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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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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개혁 495주년 기념 특별기고  

한국교회는 바알의 신전인가?-한국기독교 개혁을 위한 과제와 제언 




출처 : 기독교사상 10월호 http://clsk.org/gisang/




(1) 위기의 현실


cover_646_s.jpg교회의 위기

한국의 기독교는 급기야 존립의 위기를 맞고 있다. 교회는 사회의 뒷전으로 밀려나고 교인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퇴락과 소외다. 이는 곧 역사의 주관자인 하나님으로부터의 버림받음을 의미한다. 이른바 복음의 소리가 죄 많은 비리의 세상에 경종을 울리고,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며, 세상 구원의 희망이 되기는커녕 맛이 간 사교의 주문으로 변한 것 같아 식상하다. 

한국교회는 예수 복음의 이름과 권위를 더럽히고 있는 것 같다. 성직자들의 고결하고 경건함이 존경을 받기보다는 그들의 위선과 속물근성이 빈축을 사는 경우가 더 많은 실정이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우리 기독교인들은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어 슬프다. 오죽하면 ‘앤티 크리스찬(Anti-Christian;반기독교)운동’이 점점 더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상황에 이르렀을까. 

뜻이 있는 사람들은 한국의 기독교가 서서히 붕괴하고 있다고 걱정한다. 하나님은 교회를 떠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교회 밖의 무한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또 인간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혹은 SNS와 인터넷 속에서 역사를 주관하는 주인으로 실재하심이 틀림없다.


저질의 방송 설교

문제의 핵심은 현재 한국교회가 믿는 신이 예수님이 증거해 주신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른 신이다. 아주 심하게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가장 좋은 증거는 큰 교회 목사들이 등장하는 라디오, TV설교들을 통해 나타난다. 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말하는 솜씨부터 그들의 언어는 세상과 소통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 아니다. 목소리부터 거부감이 든다. 채널을 돌리다가 그런 목소리가 나오면 설교인줄 알고 흔히 찡그리며 다른 데로 바꾸거나 심하면 재수 없다며 꺼버리기 일쑤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옛날 약장사 스타일이란 말인가. 약장사식이란 일방적인 선전과 주입식, 처음에는 호기심에 귀기울이다가 약을 한보따리씩 사기도 하지만 효력을 본 사람은 별로 없다. 매체에 돈을 주고 설교하는 목사들은 주로 신약보다 구약 보따리를 들고 나온다. 신약 보따리에는 십자가가 들어 있기 때문에 재미를 못 보는 모양이다. 

천편일률적으로 믿기만 하면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과 은혜의 약봉지를 팔고 있지만 이들은 거의 가짜다. 왜? 그중 대부분은 예수님이 오셔서 낡고 유효기간이 지났다고 폐기처분해 버린 유대교 유산이기 때문이다. 신학자 하르낙은 기독교 경전에서 구약을 제외해야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구약은 예수님을 위한 보조 자료인데 주객을 전도시키기 때문이다. 

이들의 설교는 신선한 예수님의 말씀과 너무 다르고 어쩌면 복음 비슷한 냄새조차 없다. 누가 여기서 성전 종교의 타락상을 참을 수 없어 채찍을 휘두르며 분노하는 예수의 모습을 보았는가? 근엄한 성직자와 사회지도층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힐난하고 회칠한 무덤 같다는 비판자 예수의 모습을 보았는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비리의 권력자들에 의해 고문 받고 희롱당하며 처참하게 끌려가는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의 가장 무력한 예수를 보았는가? 가난한자 병든 자들과 이웃 사랑을 위해 자기축복을 철저하게 버린 예수의 모습을 보았는가? 악의 세력에게 점령당한 세상을 구하기 위해 악의 세력에 저항하다가 악의 세력의 음모에 의해 기소되고 그들의 부당한 정치 재판에 의해 가장 억울하게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모습을 보았는가? 십자가에 달려 천국의 문을 바라보며 구원의 희망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며 절대적인 절망에서 신음하는 예수의 그 처절한 모습을 보았는가?

거의 없다! 진실로 없다! 돈이 있어야 시간을 살 수 있는 이런 따위 조잡스런 방송설교시장부터 없애버려야만 젊은 세대를 향한 미디어 선교의 장애물이 그만큼 줄어들지 않겠나! 


