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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이 살려낸 것들 8 - 순이 아줌마 1

일반 조회수 9038 추천수 0 2009.03.06 17:56:15
아랫마을에서 자리잡고 살다 새 집터에 손수 집을 짓기 시작한 옆집 허 선생님네와 수몰예정지에서 뜯어다 짓는 우리 집이 거의 비슷한 무렵에 다 지어지고 공동으로 집들이를 합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신고식을 하는 것입니다. 이 집 가서 팥죽 먹고, 저 집 가서 돼지머리 먹고, 이 집 저 집 다니며 한 잔씩 걸치고... 마을 아짐, 아제들이 재밌다 하십니다.
"여가 옛날에는 밭이었제. 집터를 아조 잘 잡었어! 하루 종일 햇빛이 좋아, 그래 망등양지제.두 집이서 아조 망등에 제대로 들앉었구만! 잘했어."
"예? 망등양지요?"
"그라암! 여그를 망등양지라 하제."
"무슨 뜻이에요?"
"아, 벌이 벌통으로 들락날락하는 거그를 망등이락 하거든, 여그 산 밑에 자리잡은 땅 모양새가 망등 같다고 해서 망등, 해가 존께 양지, 그래서 망등양지여 !"
하아! 기가 막힙니다. 시가 따로 없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땅이름에다도 시를 붙였습니다. 땅에 코박고 온갖 미물, 온갖 생명들과 씨름만 하고 산 게 아니라, 어느 때는 가슴 펴고 하늘을 보고, 또 어느 때는 천하를 둘러보고 땅에다 이렇게 시를 써놓은 것입니다.
아랫마을의 이름은 머구재입니다. 아랫머구재, 웃머구재...지금은 하오동, 상오동으로 부릅니다. 연세 많으신 분들은 지금도 '머구재' 해야 알아먹습니다. 신선 동네에서 사는 학은 오동나무에만 앉는다 합니다. 그래서 이 마을은 오동, 고개 너머 마을은 '학선리'입니다.
근동에서 제일 높은 산이 덕유산이니, 거기 올라가면 이 땅이 그 모양으로 보일까요? 지금 사람들이 그걸 볼 눈이 있을까요? 두 눈으로가 아니라, 다른 눈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마음의 눈, 더 깊은 곳에 있는 무언가를 보고 찾아내는 눈, 지상만물의 혼과 움직임을 알아보는 눈... 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오감을 다 동원해서 듣고, 냄새 맡고, 만지고, 핥아보아서 알았을 것이고, 거기에다 마음의 눈, 영혼의 눈을 뜨고 보아서 알아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름 하나가 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요새 시골에다 집 짓는다고, 경치 좋은 곳에 집 짓는다고 전면에 통유리로 벽을 대신한 집들을 봅니다. 요즘 사람들에게 육감까지는 무리라 하더라도 사람마다 오감이라는 것이 있는데, 눈 말고는 다 막자는 꼴입니다. 창호지 문틈으로 비오는 날 올라오는 촉촉하고 꼬순 땅내음도, 아침저녁으로 부산한 새들의 기쁜 소리도, 수풀의 존재를 드러내주는 바람의 살결도, 토방 밑에 자리잡은 괭이밥의 달콤함도 통유리 집에서는 차단당하고 맙니다. 통유리 집 안에 들어가면 코밑으로, 가슴으로 숨이 답답해지는 걸 보니, 바람이 갇혀 있는 것이 확연히 느껴집니다. 오감이 막히니 육감인들 뚫리겠습니까?
(그러니 척 봐도, 어디 가서 실컷 얻어터져서 눈 찢어지고 퉁퉁 부어 터진 면상을 한 인간에게 이 나라를 맡기지요.)

망등양지에 자리를 잡고 보니, 사람 사는 옆집은 한 집이어도 이래저래 이웃이 많습니다. 은행나무 밑으로는 알뜰한 후손이 있어 늘 잘 다듬어져 있는 한 쌍의 산소가 이웃도 되어주고, 해바라기 하는 놀이터도 되어 줍니다. 아침 햇살 눈 치뜨며 인사 하는 김에 산소 이웃에도 인사를 합니다. 아! 물론 집들이날 돼지머리에 막걸리도 한 잔 드렸지요.
그리고 이웃이면 큰 이웃이 있으니 바로 비닐하우스 이웃, 전답 이웃입니다. 순이 아줌마는 우리 텃밭과 가장 가까운 이웃입니다. 우리가 집 짓고 살기 시작하자 순이 아줌마가 제일 좋다 합니다. 비닐하우스에 주는 물 길러 다니느라 늘 애먹었는데, 우리 집이 들어서자 마당에 있는 수도꼭지에 호스를 끼워 비닐하우스 물통에 물을 채우거나 어린 고추모에 물을 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산 높은 곳에서 솟아난 샘에서부터 끌어다 자연히 흐르게 해놓은 물이니 물세, 전기세 물 걱정도 없습니다.
원래 동네 아짐들은 '** 엄마!' 하고 부르지 이름을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 아짐은 아침 저녁으로 당신 논밭이나 비닐하우스를 오가면서, 우리 논밭을 지나다가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는데, 나한테도 엄연히 아들이 있는데 절대로 '강토 엄마!' 하고 부르지 않고 꼭 내 이름을 부릅니다.
"장순다안! 날이 이라고 뜨거지는디 논에 모판 비닐을 아직 안 걷으믄 어뜩혀! 모 다 꼬실라 쥑일 판이여어!"
"장 수운 다안! 아니, 풀이 이라고 우묵장성이믄 꼬추는 으추코 숨 쉬고 살아서 새끼 날 것이여! 비닐도 안 씌운다, 제초제도 안 한다, 그랄라믄 풀이라도 직심있이 매줘얄 것 아녀어! 언능 호맹이 갖고 나와!"
맨날 혼나기 바쁩니다. 어느 날은 나도 씨이, 아짐 이름을 부르기로 합니다. '수길네' '수길 엄니'가 아니라 '순이 아줌마!' 하고 부릅니다. 아짐은 "어어! 염병허여어!" 하고는  듣기에 나쁘지는 않는지 웃고 맙니다. 그 다음부터는 나도 얄짤없이 '순이 아줌마아!' 하고 부릅니다.
순이 아줌마한테 혼나기만 하는 건 아닙니다.
"순이 아줌마! 모내기를 아직 못했는디, 다음주에 해도 안 늦으까라우?"
"잉, 그려. 찔레꽃 피어 있을 때까장은 괜찮해. 아, 우리 때는 가물어서 모내기를 못하다가 장마통에도 했는디, 뭐."
"순이 아줌마! 팥은 언제 놔요?"
"잉? 팥? 자귀꽃 필 때 노믄 되제."
캬! 이 또한 시입니다. 찔레꽃 필 때 모내기 해라, 자귀꽃 필 때 팥 놔라... '몇 월, 며칠, 몇 시, 몇 분, 몇 초에 심어라'가 아니라......!

