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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신과 여신에 관한 담론

일반 조회수 8516 추천수 0 2009.02.02 22:06:15

아버지와 어머니






얼마 전 댄브라운의 ‘다빈치코드’가 출간되어 여신에 관한 논란이 세간의 관심 거리 중 하나다. ‘엄마 찾아 삼만리’라는 일본 만화가 유행한 적이 있다.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지금도 사랑받고 있다.

우리에게 여신은 없는가. 남신만 있고 여신은 존재하지 않는가. 다산의 상징인 여신은 평화와 생명의 이미지로, 남신은 씨뿌릴 땅을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야기하는 전쟁신의 이미지로만 존재하는가. 진정한 평화는 여신에게서 주어지는가. 이제 하나님 아버지의 시대가 거하고 하나님 어머니의 시대가 도래할 때가 되었는가. 역사는 여권의 시대에서 남권의 시대로 다시 여권의 시대로 흐르고 있는가. 근대와 현대는 가히 남근으로 상징할 수 있는 이성중심의 시대였음이 분명하다.

평화와 사랑의 종교는 이름뿐 종교의 배타성은 이미 폭력을 내재하고 있다. 언제든 이익이 침해될 때 전쟁과 파괴를 불사한다. 종교가 자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사랑과 평화를 말하더라도 그것은 사랑과 평화를 위장한 것일 뿐, 패거리 중심인 끼리끼리의 평화라는 것이 속속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평화의 신은 온 데 간 데 없고 폭력의 신만 주름잡고 있으니, 남근중심적 신이 탄핵의 대상이 되는 것은 마땅하지 않은가. 그동안 권위에 눌려 말조차 꺼내지 못하던 ‘엄마찾아 삼만리’의 여행이 종교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의 트렌드가 될 전망이다. 남권만 강조되는 것도 불행이고 여권만 신장되는 것도 문제이며 남녀평등이라는 이론적인 주장도 공허하다. 신들의 세계에 있어서랴.

포스트모던의 시대는 여권의 시대인가. 남근중심으로 형성된 모든 이성적 논의들, 진리의 체계, 보편성의 원리, 진리에 대한 진술들, 남신으로 군림하고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절대 권위는 마침내 해체당할 위기에 처하고 있다. 해체당해야 한다. 진리는 로고스의 진술에 있는 것이 아님이 들통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성을 자랑하고 이성의 칼을 휘두르며 세계를 지배하던 시대는 그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해와 달은 낮과 밤을 비추는 두 개의 광명이다.

근·현대는 로고스 중심의 시대였다. 로고스는 씨뿌릴 곳을 찾고 또 찾는다. 모천회귀의 연어처럼 자신이 태어난 곳을 찾아 끊임없는 여행을 계속한다. 망망대해를 주유하면서 천하를 호령하던 기개를 접고 건강한 씨를 잉태한 연어는 태어난 곳, 어미의 태에 도달해 씨를 뿌리곤 죽음을 택한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어머니를 다시 찾는다는 것, 그것은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나서는 또 다른 여행이다. 신의 모성 속에서 신의 아들들은 다시 태어난다. 생명은 낮의 빛 아래서만 자랄 수 없다는 진실의 드러남이며 이성의 진리가 밝아질수록 작렬하는 태양빛에 의해 이젠 제 스스로 시들어 어둠을 향하고 있다. 밤을 그리워하고 있다. 생명은 두 광명에 의해 자란난다.

신화에 나타나는 여신은 대개 달의 신으로 나타난다. 미의 여신이나 승리의 여신은 서구신화에 담겨 있는 복합적인 여신 이미지이기도 하다. 아테나는 지혜의 여신이기도 하고 아르테미스는 달의 여신이다. 인도인들이 그들 문명의 젖줄인 갠지스 강가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인도문명과 그들의 심성을 잘 드러내주는 것이라 하겠다.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은 문명을 달리하면서 여러 형태로 표현된다.



우리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으로 태어난다. 아버지로만 태어날 수도 없고 어머니만으로 태어날 수 없다. 우리가 거듭나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브라함은 아버지다. 육신의 아버지가 아니라,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다. 우리 영의 세계에도 두 아버지가 존재한다. 처음 아버지는 아브람이요, 두 번째 약속의 자녀가 태어날 때의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다. 아브람에게있어 하나님의 약속은 관념이고 인식으로만 와 있는 약속이다. 인식하고 있는 믿음은 하나님의 믿음이 아니다. 아브람의 믿음이요, 인식하고 있는 믿음이 낳는 자녀는 이스마엘이다.