역 그리스도의 교회

유대 보수 기득권층의 불의와 부조리를 비판하고 저항하며 정의를 위해 자기를 버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십자가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이상, 교회의 원형을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런 기준에서 한가지의 예만 들어보자. 쌍용자동차의 노조원들이 거리로 쫓겨나 생활고에 시달리다 연쇄적 자살로 2012년 8월 초 현재 22명이나 죽었고 지금도 그 죽음은 진행형이다. 이밖에도 용산 참사 등 사회의 도처에 이런 아픔이 절규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기득권과 돈과 정치권력의 횡포에 얽힌 죄악의 소산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강남의 모 대형교회는 교회신축을 위해 건축헌금을 했는데 단 한 번에 2천억 원 이상이 쏟아졌단다. 사회의 빈축을 샀다. 또 모교회 목사는 정선 카*지*노장에 7백번을 드나들면서 도박으로 날린 돈이 20억 원이 넘어 문제가 되기도 했단다. 그밖에 목사들의 스캔들 등 타락과 비리를 열거하자면 한이 없다.

예수님은 화려한 성전을 보고 강도의 소굴이라고 질타하고 헐어버리라고 소리쳤다. 오늘 이 땅에 예수가 오신다면 이런 따위 대형교회들의 기득권은 여지없이 흔들리게 될 것이다. 결국 그들은 제사장 바리세인들처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개혁자 예수를 추방하거나 없애버리려는 보수노선의 음모에 합류할 것이 빤하다. 이것이 생명은커녕 영혼을 죽이는 맛이 간 한국교회의 역 그리스도 노선이다.



(2) 위기의 본질, 바알 신앙


하나님 자리에 바알 신

앞에서 언급한 방송 설교나 대형교회 목사들의 종교적 행태를 보면 매우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이 섬기는 신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Baal) 신’이란 사실이다. 

가나안 종교의 예배 대상이었던 바알신은 이스라엘의 야웨 하나님 신앙을 끝까지 교란하고 괴롭힌 매력 있는 우상이었다. 농경사회 속의 바알은 소유의 신, 소출의 신, 풍요의 신이었다. 오늘의 용어로 표현하면 경제의 신 부자의 신이다. 따라서 장사의 신, 수출의 신, 재테크의 신, 부동산의 신, 기업의 신, IT산업의 신, 돈의 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농경 신을 섬기는 바알 종교의 교리는 지극히 원시적이었으며 저등한 차원을 벗어나지 못했었다. 예를 들면 한해의 농사가 바알 신과 그의 부인 바알라트 여신 사이의 성적 교접에 의해 좌우된다고 믿었고, 풍년을 기원하는 예배의식 속에까지 성관계가 도입되기도 했다는 것만 봐도 어떤 수준인가를 알만하다. 

이런 따위 사교임에도 불구하고 물질적 욕망과 부에 대한 운명을 틀어쥐고 있는 신이기에 매력이 있었고 힘이 있었다. 아마도 인간의 역사가 지탱되는 한 이같은 익명의 바알 신에 대한 추종과 숭배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실로 바알의 악령은 농경문화이후 산업사회 속에서도 더욱 위세를 떨쳤다. 즉 그는 산업사회를 대표하는 물량주의, 성장제일주의, 경제제일주의, 배금주의(拜金主義), 황금만능주의 등 물질적 탐욕주의의 첨단에 서서 그 욕망을 성취시켜 주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신으로 군림해 왔다. 그의 또 다른 얼굴이 돈신이며 돈이면 다 통한다고 믿는 신앙이 맘모니즘(Mammonism)이다. 

오늘의 21세기 지식 정보 사회 속에서도, 인간의 ‘궁극적 관심’을 보라. 돈이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 권력도 빼앗고 지위도 살 수 있다. 돈 많으면 귀족이고 돈 없으면 천민으로 전락한다. 삶의 보람과 행복도 돈이 실어다주는 것으로 믿고 있다. 돈이 인간의 궁극적 관심인 한 신앙의 대상이다. 아니라고 하면서도 현실적으로 가장 확실하게 믿고 있는 이 신앙의 본질은 부와 풍요와 부자의 신 바알이다. 


