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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까뮈의‘이방인’을 읽고

일반 조회수 14007 추천수 0 2009.02.02 00:56:05

알베르 까뮈의‘이방인’을 읽고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생이 의미있는 것은 무엇일까. 특히 나에겐 과연 무엇이 의미있는 것인가. 무엇이 나로 하여금 살만한 이유이며 그래도 살아야만 하는 까닭인가. 아무것도 의미있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이 ‘의미있어 하는’ 그 모든 것은 과연 의미있는 것일까. 의미가 있어 지금 그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인가.

현재 내게 주어진 지금의 삶 말고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지금 나의 삶은 나의 선택이 아니다. 다만 내게 주어진, 그러면서도 순간 순간의 선택에 의한, 선택이면서도 선택이 아닌 불가해적인 삶이 지금 펼쳐지고 있는 내 앞의 현실들이다. 도대체 사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뭐 이같은 생각들을 하며 보내고 있을 즈음 문득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이 생각난다. 이름만 겨우 기억나고 스토리도 가물가물한 까뮈의 ‘이방인’과 주인공 ‘뫼르소’가 오버랩되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장례와 지루하게 얘기되는 그의 주변 이야기, 태양, 아랍인 살해, 재판장면과 같은 것들이 문득 떠오른다.

까뮈는 왜 그같은 소설을 쓰게되었을까. 까뮈는 소설을 통해 무엇을 말해보고 싶은 것이었을까. 혹시 지금 이렇게 ‘의미, 무의미’의 생각을 다루고 있지는 않을까. 그래서 다시 한 번 ‘이방인’을 읽게 되었다. 까뮈의 생각을 더듬어보고 싶은 것이었다.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까뮈는 ‘이방인’과 ‘전락’에 대한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비록 논리적이지는 못하지만, 세계는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하지만, 그 세계안에서 갑작스럽게 환영과 빛의 세계로 빠져들면 인간은 한 사람의 이방인으로 전락하는 자신을 느끼고 마는 것이다.’

세계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에서 지식은 축적되고 문명은 발전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같은 세계에서 전락하고 한 사람의 이방인이 되는 것은 곧 환영과 빛의 세계에 빠져드는 순간 이루어진다는 게 아닌가.

주인공 ‘뫼르소(Mersault)’라는 이름은 프랑스어의 mer(정오)와 soleil (고독, 독신), 바다와 태양을 합친 말이라고 한다. 카뮈 스스로 이방인의 영어판(英語版) 서문에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뫼르소는 현대에 있어 유일한 그리스도일 수 있다’고. 이 말은 작가 까뮈 자신이 한 말이다.

작가가 무엇을 염두에 두고, 무슨 생각을 하며 이 소설을 쓰게되었는 지 엿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힌트가 아닌가. 뫼르소와 그리스도! 전혀 엉뚱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다면 뫼르소의 어떤 점에서 그리스도를 말하려 한 것인가.

이 책은 주인공 뫼르소를 둘러싼 세 가지의 ‘죽음’을 놓고 이야기가 전개된다. 첫번 째는 뫼르소 어머니의 죽음이며. 두번 째는 뫼르소가 해변에서 아주 우연히 뜨거운 태양 아래 권총으로 아랍인을 죽이게 되는 일. 세번 째는 이 살인 사건을 놓고 사형 선고를 받게 되는 뫼르소 자신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뫼르소는 어머니의 사망소식을 듣고 장례를 치루러 양로원으로 간다. 양로원 원장과 양로원에 관계된 모든 사람들은 어머니의 장례를 치루기 위해 관습대로 분주히 움직인다. 원장은 어머니를 부양할 수 없었던 뫼르소의 처지와 입장을 십분 이해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한다. 일반인들에게 있어서의 어머니의 죽음은 결코 매일 일어나는 ‘일상’이 아니다. 그러나 뫼르소에게는 그것이 결코 특별한 일이거나 별다른 일이 아니다. 조금 귀찮은 일이기도 하려니와 이미 어머니와의 이별은 오래 전에 있었고 여느 죽음과 다를 것도 없이 그저 어머니는 사망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 어머니의 죽음을 맞는 뫼르소의 태도는 정당하지 않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달라야 하는 게 아닌가. 어머니의 친구들이나, 양로원의 식구들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뫼르소의 태도가 무언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 때 문지기가 내 뒤로 나타났다. 달려온 모양이었다. 그는 좀 더듬거리며 말하였다.

“입관을 하였습니다만, 보실 수 있도록 뚜껑을 열어 드리죠.”

그러면서 관 가까이 가려기에 나는 그를 만류하였다. 그는 말하였다.

“안 보시겠습니까?”

“그만두겠습니다.”

그는 말을 끊었고, 나는 그런 소리는 하지 말아야 했을 것이라고 느껴져 어색하였다. 조금 후 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하는 것이었다.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글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흰 수염을 어루만지면서 나를 보지 않고 말하였다.