어머니도 둘이다. 인식하고 있을 때 낳는 어머니는 하갈이요, 약속의 자녀를 잉태하여 낳는 어머니는 사라이다. 우리는 두 개의 자궁을 갖고 있다. 육에 속한 자녀 이스마엘을 낳는 하갈의 태를 갖고 있고 또 하나는 약속의 자녀를 낳는 사라의 태이다. 사라가 불임의 고통에 시달리듯, 아브람의 씨로는 사라의 태에 씨를 뿌릴 수 없다. 아니 아브람의 씨로는 사라의 태가 동하지 않는다. 이 때의 믿음은 아브람의 믿음이지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니다. 갈등은 하갈의 태에 태기가 있다고 해도 그것이 사라의 태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하갈과 사라는 이야기에 두 개체로 등장하지만 내 안의 두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기 두 여신이 존재한다.

아브람과 아브라함이 두 종류의 남신이라면 하갈과 사라는 두 종류의 여신이다. 아브람과 아브라함은 두 종류의 로고스라면 하갈과 사라는 두 종류의 태요, 두 종류의 예루살렘이다.

우리에게는 두 남자와 두 여자가 있고 경우에 따라서 두 아들이 있게 된다. 신화속에 담겨 있는 수많은 여신의 뿌리에 하갈과 사라가 있는 셈이다. 문명을 달리하고 문화가 달라서 다소 표현이 상반된다 해도 근저에는 동일한 기원이 깃들어 있다.

바울은 사울이 아니다. 바울은 새로 태어난 사람이다. 바울은 자신이 태어난 자기 인식을 진술함에 있어서 분명히 하는 점이 있다. 사울은 유대주의가 낳은 아들이라면 바울은 유대주의로부터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자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울과 바울은 육체(쏘마)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울이 갖고 살던 세계관과 다메섹의 경험 이후 바울이 갖게 되는 그의 정신과 영성의 세계를 일컫는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갈 1:1)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고 사람으로부터 태어난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이 말은 언뜻 정신나간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다. 사람에게서 태어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이것은 바울의 육신의 기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의 됨됨이의 기원을 말하는 것이다. 속사람이 거듭나는 근원을 말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사람이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이상히 여기지 않는다면 바울의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 리가 없다. 그는 복음으로 거듭난 사람이다. 그가 복음의 기원에 대해 여러 곳에서 상세히 말하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2)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며, 사람에게서 받거나 배운 것도 아닌 그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일 따름이다. 이렇게 단호하고도 분명한 바울의 선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를 곧잘 곡해한다. 다음의 구절에서 곡해는 극에 달한다.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1:15)



이 말은 바울의 육신(쏘마)의 태를 일컫는 것이 아니다. 그의 육신의 어머니가 누구이고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언급이 없다. 다만 베냐민지파요 길리기아 다소 사람인 것 정도만 나와 있다(행 22:3). 그를 낳은 육신의 태와 어머니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다. 지금껏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라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한 바울이 새삼 자신의 육신의 모태를 일컬어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했다고 하겠는가. 일부러 앞의 이야기를 잊으려는 것이든지 아니면 소경이어서 바울의 말을 듣지 못하거나 보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앞의 얘기와 뒤의 얘기를 끊어놓고 읽는 것은 글을 읽는 사람의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라는 뜻은 하갈의 태가 아닌 사라의 태에서 아들을 낳게 하신 약속의 유업을 일컫는 것이다. 이 약속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고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음이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종교우월의식이나 허위의식을 고취할 문제가 아니다. 사명감도 좋고 목숨을 바친 충성심도 좋지만 선민의식의 구별로 전쟁을 야기하는 모든 종교적 군상은 허물어져야 한다. 소위 예정론을 중심으로 형성된 교리적 악폐는 철폐되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도 여전히 그 위세를 떨치고 있다.

바울이 바울 된 것은 사람으로부터도 아니고 사람으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음이라는 그의 고백처럼, 우리의 우리됨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정신적인 사생아를 적자로 주장하는 일이 계속될 것이다. 이스마엘을 유업을 이을자 이삭으로 여기고 세월가는 줄 모르는 삶이 계속될 것이다. 거짓 화평과 거짓 복음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도처에 있다.