맘몬의 문화

물론 바알은 인간의 탐욕이 만든 거짓 신, 곧 우상이다. 우리 사회를 병들게 만들고 있는 뇌물과 급행료 따위의 부정한 물질도 타락의 신 바알이 약속하는 물질적 축복을 얻기 위해 바치는 변종된 헌금의 예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른바 돈이 곧 축복의 도구이며 그 척도인 셈이다. 

오늘의 기독교 역시 주류가 이 신앙에 크게 잠식당해 부패하고 있다. 대형 교회일수록 수십 종의 헌금(돈)을 나열하고 그에 상응하는 축복을 약속하고 있는 예가 허다하다. 이처럼 돈이 좋아서 돈 준 자에게 축복으로 보답하는 신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이다. 타락의 신이다. 하나님에게 바치는 헌금도 나에 대한 축복이라는 대가성을 기대하는 한 뇌물의 성격과 일치한다. 

하나님에게 바치는 진정한 헌금이란 이웃 사랑을 위해 나를 비우는 것이며, 이 헌금의 대가성이란 나에게 축복이 아니라 이웃에게 축복의 열매가 맺어지기를 바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임마누엘 칸트는 남을 도울 때도 도덕적 의무감에서 도와야 도덕적이지, 돌아오는 좋은 반응이나 환대나 축복을 기대한다면 이는 도덕적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센델, 좬정의란 무었인가좭 162쪽) 

따라서 하나님이 갑절로 갚아 주신다는 물질적 축복의 대가성을 바라고 뇌물 바치듯 헌금 할 바에야 차라리 바알을 아버지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 제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십계명 중 제삼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고 했다. 그럼에도 하나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있는 목사나 교인들이 이를 알고 있는지 실로 의심스럽다.

하나님의 물질적 보답을 믿고 교회에 헌금을 바치는 것보다 바알의 보답을 믿고 권력 당사자에게 뇌물로 헌금하는 것이 축복의 약발 면에서 훨씬 더 빠르고 효과적일 것이다. 


한국 사회의 위기

한국사회의 의식 구조는 어떤가? 그들이 추구하는 절대 가치가 무엇이며 그들의 궁극적 관심은 무엇인가. 생각을 상품화해서 사고파는 대형 서점에 가서 베스트셀러 코너를 한번 둘러보라. 온통 부자와 돈 재테크 부동산에 관한 책들이 판을 압도 하고 있다. 좬부자 지침서좭 좬부자 매뉴얼좭 좬안전한 부자좭 좬백만장자 수업좭 등 셀 수 없이 많은 부자 목표의 책들, 표지만 봐도 이 나라의 정신적 토양 자체가 풍요의 신인 바알 신앙에 먹혀버린 문화란 것을 입증한다. 

여기에 하나님의 모습이 있다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눅 18:25)”라던가 “너의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 19:21)라는 등의 내용이 담긴 베스트셀러도 눈에 띄어야 되지 않겠나. 타락한 시대에 경종을 울리는 예언자의 음성이 들려야 하지 않겠나. 그러나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우리나라는 모두 경제에 미쳤다. 소유욕에 미쳤다. 부자 환상에 미쳤다. 너 나 할 것 없이 경제에 미치는 데는 예외가 없다. 가진 자가 더 미쳤다. 병든 사회 치유는커녕 교회도 여기에 미쳤다. 미친 정신 더 부추기는 것이 정부요 권력자들이다. 경제 살리기라 하면 모든 것이 다 통한다. 만병통치약이다. 모두 경제와 소유욕에 미쳤다. 소유욕은 곧 탐욕의 본질이다. 총체적으로 정신문화가 변질 되었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역시 스스로도 모르게 여기에, 그것도 매우 심하게 오염되었다. 바른 신앙으로부터의 이탈이며 타락이다. 



(3) 하나님과 경제


사랑과 경제 

우리는 이런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인간이 잘살고 부자되는 것 자체가 문제란 말인가. 물질적 풍요가 곧 타락인가. 경제 성장과 발전과 윤택한 생활이 죄란 말인가. 하나님은 경제를 부정하시는가. 

