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서로 마음을 열어 고민과 아픔을 나누고 치유하며 행복을 모아내는 게시판입니다.


김기석과 손석춘의 대화(15) 

새로운 사람의 길  


출처 : 기독교사상 http://clsk.org/gisang/

 

   


 cover_635_s.jpg김기석 목사님. 

처음 편지를 드릴 때 들머리에 ‘사랑의 길. 자본의 길’이라고 썼던 기억이 납니다. 그 편지를 쓸 때의 찌던 더위가 생생한 데 어느새 가을, 겨울에 이어 새로운 봄과 여름을 보내고 가을까지 맞았습니다. 세월은 속절없이 흐르는 데 저의 눈은 얼마나 더 밝아졌는가를 헤아려봅니다. 어두워진 것은 육체적 눈만이 아니라는 두려움이 어쩔 수 없이 들 때가 많습니다.

목사님은 지난 답장에서 전태일의 어머니 고 이소선 이야기를 들려 주셨지요. 고인의 부음 앞에서 다시 본 사진, 1970년 아들의 영정을 끌어안고 비통해하는 어머니의 그 잘 알려진 사진에서 새삼 ‘피에타’를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우아한 어머니’가 아니라, 미켈란젤로가 새롭게 다가서서 그가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붙잡고 있었으나 끝내 미완성으로 남겨진 피에타를 부각하셨지요.

어느새 오래 전입니다만 취재기자 시절에 베드로 대성당의 피에타는 찾아가보았습니다. 하지만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중력을 이기지 못해 흘러내리는 아들의 몸을 지탱하려고 애쓰는 모습으로 피에타를 그렸다는 말씀이 많은 여운을 남깁니다. 기실 아들 전태일의 영정을 부둥켜안고 있는 어머니 이소선의 사진은 서러움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목사님.

기실 고인은 오래전부터 마리아로 비유되어 왔었지요. 1980년대 후반에는 마리아가 들어간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2011년 9월 7일 민주사회장이 치러진 모란공원의 하관예배에서 이해학 목사는 “어머니는 평생 발이 닳도록 매 맞는 노동자, 추위에 떠는 노동자들의 곁을 찾아 뛰어다니셨다”고 기도한 뒤 “제 몸에 불을 밝혀 어둠을 몰아낸 아들 전태일처럼, 그 아들의 정신을 예수의 정신으로 부활시켜 온몸으로 살아오신 어머니 마리아셨다”고 고인을 기렸습니다. 그날 오전에 열린 발인예배에선 고인이 다닌 창신교회 이종복 목사가 선창으로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그랬습니다. 전태일이 그랬듯이 어머니도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피에타와 같은 맥락입니다만, 저는 부활의 의미를 새삼 성찰해보았습니다. 전태일과 이소선은 예수와 마리아의 부활이 아닐까요. 어디 그 뿐일까요. 인류의 역사에 부활은 얼마나 끊임없이 나타났던가요. 

그런데 목사님. 목사님께 드린 편지에서 전태일의 장례식을 거부했던 목사 이야기를 꺼냈던 기억이 나시지요. 당시 김재준 목사가 개신교와 천주교가 공동으로 연 추모예배에서 한 말도 다시 새겨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여기에 전태일의 죽음을 위해 애도하기 위해 모인 게 아닙니다. 한국 기독교의 나태와 안일과 위선을 애도하기 위해 모였습니다”라는 그 통렬한 자기비판은 40년이 더 흘러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날카롭게 빛나고 있더군요. 


목사님.

하지만 저는 자기비판은 비단 기독교에만 절실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께선 언제나 단결을 호소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진보세력에게 “제발 쪼개지지 말고 하나가 돼라. 우리가 얼마나 단결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고 강조했었지요. 

기실 그래서입니다. 어머니의 부음을 접한 다음날 저는 <한겨레>에 실린 여러 추도문 가운데 진보신당 상임고문 심상정의 글에서 눈길이 멈췄습니다. 

“나는 전태일 열사의 평전을 읽으며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어머니와는 30년 이상을 동지이자, 스승, 어머니처럼 모시고 살았다. 지난 2008년 진보정당이 나누어졌을 때 어머니가 펑펑 우셔서 죄송한 마음에 2년 동안 찾아뵙지 못하다가 지난해 전태일 열사의 기일에 모란공원에서 어머니께 막무가내로 업히시라고 하면서 죄송한 마음을 전한 것이 떠오른다. 어머니께선 “태일이가 40년 전에 염천교에서 신문지 한 장 덮고 잠을 청했었는데, 지금도 제2, 제3의 전태일이 넘치고 있는 것처럼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며 한숨을 쉬셨다. 새로운 진보통합정당을 만들어 노동이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겠다는 약속을 어머니 영전에 바친다.”

