았다. 1630년의 사망자는 7월부터 9월까지 석 달 간 약 천 이 백 명으로 불어났고 사망자 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확산만 될 뿐이었다. 1630년대는 2 4백 명이 다른 섬으로 도망 갔을 정도였다.


1630년 10월 신의 저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베네치아 시는 구체적인 대책을 세웠다. 환경정비를 철저히 하기로 하고 마시는 물 공급에 신경을 썼고, 어떻게 하면 도시자체를 깨끗하게 유지 할 수 있을 것인가로 의식구조를 바꾸었다. 거지나 집 없는 이들을 먼저 정리하기 시작했고 베네치아 출신이 아닌 거지는 다 쫓아냈다(그 당시엔 시가 거지증서를 부여하기도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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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죽은 자의 옷이나 이불 등을 서로 사고 팔았다. 이런 상행위가 전염병 전파의 온상지가 된다는 것도 파악하게 되었다(당시의 가난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런 사고파는 것이 가능하다. 독일의 벼룩시장에선 아직 속옷도 판다. 특히 한국인들은 이런 일은 상상도 못 할 일!). 건강관청이 두 가지 방편을 정했다. 아직 건강한 자와 이미 죽은 자, 병에 걸린 자를 구분하였다. 두 곳으로 장소로 나누어서 사람들을 격리시켰다. 한 쪽은 건강한 이들을 위한 섬 누오보로, 죽은 시체들과 이미 병에 걸려 버린 이들은 베치오섬으로 그들의 재산과 함께 보냈다. 베치오섬은 매일 죽은 이들을 태우고 버리는 일로 정신이 없었다. 시체 태우는 연기가 그치지 않았던 이 섬에 신음소리와 구역질나는 냄새가 진동했다. 시체를 구덩이를 파고 던져 버렸다. 구덩이의 시체 가운데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자들이 꿈틀거리기도 했다. 물과 음식 조달이 어려운데다 간병인들도 턱없이 부족 했다. 그런 최악의 상황이 약 400년 전에 베네치아에서 실제로 일어났었다. 남아 있는 통계자료에 의하면 1630 11월 만 4천 명이 죽었다고 한다.


1630년 누오보로 간 약 만 명의 사람들은 배를 타고 섬으로 가서 여기저기에 임시 거처를 짓고 기거했다. 살아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그들은 황홀해 했다. 혼탁하고 냄새 나는 공기를 정화시키기 위하여 로즈마리를 태웠다. 배로 들어오는 물건들을 소금물과 식초로 소독 했다. 의사들도 뾰족한 덮개를 쓰고 치료 일을 하였다. 감염을 막기 위해 그 안에다가 공기 정화를 시켜 주는 약초를 넣었다


언제 감염되어 죽을지 모르는 불안한 사회적인 상황에서 그 당시 사람들 민심은 어떠했을까? 당시도 소위 사재기란 것이 있었을까? 예외는 없었다. 많은 생필품을 미리 구입해 집에 저장해 두었다. 완전히 문 닫고 갇혀 지내거나, 아니면 이미 옆의 섬으로 이주해 버린 부자들도 있었다. 그때 2 4천 명이 이 도시를 떠났다.  빵 기름, 고기 생필품, 초 값이 계속 뛰었다. 없는 자들의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빈곤한 상태에서 페스트감염의 두려움은 더욱 심했다.


이런 상황에서 거꾸로 물 만난 고기처럼 활약을 했던 부류들도 없지 않았다. 검정이나 빨간 옷을 입고 시체를 옮기는 직업인들이었다. 이들은 시체를 옮긴다는 이유를 미끼로 물건들을 마구 훔쳤고 약탈을 일삼았다. 특히 부유한 집에 시체를 치우러 갔을 경우. 그 죽음의 집에서 이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되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이들은 가끔 버젓이 살아 있는 자들의 물건에 트집을 잡으면서 훔치기도 했다, 그때 만약 물건 주인이 반항을 하면 그를 밀어서 죽은 시체들이 실려 있는 수레에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 버렸다. 인간이 평소엔 두 개의 눈이 정상에 속하지만, 비정상적인 상황이 되면 외눈박이가 왕이 될 수 있다. 바로 그와 같은 상황처럼 시체 치우는 이들의 횡포는 심해졌고 수입은 더욱 짭짤하게 챙겼다. 그들이 엄청난 부잣집에 들어섰을 때, 휘황찬란한 물건이 눈앞에 보였을 때 견물생심도 자연히 생겼을 것이다.