그렇지 않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경제란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준말이다. 경세제민의 사전적 의미는 세상을 관리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일이다. 치세(治世)는 정치적 권력의 개념이 있지만 경세는 물질적 경영이란 평화로운 의미가 아닌가. 특히 백성을 구제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나. 그런데 왜 경제란 밝은 이름 뒤에 어두운 그림자가 붙어 다니는 것일까. 아마도 경제에 내포된 물질적 이익의 개념이 문제의 변수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바알은 인간이 잘 사는 것을 기뻐하는데 하나님은 이를 싫어하시는가. 바알은 물질적 축복의 신인데 하나님은 물질적 저주의 신인가. 바알은 부자 만들어 주는 신인데 하나님은 인간을 가난하게 만드는 신인가. 예수는 어째서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 더 어렵다고 말 했는가. 그는 왜 열심히 재산을 모은 부자 청년에게 너의 재산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께 나누어 주라고 명했을까. 웃기는 소리 아닌가. 그러면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가르쳤다. 냉정히 생각해 보자. 통상적인 인간이라면 당연히 예수보다 바알에게 더 호감이 갈 수밖에 없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경제의 성격을 다시 생각해 보자. 여기서 파생된 의미 가운데 경제발전, 경제성장, 국민소득 증대, 안정생활, 풍요로움 등은 얼마나 좋은 말인가. 그러나 경제가 조금 더 편중되는 개념인 부자, 부유층, 재벌이란 말에 이르면 약간의 거부감이 일기 시작 한다. 나아가 배금주의, 황금만능주의, 물신주의, 맘모니즘 등에 이르면 여기서는 가치관이 전도된 신념의 문제이기 때문에 매우 심한 거부감이 일어난다. 결국 경제가 나사 풀린 인간 욕망의 정점을 점령하게 되면 탐욕과 횡령 수탈 등 온갖 범죄의 동기가 되고 만다.

그렇다면 경제는 만 악의 근원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신다. 인간이 풍부하고 넉넉하여 물질에 구속됨이 없는 자유를 누리며 행복하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또한 축복이다. 진정한 행복이 구원이다. 물질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물질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본질적 요소로 착각 하거나 부와 풍요가 곧 행복이라고 동일시 하는 오류를 경계하는 것이다. 권력이나 물질적 부는 악마의 속성을 내포할지언정 하나님의 뜻이거나 진리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과 진리는 사랑이다. 사랑이 곧 하나님 자신의 모습이다. 산신령 같은 모습이 아니다. 고로 경제는 사랑을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 경제가 사랑이란 목적을 위해 봉사하는 수단이 될 때 제민(濟民)이 될 수 있지만, 사랑이 경제란 목적을 위해 봉사하는 수단이 될 때는 멸민(滅民)이 되고 만다.

경제가 사랑 위에 있을 때, 즉 사랑이 경제에 눌려버릴 때 이 경제는 온갖 부정부패와 비리와 부조리의 원동력이 된다. 악마의 속성을 지닌 권력이 견제 받는 것 만큼밖에 선해질 수 없는 것처럼, 탐욕의 속성을 지닌 경제는 사랑의 지배를 받는 것 만큼밖에 도덕성을 갖지 못한다. 


정의와 경제

사랑의 의미는 너무 심오해서 이해하기 힘들다. 간단히 살펴보자. 희랍 철학에서는 사랑을 필리아(Philia·우정), 에로스(Eros·애정). 아가페(Agape·영적사랑) 등 세 분야로 분류했다. 하나님 사랑은 아가페다. 주고받는 우정이거나 독점해야 하는 남녀 간의 애정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자기를 비우고 희생하는 사랑이 아가페다. 아가페는 사랑할 가치가 있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가치가 전혀 없는 이웃도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진리에 대한 신념이나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사랑이다.(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3권 137쪽 참조) 

하나님 사랑 아가페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봉사이며 둘째는 정의다. 봉사는 이웃을 위해 자기를 비우는 행위다. 이는 가난한 이웃을 돕는다거나 그 아픔에 동참하는 등의 직접적인 사랑이다. 불쌍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병든 자 고쳐주는 예수의 모습은 이 사랑의 원형이다.

