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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상 6월호] 김기석과 손석춘의 대화(10) 
넘어진 자리를 딛고 일어서듯
미루고 또 미룬 편지
 

출처 : 기독교사상 6월호 http://clsk.org/gisang/  


cover_630_s.jpg손석춘 선생님,
 계절은 벌써 입하 절기를 지나 소만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계절을 가늠하기 위해 제가 자주 들여다보는 <농가월령가>는 이 계절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네요. “비 온 끝에 볕이 나니 일기가 맑고도 화창하다. 떡갈잎 퍼질 때에 뻐꾸기 자주 울고, 보리 이삭 패어 나니 꾀꼬리 소리 난다.” 아닌게 아니라 가끔 산에 들 때면 먼 데서 들려오는 꾀꼬리 소리에 발을 멈추곤 합니다. 옛사람은 이맘때가 되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들일에 바빠 집에 있을 틈이 없으니 나무 그늘 드리운 사립문만 적막하다고 노래했습니다. 초록이 산 아래 마을까지 넘실대는 때이니 참 좋은 계절입니다.
얼마 전에 교회 마당가에 교회 설립 100주년 기념 타임캡슐을 묻고 표지석을 세웠습니다. 50년 후에 개봉하도록 조치를 해놓았습니다. 표지석을 세울 때 제 귀에 쟁쟁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50년 후에도 여전히 봄이 되면 꽃들은 피어나고, 벌들은 잉잉거리며 생명의 노래를 부를까?’, ‘50년 후에도 아이들의 얼굴에 해맑은 미소가 피어오를까?’, ‘50년 후에도 사계절의 리듬은 변함없이 운행될까?’ 눈을 부르감고 힘주어 드리는 기도가 간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무지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손석춘 선생님,
편지를 읽으며 왜 이리 한가로운 소리를 늘어놓고 있는가 의아해 하실 것 같습니다. 사실 선생님의 편지를 읽은 후에 한동안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야단을 맞고 난 후에 느끼는 무력감이었을까요? 마치 격정이 분출되듯, 한 호흡으로 말하듯, 한국교회를 향해 일직선으로 쏟아지는 말의 폭포 앞에서 정신이 아뜩해졌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글을 읽는 동안 제 호흡은 거칠어졌고, 말문이 막혔고, 사고는 정지되었던 모양입니다. 마치 숨기고 싶었던 치부가 드러난 듯 부끄러웠습니다. 외부자의 눈에 비친 교회의 모습이 강도의 굴혈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답장이 어렵습니다. 맞장구를 치자니 나 또한 교회의 한 부분이고, 변명하자니 군색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살싸한 꾸지람에 허둥대고 있는데 이번에는 연세대학교 정치학과의 박명림 교수까지 회초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신문 칼럼에서 지금 우리 사회에서 자기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분야는 단연 종교, 교육, 언론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셋은 한결같이 “낮고 억눌리고 소외된 삶들을 위로하고 가르치고 보듬어 두루 고르고 높이라는 본령”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는 그 세 분야를 두루 비판하고 있었지만 가장 따갑게 질책한 분야는 종교였습니다. 사실 종교라 말하고는 있지만 그가 염두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인용해 보겠습니다. 

오늘의 한국 종교가 과연 우리네, 특히 궁핍한 영혼들의 평안과 공동체의 평화에 기여하고 있는가? 대답은 반대이다. 종교로 인한 영혼 방황과 내부 쟁투, 사회평화 파괴는 이제 사회를 구성하는 어떤 영역 못지않게 해악적이다. 고작 ‘개인들에게’ 면죄부를 팔았다는 이유로 폭풍 같은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음을 고려할 때, 신도의 숫자와 교회 면적을 계산하여 ‘하느님의 것’인 ‘교회를 통째로’ 사고파는 암담한 현실은 종교인 영혼의 집단화형 차원을 넘는 종교혁명으로도 부족한 지경이 되고 말았다. 세상 구원과 영혼 대속은 고사하고, 사회보다 종교가 더 타락하였기 때문이다. 누가 누굴 걱정하고 구원한다는 말인가?(<한겨레신문>, 2011년 5월 10일자, <카이스트 연속 자살에 대하여> 중에서)