심상정의 추도문에서 제 눈길이 멎으며 가슴 깊숙이 아픔이 밀려든 대목은 어머니가 펑펑 운 시점이었습니다. 아들 전태일을 참혹하게 잃은 어머니는 2008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이 쪼개졌을 때 펑펑 울었다는 사실을 저는 그때서야 알았습니다.

목사님도 기억하시겠지만 2008년 2월 원내의석 9석이던 민주노동당이 대선 패배이후 총선을 앞두고 쪼개졌을 때 적잖은 지식인들이 분당을 부추겼습니다. 당시 저는 분당을 반대하는 글을 썼지요. 그 과정에서 평소 친분이 있던 진보논객들이 분당을 부추긴다는 이유로 제 성격과 어긋나게 각을 세워 비판했었습니다. 가령 칼럼 제목 ‘홍세화의 용기, 진중권의 패기’에서 나타나듯이 분당을 막으려고 실명 비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결국 토론문화가 익숙하지 못한 한국 사회에선 상대에 대한 논리적 비판이 인간관계의 악화로 곧장 이어지더군요. 그런데 그때에도 저는 자신의 상처만 생각했을 뿐, 끝내 민주노동당이 분열될 때 펑펑 울지 못했습니다. 

그 순간에 펑펑 울었던 어머니 앞에서 과연 누가 더 단결을 갈망 했었는가를 톺아보게 됩니다. 저는 여전히 먹물이었고 어머니는 고통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하고 있었던 데서 그 이유를 찾았습니다. 제가 고인의 부음 앞에 더 슬펐던 까닭입니다. 


그런데 목사님.

진보신당 심상정 고문이 진보대통합으로 노동이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 어머니 영전에 바치겠다고 약속했지만, 고인을 추모하는 시민들의 발걸음이 줄을 잇던 바로 그 날 열린 진보신당 임시 당 대회는 진보세력이 합의한 통합안을 거부했습니다. 진보신당의 결정으로 진보대통합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습니다. 

더러는 의결 정족수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대의원 과반수가 통합에 찬성한 사실에 주목하고 진보대통합을 계속 추진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실제로 심상정, 노회찬, 조승수는 진보신당을 탈당했습니다. 

하지만 진보세력이 모두 하나로 뭉치는 극적 감동을 국민 대다수에게 주는 데는 이미 실패했습니다. 진보신당의 그 아쉬운 결정에는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을 조급하게 추진해 안팎에서 물의를 빚은 민주노동당 당권파의 책임도 있습니다. 먼저 진보신당과의 통합에 최선을 다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국민참여당과의 관계도 진전시켜야 했었는데 조급성이 전면화 되었지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어딘가 ‘불길하게 다가온 예측’이 적중한 데 참담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땅의 민중 앞에 진보가 하나로 뭉쳐 희망을 주어야 한다며 10여 년 넘게 활동해 왔습니다만 현실의 벽, 분열의 벽은 생각보다 높았습니다. 기대하던 수준의 진보대통합은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제가 2010년 8월 결성된 복지국가와진보대통합을위한시민회의에서 창립 공동대표를 맡을 때 꿈은 신자유주의와 분단체제를 넘어서자는 데 동의하는 모든 사람을 하나로 모으자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결국 제대로 활동하지 못한 책임을 느껴 옹근 1년 만에 그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진보대통합의 3항 18장 원칙(반신자유주의, 분단체제 극복, 국정대안 제시)을 <경향신문>에 기고하고 마치 할 일을 다 했노라고 생각했던 저 자신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자 그 대외적 ‘표현’이었습니다. 삼성경제연구소를 ‘맞수’로 진보의 집권 대안을 만들겠다며 6년 가까이 책임자로 앉아있는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에도 곧 만료될 이사장 임기 이후 더는 연임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글을 썼습니다. 물론, 신자유주의를 넘어설 체계적인 국정 대안을 내놓아 2012년 4월 총선과 12월 대선에서 어떤 정치세력이든 자신의 비전과 정책에 참고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약속은 지킬 수 있습니다. 