정의는 이웃사랑을 파괴하는 자의 행동을 파괴하므로 이웃사랑을 회복하는 역설적인 사랑이다. 즉 이웃이나 민족이나 역사를 짓밟는 자의 의도를 미워하는 것이 사랑이며 이를 척결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 정의다. 이는 곧 비판과 도전과 투쟁을 의미하기 때문에 고통과 희생의 길을 택해야 되는 적극적 사랑이다. 이웃에게 고통을 주는 불의의 세력을 묵인하거나 방관하면 정의를 외면하므로 하나님 사랑을 거역하게 되는 것이다. 길가는 여인을 능욕하는 강간 살인범을 발견했을 때 목숨을 걸고 가해자를 때려눕히는 것이 정의다. 이를 방관하여 그 여인이 죽었다면 이는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배신이다. 자기 권력 유지를 위해 인혁당사건 같은 것을 날조하여 죄 없는 인재들을 무더기로 학살한 포악한 독재자에 대해 그를 묵인하거나 사랑하는 것은 정의에 대한 배신이며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 

정의를 통해 적극적 사랑을 보여준 원형도 역시 예수다. 그는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국민을 수탈하고 억압하는 성전종교의 지도자들과 그 주변의 기득권자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 교회를 도둑의 소굴로 만든 자들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며 저항하다가 그들의 음모에 의해 사형당했다. 이것이 정의의 표본이다. 

이상에서 간략하게 사랑의 실체를 조명했다. 사랑에 봉사하는 수단이 아닌 경제는 하나님이 포용하지 않고 거부한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다시 말하면 경제는 탐욕의 도구다. 경제란 사랑과 정의를 위해 봉사할 때만이 도덕적일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언제나 타락의 흉기가 될 수 있다. 그 반면 경제가 사랑과 정의를 위해 봉사할 때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 



(4) 하나님의 응징


바알에 대한 심판

소유와 부자의 신 바알이 얼마나 매혹적이었던지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도 여기에 빠졌었고, 앞에서 언급한 아합 왕은 바알 신전까지 지어 숭배 했었다(왕상 16:33-34). 바알 신앙의 위력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아합 왕 시대가 경제적으로 가장 윤택했었다고 한다. 

이스라엘이 가장 부유한 세상을 즐기고 있을 때 부패한 사회는 가장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예언자들은 이를 비판했다. 아합 왕은 자기를 비판하는 엘리야를 만나 나라 경제가 크게 신장하고 국가가 이처럼 발전하는데 그대가 이스라엘을 망칠 셈인가라며 꾸짖었다.

아합 왕의 잘 살아보려는 욕망과 부의 성취, 경제 성장, 경제 살리기 정책은 바알 신앙에 의해 성과를 거둔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아마 아합 왕의 정책과 박정희의 경제성장과 경제 대통령 이명박의 철학과 신념이 서로 유사한 데가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도덕성의 문란, 온갖 비리,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에 대한 배반 등으로 역사는 혼란의 길을 걷고 있었다. 고로 혹독한 심판이 뒤따랐다.

하나님은 아합 왕 가문의 왕위 세습을 단절하고 예기치 못한 예후 장군을 왕으로 등극시켜 과거사 청산을 철저히 했다. 예후는 바알 신을 믿고 경제성장 제일주의를 신앙 했던 아합의 왕자들 칠십 명을 비롯한 그 가문의 권속들과 그 가문 주변의 측근 지도자들과 제사장들까지 모조리 잡아 죽였다.(왕하 10:6-11) 

이어서 예후는 부자 환상에 빠져 경제의 신을 믿는 전국 백성들을 모두 바알 신전으로 유인해 한명도 예외 없이 다 죽여 버렸다. 몇 명인지 구체적인 숫자는 알 수 없으나 성서에는 신전의 이쪽 벽에서 저쪽 벽까지 가득 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바알신전을 헐어버리고 그 지성소는 변소간으로 만들어버렸다.(왕하 10:18-27) 

예후가 너무 잔인하고 혹독한 것 같다. 사랑의 하나님이 과연 이처럼 비정하게 처단하기를 원했을까. 차제에 이런 핑계로 보복심과 포악성을 노출한 것이 아닐까. 의아한 생각이 든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후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내 마음에 들도록 일을 잘하였다. 나의 뜻대로 아합 가문을 잘 처치하였다.” 

예후 왕은 이처럼 경제우상을 근절하고 하나님의 정의로 나라를 살려내어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이처럼 철저한 개혁자 예후도 맘몬(돈) 신의 상징인 금송아지를 버리지 못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다. 