박 교수는 오늘의 개신교회의 상황이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시기보다 더 심각하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누가 누굴 걱정하고 구원한다는 말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저는 유구무언일 따름입니다. 박 교수의 말은 마치 개신교회를 향해 울리는 조종소리처럼 들려왔습니다.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일까?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되는 나날입니다. 

광신을 넘어
그러다가 문경에서 벌어진 한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50대 후반의 한 남성이 십자가에 못 박힌 채 발견된 사건 말입니다. 그것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자행한 자살인지는 경찰이 밝혀내겠지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이 사건에 관심을 갖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아니 일부러 외면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건은 마치 목에 걸린 가시처럼 저를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불편함’은 그런 광신적 신앙과 나는 무관하다는 무의식적 구별이 사실은 부질없는 짓이라는 자각에서 기인할 것입니다. 대중들의 관음적 시선과는 다르지만 저 또한 흘낏흘낏 그 사건을 살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한국교회와 신학계의 이상한 침묵에 놀랐습니다. 외국 언론은 이 사건에 주목하면서 기독교 전통 속에서 발견되는 ‘적색 순교’와 ‘백색 순교’라는 개념을 끌어와 이 사건을 해석하거나, 정신분석적인 해석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마치 이 일과 우리는 무관하다는 듯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저는 마치 끌리듯 제가 속한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 목사의 글 가운데 <광신의 본성>이라는 설교문을 찾아 읽었습니다. 웨슬리 목사는 광신은 한마디로 ‘정신의 무질서’라고 요약합니다. 광신은 인식의 눈을 흐리게 합니다. 광신자들은 그릇 상상된 하나님의 힘과 감화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스스로를 속입니다. 그들은 “생활의 가장 사소한 일들에게서까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지시’를 받고 있거나 받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사람들”입니다. 웨슬리 목사가 광신에 대한 해독제로 제시하는 것은 성경과 이성, 경험과 전통입니다. 그는 “경험과 이성 그리고 성령의 평범한 도우심을 힘입고 명백한 성경적 법칙을 적용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제 가슴에 크게 공감되는 것은 ‘평범’이라는 단어입니다. 옛말에 ‘선인의 도는 싱겁지만 싫증이 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흔히 ‘평범’은 ‘무미無味’ 즉 ‘맛없음’으로 인식되곤 합니다. 짜릿한 자극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평범’은 ‘따분함’의 동의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현대인들은 특별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삶이 괴롭습니다. ‘그래서’라는 접속 부사가 과연 적절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게는 그렇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특별하기를 원하기에 삶은 분주하고, 마음은 늘 혼돈입니다. 다섯 가지 색이 우리 눈을 멀게 하고, 다섯 가지 소리가 우리 귀를 멀게 하고, 다섯 가지 맛이 우리 입맛을 상하게 한다는 말은 가감 없는 진실입니다. 프랑수아 줄리앙은 “맛은 우리를 얽어매지만, 맛없음은 우리를 풀어주는 것”이라고 말했더군요.
신앙에는 분명히 일상적 삶의 체험과는 다른 맛이 있습니다. 그것은 때로는 매혹으로 때로는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삶의 시간은 그리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특별할 것이 없는 그 무미한 삶의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가 드러나는 시간입니다. 사람들과 만나 함께 일하고 회의하고 공부하고 사귀고 음식을 나누고 함께 걷는 그 시간이야말로 나의 나됨이 오롯이 드러나는 시간입니다. 조르주 루오의 ‘미제레레’ 연작 가운데서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를 표현한 작품입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비애에 차 있지 않습니다. 차라리 고요하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화가는 그 작품에 이런 제사(題詞)를 붙였습니다. “의인은 향나무처럼 치는 도끼에 향기를 묻힌다.” 향나무처럼은 못 되어도 악취는 풍기지 말아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 가운데 하나는 신앙을 일상과 유리된 특별한 뭔가로 생각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늘을 바라본다고 말하면서 발은 땅에서 떨어져 건들건들거립니다. 별 하늘을 바라보다가 개울에 빠졌다는 탈레스의 경우는 차라리 애교스럽습니다. 문제는 하늘도 땅도 잃어버린 채 들떠버린 영혼들입니다. 말은 신령하기 이를 데 없는데 사는 모습은 자본주의에 침윤된 사람들과 구별할 수 없는 이들이 많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악취 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교회도 다를 바 없습니다. 사실 사정이 이렇게 된 데는 목회자들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목회자들은 교인들의 비릿한 욕망을 거스르기보다는 그것을 추인하거나 부추기는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번영의 복음’이라는 말로 간추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말은 우물우물 삼키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단자 칼릴
예레미야서를 읽다가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기원 전 6, 7세기의 예언자인 예레미야는 “지금 이 나라에서는, 놀랍고도 끔찍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게 어떤 일일까요? 갖가지 궂은 일들이 떠오릅니다. 세상사는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할 테니까요. 그런데 예레미야의 그 다음 말은 참 놀랍습니다. “예언자들은 거짓으로 예언을 하며, 제사장들은 거짓 예언자들이 시키는 대로 다스리며, 나의 백성은 이것을 좋아하니, 마지막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렘 5:31) 놀랍고 끔찍한 일은 다름 아닌 종교의 타락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이 참 말을 버리고 거짓말을 할 때, 백성들이 들어야 할 말을 버리고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할 때야말로 가장 심각한 위기의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파토스에 사로잡혀 동족들을 향해 불길한 말을 해야 했던 예언자들의 고독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들이 겪어야 했던 간난신고가 떠오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타락은 예언자의 음성이 잦아든 데 있습니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목회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이동원 목사는 은퇴석상에서 예언자적 직무에 충실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참회했습니다.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저는 그의 그런 고백이 상당히 용기 있는 어쩌면 양심적인 고백이라고 인정하고 싶습니다.