김 목사님.

전태일의 어머니가 진보정당 분열에 펑펑 울었다는 사실, 어머니가 세상을 뜬 그 때 진보정당의 대통합이 무산된 사실 앞에서 제가 맡고 있던 자리에서 물러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제가 분명하게 인식할 사실이 있었습니다. 기존의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물론, 그동안 두 정당의 그릇으로 담아내지 못했던 수많은 시민사회의 진보세력을 하나로 묶어세우려는 구상이 실현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다만 어디서 문제가 있었는지를 제가 지금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는 게 위안 또는 소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목사님.

자기중심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영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재발견, 아니 자기 자신의 성찰이 저는 지금 보수든 진보든 절실한 과제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런 생각에 곧이어 따라오는 자기경계도 있지요. 엄연히 고칠 수 있는 정치경제적 문제를 두고 모든 것을 영성으로 환원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문이 해석의 여지없이 명확하게 밝혔듯이 예수는 단순한 영성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실천하라고, 자기중심주의와 탐욕을 벗어나 빚을 탕감해주라고 가르쳤지요. 거듭남과 더불어 그 거듭남을 구체적 이웃 사랑으로 구현해나가라는 가르침으로 저는 읽었습니다. 


김기석 목사님. 

그래서 저는 다시 목사님의 피에타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전태일이 스스로 몸을 불태울 때 꿈꾸던 세상은 무엇이었을까요? 전태일은 억눌리던 세상에 자신이 작은 구멍 하나 내겠다고 했습니다.어머니가 작가 오도엽에게 구술한 전태일의 마지막 순간은 장엄합니다. 

“(태일이는) 내가 3분 있다가 죽을지 10분 있다가 죽을지 모르니까, 다른 약을 구한다 어쩐다, 뭐 주사 놔달라고 말하지 말고, 내가 말하는 것 잘 듣고, 엄마 꼭 들어주세요, 애원하더라고. 우리 엄마는 그렇게 할 거라고. 내가 부탁하는 걸 안 하면 나는 이 다음 천국에 온 (엄마)영혼도 안 만날 거라고.”

무엇이었을까요? 전태일의 부탁은. 어머니 이소선은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전해줍니다. 

“학생들하고 노동자들하고 합해서 싸워야지 따로따로 하면 절대로 안돼요. 캄캄한 암흑 속에서 연약한 시다들이 배가 고픈데, 이 암흑 속에서 일을 시키는데, 이 사람들은 좀 더 가면 전부 결핵 환자가 되고, 눈도 병신 되고 육신도 제대로 살아남지 못하게 돼요.이걸 보다가 나는 못 견뎌서, 해보려고 해도 안 되어서 내가 죽는 거예요. 내가 죽으면 좁쌀만한 구멍이라도 캄캄한데 뚫리면, 그걸 보고 학생하고 노동자하고 같이 끝까지 싸워서 구멍을 조금씩 넓혀서 그 연약한 노동자들이 자기 할 일을, 자기 권리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엄마가 만들어야 해요.”

마지막 순간에 전태일은 “엄마, 엄마, 내가 부탁하는 거 꼭 들어주겠다고 크게 한번 대답해줘”라고 말했다고 하지요. “그래, 아무 걱정마라. 내 몸이 가루가 되어도 니가 원하는 거 끝까지 할거다”라고 했는 데도 다시 “엄마 꼭 크게, 나 잊어버리고 부탁하고 가게. 크게, 크게 대답해 주세요”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피가 퍽 쏟아지고, 크게 대답하라 소리치면 피가 퍽 쏟아지고”라는 어머니의 증언 대목에선 가슴이 먹먹해옵니다. 마지막 순간, 그의 간절함이 무엇이었는지 그대로 묻어나기 때문이지요.


전태일이 살았던 시대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던 자본의 이윤추구 논리와 물신주의 팽배, 그로인한 부익부빈익빈의 캄캄한 어둠에 맞서 전태일은 자신의 몸을 불살라 빛이 되었습니다. 기독교인 전태일의 그 결단은 성전 앞에 차려놓았던 숱한 좌판을 뒤엎으며 제 잇속 챙기기를 넘어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친 예수의 길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런데 전태일이 몸을 불사른 1970년의 어두운 상황은 목사님께 처음 편지를 드렸던 2010년에도 말씀드렸듯이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한국은 자살률 1위, 출산률 꼴찌,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과 최고의 비정규직 비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뿐인가요. 사회 곳곳에서 물신이 찬양받고 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 내부까지 아주 깊숙이 들어와 있는 물신 숭배는 왜 지금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전태일에서 예수를, 이소선에서 마리아를 연상하는지를 역설로 설명해줍니다. 