우리에게 있는 두 가지 태를 오늘의 언어로 말해보자. 두 가지의 태는 두 가지의 씨를 전제로 한다. 태는 궁합이 맞는 씨를 맞이하기 마련이다. 코스모스의 세상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그의 씨를 뿌린다. 이 때 뿌리는 밭, 태는 곧 인간의 인식의 밭인 머리다. 이성적 지식이 이성에 뿌려진다. 인식의 활동 공간인 이곳이 곧 태이다. 이곳에서 형성된(낳음을 입은) 존재는 곧 인식의 확대, 앎의 확대를 꾀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한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을 머리에 담겨 있는 정보력이나 사회적 지위, 그리고 명성과 소유하고 있는 재산에 둔다. 특히 머리에 집적된 정보능력과 추론 능력을 자신으로 여기게 마련이다. 하여 그의 아비는 세상이다. 소위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다’라는 자긍심의 근원이 세상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곧 ‘나는 누구냐?’는 물음에 대한 무언의 응답인 셈이다. 윤리적으로는 율법의 의로움이 자기 정체성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율법적 행위가 곧 자신의 현주소이니 그의 아비는 율법이요, 지식이며, 소유이다. 그의 어미는 율법의 씨를 받아서 율법의 자녀로 낳고 키우는 하갈이니 오늘날의 예루살렘이며, 종교의식의 세계요, 머리이고, 조직이고, 종교의 조직으로 전락한 교회이며, 시스템이다.

지식은 지식을 낳는다. 정보력은 곧 기운이다. 정보를 집적하는 창고가 곧 태이며 거기서 새로운 정보를 생산하는 아들이 태어난다. 정보 프로덕션이 곧 이스마엘이기도 하다. 지식은 끊임없이 연하여 집을 짓는다. 사람들은 곧 이를 자신의 거처로 삼기도 하고 자기 자신이 되기도 한다. 거기서 낳은 거인을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인 줄 오해하며 산다.

또 하나의 태를 우리는 가지고 있다. 이 태는 숨어 있다. 숨겨진 태이다. 다만 약속으로 있는 누이이며 아내이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사라가 누이이며 아내였듯 숨겨진 태는 우리 어머니이며 또한 누이이고 아내이다. 이 곳에 뿌려지는 씨는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갈에게 뿌려지는 씨는 온통 밖에서 주어지는 것들이다. 외부에서 뿌려지는 씨이다. 세상임금의 씨를 아브람의 남근을 통해 하갈에게 뿌리는 것이다. 그러나 사라의 태는 아무 씨나 받지 못한다. 약속의 자녀가 태어나리라는 약속만 받았을 뿐 정작 태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불임환자들이다. 구로치 못하는 여인의 눈물을 흘려본 자들이 사라의 태의 허전함을 안다.

라헬이 아니고서야 라마의 슬픔을 알 까닭이 없다. 아무리 애를 쓰고 몸부림쳐도 하나님의 씨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 사람만이 모든 종교행위가 허구임을 안다. 종교행위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한 많은 불임의 고통속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약속마저도 우습고 허망한 것으로 보일 때 하나님의 또다른 일은 시작된다. 하나님의 약속이 농담처럼 여겨지고 더 이상 믿을 것이 못될 때 비로소 약속은 성취된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고 하나님의 언약에 고무되어 언약을 붙잡고자 하는 자기 믿음에 수없이 속아보고 나서야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게 되고 의심하는 것조차 쓸데 없는 것이라는 사실에 망연자실할 즈음, 하나님의 언약에 더 이상 나의 기운을 실어 붙잡고자 하는 의지마저 상실할 즈음, 언약이 더 이상 진실이 아니고 농담으로 들려질 즈음,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된다. 경수가 끊어지고 태가 더 이상 기능을 할 수 없는 그 때, 사라의 태가 다시 살아난다. 불임의 고통을 겪어본 사람은 안다. 스스로의 행위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만이 약속이 성취될 때 이삭은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로 얻게 된다는 사실을 받아드린다. 하여 자랑할 것이 없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뿌리깊은 자기긍정의 덧에서 해방된다.