(5) 청산의 대상, 바알의 제자들


경제 대통령

경제 대통령이란 말에서 풍기는 냄새가 뭔가? 이미지를 냄새로 표현하자면, 하나님 냄새가 나는가, 바알 냄새가 나는가. 이른바 경제 대통령인 S교회 장로는 경건하게 하나님께 예배드리지만 그의 기도는 바알 신께 드리는 것 아닐까?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예수는 우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 19:24)고 말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경제 대통령은 부자 위의 슈퍼 부자들인 재벌들에게 세금을 감해주고 출자총액제한 철폐 등의 특혜를 베풀어 주었다. 재벌들이 돈을 크게 벌면 국가가 그만큼 쉽게 부자가 된다는 논리다. 그대신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하는 복지 예산은 삭감해 버렸다. 복지예산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야당 의원들을 향해 집권측은 인기영합주의 즉 포퓰리즘이라고 매도해 버렸다. 이것 하나만 봐도 그가 예수를 믿는 사람인가 바알을 믿는 사람인가에 대한 판단은 명쾌하지 않은가?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을 외면하고 있는 자, 상류층과 부자와 재벌들 우대 정책을 쓰는 자, 그의 기본이 예수의 길과 반대 방향이다. 필연적으로 역사 후퇴와 죄의 밤은 더 깊어 가고 있다. 대한민국은 하나님의 응징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경제대통령이란 슬로건을 걸고 정권을 잡은 경제 대통령의 궁극적 관심은 두말 할 나위 없이 경제성장신앙이다. 분배보다 성장위주의 정책이란 사랑과 정의보다 부자가 목표라는 뜻이다. 그의 궁극적 관심이 오로지 경제였다. 폴 틸리히(P. Tillich)에 의하면 한 인간의 ‘궁극적 관심’이 곧 그의 신이다. 경제와 풍요와 탐욕의 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이다. 

아합 왕을 응징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경제에 미친 대한민국 국민과 지도자의 바알 신앙에 대한 심판은 예외가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미 징벌이 떨어지고 있다. 모든 국민이 피부로 느끼게 되는 총체적인 재앙이다. 

매우 치명적인 통일 외교 분야의 역사 후퇴는 제쳐두고 민생 문제만 보더라도 매우 심각하다. 이 나라 부유층 상위 1%의 인구가 국가의 부를 독식하게 되는 불균형이 크게 부각되었다. 이로 인해 중산층 몰락과 심각한 빈부의 격차를 빚어 사회의 아픔이 더해가고 있다. 재벌들의 문어발식 확장에 대한 규제를 풀어줌으로 대기업이 중소기업 다 잡아먹고 빵집, 두부집, 콩나물집에 이르는 골목 상권까지 재벌기업들이 삼켜버리는 바람에 서민들은 도탄에 빠지고 있다. 

이 뿐이겠는가? 국민의 소리, 하늘의 소리와는 불통, 언론 악법과 민간 사찰, 6·15, 10·4 남북공동 합의서 불인정, 긴장고조-냉전시대로의 회귀, 인권과 자유의 축소와 민주주의 후퇴 등 총체적으로 역사는 퇴락하고 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경제의 신 바알 신앙의 종말은 불을 보듯 빤하다. 


경제 우상 박정희

성서는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오늘의 우리 역사에 상징적으로 다가오는 살아 있는 메시지라야 성서다. 우리의 현실에도 상징적 아합 왕이 무수히 존재한다. 그 중 박정희 대통령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겠다. 박 대통령의 구호가 ‘잘살아 보세’였으며 경제성장이 그의 운명을 좌우할 만큼 절대적인 관심이었다. 이것이 곧 바알 신앙의 요체다. 

그는 ‘경제’가 쿠데타로 탈취한 정통성 없는 자기의 권력을 유지시켜주고, 독재를 합리화해주고, 국민 위에 행복한 지도자로 남을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사랑과 정의를 묵살한 죄, 즉 하나님 자신을 짓밟은 죄로 인해 그의 마지막은 비참했다.

그럼에도 경제제일주의 사상에 오염된 기득권층 보수 세력들은 박정희를 경제발전 우상으로 부활시키고 전국 곳곳에 박정희 동상을 세우고 있다. 자유를 억압했건, 인권을 탄압했건, 무고한 백성 무수히 죽인 포악한 독재자이건 간에 경제를 발전시켰으니 위대하다는 생각은 사탄의 철학이며 바알 신앙이다. 40일을 굶어 시장한 예수에게 사탄이 나타나 이 돌들을 떡으로 만들라고 했을 때, 예수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말하며 사탄을 물리쳤다. 사탄이 유혹하는 이 떡이 경제다. 박정희 동상은 사탄의 유혹에 대한 환영을 상징하는 바알 신상이다.