전태일의 죽음 당시에도 그것은 비록 축적기의 한국 자본주의와 이미 절정에 이른 선진 자본주의라는 차이가 있습니다만 68혁명처럼 세계사적 흐름과 전혀 동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요. 


목사님이 아들 영정을 부둥켜안고 오열하는 어머니에서 피에타를 발견한 바로 그 시간에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 자본주의의 수도(capital of capitalism)에서도 마침내 아래로부터의 변화의 욕구가 세차게 솟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흔히 한국에서 집회와 시위가 벌어질 때 이 땅의 언론들은 경찰에게 강경대응을 살천스레 주문하면서 미국 경찰은 폴리스라인을 넘어서는 불법행위에 대해 발사까지 주저하지 않는다고 강변했었지요. 하지만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습은 단순한 폴리스라인을 넘어선 양상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미국의 심장부이자 세계 경제의 중심인 월스트리트에서 벌어지는 시위에서 나온 푯말 문구 하나를 한국의 기독교인들, 특히 대형교회 목사들과 그 신도들에게 꼭 소개하고 싶어 옮겨 봅니다. 

“Capitalism is Evil”

말 그대로 자본주의는 악마라는 구호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세계 자본주의의 수도(capital of capitalism)인 월스트리트에서 울려 퍼진 저 구호에 대해 저는 미국 당국이 그 무슨 국가보안법 따위로 다스렸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미국만 하더라도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왜 그런 소리가 나왔는가는 실제 미국 금융가의 현실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2008년 월스트리트를 강타한 위기로 미국 정부는 파산 또는 그 직전의 금융회사들을 살려내기 위해 7천억 달러의 세금을 투입했었지요. 한국 돈 840조 원(2011년 10월 현재 1달러 1200원 기준)이면 2011년 대한민국 전체 예산의 2배가 넘는 천문학적 금액이지요. 그 돈이 뱅크오브아메리카(BoA), JP모건체이스, 골드만삭스를 비롯해 월스트리트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돈을 받아 챙긴 금융회사들은 그 뒤 황당한 잔치를 벌이게 됩니다. 보도에 따르면 2009년 골드만삭스와 JP모건체이스는 직원 1명당 59만 달러(한화 7억 원)와 46만 달러의 보너스를 뿌리는 돈 잔치를 벌였습니다. 

CEO들의 연봉은 더 충격적입니다. 대표적 보기로 JP모건체이스의 CEO 제이미 다이먼은 2010년 기본급과 스톡옵션을 포함해 2천 80만 달러를 받았습니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300억 원이 넘지요.

그런 추악한 진실을 알게 되면 왜 “자본주의는 악마”라는 구호가 나왔는지 누구나 수긍할 수 있겠지요. 심지어 미국 헤지펀드의 ‘대부’로 불리는 조지 소로스도 “솔직히 말해 시위대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마호메트에 대한 모욕으로 비난 받은 영국 작가 살만 루시디도 트위터에 “세계경제는 월가의 탐욕스러운 거래 때문에 파산났지만 감옥 가는 사람은 시위대”라는 글을 올렸다고 합니다.

한국의 기독교인 가운데는 자본주의라는 말을 쓰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느낄 사람도 있겠지만 이제 그런 편견에선 벗어날 때입니다. 기실 ‘자본주의’란 문자 그대로 자본이 중심인 사회라는 말인데 그것을 불편해할 아무런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자본주의라는 말은 가장 보수적인 세력에서도 무람없이 나오고 있습니다. 가령 현대중공업의 최대주주이자 국회의원인 정몽준은 2천억 원 사재를 출연하면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주인공인 자본가가 인기가 없어 자본주의를 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었지요. 물론, 정몽준의 사재 출연은 대선을 의식한 행보임에 틀림없지만, 중요한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의 주인공인 자본가”라는 그의 인식입니다. 정몽준의 생각은 소로스의 그것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지금 당장 자본주의를 폐절해야 한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유는 명확합니다. 폐절한 그 다음 사회가 떠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저만의 인식은 아닙니다. 영국의 사회운동가 오언 존스도 “자본주의가 1920년 이후 최대 위기를 맞고 있지만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며 “정책 결정자도, 시위대도 지금의 위기 상황을 해결할 만한 대안적 비전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목사님. 그렇다고 해서 월스트리트 시위가 부질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미국 <뉴욕타임스>도 지적했듯이 “처음에는 수십 명 수준으로 일종의 농담처럼 시작된 시위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것은 1991년 옛 소련 붕괴 후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각성”이기 때문입니다. 

