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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를 다시 생각하다 

아가페 - Y의 고백 



                                                                                      출처 : 기독교사상 6월호 http://clsk.org/gisang/





cover_642_s.jpg1. X와 Y, 그리고 에로스

그 옛날 플라톤은 에로스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어떻게 사람이 여자와 남자로 탄생하게 되었는가 하는 이야기죠. 처음에 사람들은 둥근 원형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디든 자유자재로 다니며 즐겁게 살았다지요. 그런데 복에 겨운 인간들이 그만 신들과 동등해지려는 오만함이 생겨나서 신들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신들은 사람들에게 벌을 내리기로 결정합니다. 둥근 원형을 찢어서 둘로 나누고 반쪽끼리 서로를 그리워하며 살게 한 것이지요. 배꼽은 둘로 나누어 찢어진 부분을 묶었던 흔적이 됩니다. 이후로 반쪽이 된 사람들은 나머지 반쪽을 찾아 헤매며 살게 되었는데 이와 관련된 사랑이 바로 에로스라고 합니다.

여기서 둥근 원형은 완전함과 아름다움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로 나뉜 인간은 완전함과 아름다움의 파괴, 그래서 불완전함과 아름답지 못함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겠죠. 플라톤은 불완전하게 된 존재들이 완전함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활력을 에로스를 통해서 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에로스는 완전함과 아름다움을 찾아 떠나는 상승운동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불완전한 존재들이 자신의 짝을 찾아 만나는 관계 속에서 성취됩니다. 완전함과 아름다움은 관계맺음을 통한 원만함의 성취에 있다는 것이겠습니다.


더욱이 흥미를 끄는 것은, 에로스를 통해서 플라톤이 말하고자 했던 것이 여성 X와 남성 Y의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나뉜 반쪽들의 쌍은 X와 Y만 있는 것이 아니라 X와 X, Y와 Y도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 플라톤이 말하고자 했던 완전한 아름다움은 성 정체성을 넘어선 관계의 회복에 있었다고 이해하더라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성 정체성은 보통 두 가지로 나뉘어서 이야기되곤 합니다. 하나는 영어로 sex라고 하는 것으로 생물학적인 구분을 할 때 사용합니다. 다른 하나는 영어로 gender라고 하는 것인데 문화적인 의미에서 여성과 남성을 구분할 때 사용합니다. male/female, masculine/feminine은 각각 생물학적인 성 정체성을 표현하는 남성/여성, 문화적인 성 정체성을 표현하는 남성다움/여성다움을 지칭하는 용어들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생물학적인 성 정체성이 문화적인 성 정체성을 설명해 줄 수 있다는 관점에서 양자의 관계를 설정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곤 합니다. 예컨대 남자보다 여자가 언어능력이 더욱 뛰어난데 이는 남자가 뇌의 한쪽 반구만 사용하는 반면 여자는 좌우 양 뇌 전체를 사용하기 때문이라는 통설이 있지요. 또 남자가 여자보다 공간지각능력이 뛰어나다는 말도 많이 합니다. 동성애가 생물학적인 원인에 의해 선천적으로 정해지기도 한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러한 속설들은 문화적인 성 정체성이 뇌와 같은 선천적인 생물학적 차이를 바탕으로 해서 형성된다는 인식의 연장입니다. 남성이기 때문에 남성답고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답다는,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말입니다.

하지만 생물학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과의 상관관계가 그리 간단하게 결정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우선 인류학적으로 살펴볼 때 문화적인 성 정체성이 꼭 두 가지로만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3, 제4, 제5의 젠더가 인류사에 있어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로, 아메리카 인디언 중에는 오늘날 ‘두 영혼을 가진 이’(two-spirit people)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존재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생물학적 성으로는 주로 남성들이었지만 복장이나 일, 종교적인 역할에 의해 남성과는 다른 이성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더욱이 양성구유(兩性具有, androgyny)1)와 같은 사회관습적 성 정체성과 어지자지(남녀추니, hermaphrodite)2)와 같은 생물학적 성 정체성의 존재는 남성의 남성다움과 여성의 여성다움을 간단하게 말하기 더욱 어렵게 만듭니다.3)