비료도 안 한다, 제초제도 안 쓴다, 농약도 안 한다, 비닐도 안 쓴다 하니 기가 막힌 순이 아줌마 말씀!
"자네들 뜻은 존디, 자네들처럼 살다는 우리나라 사람들 누가 멕여 살릴 것이여?" 
백번 맞는 말씀! 그런 것 안 쓰고 농사 지으려니 처음엔 소출이 말이 아닙니다. 자식이 하나기 망정이지 옛날처럼 새끼들 줄줄이 있는데, 그 생떼 같은 새끼들 입에 넣어줄 것이 없다면 참말로 사람 환장, 애간장이 다 녹을 노릇이었겠습니다. 화학비료가 뭔지는 몰라도 그것 뿌리니 새끼들 실컷 먹일 수 있어서 얼마나 고마웠겠는지... 농사라고 지어보니 심정을 알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제는 아는 이상 그렇게 할 수는 없지요.
"예! 예!"
머리를 주억거리며 대답은 잘해놓고, 절대로 약은 안 씁니다.
순이 아줌마도 이제 지쳤습니다. 
"아이, 밥을 묵어야 사람이 기운을 쓰등가 새끼를 낳등가 하잖여어. 나락도 묵을 거이 있어야 키가 크등가 여물등가 할 것 아녀? 비료 안 할라믄 딩겨라도 갖다 뿌려. 닭장에 달구똥은 너머 많이 뿌리지는 말고, 많으믄 타죽응께..."
"풀 매기 사나우믄 기양 낫으로 착착 비어서 고자리에 엎어놔. 그래야 거름도 되고 풀도 안 나제."
"허긴, 옛날에는 다 이라고 농사 지었제. 비료가 어딨고, 농약이 어딨어? 새복이믄 눈뜨자마자 길바닥에 개똥 줏으러 다니는 것이 일이었제. 오줌도 아까서 놈의 집서 놀다가도 달려와서 내 집 벤소에 눴제... 맞어, 자네들 말이 맞어, 요새는 그 아깐 똥오줌 다 흘려보내 강물이나 망치고... 우리 논밭도 땅심이 다 죽었어. 한번씩 객토를 할라도 돈이 얼마여?"
"맞어... 옛날에는 바로 요 앞 또랑에서 미나리도 뜯어 묵고, 아 그때는 몸에 해로울 것이 없는께 집 밑에 수채에서도 미나리를 뜯어묵었당께. 그라믄 한나 더럴 것이 없는 물이 내로 흘러가제잉... 꾸정물도 안 버리고 다아 소 멕이고 되야지 멕이고 했제... 가실한 논에서는 물 빼고 미꾸라지도 잡어묵고... 아프믄 약이 어딨어? 다 산에 가서 뭔 병에는 뭐이가 좋다, 뭔 병에는 또 뭐이가 좋다 함서 약뿌리 캐러 댕겼제..."
순이 아줌마 입에서 [오래된 미래]가 줄줄이 흘러 나옵니다.
"그때 농사가 참말 농사제. 요새는 이것이 뭔 농산지 투긴지... 잘 되믄 돈 벌고, 안 되믄 밭째로 갈아엎고... 하긴 우리같이 땅없는 사람들은 그래 하제도 못 하제만..."
"요새처럼 뭐 차고 넘치는 것은 없었제만 그래도 그때는 중한 것이 뭔지는 알고 살었는디... 짐승들 살기도 그때가 낫었제, 사람하고 같이 살었능께. 에고오! 뭔 눔의 시상이 이런 시상이 있능가 몰라!"
[오래된 미래]가 아직 라다크에 있는지 어쩐지는 몰라도 우리 아짐들한테 확실히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잠시 잊거나 팽개쳐 두고 있을 뿐입니다. 순이 아줌마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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