더욱이 개탄스러운 것은 박정희경제를 신봉하는 보수권력층, 즉 한국의 바알 신도들이 독재자의 딸을 대통령 후보로 세운 사실이다. 그는 후보가 되자마자 5·16 불법 쿠데타를 미화하고 그의 아버지가 무고하게 죽인 인혁당사건 관련자들의 무죄판결을 인정하지 않는 등 숭엄한 하나님의 역사적 심판과 그의 창조 질서에 도전하고 있다. 

만약 이런 반역사적 가치관을 가진 그가 집권하게 된다면 박정희 독재에 저항하다가 희생된 무수한 민주 열사들은 빨갱이거나 반 국가사범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 틀림없고 5·18 광주민주 항쟁은 폭도들의 내란 음모로 다시 규정해야 하며, 무등산의 5·18 민주유공자 묘역과 4·19국립묘지는 블도저로 갈아엎어 버려야 옳을 것이다. 

이같은 역사 뒤집기 논리라면 이완용은 충신이고 안중근은 역적이 돼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수한 독립투사들은 한 시대를 어지럽힌 게릴라쯤으로 매도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의 사고는 논리적 모순에 빠진다. 이런 역사의식을 가진 독재자의 딸이 21세기 투명세상 밝은 시대 속에서 대한민국 여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부끄럽기 짝이 없다. 이는 예후가 아합의 후예를 청산한 것처럼 철저하게 과거사 청산을 하지 못하고 미진하게 한 것에 대한, 즉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지 못한 것에 대한 죗값이라는 사실을 교회가 먼저 깨달았으면 좋겠다.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셨을까. 성서가 대답해 준다. 이스라엘의 경제 발전을 이룬 아합 왕과 박정희의 경제성장이 비슷하고 그들이 믿는 신념 역시 하나님의 정의를 배반한 물신주의 바알에 대한 신앙이었다. 그러나 아합은 탐욕은 있었지만 유신독재자 박정희처럼 포악한 군주는 아니었다. 

앞에서 언급한 부분을 다시보자. 새로 왕위에 오른 예후는 바알 신을 믿는 아합 왕에 대한 과거사를 철저히 청산했다. 즉 아합왕의 아들 70 명과 그들의 가족들과 왕족들 주변의 지도자들과 제사장까지 모두 죽여 버렸다. 그리고 전국에 있는 바알 종교의 신자들을 유인해 모조리 처단해 버렸다.

아합이 가졌던 그릇된 역사의식과 타락한 가치관이 깨끗이 청산되었다. 하나님은 예후를 극찬했다. 우리는 여기서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잔혹한 살육의 방법을 그대로 반복하라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상징하는 하나님의 정의를, 즉 과거사 청산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확실하게 실행해야만 새 역사 창조의 미래가 있다는 뜻이다.

오늘의 우리 역사는 분명 하나님의 뜻과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 경제적 맘몬의 신을 청산하지 못하면 민족 전체에 그에 상응하는 재앙이 내려질 것이다. 이는 사이비신앙과 불의에 대한 심판이다. 이런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이는 하나님이 주관하는 역사의 문제이기 때문에 교회의 문제다. 여기서 교회가 직무유기하면 이 나라는 경제의 신, 황금 만능의 신, 배금주의의 신, 타락의 신인 바알의 세상이 될 것이다.



(6) 교회 개혁의 과제


엘리야의 진언

이스라엘은 바알 신앙으로 위기에 직면했을 때 예언자들이 나타나 나라를 구했다. 예를 들어 엘리야 선지자는 아합 왕의 면전에서 이렇게 공격했다. “이스라엘을 망치는 사람은 바로 왕 자신과 왕의 가문입니다. 왕께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바알을 받들어 섬깁니다.”(왕상 18:18) 얼마나 용감하고 신랄한가. 목숨 내놓고 하는 말 아닐까. 

