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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상실한 교회

일반 조회수 8696 추천수 0 2009.01.13 21:02:07

 

도란 무엇인가.

길이란 무엇일까.

도를 도라고 말하면 이미 도가 아니고 길을 길이라 하면 이미 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를 말하고 이름을 짓는 것은

비록 그것이 도가 아니라 하더라도,

비록 그것이 참된 이름은 아니라 하더라도

말의 너머에 있는 도에 이르고자 함이요

이름 너머의 실재를 만나고자 함 일 것이다.

하여 진리를 말할 때 흔히 부정의 어법을 동원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적어도 ‘도는 ~은 아니다’는 식의 방법을 택하는 것이다.

‘이다’ 보다는 ‘아니다’는 것으로 가까이 다가서려는 것이다.

이것이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이라는 노자의 어법이다. 그

러나 그것만으로도 역시 충분한 것은 결코 아니다.

 

여기 성경의 진리에 대한 진술을 살펴보자.

 

도란 무엇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예수는 말한다. 내가 곧 길이요, 내가 곧 진리요, 내가 곧 생명이라고.

그것은 노자의 진술과도 다르고 부정 어법과도 다르다.

 

I am the way.

I am the truth.

I am the life.

 

그러면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고 한다.

지금은 나의 가는 길을 알 수 없지만 후에는 알게 되리라는 말과 함께

그의 생애 마지막을 예고하면서 하신 말씀이다.

 

이 무슨 청천벽력이란 말인가. 내가 길이라니, 내가 진리라니, 내가 생명이라니.

이보다 간결하고 명쾌한 것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과연 명쾌한가. 그렇지 않다.

이것처럼 난해하고 복잡한 것이 또 있는가.

노자는 도를 도라고 말하면 이미 도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예수는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고 있다.

그것은 한편 간결 명쾌하고 직설적이지만

문제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는 ‘나’에 있다.

 

간결한 듯 간결치 않은 것은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하는 것이 풀리지 않는 화두요,

알 수 없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예수의 말씀을 철저히 곡해한다.

종교인들은, 기독교인들은 이 말씀을 철저히 교리화 해버렸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기독교인데,

예수만이 길이요, 예수만이 진리요, 예수만이 생명이라는 새로운 교리가 등장했다.

즉, 예수를 교주로 삼고 예수를 자신들의 임금을 삼는 구실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을 원천 봉쇄하고

더욱 오리무중으로 만들어 놓았다.

 

기왕에 나온 말이니 요한복음 14장의 여러 정황을 살펴보자.

대화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또 이런 말씀도 있다.

너희가 나를 알았다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그를 또 보았느니라고.

 

빌립이 묻는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는 말씀하신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여기 사람들과 예수와의 큰 간극이 있다.

물론 빌립과 예수 뿐만 아니라 오늘날 기독교인들과 예수의 사이에도 마찬가지의 구렁이 있다.

어떤 거리인가.

그렇다. 빌립이 보고 싶은 하나님과

오늘날 종교인들이 믿고 싶은 하나님은 동일한 하나님이다.

 

그러나 예수가 말하고 있는 하나님과는 전혀 다르다.

예수는 빌립이 보고 싶은 하나님을 보여줄 수가 없다.

예수의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

 

예수는 말한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그래서 한 술 더 떠 오늘날 인간들은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각종 교리들이 마구 등장한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는 곧 하나님이라고.

 

거기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얼핏보면 너무나 성경적이 아닌가.

도리어 이 말에 토를 다는 것은 명백히 이단의 증거가 아닌가.

말씀인즉 지당하고 지당하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예수는,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지 않는가.

사람들은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는다.

 

예수를 믿는다는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천하 인간에게 구원 얻을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예수를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문제는 그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여기서 예수는 그 예수가 아니다.

육체대로의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육체를 따라 예수를 이해하는 것은 예수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가 말하는 ‘나’는 육체대로의 예수를 일컫는 것이 아니다.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고 할 때의

‘나’는 목수의 아들 예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당시에도 그를 따르던 제자들이나 그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사람들과의 간격도

바로 그 같은 데서 발생한다.

사람들은 예수를 볼 때 그의 속 사람을 보지 않는다.

그의 겉을 따르고 겉 사람 예수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하려 한다.

서로 커뮤니케이션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도 그래서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다.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은 예수 속의 ‘나’였다.

그것이 그가 보여주고 싶은 하나님이었다.

그래서 그는 ‘나’는 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나’를 도외시하고 하나님을 보려는 모든 시도는

허공에 대고 헛손질하는 것에 불과하다.

 

얼마나 답답했을까.

빌립에게 그는 말한다.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그렇다. 빌립은 예수와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있었지만,

예수를 알지 못한다.

예수를 보고 있었지만 예수를 보지 못했다는 말이다.

왜인가.

그가 함께 하고 있었던 예수는 어떤 예수이기에 예수를 알지 못한다는 말인가.

빌립이 그렇게 예수를 따라 다녔지만

그가 따라 다녔던 예수는 겉 사람 예수였다.

따라서 그는 예수를 보고도 예수를 보지 못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빌립은 예수가 하나님을 보여주기를 바랐다.

예수를 따라 다니면서 아마도 예수는 하나님을 보여 줄 수 있는 분임에 틀림없다고 믿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그가 예수에 대해 하나님을 보여 줄 분이라고 믿는 그 믿음은

그러므로 철저히 육신에 속한 믿음일 따름이다.