게다가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뇌의 형태나 구조에서 찾고자 하는 앞서의 통설들이 그리 미덥지 못하다는 대목에 이르면,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의 확고한 근거를 선천적인 생물학적 토대에서 찾고자 하는 모든 시도가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물론 남성과 여성의 뇌는 명백히 다릅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식 기능과 관련된 것입니다. 성 정체성 문제와는 또 다른 차원이죠. 예로, 언어능력의 차이에 관한 속설을 살펴봅시다. 여성이 남성보다 언어능력이 뛰어나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여성의 뇌가 더 두꺼운 뇌들보(corpus callosum, 뇌량)4)를 가지고 있다는 해부학적 근거를 제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남녀를 대상으로 한 통계적 연구결과나 MRI를 통한 보다 정확한 뇌들보 측정 결과는 “뇌량의 두께에 있어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성별 간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5)는 것입니다. 남녀의 공간지각능력에 대한 통계학적 결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의미 있는 차이를 발견할 수 없었지요. 또 동성애 유전자에 대한 주장이 제기된 적이 있었지만, 이는 이내 잘못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뇌와 성 정체성과의 관계에 관한 논의는 성차별 문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는 우생학을 바탕으로 인종차별을 정당화하려는 시도와 함께 차이를 차별로 이어왔던 인류사의 왜곡된 자화상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다양성 속에서 삽니다. 그런데 그 다양성에 우열과 순위를 매기는 사회문화적인 기풍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다양성과 우열은 서로 아무런 관련을 갖지 않습니다. 우열과 순서 매김의 근본에는 다양성이 도사리고 있기보다는 혹시 인간의 탐욕과 무지가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성 정체성에 대한 생물학적 결정론은 이러한 질문과 연결되어 있다고 할 것입니다 - 여성 X와 남성 Y는 차이와 분열의 통합을 추구하는 에로스로부터 끊임없이 멀어져간 역사 속에 들어앉아 있는 것이 아닐까요?

어쩌면 이는 상승운동인 에로스의 왜곡된 형태일지 모릅니다. 왜곡된 상승운동의 대표적인 예가 바벨탑이라는 상징물로서 성서에 나오죠.(창 11:1-9) 하늘로 오르는 길로 기획되었던 바벨은 하나였던 언어, 곧 통합된 형태의 문화를 분열로 인도하는 실패한 상승운동으로 끝나고 맙니다. 이러한 왜곡에는 자기 바깥에 있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확립하려는 인간의 자기소외적인 탐욕이 자리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내가 곧 하늘이 되겠다는 것이죠. 그것은 ‘카리스마’()라는 용어가 걸어온 길과도 같습니다. 바울의 서신 곳곳에서 ‘하느님의 선물’로 사용되었던 이 용어는(롬 6:23, 고전 7:7 등) 오늘날 좌중을 사로잡는 인간 자신의 능력을 의미하는 말로 더 자주 사용됩니다. 그래서 카리스마 있는 인간이란 좌중 내지 대중의 형태로 존재하는 인간 ‘바깥에’ 있는 인간이 됩니다. 이 인간의 카리스마는 하느님에게서 연유하는 선물을 자신에게서 연유하는 속성으로 훔쳐 놓은 것, 그래서 인간의 자기소외를 통해 자기를 확립하려는 왜곡된 자기 정체성 형성의 시도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 자신이기를 거부함으로써 참된 인간,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성 정체성의 차이를 생물학적 결정론을 통해 정당화함으로써 남성/남성다움의 우월성을 입증하려고 하는 시도는 오늘날 카리스마의 역사와 맞물리면서 교회 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남성/남성다움이 하느님에 대입되면서 교회의 상부구조를 차지하고 있는 교회 현상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Y의 아가페

일찍이 들뢰즈(Gilles Deuleuze)는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요약적으로 보여주는 ‘백인 남성’이라는 개념이 그리스도의 얼굴이라는 형태로 기표화·주체화되었음을 밝힌 바 있습니다. 얼굴은 머리를 포함한 몸 전체를 새롭게 구성하여 덧입혀진 개념으로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권력을 표시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이를 전제로 그리스도의 얼굴은 기독교-코드에 의해서 정형화되고, 이를 기준으로 해서 다른 모든 기본 얼굴들을 구성하고, 모든 격차들을 배열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몸체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환경들을 얼굴-풍경의 관계에 진입하게 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얼굴화는 반드시 기호체제의 맥락에서 진행됩니다. 그는 이렇게 적습니다. “모든 방향으로 얼굴과 얼굴화의 과정들을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십자가의 기호 아래서이다.”6)  백인 남성들은 십자가라는 기호를 통해서 표준적인 인간상을 설정하고 이를 자신들에게 대입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백인 남성을 기준으로 다른 인간들의 우열과 순위를 정할 준비를 한 것이죠. 