손석춘 선생님, 
지난 번 편지에서 선생님께서 <오마이뉴스>에 기고했던 “한기총, 돈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제목의 글을 소개하셨지요? 제목의 말미에 붙은 물음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선생님의 마음을 헤아려보았습니다. 극렬한 반발에 대처하기 위해 일부러 유보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분명 아닐 겁니다. 저는 그 물음표에서 오히려 희망을 봅니다. 그것이 선생님의 의도에 대한 오독이라 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에게 돌이킴의 가능성은 있는 것일까요? 저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돈을 쓰는 이들은 이미 종교인일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자신의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 신앙적 성찰조차 없이 힘 있는 이들의 편에 서는 이들은 종교인이 아니라 종교 상인일 뿐입니다. 선생님은 오늘의 타락한 교회를 가리켜 ‘예수가 반대한 모든 것의 구현체’라 말씀하셨습니다. 듣기에 따라서는 너무 가혹한 평가일 수도 있겠지만 그 말이 가리키는 진실조차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 돈과 권력은 예수 정신 위에 세워진 교회의 토대를 허무는 여우입니다. 
일상의 일에 쫓겨 시나브로 구도자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애마를 때면 저는 칼릴 지브란의 글을 찾아 읽습니다. 그중에서도 <이단자 칼릴>이라는 글을 영혼의 숫돌로 삼곤 합니다. 어린 시절에 수도원에 들어간 칼릴은 적당히 적응하거나 눙칠 줄 모르는 야인이었습니다. 하늘 진리에 취해 야무지고 기운찬 그는 동료 수도사들의 위선과 나태함을 나무랐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이단자의 낙인을 찍어 수도원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그가 피를 토하듯 내놓은 말은 어쩌면 이리도 전형적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찌해서 당신들은 여기 수도원에 편히 앉아 가난한 사람들의 땀과 눈물로 빚어진 빵을 먹으면서, 그 지식을 필요로 하는 백성들과는 동떨어져서, 저들의 무지를 깨우쳐 주기는커녕 고지식한 그들의 피를 빨아먹고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당신들 보고 이리떼로부터 양들을 지키는 어진 목자들이 되라 하셨는데, 어떻게 당신들은 양들을 잡아먹는 이리떼가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당신들은 가난 속에서 평생토록 헌신적인 삶을 살기로 굳게 맹세하고 또 서약하고서도, 당신들이 한 말은 모두 잊어버린 채,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산다고 하면서, 종교가 뜻하는 모든 것을 다 저버릴 수 있습니까?
마음이 욕심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어떻게 수도를 한다는 것입니까? 당신들은 겉으로는 당신들의 육신을 죽이는 체하나, 속으로는 당신들의 영혼을 죽이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이 세상의 모든 세속적인 것들을 질색인 양하면서도 속마음은 탐욕으로 부풀어 있습니다. 스스로를 백성의 지도자요, 스승이라 지칭하나, 사실을 말하자면 당신들은 강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 정신은 잦아들고
무슨 변명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게 바로 제 모습이고, 목자연하는 이들의 적나라한 실상이니 말입니다. 다시금 묻게 됩니다.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호랑이 탈을 쓰고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낮아짐을 가르치면서도 자신은 높이고, 섬김을 말하면서도 섬김 받는 일에 익숙해지면서 우리는 예수로부터 아득하게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득의의 미소를 띤 채 상황은 질문하고 복음은 답한다는 말을 되뇌는 이들을 볼 때마다 마치 중세 사람을 보는 듯 낯설기만 합니다. 내부자인 제게도 그러하니 외부자들에게는 어떻겠습니까? 아무도 우리를 답을 가진 자로 인정하지 않는데, 우리만 답이 여기에 있다고 동어반복적으로 말합니다. 고백의 언어를 인식의 언어로 착각하는 것이지요.