이 때 우리 어머니는 하늘에서 내려온 새예루살렘이다. 하늘은 어디인가. 우리의 마음 너머의 마음이다. 마음의 가죽을 베어내고 드러난 숨겨진 새살의 세계다. 휘장이 벗겨지고 마침내 드러난 곳이 곧 우리 어머니의 태이다. 이곳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은 그곳을 태로 삼아 증거궤 안에 있는 증거판과 광야의 만나 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씨(스페르마, 약속의 씨)로 삼아 마음의 사람을 다시 나게 한다. 일러 거듭남이라 하고 다시 태어난 자를 아들이라 한다. 하나님의 사람인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난 사람을 일컬어 사람으로부터도 아니고 사람으로 말미암음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언약으로 낳음을 입은 자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자의 어머니인 사라가 우리의 어머니요, 여신이며, 우리 자신이다. 따라서 또 하나의 태는 마음의 궁전인 셈이다. 처음의 태가 머리와 이성의 세계라면, 또 다른 태는 가슴의 세계이며 마음의 세계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마음의 세계에서 새로 낳음을 입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으로부터 흐르는 생수에 갈한 목을 축이며 양육받는다. 그곳에서 터져나오는 양식으로 먹거리를 삼는다. 하여 그는 우리 어머니이다.

바울은 말한다. 창세 전에 모태로부터 구분되었노라고. 새언약의 성취는 아비의 마음이 자녀에게로 향하고 자녀의 마음이 아비에게로 향하는 것에 있다. 이 둘은 사라의 태에서 태어남으로 가능하다. 새언약의 성취는 하갈의 태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라의 태에서 시작되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이다. 이것은 씨뿌리기 전, 곧 창세전부터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창세 전부터 진설되어 있는 떡 곧 진설병이다.

동정녀 마리아가 가톨릭에서는 우상으로 등장하였다. 동정녀 마리아는 사라에 대한 또 하나의 징조다.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의 육신의 어머니는 될지 모르지만 ‘누가 내 형제며 모친이냐?’는 예수의 반문 속에서 그는 육신의 태에 관심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의 의식을 철저히 부정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는 새로운 관계에서 존재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의 어머니 사라는 씨를 어디에서 받는가. 물론 믿음의 씨, 아브라함의 씨를 받는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믿음을 받았고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믿음으로 잉태하게 된다. 외부의 세계, 경험과 단단한 지식의 세계에서 씨뿌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은밀한 밀어속에서 로고스를 받는다.

외부의 원리는 율법이며, 선악이며, 지식의 세계다. 마음에서 들려오는 로고스는 내적원리이며, 믿음의 세계이며, 생명의 꿈틀 거림이고 사랑의 세계다. 마음의 세계에서 들려오는 로고스를 마음의 귀가 듣는다. 마음의 태가 잉태한다. 마음의 세계에서 아들을 낳는다. 미혹하는 마음은 베어내고 단단한 마음의 열매를 맺는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덧입혀진다. 새하늘과 새땅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늘과 땅이며 하나님의 나라이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말 그대로 믿음으로 산다는 말이다. 관계에 있어서 행위나 외모를 보고 관계하지 않는다. 나의 기준에 맞춘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외부의 원리에 의해 판단을 구하지 않는다. 은밀한 중에 계시는 내면의 세계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을 대면한다. 하나님의 믿음, 곧 생명의 흐름에 맡기고 관계한다. 그곳엔 의심이 사라진다. 불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긍휼이 있을 뿐이다. 이해와 기다림이 존재할 뿐이다. 세상이 속삭이는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외모로 판단하는 율법의 세계에 머물지 않는다. 나의 기준을 정하지 않는다.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밖에 없다. 행위로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심판하지 아니한다. 다만 그의 믿음으로 믿는다. 우리의 믿음은 믿을 것이 못된다. 우리의 믿음으로 자유와 사랑의 토대를 삼을 수는 없다. 그것은 하갈이 하는 일이며 하갈이 낳은 자들의 일일 따름이다. 사라의 태와는 전혀 다른 세계다. 이 둘이 둘로 나뉘고 또 하나로 통합될 때 비로소 갈등은 점차 사라진다.

사라는 자유자의 어머니요, 우리는 사라의 자녀다. 집에는 어머니만 계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도 계신다. 어머니와 아버지만 계신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태어난 아들, 곧 자유자인 ‘나’도 함께 거한다. 예수는 처소를 예비하러 가셨고 처소를 예비하신 후 다시 오셨다. 부활의 영으로 제자들에게 오셨고, 여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육신의 장막이 우리의 장막이 아니다. 하늘의 장막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들이 하나로 거한다. 하나님의 장막은 성전, 곧 우리 안에 지으셨다. 거기 어머니도 계시고 아버지도 계시고 나도 있다는 사실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가족이 한 집에 머무는 것이 어찌 이상한 일이랴. 그는 셋이 아니고 하나다.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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