어쩌면 한국교회에서 남성 Y는 백인 남성을 대별하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중심으로 해서 서열화 된 기나긴 줄 사이의 어딘가에 놓여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얼굴로 덧입혀진 백인 남성의 얼굴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고자 하는 유혹에 자신을 내어맡기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 유혹의 한 축을 자본주의가, 또 다른 한 축을 서양인 중심의 세계 인식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자기 외부의 것으로부터 자신을 규정하고자 하는 탐욕의 세속화를 대변한다면, 서양인 중심의 세계 인식은 이 탐욕의 초월화를 대변합니다. 그리고 탐욕의 초월성은 결국 우리가 소중하게 여겨온 아가페 사랑에 침투합니다.

아가페는 헬레니즘 문화권에 이미 있었던 사랑 개념이었지만 필리아(우애)나 에로스보다 더 중요하게 부각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던 것을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느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도입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으로 재개념화되었습니다. 따라서 아가페가 강조하는 것은 하느님의 희생적인 자기 비움의 사랑행위 자체에 있습니다. 이 사랑은 인간에게도 동일한 사랑의 실천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헬라적 사유방식이 점점 더 서구인들의 문화 깊숙이 파고들게 되자 아가페를 이해하고 강조하는 방식이 변합니다. 니그렌(Anders Nygren)이 쓴 아가페와 에로스에 관한 책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그는 아가페를 신본주의적인 하강운동으로 보면서 그 출처가 어디인가를 더 강조합니다.7) 아가페란 오직 하느님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이기에 그 외의 것을 출처로 하는 것은 아가페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부각시킨 것이죠. 하느님이 곧 아가페이시기에 하느님만이 아가페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신앙고백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의 신앙고백이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갔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됩니다. 이미 에베소서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아가페와 이에 대한 순종과 존경의 관계로 그려내고 있지요.(엡 5:22-33) 이 서신이 신약성서가 확립되는 후기나 그 이후의 것이라는 학설을 바탕으로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일찌감치 ‘하느님-교회’의 관계를 ‘남성-여성’의 관계로 확장해서 남성 우위의 이데올로기를 교회 ‘내에서’ 정당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교회의 신앙고백은 하느님의 아가페 되심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가페를 남성의 남성다움 속으로 끌어다가 사용함으로써 남성과 그리스도를 은근히 중첩시키는 효과를 냅니다. 하느님과 피조물의 관계가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확정하고 정당화하는 이념으로 사용된 것이죠. 이것은 서양인 중심의 세계 인식에 삽입되면서 서양의 문화를 이룩해 왔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아가페는 Y의 아가페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간 탐욕의 초월화에 다름 아닙니다. 왜곡된 상승운동으로서의 에로스, 바벨탑의 망령은 여전히 교회의 아가페 속에 드리워져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남성 Y는 이러한 이념 한 가운데에 서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남녀를 불문하고 대부분의 한국교회 교인들이 하느님을 남성으로 고백합니다. 그들은 창세기의 창조설화를 근거로 남성이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여자는 그 형상의 일부를 재료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좀 부족한 존재라고 이해되고요. 하지만 이것은 오늘날 참으로 비상식적인 일인데 굳이 이 설화를 참조한다면 여성이 남성보다 신제품이라는 것 아닌가요? 보통은 신제품이 구제품보다 더 발전한 것으로 이해되지 않나요? 남성이 여성보다 완성도가 높은 하느님의 형상이라는 이해에는 하느님이라는 원형이 있고 남성이 하느님의 원형을 더 잘 보존하고 있다는 원형적 사고방식이 깔려 있습니다. 반면 오늘날 우리에게 더 익숙한 사고방식은 역사는 진보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원형을 근거로 하는 ‘아가페-Y’ 이론은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일 수 있습니다. 

‘아가페-Y’는 한국교회 Y들의 이상으로 남아있습니다. 이 이상으로 인해 카리스마 있는 남성 목사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그는 아가페-하느님을 대리하는 아가페-Y로 자리 잡습니다. 이는 자기 외부의 것으로부터 자신을 규정하고자 하는 탐욕의 초월화가 교회 공동체의 내적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게다가 교회의 외적 구조는 교회가 들어앉아 있는 사회의 구조를 충실하게 반영하는 게 보통입니다. 교회의 이상은 세속의 문화를 변혁하는 것일지 모르지만, 교회의 실상은 세속의 문화를 반영하는 것이 속사정이지요. 한국교회는 자본주의 정치경제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유교적 민주주의국가사회에 놓여 있으면서 이 사회의 모습을 충실하게 반영합니다. 누가 교회의 ‘일꾼’으로서 직분의 요직에 앉아 있습니까? 대부분이 경제력 있는 남성들입니다. 한국교회의 Y들은 자기 외부의 것으로부터 자신을 규정하고자 하는 탐욕의 세속화를 자본주의라는 형식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 돈이라는 허상을 중심으로 하는 이윤 추구를 말입니다.
 