사실 문제의 해결은 문제가 무엇인지를 바로 인식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문제가 무엇이고 그 문제를 잉태하고 있는 사회 구조가 무엇인지, 그 얼키고설킨 속내를 알아야 적절한 답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기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 안다’는 오만이 배우려 하지 않고 가르치려고만 드는 독선을 낳고 있습니다.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자주 만나 대화를 하면서 배워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화를 꺼립니다. 대화란 변화를 향해 자기를 개방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속 좁은 기독교인들이 자폐적 담론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것은 자기 정체성이 흔들릴까봐 두려워서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게 될 것입니다. 고백의 특수성을 굳게 붙잡으면서도 보편적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언어를 발견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기독교에 반발하는 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의 특수성 때문이 아니라 그 용어가 함축하고 있는 배타성과 독선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가끔 세상에 산적한 문제를 예리하게 통찰하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떨쳐 일어선 사람들을 볼 때마다 부끄러움과 동시에 동류의식을 느낍니다. 전쟁과 테러, 불의와 불평등, 빈곤, 질병, 소수자 차별, 인권유린, 성적 억압, 핵무기 확산, 생태계 파괴, 과학의 무분별한 자율성 등의 문제는 기독교가 절대로 외면해서는 안 되는 문제들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기독교는 영혼 구원에 집중해야 한다는 반발이 예상됩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에게 이런 문제들을 외면하고 기독교인이 되는 방법이 있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저는 교인들에게 ‘일인 일 구좌 갖기 운동’에 적극 참여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존엄성이 인정되는 세상, 지속가능한 세상을 이루기 위해 일하고 있는 비영리단체의 후원자가 되어달라는 것이지요. 가장 바람직한 것은 우리가 그 일에 몸으로 참여하는 일이겠지만, 여러 가지 여건상 그럴 수 없다면 그들의 일에 공감하고 연대한다는 의사표시라도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분들이 하는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선교’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조차 그분들에게는 불쾌한 말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제 자리에서는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손석춘 선생님,
교회 안에는 참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갑니다. 부자와 빈자, 많이 배운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아이와 청년과 노인, 진보와 보수…. 그 다양성이야말로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여간해서는 만나기 어려운 이들이 만나 공동체를 이룬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기적입니다. 그들의 만남 혹은 조화의 중심에는 예수가 있습니다. 노자가 그랬지요? 바퀴살 서른 개가 바퀴통 하나에 모여 있지만 바로 거기가 비어 있어서 수레를 쓸 수 있다구요. 기독교의 경우 비어 있는 중심이 바로 예수 정신이겠지요.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예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예수의 마음으로 세상을 느끼고, 예수의 손과 발이 되어 살아가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예수 정신은 현실 논리 앞에서 자주 차단당하곤 합니다. 정부나 대기업이 시행하는 어떤 사업이 반생명적이고 반신앙적이라고 비판하는 순간 즉시 반발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신앙적 판단을 정파적 이해로 환원시키는 데 재빠릅니다. 금관이 씌워진 예수는 교회 안에서조차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주님의 입이 되어야 할 저 자신도 갈등이 빚어져 교회가 시끄러워질까봐 자꾸만 몸을 사리고 말을 가리곤 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말이 무색한 나날입니다. 이 불의한 침묵을 깨뜨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불이 되어 저를 사를 것을 알기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요즘 제 귀에는 마치 이명증처럼 ‘이 성전을 허물어라’ 하고 외쳤던 청년 예수의 음성이 자꾸만 들려옵니다. 