당장 자본주의를 넘어선 사회를 만들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설 수 있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제가 다시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에 국한해 대안을 말씀드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입니다. 다만 한국의 진보세력 대표자들이 대안에 합의한 게 있습니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을 비롯해 여러 사회단체들이 모여 합의한 진보대통합 정당의 정책 대안은 20개입니다.진보언론조차 자세히 보도하지 않아 대다수 사람들이 모르고 있습니다만, 저는 결코 과격하지도 밋밋하지도 않은 그 20개 정도만이라도 이 땅에 구현될 수 있다면 물신이 지배하고 있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사회가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진보진영 대표자 연석회의에서 합의한 ‘20대 주요 정책 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노동시간 대폭 단축을 통한 일자리 창출, 비정규직 해소, 파견제 폐지, 동일노동 동일임금 실현, 청년실업 해소, 생활임금 보장, 산별 교섭 제도화 등 민주적 연대적 노사관계 구축 

2) 교사 공무원 및 특수고용직 노동자를 포함한 노동3권의 완전 보장 및 노사관계의 민주화 

3) 주요농산물 국가 수매제도 도입을 통한 식량주권 확보 및 농민소득 보장, 공동체가 살아있는 농촌과 지속가능한 농업 구축 

4) 보편적 복지체제와 자산의 불평등 해소 및 사회적 재분배 강화 등 사회 전반의 진보적 개편을 뒷받침하는 증세를 통한 조세재정혁명 

5) 재벌의 소유·경영 독점 해소 등 독점재벌 중심 경제체제로부터의 탈피, 중소기업 육성 및 영세자영업자 등 보호, 국민연금 등 각종 연기금에 대한 노동자·민중 참여 강화, 기술-고용-생태 친화적인 적극적 산업정책, 협동조합 등 사회적 경제에 대한 지원과 제도 개선 

6) 국제 투기 자본에 대한 토빈세 도입 등 규제 강화, 투기적 금융자본 규제 등 금융부문의 공공성 강화와 사회화 추진, 파생 금융 상품 규제, 서민 금융 배제 해소

7) 순환식 재개발 추진 및 세입자 권리 보장, 토지 사회화 추진 및 주택 공영제, 사회주택 확대, 공정임대료제 도입 및 저소득층 주거비 지원 등 토지 공공성 강화와 국민주거권 보장 

8) 의료 민영화 저지와 무상의료 실현, 주치의제도 도입 등 공공의료 확대, 공적인 사회 서비스 확대를 통한 돌봄 사회 실현, 상대적 빈곤선 도입과 빈곤층 사각지대 해소를 통한 국민 기본 생활 보장, 보편적 기초노령연금 도입과 증액, 실업 및 아동수당 신설 등 보편적 복지체제 구축, 경비업법, 행정대집행법 전면 개정. 생계형 노점상 단속 중단. 

9) 재벌 언론·언론재벌의 종합편성채널 특혜 저지 및 신문·방송의 공공성 확보와 민주화, 대안언론 지원 

10) 고교 평준화, 대학서열체제 혁파와 모든 대학의 균등 발전, 대학등록금 문제 해결과 무상교육 확대 등 전면적인 교육개혁 

11) 모든 국민이 누릴 수 있는 문화적 권리 보장과 문화다양성이 인정되는 문화민주주의 구현, 독립문화예술 활동 지원 

12) 여성의 임신출산결정권과 성적 자기결정권 보장, 남녀 성별 임금 격차와 노동시장 내 성차별 해결 등 여성의 권리 보장/장애인 노동권 보장 및 자립생활 보장, 진정한 다문화 사회 정착을 위한 이주민 권리 보장, 다양한 가족구성권 보장 등 장애인·이주노동자·성소수자 등 사회적 소수자 권익 옹호.