그러니 한국교회의 남성들은 안팎으로 분열증을 앓고 있는 셈입니다. 안으로는 자신이 신이 될 수 없음에도 신을 추구하는 가운데 자신으로부터 분열됩니다. 밖으로는 자신의 외부에 있는 돈-허상을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위장된 탐욕의 성취물로 간주함으로써 자신으로부터 분열됩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이들은 성화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이냐고 물어올 지도 모르겠습니다. 성화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이겠습니까. 다만 참된 성화는 자신을 성찰하면서 새사람이 되는 과정에서 성취되는 것이지 자신의 외부에 놓여 있는 하느님 원형이 마치 자신일 수 있는 것 마냥 절대화하는 과정에서 성취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본주의가 남성과 여성 개인들에게 자기실현을 위한 더 많은 자유를 가져다주는 측면이 있지 않느냐고 항변할 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윤을 더 늘이고자 할 때 노동력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로 인해 파생되어 나온 부산물로서의 자유가 아니던가요? 오늘날 안팎으로 자기소외를 경험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Y들은 외롭습니다. 자신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탐욕의 세속화와 초월화라는 틀 속에 갇힌 아가페에 직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디 그들뿐입니까. 남성의 소외는 여성의 더 고통스러운 소외를 야기합니다. 이 세계 도처가 외롭습니다. 다양성들의 생기발랄한 풍부한 만남들은 우리의 외로움을 더욱 조장하는 장벽과 같은 꿈으로 남아 있습니다.


3. 아가페 ‘대’ 에로스? 아니면 에로스 ‘그리고’ 아가페?

에로스는 분열되어 불완전한 것들의 통합을 향한 상승운동이며 아가페는 완전한 것의 자기희생을 통해 불완전한 존재들의 회복을 일으키는 하강운동입니다. 니그렌과 같은 이들은 에로스를 인간의 노력과 공적이 부각되는 상승운동으로, 아가페를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가 부각되는 하강운동으로 특징지으면서 양자의 종합이란 불가능한 것이라고 단정합니다. 양자는 이질적인 것으로 변증법적 운동마저도 피해가는 대립을 통해 기독교 역사 속에서 아가페의 생동력을 제공해왔다는 것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가페와 에로스처럼 서로 완전히 상치되는 2개의 세력 사이에 어떤 진짜 종합(synthesis)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에로스는 아예 처음부터 가난과 공허감에 사로 잡혀서 그 궁핍함을 채워 만족을 얻으려고 하나님 안에서 그와 일치되기를 한없이 갈망 희구하는 것이고, 아가페는 하나님의 은총을 통한 부요함 때문에 그 자신을 사랑으로 쏟아 붓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로스와 아가페가 서로 성공적인 통합을 이룬 것으로 보이면 보이는 정도만큼 그것을 아가페 동기의 관점에서 보면 아가페의 실패의 척도를 나타내는 것이 된다. 그것은 곧 아가페의 배반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8)