급진적인 예수
선생님은 오늘의 한국 기독교에 옷깃을 여미며 정중하게 묻고 싶다면서 “왜 주님의 뜻을 실현하지 않는가요?”라고 물으셨습니다.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 이렇게 물으신 까닭은 역사 앞에 그리고 하나님 앞에 참회하고 엎드리라는 말씀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러 말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민중들의 삶의 자리에 다가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꿈을 불어넣고 그 꿈을 이루려고 분투하다가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예수를 우리는 믿음의 대상으로 대상화할 뿐, 그분의 인격과 삶을 체화하지는 못했습니다. 
1983년에 대안 노벨상으로 불리는 ‘바른생활상’을 수상한 칠레의 경제학자 만프레트 막스 네프(Manfred Max-Neef)의 대담 기사를 읽다가 저는 ‘맨발의 경제학’이라는 용어와 만났습니다.(『희망을 찾는가』, 갈라파고스, 2011 참고) 그가 말하는 맨발의 경제학이란 신자유주의 세계경제 체제에서 탈락하여 당장 생계가 막막한 사람들의 상황을 어떻게 하면 나아지게 만들 것인지 함께 고민하는 것입니다. 사회적 곤경에 처한 누군가와 같이 있는 순간, 그 전까지 그가 끼고 살다시피 했던 경제 개념들이 의미를 잃었다는 그의 고백은 참 절실합니다. 그는 학자들이 있어야 할 곳은 상아탑 안에 있는 책상 앞이 아니라 가난이 있는 곳, 고통이 존재하는 바로 그곳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다가 가슴을 쳤습니다. 고통의 현장,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보다 앞서 가 계시겠다고 하셨던 ‘갈릴리’로 가지 않고서 예수를 믿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갈릴리의 예수를 말하는 이들은 급진적으로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갈릴리 예수와 접속되는 순간,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 마련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래로부터의 시선입니다. 기존질서는 언제나 그 질서에 동화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급진’ 혹은 ‘불온’의 낙인을 찍곤 했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좌파’라는 말이 자주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예수가 ‘좌파’라는 저의 확신은 더욱 깊어가고 있습니다. 인간을 억압하는 종교와 제도에 맞서 모든 생명의 존귀함을 가르치고, 종교 지도자들의 민낯을 폭로하면서 참된 신앙은 가름이 아니라 포용에 있음을 가르친 예수, 기존질서의 입장에서 그는 정말 위험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급진적’이라는 뜻의 ‘radical’은 ‘근본적’이라는 뜻도 거느리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것은 언제나 급진적으로 보이게 마련인가 봅니다.