13) 4대강 사업 및 운하 건설 저지와 생태 복원 등 친환경정책, 핵발전의 단계적 폐기, ‘정의로운 전환’ 방식을 통한 친환경 재생가능에너지 체제 수립 

14) 과학기술발전에 대한 민주적-사회적 규제 강화 

15) 군·경찰·행정관료 기구 전반의 민주적 개편, 검찰·사법부 개혁, 국가보안법 철폐, 전의경제 폐지 및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를 위한 대체복무제 도입 

16) 공공부문 민영화 반대와 공공성 강화를 위한 운영의 투명화-민주화 

17) 정치선진화를 위한 대선 결선투표제와 독일식 정당명부비례대표제 도입 등 선거법 개정, 예산과 정책 결정 등에 대한 국민들의 직접민주주의 참여 확대, 지역별 재정 격차 해소, 수도권 과밀 해소, 지역 자원을 활용하는 지역 주민 주체의 지속가능한 지역 발전 추구 

18) 국군의 해외 파병 반대, 한반도 외국군대 철수, 휴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대체, 한반도·동북아 비핵평화체제 구축 및 선제적 군비 동결과 남북 상호 군비 축소,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의 이행 및 자주적 평화통일 추구

19) 대미·대중 등 자주·평화·선린·균형 외교, 남반구 저개발국가 지원, 유엔 등 국제기구의 강대국 중심 체제 개편 

20) 한·미 FTA, 한·EU FTA 반대, 호혜적 공정무역체제 수립에 기여하는 대외통상정책


목사님, 진보진영 대표자 연석회의에서 합의한 대안들을 어떻게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추상적이라거나 관념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 세세한 정책 대안은 함께 다듬어가야 할 문제이겠지요. 

제가 성찰하고 싶은 것은 20대 정책대안이 주기도문에 명시된 그분의 가르침과 얼마나 이어있을까라는 지점입니다. 주기도문과 온 몸을 던진 예수의 간절함에 견주면, 20대 정책대안은 소극적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지금 그 정도 구현하는 데도 갈 길이 너무 멉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당장 그 20대 정책에 합의한 주체들 사이에서도 힘이 모아지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목사님.

진보대통합시민회의 공동대표에서 사퇴하고 곧 새사연 이사장직에서도 물러나면 무엇보다 먼저 저 자신과 정직하게 마주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보수와 진보를 떠나 진실을 찾고 싶은 내면의 갈망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인국 신부님께서 <기독교사상>에 기고한 글에서 “민중이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슬기, 민중이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현실과 다른 사회가 가능하다고 확신하는 슬기,민중이 자신이 확신하는 새로운 사회를 자신의 실천으로 창조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슬기”를 스스로 결집해내야 한다는 데 공감해주셨습니다. 저는 굳이 그것을 ‘영성’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보수나 진보를 넘어 진실을 학습하고 토론하는 범국민 운동이 펼쳐져야 옳지 않은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기석 목사님과 김인국 신부님처럼 뜻이 깊은 분들께서 슬기를 모아간다면 아래로부터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실현해가는 새로운 길이 열리지 않을까라는 희망도 고백해봅니다. 

물론, 서둘러 될 일은 아니겠지요. 저 나름대로 한국 사회의 성숙과 새로운 사회의 구현을 위해 진보대통합이 절박한 과제라고 생각하며 글을 써오고 사회운동 단체에 몸을 담았지만 지금은 그 길이 막혀 있다는 판단을 조심스레 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길을 찾고 있는 까닭입니다.

존경하는 김기석 목사님.

새로운 사람은 새로운 사회 없이 오지 않고, 새로운 사회는 새로운 사람 없이 오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어느덧 세월에 침윤되어서일까요. 지금까지 전자에 근거해 활동했다면, 이제는 전자와 후자를 함께 고심하고 싶습니다. 그 길이 어디로 나 있는지는 저도 잘모르겠습니다.

아쉽지만 어느새 편지를 마쳐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1년 반에 걸쳐 목사님과 편지를 나누는 내내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새삼 고개 숙여 고마움을 전합니다. 주님이 늘 함께 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손석춘 l 님은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이사장으로 언론학 박사이다. 동아일보 기자,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중앙대-연세대 겸임교수, 언론개혁시민연대 창립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신문읽기의 혁명1, 2권』을 비롯한 언론비평서와 『순수에게』, 『민주주의 색깔을 묻는다』 장편소설 『아름다운집』을 발표했다. 민주언론상, 통일언론상, 한국언론상, 한국기자상, 안종필자유언론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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