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서로 마음을 열어 고민과 아픔을 나누고 치유하며 행복을 모아내는 게시판입니다.
시골에 오고서부터 술자리는 대개 축제입니다. 그런데 그게 지나쳐서 내가 참 사랑하는 짝꿍이 술을 너무 마십니다. '술 권하는 세상'에서 배운 술버릇이라 그렇다 치더라도 본래 그 인간은 어디로 가버리고 갈수록 뒤끝이 고약시러워집니다. 그렇게 계속 술을 마셨다가는 금방 죽을 것만 같습니다. 겁이 납니다. 아무리 말해도 들어먹지를 않습니다. 나는 결단을 하지 않을 수 없어집니다.
가방 하나 달랑 메고 집을 나옵니다. 늘 그렇듯이 꼬불쳐놓은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달랑 만원짜리 몇 장이 전재산입니다.
"어디로오 갈거나아! 어디로오 갈거나아아!" 졸지에 그런 신세가 되었습니다. 우선 부처님전에 물어봐야겠습니다.
삼천배를 올린 적이 있는 법당에 앉아 절을 시작합니다. 백팔배도 다 마치지 않았는데,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합니다. 이러고 있을 일이 아니라 얼른 그 집엘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 죄송, 나중에 다시 올게요."
언젠가 갔던 친구네 마을에 비어 있던 옆집이 생각났습니다. 마당에 우물이 있던 집, 텃밭도 있고, 기둥이며 지붕이며 무너진 데 없이 멀쩡하게 서 있던 집...... 해가 얼마 남지 않아 부랴부랴 달려갑니다.
집과 땅은 인연이랬습니다. 그 집과 나는 인연이 딱 있는가 봅니다. 주인 아짐이 목포 아들네 집에 살면서도 일년이면 너댓번씩 와서 씨앗도 놓고 콩도 거두어가면서 집을 건사하고 계신다는데 마침 조합장 선거에 참여하기 위해 먼 길을 마다않고 와 계십니다.
주인 아짐은 기골이 장대하니 70이 넘은 나이에도 장정 같습니다. 다만 뭔 수술을 받은 뒤로 귀가 먹었다고 합니다. 당신 귀가 안 들려서 그런지 숫제 소리 높여 외칩니다.
"내가 귀가 먹어서 할수없능께, 아들메느리도 손주 봐줘서 좋탁한께 그라제 내가 왜 이 존 디 두고 씨멘트 콩쿠리트 바닥서 살것이여? 텍도 없제."
다른 사람 말은 안 들어도 되니 주로 혼자 떠드시는데, 원래 남의 말은 잘 안 듣는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손짓 발짓 눈짓 웃음짓 다 섞어 이 집에서 좀 살아도 되겠냐고 묻습니다.
"엉? 그래? 혼자 되야부렀다고? 쯧쯧. 나도 50도 안 된 나이에 혼자 되얐어. 우리 영감이 새끼들 일곱을 놔두고 혼자 가부렀당께. 그래도 내가 그 새끼들 다 키우고 갈치고 다 했어. 괜찮해! 기양 혼자 살어!"
과분지 홀엄씬지 아닌지 밝히기는 생략하고 가방에서 공책을 꺼내 몇 자를 적어가며 허락을 받습니다. 다행히 천천히나마 글자를 읽으실 줄 압니다.
" ... 잉. 그래. 그래. 여그서 살긋다고?"
사람이 안 산 지 오래 돼서 전화도 전기도 끊겨 있습니다. 굳이 그런 것 다 살려서 살고 싶지도 않고, 기왕에 우물도 안 메워져 있는데 모터를 써서 수도를 끌어대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두레박으로 물 길어 먹고 아직 농사철 아니라 농약 걱정은 없을 테니까 빨래는 집앞 냇가에서 하기로 하고 밤에는 촛불을 켜기로 합니다. 안 그래도 좀 쉬고 싶은데, 먹고 자고 입고 하는 것에만 집중해서 살다 보면 좋은 사람이 될 것도 같습니다. 다행히 핸드폰 안테나가 두세 개는 뜨는 곳이라 바테리만 옆집 친구네서 하루이틀에 한번씩 바꿔주면 될테니 급한 대로 핸드폰은 하나 장만해야겠습니다.
