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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절규, 마음의 절규

일반 조회수 15592 추천수 0 2011.11.17 10:18:29


[환경설교]

지구의 절규, 마음의 절규



출처 : 기독교사상   http://clsk.org/gisang/




cover_634_s.jpg이 설교는 마음의 절규(영성), 지구의 절규(생태), 그리고 가난한 자들의 절규(자선) 사이의 중대한 관련성을 이끌어내어 신학적 사고, 영적 실천 및 사회적인 봉사를 하나로 결합시키고자 한다. 이 설교는 2003년 3월 하버드 신학대학에서 열린 코스타스 세계 선교 대회에서 행해졌다.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을 땅 속에 있을 것이다.(마 12:40, 새번역)


우리에게 주어지는 통계와 정보들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정말 우리를 두렵게 함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해결책으로부터 더 멀어져 가는 것일까요? 우리가 수많은 다양한 관점들을 통해 그것을 언급하며, 그 요소들을 더 분명하게 밝힘에도 불구하고 왜 어떤 곳에서는 상황이 더 악화되는 것일까요? 그리스 정교회의 영적인 관점에서, 저는 교회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멈추어서 반성하라. 제가 이해하기로는, 그것이 제가 정교회 신학자와 사제로서 부름 받은 일입니다. 

저는 사제로서 해야 할 일을 행함으로써 응답해야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설교하고, 침묵과 눈물의 힘에 대해 선포하며, 삶과 죽음에 관한 성례를 집례하는 일입니다. 저는 서로의 관점으로부터 배우는 것만큼이나 한 개인의 관점으로부터 진실되게 말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제 개인적인 관점은 전례(liturgy)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제가 “보존”(con-serving, 함께 섬기기)의 개념에 대해 들었을 때에 저의 마음이 저도 모르게 향하고 있던 곳이 전례입니다. 저는 즉시 세계의 제단에서 섬기는 것, 곧 “공동 집전”(con-celebrating, 함께 기념하기)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공동 집전은 7세기의 막시무스 고해신부가 “우주적 전례”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 세계관 안에서, 만물은 성례전적 확증과 거룩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정교회의 전례 중에는, 부제(deacon)가 예배당의 한 가운데에 서서, 사도적 확신과 열정을 가지고, 크게 외치는 순서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온전히 일어서서 다 함께 경외합시다.”(let us stand well, let us stand in awe) 부제는 사람들에게 그저 일어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부제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서 계십시오!” 우리는 행동하기 전에, 무엇보다 우리를 궁지에 빠지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행동”이라는 사실을 종종 상기할 수 있도록 겸손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행동을 삼가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방식에 대하여 심사숙고하여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가 환경 위기를 되돌리고 우리의 생활방식을 바꾸려고 한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세계와 자신들을 인식하는 방법을 바꿔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세계관, 즉 세계에 대한 우리의 상이나 이미지를 바꿔야 합니다. 이것은 마음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우리는 창조세계에 대한 완고한 가정과 독단적인 전제들에 기초해서, 지구를 취급해 왔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세계가 어떻게 작용하는가”는 “세계가 어떻게 보이는가”에 달려있으며, 그것은 우리의 세계관과 세계상을 반영합니다. “청지기직”이라는 용어와 개념에 대한 저의 비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용어는 자기중심적인 세계관, 아마도 더 효율적이며 생산적인,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필요와 욕망에 의해서 결정되는 세계관을 암시합니다. 세계는 복음의 선포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안에는 위험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증언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제가 마음의 절규라 부르는 소리를 들어야만 합니다.


마음의 절규 

제가 나무 한 그루를 베어낸다고 합시다. 전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문제를 만들어냅니다. 탁자나 수납장을 만들 때, 저는 본의 아니게, 심지어 자신도 모르게 관도 준비합니다. 예가 좀 거칠어서 죄송합니다. 벌목을 하는 작업은 일반적으로 책에 사용될 종이, 가정을 위한 지출, 자동차를 고르는 것보다 더 미묘한 형태를 지닙니다. 나무 한 그루를 베어낼 때, 그 만큼의 산소도 베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나무와 지구만을 매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와 저의 자녀까지도 매장시켜버립니다. 이제 저는 관에 뉘여 있는 저 자신의 영혼과 자녀, 바로 지구의 영혼과 존재를 바라봅니다. 잔인한 순환을 영속시키면서, 어떻게 성급하고 낭만적인 해결책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구원은 실로 치유입니다. 그러나 제가 입힌 상처를 이해하기 전까지, 치유를 말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그 대신에, 저는 우선 침묵해야 합니다. 조용히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제 자녀를 되찾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눈물은 새로운 삶을 향한 영적인 목마름의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마음의 변화를 위한 열정적인 욕망 -제가 속한 전통에서 “성적인 욕망”(erotic desire, 즉 에로스라고 부르는 것)- 은 그 자체로 낙원으로의 서곡입니다. 그것만이 잃어버린 것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현대 심리학의 전문용어로 말하자면, 저는 상실을 슬퍼하고, 죄를 인식하고, 썩어짐을 느끼고, 저의 삶, 자녀들, 심지어 제가 파괴한 나무까지도 되찾기를 진실한 마음으로 원해야 합니다. 저는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저의 유일한 부활의 희망입니다. 역설적으로 삶의 스승은 죽음입니다. 그것은 자연의 방식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그리고 저는 죄를 인정합니다. 책임감을 떠맡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저에게 오존층에 구멍이 생겼다고 말할 때, 그 구멍을 감지하지 못하는 한, 그 잃어버린 고리로 인해 마음 아파하지 않는 한, 저의 자녀와 손자 손녀들, 미래의 후손들의 세대가 그 구멍 안에 매장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 저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때에야 그 구멍을 통해 하나님의 손이 미치게 됩니다. 그 때 비로소 이 비어있음이 그리스도의 열려진 무덤을 반영하는 열려있음으로 변화됩니다.