한국교회에 이런 목사들이 있는가? 교회가 살아 있다면 이런 메시지를 전달했을 것이다. “대한민국을 망치는 사람은 바로 대통령 자신과 그 가족들입니다. 대통령께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바알을 받들어 섬겼기 때문에 형님을 비롯해 참모들이 줄줄이 감옥에 가고 청와대는 도둑의 소굴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교회가 대부분 바알의 신전으로 타락했는데 이런 목소리가 나올 리 없다.

엘리야도 4백 50명이나 되는 바알의 예언자를 대항해 혼자 싸웠다.(왕상 18:22) 어느 시대나 물신(物神)의 세력이 압도적인가 보다. 그래서 한국교회에는 수만 명의 목사들이 모두 바알의 예언자들이란 말인가? 정녕 엘리야 같은 예언자는 한명도 없단 말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응징과 심판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바알의 신전

한국교회의 하나님은 왜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의 우상인가를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자. 기독교의 하나님은 사랑의 신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사랑과 정의의 상위에 자기 축복과 자기구원을 올려 놓았다. 이 축복은 물질적 풍요이며, 이 자기구원은 축복의 영원한 연장이다. 이는 모두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이다. 이를 믿음으로 연결시켰다. 이 믿음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과 연결시켰다. 주로 교회 충성, 헌금, 기도가 믿음의 척도다. 여기에 성령을 받으면 이기주의적 자기구원의 환상과 희열에 빠진다. 물론 이는 성령이 아니다. 여기서 가진 것 몽땅 교회에 바칠 수 있다. 이런 신앙의 구조는 교회성장과 교회 키우기의 가장 효율적 방식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여기에는 이웃 사랑과 정의가 없다. 사회봉사, 역사의 아픔에 대한 동참, 도둑에 수탈당하는 약자를 돕는 일, 정치권력이 국민을 억압하고 죽이고 온갖 횡포를 자행하는 데 대해 저항하고 투쟁하는 사명, 국민과 민족을 구하는 정의의 부름 등에는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다. 권력을 업고 국민의 돈 횡령하는 도둑들이 연일 보도되는데도 교회는 관심이 없다. 

한국교회는 예수의 사랑과 정의에는 등을 돌린다. 이는 정의를 위해 짊어져야할 십자가를 거부하는 죄다. 즉 이웃 사랑에는 담을 쌓고 자기 축복과 교회성장을 위해 믿음만을 강화 할 때 교회는 물량주의 바알 신앙의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타락한다. 이런 믿음의 대상은 기독교하나님이 아니다. 부자의 신 바알이다. 상당수 한국교회는 바알의 신전이다. 


교회의 개혁

교회 개혁의 궁극적 목표는 잃어버린 예수를 다시 찾는 작업이다.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먼저 예수님의 말씀대로 부자교회들이 가진 것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국가 차원의 분배정책에 교회가 나서야 한다.

그다음 예수가 성전을 정화한 것처럼 교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 목소리가 교계 안에서 일어나야 한다. 단 한사람의 예언자라도 좋다. 밖으로부터의 비난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할 만큼 권위 있고 진지하게! 

그리고 권력층과 재계를 필두로 한 부정부패 비리가 만든 죄악 사회 밑에서 신음하는 국민을 구원하기 위해 교회가 나팔을 불고 채찍질 해야 한다. 협잡성이 농후한 정치는 죄 많은 사회를 구원할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왜곡된 낡은 사고로 역사를 과거로 회귀시키려는 반역사적 세력들에 대한 역사의식 교육을 교회가 앞장서야 할 것이다. 미래에 계시는 하나님께로 전진하기 위해 발목을 잡는 과거사를 철저히 청산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 자체의 해체를 각오하고, 자기 버림의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몰락하게 될 것이다. 교회 몰락은 반드시 바알 신전이 지속되는 과정 속에서 진행 될 것이다.



[한용상] 님은 연세대 신학과를 졸업하고, 캐나다 애틀랜틱신학대학원(Atlantic School of Theology)과 맥마스터대학교(McMaster University)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했다. 기독교방송(CBS) 정치부장, 보도국장. 캐나다 동아일보 비상임 논설위원, 캐나다 임마누엘연합교회 목회활동, 평화통일 자문위원(1998), 남북 이산가족 교류 협의회 사무총장(2003), 협성대학교 외래교수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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