즉, 스스로 믿는 스스로의 믿음,

스스로 설정한 예수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일 뿐이다.

 

그래서 그 믿음이 아무리 굳세고 좋은 믿음이라고 할지라도 헛된 믿음일 따름이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하는 현장에

빌립인들 없었을 것인가.

예수가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베풀 때

빌립은 생생하게 그 현장을 목도하고 또 목도 했다.

하여 예수가 메시아임에 틀림없다는 확신을 가졌다고 짐작하는 것조차

빌립에게 결례가 되는 것이다.

체험, 그것은 빌립에게 있어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예수에 대한 생생한 경험일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가 경험하고 체험하며 이해하고 느끼고 있는 예수는 어떤 예수이며,

그가 바라고 대망하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다는 말인가.

 

빌립이 열망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무엇인가.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가 일컫고 있는 ‘나’는 빌립이 보고 있는 그 예수가 아니다.

예수가 ‘나’라고 말하고 있는 ‘나’는 아브라함이 보고 기뻐했던

그 ‘나’를 말한다.

다윗 때에도 있었던 그 ‘나’를 말한다.

 

예수를 통해서 그 존재를 본다면,

그것은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러나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그 예수’를 보지 못했다.

다만 그 ‘나’를 담고 있는 그릇에 불과한 겉 사람 예수를 보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를 보지 못한 것이다.

아니, 그래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여전히 떼쓴다.

 

요한복음 14장은 예수의 공생애가 마무리되고 있는 시점이다.

사연이야 어떻든 제자들은 생업을 내 던지고 예수를 따랐다.

 

그를 믿었다.

그를 믿지 않고서야 어찌 예까지 따라 왔겠는가.

그런데 예수는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고?

 

제자들이 믿은 예수는 누구이길래,

여기서 다시 ‘나’를 믿으라고 강조하시는가.

그 동안 예수를 믿고 따라왔는데, 그 믿음은 무엇이길래 또 다시 믿으라고 하는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예수는 누구인가.

 

기독교는 이 점에서 예수가 말하고 있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가 부정하고 또 부정한 그 겉의 예수를 믿는 종교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예수는 다른 예수가 되었다.

 

예수가 말하고 있는 그 ‘예수’, 그 ‘나’는 거세되어버린 채,

다른 예수, 육체대로의 예수만이 교회의 주인이 되어버렸다.

여기 비극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교회는 예수를 상실한 것이다.

열심히 예수를 믿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예수, 버러지 예수, 세상 임금 예수만을 고집하며 주인으로 모시고 있으니

그 예수는 처단되어야 할 사탄이 되었다.

 

예수께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하나님인가.

 

예수는 말씀하신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제자들에게 ‘누가 내 모친이며 내 형제냐’고

자신의 육신의 어머니와 형제를 바라보며 반문하시던 예수.

거기서도 육체를 따라서 말한다면 마리아와 그의 형제들이 분명한 그의 어머니며 형제들이었다.

그러나 예수가 누가 내 어머니며 형제며 자매인가라고 할 때의 그 예수는

예수가 참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예수였다.

그것이 요한 복음 14장에서 말하고 있는 ‘나’이다.

예수에게 있어서의 하나님은 바로 그 예수의 ‘나’였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 ‘나’ 안에 계시고 그 ‘나’는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처소가 어디인지가 분명해진다.

그 자리에, 하나님이 계셔야 할 그 자리에 다른 존재가 앉아 있으니

예수는 이 성전을 청소하고 소제하러 오신 분이다.

처소를 예비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육체 대로의 예수가 떠나야 비로소 처소는 예비된다.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오늘날 하나님에 대한 칭송이 하늘을 찌를듯하다.

하나님에 대한 높임말이 하늘에 닿아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신 무소부재하시고 편만하신 하나님이다.

이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은 인간의 가상한 표현인가.

이 말을 듣는 하나님이 얼마나 흡족해 하실까.

이처럼 신학적이고 성경적이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려는 ‘코람 데오’의

갸륵한 신앙이 또 어디 있는가.

이는 신을 향한 인간의 지독스런 아부근성이 철저히 배어 있는 주술적 용어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을 표현하는데 최고의 찬사와 신학 이론으로 흠잡을 데 없이 무장된

무소부재하시고 편만하신 하나님 속에는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은 존재치 않는다.

예수가 보여주고 싶은 하나님은 거세되었다는 말이다.

예수는 하나님이 무소부재하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아니 성경은 하나님이 어느 곳에나 계시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의 수많은 선진들은 하나님이 계신 처소에 대해서 의견이 일치한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성전에만 거하신다고 가르친다.

그렇다. 미안하지만 하나님은 오직 성전에만 계신다.

아니다. 성전에서도 휘장 너머의 지성소에만 계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이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 모세 오경이 있고

선지서와 시가서와 신약의 많은 성경들이 있다.

 

성경 어느 곳을 보더라도 성전이 빠지고 얘기되는 곳이 있는가 자세히 살펴 보라.

신구약 모두 이 성전을 이야기하기 위한 책이 아닌가.

하나님은 오직 예루살렘 성전에만 계시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저토록 성경이 두꺼워졌다는 사실을 아시는가.

 

언제부터인가 이러한 가르침을 희석시키기 위해서 누군가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몰라도

하나님은 성전에서 축출되었고 금칠이 되어서 아니 계신 곳이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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