그러므로 제가 세계의 얼굴 안에서 자신의 후손의 얼굴을 볼 때에 비로소, 그 얼굴 안에서 더 나아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상, 모든 얼굴들 중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8세기의 시인이자 예술가인 다마스커스의 존은 “땅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얼굴”임을 간파했습니다. 그 때에야 저는 또한 각각의 나무에서 얼굴, 이름, 시간, 장소, 목소리, 그리고 간절히 듣고 싶은 절규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저는 더 이상 마치 세계가 항상 거기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자기중심적인 방식으로 자연 세계와 관계하지 않습니다. 이기적인 세계관에 갇히면 자연과 소통하지 못하며, 자연이 저의 영혼을 고양시키는 것을 깨닫지도 못합니다. 저는 사람을 사물처럼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그 사물들조차도 단지 사물로서 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지구의 절규는 저의 내면 깊숙이 뿌리내리게 됩니다.


지구의 절규

여러분이 보는 바와 같이, 저는 어떠한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저는 절규와 고백 그리고 또 다른 해방적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절규가 지구와의 관계 안에서 저의 악행에 대한 고통스러운 자백이라면, 지구의 절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해방을 기다리며 “해산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것” 자체입니다.(롬 8:22-23)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록한 대로, “우리가 이보다 더 큰 소리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지구가 절규하기 시작하고 심해지는 것은 우리가 주로 인간의 소비를 위한 생산에 매달리고, 세계와 인류를 단지 우리의 필요로 환원시키는 데에 전념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환원주의적 세계관에서, 우리는 더 큰 실재를 간과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포함시키며, 모든 존재와 전체 세계를 아우르고, (“용서”와 “화해”를 뜻하는 헬라어 단어 synchoresis의 문자적 의미처럼) 만물을 위한 공간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경제(the divine economy)를 무시하는 것이죠. 우리의 경제는 인간과 동물과 식물을 모두 수용해야만 합니다. 한 번 더 막시무스 고해신부를 인용하자면 하나님의 경제와 조화를 이루는, 최소한 이를 위배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아마 여기에 일반적인 용어 “청지기직”의 또 다른 약점이 있을 것입니다. 이 용어에 대한 적당한 헬라어 번역은 oikonomia입니다. 그러나 oikonomia(혹은 ‘경제 economy’), 더 나아가 oikologia(혹은 ‘생태 ecology’)는 사실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경제에 대한 하나님의 우선권에 응답하는 것뿐입니다.


산업과 기술은 신비의 차원을 인정해야 하며(송영 doxology), 우리는 만물의 궁극적인 계획에 민감해야 하며(종말론 eschatology), 또한 만물을 향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관심을 믿어야만 합니다.(섭리 providence) 생태는 단지 기독교적 비전이나 선교의 한 양상, 또한 기독교 신학이나 영성의 한 차원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기독교적 삶과 실천의 중대한 기초이며 방법입니다. 우리의 메시지가 인간 공동체를 넘어서 전체 공동체의 보다 넓고 보편적인 관계를 깨달을 수 있을 만큼 담대하며 모험적이지 않다면, 그 메시지는 결함투성이일 것이고 복된 소식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더 넓은 실재, 더 큰 경제, 더 에큐메니컬 하며 우주적인 관점은 다음의 사실을 상기시켜줍니다. 콘텍스트는 언제나 여러분이나 저보다, 한 교파나 신앙보다, 심지어 세계 그 자체보다도 크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외골수의 의제를 고집하는 한 지구는 항상 위협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의 과도한 소비에 대한 올바른 반응과 적절한 해결책은, 정교회의 금욕주의 전통에서 포기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땅이 하늘에 속해 있다고 의식하는 것이요, 밀라노의 암브로스를 인용하자면 “땅도, 하늘도, 공기도, 바다도, 그 어떤 것도 부유한 소수가 쓰기 위해 차지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지구의 절규는 결국 겸손의 요청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자존심(pride)은 인간의 독특한 속성입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본능적으로 만물의 법칙에 따라 그들에게 어울리는 자리를 아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류만이 만물의 계획안에 있는 자신들의 적절한 장소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우리들만이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디에서 멈추어야 할지, 어디까지 가야 할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봉사하고 지키기 위해”(창 2:15) 존재합니다. 저는 이 구절을 “봉사하고 보존하다”로 번역하기를 좋아합니다. 이것은 덜 가지며 사는 것의 문제이며, 가볍게 여행하는 것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덜 가지고도 삶을 꾸려나갈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안식일 원리”입니다. 우리가 덜 가지고 있을 때에,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에 더 민감해지게 됩니다. 이로써 우리는 가난한 자들의 절규에 보다 더 귀 기울일 수 있게 됩니다.