죄라는 은유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저는 급진적이지 못한 목사입니다. 예수의 핵심을 붙잡고 살지 못하고,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할 줄 모르고, 몸을 던져야 할 때 몸을 던지지 못하니 말입니다. 선생님은 제게 마치 비수를 들이대듯 ‘죄’가 무엇인지 또 ‘원죄’가 무엇인지를 물으셨습니다. 사회적인 불의의 뿌리인 ‘빚의 탕감’ 요구를 ‘죄의 용서’로 바꿔버린 교회사와 교회 현실을 질타하시기 위한 물음인 줄 압니다. <기독교사상> 5월호 특집이 이미 죄의 문제를 상세하게 다뤘기 때문에 제가 다시금 답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몇 가지 생각을 적어보려고 합니다. ‘원죄’ 하면 사람들은 즉시 아담과 하와 그리고 불순종이라는 단어를 떠올립니다. ‘죄’를 불신앙 혹은 ‘우상숭배’와 동일시하기도 하고 우리가 저지르는 도덕적 과실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왕자의 운명을 타고 나 거지의 삶을 사는 것이 죄라고 설명하더군요. 또 어느 신학자는 죄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짐 혹은 소외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죄’를 설명하는 방식이 이처럼 다양하다는 사실은 죄의 문제가 자명한 듯하지만 사실은 규정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반증합니다.
죄의 문제는 물론 심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이 온통 죄와 용서의 문제로 도배가 된 텍스트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죄는 인간의 삶의 조건 혹은 인간이 처한 곤경을 나타내기 위한 하나의 은유에 불과합니다. 물론 인간의 내면에 깃든 죄의 유혹이 모든 악행의 뿌리인 것은 분명합니다. ‘신처럼 되고 싶은 인간의 자기 확장 욕망’이 많은 문제를 야기하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원죄’라는 은유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처한 다양한 문제 상황을 ‘죄’라는 단어 속에 뭉뚱그릴 때 성경이 내장하고 있는 혁명적 메시지는 소거되고 맙니다. 하나님이 문제 삼는 것은 개인의 내면에 깃든 죄만이 아닙니다. 그것이 불순종이든 반역의 충동이든 교만이든 나태든 하나님이 문제 삼는 것은 개인의 죄성만이 아닙니다. 정치적인 억압, 경제적 수탈, 문화적 인종적 차별,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없도록 만드는 일체의 장애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문제가 무엇이냐에 따라 답도 달라집니다. 억압이 문제라면 해방이 구원일 것이고, 포로 상태에 있다면 자유를 되찾는 것이 구원일 것이고, 병이 문제라면 치유가 구원일 것이고, 소외가 문제라면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구원일 것입니다. 사실 예수는 나사렛 회당에서 자신의 소명이 바로 거기에 있음을 천명하셨습니다.
세상의 문제를 ‘죄’의 문제로 축소하는 것이야말로 문제입니다. 아무리 선하게 살아보려고 몸부림쳐도 그럴 수 없는 구조가 온존해 있다면 죄의 용서를 말하는 기독교의 담론은 공허하기 이를 데 없기 때문입니다. 세계화라는 허울 좋은 명분 속에서 예수의 벗들은 지금도 질식하고 있습니다. 중세의 가톨릭이 자기 확장을 위해 면죄부를 팔았던 것처럼 ‘죄 경영’에 몰두하고 있는 오늘의 교회도 개혁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희망의 바깥은 없다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면 답답합니다. 그러나 가야 할 길이 분명하기에 낙심할 수는 없습니다. 언제쯤 그 목표에 도달하게 될지 혹은 그곳에 다다를 수는 있을지 가늠이 되질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운명입니다. 가끔 아주 외롭습니다. 뜻을 함께 하는 이들의 연대가 필요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마음과 비전을 나누고, 방향을 점검하고, 어깨를 겯고 함께 걸어가는 이들의 든든한 연대 말입니다. ‘새사연’에 십일조를 내는 회원들이 그렇게 많다는 사실에 감동합니다. 자기 수입의 일정 부분을 자기 살고 싶은 세상의 꿈을 위해 내놓는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갈 길이 멀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득해질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고통의 시대를 살았던 이사야의 비전입니다. 그는 주님의 날을 예고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날이 오면, 이집트 땅 한가운데 주님을 섬기는 제단 하나가 세워지겠고, 이집트 국경지대에는 주님께 바치는 돌기둥 하나가 세워질 것이다.”(사 19:19) 이집트 땅에 세워질 제단 하나, 국경지대에 세워질 돌기둥 하나, 희망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요? 한숨을 삼키며 도종환 님의 시 <희망의 바깥은 없다>를 나직이 읊조립니다.