과연 그런가요?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는 아가페를 오히려 그리스식 에로스와 구약성서 여호와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아가페의 하강운동은 단지 에로스의 상승운동을 뒤집어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9) 그럼에도 이 전이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습니다. 인간 -죄인은 더 이상 대가를 제공하지 않고 오히려 “가장 사랑 받은 자”10) -예수의 죽음을 통해 사랑을 입습니다. 그것은 시간을 타고 이어지는 부활을 통해 입증될 것입니다. 하지만 크리스테바는 교회에 물어옵니다. 죽음을 통한 부활의 약속은 결국 영원을 역사 속으로 끌어내린 신성모독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더욱이 이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을 일회적으로 확정함으로써 희생을 종결시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상징적인 구강운동 뿐입니다. 성찬 속에서 ‘그의’ 죽음을 먹음으로써 ‘우리’는 화해합니다. 구강운동 속에서 식성과 말씀이 교차하는 그것은 바로 상징입니다. 크리스테바가 보는 바 아가페와 에로스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이질적인 사랑들이 아닙니다. 그녀가 보여준 것은 에로스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아가페가 이미 에로스의 전이로서 닮아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초기 기독교 교회와 바울은 모두 에로스로부터 탈출해서 아가페를 건설했으나, 건설하고 보니 에로스와 닮았다는 것이죠. 앞서 표현했던 것처럼 Y의 아가페는 왜곡된 에로스일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아가페와 에로스를 대결구도로 놓았던 니그렌이나 아가페를 에로스의 전이된 형태로만 이해하는 크리스테바의 분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아가페와 에로스를 분리시키는 생각에는 신이냐 인간이냐 하는 사랑의 주체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주체의 문제를 떠나서 양자를 잘 살펴보면, 두 사랑이 추구하는 것은 불완전하고 분열된 존재들의 원만한 통합과 회복입니다. 하나는 상승운동으로 나타나고 다른 하나는 하강운동으로 나타날 뿐이죠. 주체 문제가 극대화되면서 Y가 자신을 신과 동격으로 놓는 이데올로기가 형성되었다면, 이제 주체 문제를 내려놓음으로써 아가페와 에로스를 배타적으로 생각하던 마음을 고쳐야 합니다. 이념의 딱지를 떼어놓는 것이죠. 오히려 그 사랑들이 추구하는 이상에 집중하면서 양자의 운동성을 두루 사용할 줄 아는 유연성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겐 상승운동으로서의 사랑을 알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위에 있는 사람들에겐 하강운동으로서의 사랑을 알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 두 경향이 조화를 이루며 관계의 원만한 회복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Y의 아가페는 본연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즉 Y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신의 형상 이념을 떠나 아가페가 가지고 있는 희생적인 사랑으로서의 하강운동을 감행해야 합니다. 이는 단지 개인들의 결단만으로 끝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아가페-Y’이론으로 무장된 조직적인 사회와 문화 자체의 전반적인 수정이 필요합니다. 더불어서 ‘아가페-Y’이론의 강제 속에서 더 고통스럽게 소외된 X및 여타의 Y아닌 존재들은 에로스의 상승운동을 따라서 자신을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또한 개인의 열정에 맡길 문제가 아니며 사회문화적인 회복으로 실현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공동 작업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며 교회의 한 사명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뇌과학은 뇌에 가소성이라는 것이 있어서 뇌의 내적·외적 환경과 교류를 하는 가운데 정체성을 형성해 간다고 말합니다. 성 정체성도 그렇게 형성되어 간다는 것이죠. 교류와 관계를 떠나서 자신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남성들은 우월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심리적 탐욕을 버리고 관계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사랑의 양대 운동에 모두 열려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의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아가페 ‘대’ 에로스라는 배타적인 사랑 이해가 아니라 에로스 ‘그리고’ 아가페라는 통전적인 사랑 이해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교회를 ‘섬기는’ Y들에게 주어진 과제, 교회가 교회다울 수 있는 길에 기여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아가페가 가장 아가페답게 되는 길은 에로스와 만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쓰고 있는 한국교회의 한 Y로서 반성적인 고백으로 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아내 X는 “네가 쓰는 글이 좋은 글이 되어 나오지 않는다면 나의 희생과 인내가 헛되게 되는 것”이라는 취지의 말과 함께 글 쓰는 공간을 확보해주기 위해서 물심양면의 노력을 기울여주었습니다. 이미 남편의 인생여정을 위해 자신의 인생계획을 허물어뜨린 그녀였기에 둘의 결합은 그 시작부터 ‘아가페-Y’이론에 포함된 것이었습니다. Y의 성공 속에 모든 것이 종속되는 구조는 우리들이 어떻게 하기에는 너무 강고한 사회 구조가 되고 있습니다. 그 구조 속에서 상대적으로 더 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은 결코 Y가 아닙니다. 게다가 이 글은 여전히 X의 일방적인 희생을 전제로 한 Y의 성취 속에서 완성되고 있습니다. 처음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글을 완성해 가는 과정에서 생각하게 됩니다 -괜히 이 글을 맡았던 것은 아닐까. X의 희생 위에서 X의 회복과 Y의 반성을 촉구하는 글이 쓰여야 한다는 점에서 저는 지금 이율배반에 처해 있음을 깨닫습니다. 일단 지금은, 너무 비관적이 되지 않을 힘을 발휘해서 비난을 받을 각오와 함께 말씀드립니다-정말, 죄송합니다. 



신익상 l 박사는 서울대학교에서 물리학을 공부하고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종교철학으로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현재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종교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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