가난한 자들의 절규

우리는 사람들을 대할 때와 같은 섬세함과 다정함으로 자연을 대합니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생태-정의(eco-justice)라는 적절한 단어를 만들어냈습니다. 모든 생태적 활동, 경제적 기획 및 신학적 원리와 영적인 실천들이 궁극적으로는 사람들 특히 가난한 자들에게 끼치는 영향에 따라 판단되고 심판 받습니다.(마 25:31 이하) 웬델 베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어떤 관련성 때문에, 하나[지구]를 착취하려는 의지는 다른 것[인간의 몸]을 착취하려는 의지가 됩니다.”(Wendell Berry, “The Body and the Earth,” Recollected Essays, 1965-1980 San Francisco: North Point Press, 1981), 304-5.


우리는 가난한 자들의 절규를 위한 공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가난한 자들의 존엄성을 긍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우리의 행동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우리의 시장은 착취와 배제에 기초해 있습니다. 우리의 기술은 사람들을 한쪽으로 멀리, 심지어는 바깥으로 몰아냅니다. 생태적 응답의 첫 번째 단어는 환경이나 신학으로부터가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향한 우리의 태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온정주의나 선심주의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가난한 자들을 지키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단지 동등한 정당성을 갖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더 큰 정당성을 갖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난한 자들은 지금껏 우리가 그들에게 “판” 것을 “사” 주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말한 것을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오만하게 행한 것들을 끈기 있게 견뎌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주객이 전도되어 있습니다. 지금 최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은 가난한 자들의 고통입니다. 해결책을 결정하는 것은 그들의 절규입니다. 죽음이 우리에게 삶에 대해 가르쳐주고, 나무가 창조세계를 어떻게 대할지 우리에게 깨우쳐주듯이, 이제 가난한 자들은 말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의 절규를 듣지 않은 것에 대해 우리에게는 어떠한 변명의 여지도 없습니다. 성서가 우리에게 확언하기를, “가난한 사람들은 늘 여러분과 함께”(마 26:11) 있을 것입니다.


상실

우리가 숲을 잃게 된다면, 그것은 삶의 미적 차원 이상을 잃는 것이며, 삶의 본질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상상력과 영감, 자연과 생명의 신비를 잃어버리며, 우리의 감성과 영혼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멸종 위기에 처해있는 가장 위험한 종은 고래나 숲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지구입니다. 지구는 우리의 집(‘ecology’라는 용어의 어원인 oikos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지구는 우리 모두가, 고래와 나무와 사람 모두가 살며 죽는 곳입니다.


이러한 것이 마음의 절규입니다. 세계는 단지 빵에 굶주린 것이 아닙니다.(마 4:4) 세계는 거룩과 신비에 대한 감각에 굶주려 있고, 나무들,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신성을 보지 못하는 영적 비전에 굶주려 있습니다. 이 굶주림이 결국 우리로 하여금 생명과 자연환경에 대한 진실성을 갖도록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모든 인간과 만물의 화해에 대한 이해를 물려줄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의 언약을 의미하며, 곧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마 6:10) 이뤄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받은 선물이요, 우리가 서약한 새로운 삶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 및 너희와 함께 있는 숨쉬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세우는 언약의 표는, 바로 무지개이다. 내가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둘 터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언약의 표가 될 것이다.’(창 9:12-13)


그것이 제가 지키도록 부름 받은 보물입니다. 결국, 그것은 제가 저의 자녀들에게, 손자 손녀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가장 고귀한 선물입니다. 감사하게도, 그 선물은 제가 초래한 불명예와 파괴보다 훨씬 더 놀라운 것입니다. 그것은 은혜와 생명의 상징입니다. 아무리 감사해도 모자라지 않겠습니까?



존 크리사브기스 l 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으로 그리스 음악원(Greek Conservatory of Music), 아테네 대학교, 성 블라디미르 정교회 신학교, 그리고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았다. 그는 호주 그리스정교회 대주교의 개인비서를 역임했으며, 시드니 소재의 성 안드레 신학대학(St. Andrew’s Theological College)의 공동 설립자이다. 1999년 성 십자가 신학교(Holy Cross School of Theology)의 신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Beyond the Shattered Image와 Cosmic Grace, Humble Prayer 등을 저술하였다. 



본 설교의 원문 l John Chryssavgis, “THE CRY OF THE EARTH―THE CRY OF THE HEART” from David Rhoads, ed., Earth & Word: Classic Sermons on Saving the Planet (New York: Continuum, 2007) 


옮긴이 l 전현식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조직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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