희망의 바깥은 없다
새로운 것은 언제나 낡은 것들 속에서
싹튼다 얼고 시들어서 흙빛이 된 겨울 이파리
속에서 씀바귀 새 잎은 자란다
희망도 그렇게 쓰디쓴 향으로
제 속에서 자라는 것이다 지금
인간의 얼굴을 한 희망은 온다
가장 많이 고뇌하고 가장 많이 싸운
곪은 상처 그 밑에서 새살이 돋는 것처럼
희망은 스스로 균열하는 절망의
그 안에서 고통스럽게 자라난다
안에서 절망을 끌어안고 뒹굴어라
희망의 바깥은 없다

이제 희망의 바깥을 기웃거리는 일은 그만 두어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내부자이면서도 현실 교회에 대해 큰 희망을 갖지 못했습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절망을 말하는 것조차 사치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시들어서 흙빛이 된 겨울 이파리/속에서 씀바귀 새 잎은 자란다’네요. ‘가장 많이 고뇌하고 가장 많이 싸운/곪은 상처 그 밑에서 새살이 돋는 것처럼’ 희망은 그렇게 온다네요. 희망은 저절로 오는 게 아니라 치열하게 싸울 때 열리는 지평임을 알겠습니다. 이 구절을 시인을 통해 말 건네오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겠습니다.


손석춘 선생님,
저 밭두둑에 찰랑이는 초록의 물결이 흥겨운 때입니다. 신명날 일 하나 없는 세상처럼 보여도 밖은 온통 생명의 춤판입니다. 그 춤판에 뛰어들면 우리 가슴에도 신명이 찾아올까요? 부디 청안청락하시기를 빕니다.
두서없는 편지가 길어졌습니다. 이제는 제가 선생님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지금 우리가 집중해야 할 일들은 무엇일까요? 잘못된 관행과 제도와 정치 행태에 저항하는 일과, 대안을 제시하는 일은 동시에 진행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대안은 물론 획일적이어서는 안 되고 다양성을 담보해야 하겠지요? 선생님은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어떤 발전의 모델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제주도 강정 마을에 한번 다녀와야 할 것 같은데, 시간을 낼 수가 없네요.


김기석 l 목사는 감신대와 같은 대학원을 나와 현재 청파교회 담임목사로 있다. 문학 평론가로도 활동하며 저서로는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서다』, 『새로봄』, 『길은 사람에게로 향한다』, 『삶이 메시지다』가 있다.

글쓴이 / 김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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