 
첫날입니다.
지은 지 이백년이 넘었다는 집. 냇물을 마주하고 서남간으로 집이 앉혀져 있습니다. 방 한 칸, 마루 한 칸, 부엌 한 칸, 그야말로 초가삼간입니다. 70년대 새마을운동 이후이겠지만, 초가는 스레트 지붕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부엌에는 쪽방이 하나 붙어 있습니다. 자식 일곱을 이 집에서 다 키웠다고 하니, 어린 자식들이 이 쪽방에서 태를 자르고 어린 영혼을 살찌웠을 것입니다.
안방 앞에는 냇물을 바라보는 툇마루가 처마 밑까지 나와 있습니다. 햇살 따뜻한 날 해바라기 하기 딱 좋은 곳입니다.
마루방에는 아직까지 단 한번도 도배를 하지 않았는지, 흙벽이 그대로입니다. 바닥에 때묻은 장판이 깔려 있을 뿐입니다. 여기저기서 줏어온 뚝배기 둘, 후라이판 하나, 야외용 가스렌지, 귀떨어진 밥상 하나, 그릇 몇 개가 전부인 살림살이를 장판을 닦아내고 마루방에 놓습니다.
우물은 부엌문 앞 텃밭 가까이에 있습니다.
 
해 지기 전에 우선 방에 불을 때야 합니다. 부엌 아궁이에 가마솥은 아직 구멍 나지 않고 멀쩡합니다. 가마솥에 물부터 채워야겠습니다.
어린 시절 몇 번 해보았던 두레박질이 영 서툽니다. 두레박이 물에 잠기게 하려고 텅텅 소리가 나게 우물에 곤두박질치게 하자니 힘만 들고 물은 반도 차지 않기 일쑤입니다.
그 꼴을 보셨는지 지나가던 마을 아짐이 울도 담도 없는 집 마당에 아는 체를 하고 들어서며 시범을 보여 주십니다. 두레박을 고이 물 위에 내려놓으시고는 두레박끈을 살짝, 그러면서도 순간적으로 힘을 주어 절도 있게 한쪽으로 재낍니다. 두레박은 순하게 물에 잠겨 잠시 후에 하나 가득 물을 담고 표면에 떠 있습니다. 그때 힘들이지 않고 서서히 순하게 두레박을 들어올립니다. 예술이 따로 없습니다.
두레박을 건네받고 나도 따라 해봅니다. 뭐든 열심히만 하면 최고인 줄 알고 살아온 '요즘것들' 티가 짝짝 납니다. 순하게 천천히 하는 것, 그것 자체의 호흡이 영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흠!흠! 사는 것이 모두 이런 것이것다! 도 닦는 게 따로 없는 것이 옛 사람들의 생활이었으니, 힘으로 한꺼번에, 빨리 하려다는 죽도 밥도 안 되는 것이 시골살림이었던 것이었던 것이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열 번, 스무 번...... 이제 호흡이 좀 되어 갑니다. 이웃집 아짐은 '숙달된 조교'의 솜씨를 멋지게 보여주시고, 이 헛된 제자가 좀 기본이 되어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웃음을 짓고 당신 볼 일 따라 가십니다.
오래 안 쓰던 우물이라 물을 되도록 자주 퍼내주어야 합니다. 나는 어느덧 심심해질 때마다 두레박질을 하고 있습니다. 그날 밤 별이 총총한 하늘 아래서 우물에 비친 별빛을 깨뜨리며 나는 늦도록  마음을 닦듯, 도를 닦듯, 호흡을 가다듬듯 두레박질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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