허가 없이 이상한 약을 제조해서 팔았던 이들이나 페스트를 치유해 준다고 속였던 야바위꾼들도 수입을 꽤 많이 올렸다. 그런 그들도 병에 전염되어 버려 한 순간에 모든 것이 허사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오늘 헛간에 곡식을 잔뜩 쌓아두고, 내일 죽어버리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성서 말씀이 떠오른다. 1631년부터 페스트로 죽는 사람들 숫자가 2천 명으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십 4만 명의 시민 중 4 6천명이 죽었다는 통계가 남아있다.


전염병은 서서히 사라졌지만 그 후유증은 엄청나게 컸다. 1492년 콜롬부스가 신대륙을 ‘찾은’ 이래로 베네치아는 유럽중심의 무역항구라는 위상을 점점 빼앗기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까지는 신대륙을 ‘발견했다’ 라는 표현을 정석으로 여겼지만, 이게 잘못 되었다는 것이 최근의 이론이다. 없었던 신대륙을 콜롬부스가 ‘발견’ 한 것이 결코 아니었고 인디언들이 평화로이 살고 있었던 곳인데 우연히 유럽인들이 ‘찾게’ 되었을 뿐이다. -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빼앗은’ 것이지만. 그러므로 이런 ‘발견했다’라는 표현은 서양 중심주의 사상이라는 것을 한번 밝히고 싶었다). 거기에 페스트 같은 큰 전염병이 돌고 나자 베네치아의 상업 시장은 완전히 얼어붙었고, 옛 영광도 서서히 내리막을 길을 걷게 되었다.


늘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이는 세계적인 수상도시가 이런 참담한 역사를 말없이 품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부정 할 수 없는 것은 몇 세기가 흘러 문명과 기술이 최고로 발달한 오늘날도 전염병에 대해선 아직도 불가항력으로 당하고만 있지 않은가? 당시에 페스트는 정말 어마어마한 재앙이었을 것이다. 오늘도 한때는 사스 때문에, 조류독감 때문에, 또 가축에게 나도는 전염병 확산을 잡지 못하고 온 나라가 구제역의 확산 때문에 떨고 있다. 구제역 확산 방지를 이유로 소와 돼지 3백 만 마리가 땅에 묻혀야만 했고, 천연기념물인 오계를 6대 째 키우고 있던 주인이 구제역 때문에 가축을 몰고 깊은 산속으로 피난을 갈 정도가 아닌가. 독수리도 40마리가 몰살했다. 독수리가 먹을 음식을 진작 못 구해 방치하던 사이 독 있는 음식을 스스로 먹어버렸기 때문이다. 돼지들이 묻힌 구덩이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돼지야 엄마 왔다! 고 울부짖는 여인! 소들이 묻힌 장소에 사람의 무덤에 술을 뿌리듯 술을 뿌려주며 고사를 지내던 모습! 어느 구덩이에 소가족이 함께 묻혔는데 뱃속에 꿈틀거리는 송아지까지 4대가 고스란히 묻혔다고 한다. 소를 길렀던 사람이 그 앞에서 울부짖는 모습에 겹쳐서 페스트가 덮쳤던 베네치아가 떠오른다. 


베네치아도 그 당시 죽어간 사람들을 두고 눈물의 바다가 되었으리라. 우리 곁에서 일어난 이 상황을 가축 대신 인간으로 단어를 바꾸어 생각해 본다. 1348-1630년 사이에 20번 넘게 일어났던 당시의 전염병을 유추 해 볼 수도 있겠다. 만약 오늘날에 이런 무서운 전염병이 베네치아처럼 돌아서 거리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구분이 매일같이 일어날 경우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게 될까? 전쟁, 자연재해, 전염병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커다란 행복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볼 수 있다. 지금도 전쟁이나 질병, 기아로 죽어가며 고통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더라도! 그리고 저 무시무시한 자연재해 - 지진, 해일, 화산 폭발, 홍수들을 보면 평화와 안전이 얼마나 중요한 삶의 기본바탕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이렇게 구축된 기본바탕 위에서 의식주를 갖추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이고 이 자체가 행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중세의 뒷골목 풍경>(양태자 씀, 도서 출판 이랑 펴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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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태자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비교종교학과 비교문화학으로 석사, 예나 대학교에서 비교종교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천국과 지옥』 (독일인 교수들과의 공저), 『서구 기독교의 믿음체계와 전통 반투 아프리카에 나타난 종교 관계성 연구』, 『한국 기독교에 나타난 샤머니즘적인 요소들』 등의 연구 저서가 있다. 『중세의 잔혹사 마녀사냥』(2015년, 이랑), 『중세의 뒷골목 풍경』(2011년, 이랑), 『중세의 뒷골목 사랑』(2012년), 영성 번역서 『파도가 바다다』(2013년)를 출간했으며, 전문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글을 대중매체에 쓰고 있다.
이메일 : hanispecia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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