“하긴 그러실 겁니다.”



뫼르소에게 그같은 일은 특별히 의미가 없다. 단지 지금 짓눌리는 피곤에서 쉬고 싶고 더위를 피해 시원한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싶음만 있을 따름이다.

까뮈의 작품에서 ‘뜨거운 태양’은 종종 등장한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루는 날 묘지로 향하는 길목에서도 예의 태양은 내리쬐고 있었다. 장례에 대한 뫼르소의 기억 속에는 교회당과 보도 위에 있던 사람들, 묘지 위의 제라늄, 뻬레의 기절, 관위로 떨어지던 흙, 그 속에 섞여 있던 나무 뿌리, 그리고 또 사람들, 목소리들, 마을 여느 카페 앞에서 기다리던 일, 끊임없는 엔진 소리, 그리고 마침내 버스가 빛나는 알제 시가지에 다다라서 이제는 드러누워 실컷 잠을 잘 수 있겠구나하고 생각하였을 때의 안도감 같은 그러한 것들만 있을 따름이다. 즉 어머니의 죽음이어서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저 매일 있는 일들의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일 따름 아닌가. 까뮈는 대개의 사람들이 호들갑을 떠는 것을 지극히 일상화시키고 있다. 때문에 장례식 다음날 여자 친구를 만나서 영화를 보고 함께 밤을 보내는 것 역시 특별할 것이 없다. 어머니의 장례식과 여자 친구를 만나는 것이 무슨 연관인가. 



“또 하루의 일요일이 가 버렸다, 엄마는 묻치셨다, 내일은 직장으로 돌아가야만 할 것이다. 정말로, 무엇도 변한건 없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이렇듯 뫼르소가가 계속 주절 거리는 말은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이다.

소설은 계속 그의 일상을 묘사해가고 있다. 이웃집 살리마노 영감과 우연히 알게 된 레이몽 생떼스. 그리고 마리와 회사 사장.

뫼르소는 레이몽을 알게된 후 그들과 함께 해변가에 가게되고 그곳에서 아주 우연히 아랍인을 살해하게 된다. 자연수명으로 죽어가는 어머니의 죽음이나, 작열하는 태양빛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해 권총을 쏘게되고 자신이 가해자가 되어 살인하게 되는 죽음조차도 뫼르소의 일상을 파괴하지 못한다.

‘그게 뭐 그리 중요한 일인가.’ 이것이 뫼르소의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이다. 어머니의 죽음이나, 자신으로 인해 죽게된 아랍인의 죽음이나 사람들은 저렇듯 소란스럽게 떠들고 있지만, 여기 뫼르소는 그같은 것들이 그저 하나의 일상일 따름이다. 아마도 자연스러운 생명의 현상일 따름이라고 해야 옳겠다. 나고 죽고 사는 것이 으렛껏 그런 것이 아닌가. 새삼스럽게 소란스러워야 할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뫼르소는 왜 아랍인을 살인하게 되는가. 그의 설명은 동기가 분명치 않다. 살인에는 그만한 이유와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뫼르소의 경우는 흔히 가정해 볼 수 있는 경우와 전혀 다르다.



“그 태양은 내 뺨에 비춰오기 시작했고, 나는 내 눈썹주위에 땀방울이 흘러 모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뜨겁게 타오르는 것 같았고, 난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나를 앞쪽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뫼르소는 레이몽이 마주친 아랍인, 지금 자신의 앞에서 칼을 뽑아 든 그와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마치 하늘이 열려서 한쪽끝에서 다른쪽 끝가지 빗물을 쏟아붓듯 열기를 내리 쏟고 있는 듯 했다. 뫼르소는 방아쇠를 당긴다. 이제 흔적도 없이  총알을 삼켜버린 그 움직이지 않는 몸뚱아리를 향해, 그는 네 방을 더 쏜다.”

살인을 하게되는 동기를 설명할 수 있는 다른 이유는 없다. 태양 때문이었다. 뜨겁게 타오르는 태양 때문에 견딜 수 없어서 방아쇠를 당기게 되었다. 그러나 예심판사나 검사, 그리고 재판정의 배심원들에게 그같은 것은 결코 설명이 아니다. 설명은 논리적인 근거가 있든지 심리적인 동인이 있어야 한다. 왜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는지, 하다못해 성격이 포악해서 순간적인 충동으로 우발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이라든지 사람들이 듣고 싶은 이유를 들어 설명을 해야 납득할테지만 사람들이 듣고 싶은 그같은 이유는 뫼르소에게 없다. 비록 우발적인 살인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은 ‘태양’ 때문이란다. 뫼르소의 진실과 사실이 논리적인 설명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없다.



“왜 당신은 땅에 누워있는 시신에 대고 총을 쏘았습니까?” “왜 첫발을 쏘고 두 번째 방아쇠를 당길 때까지 잠시 시간을 두었습니까?” 뫼르소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알지 못했으므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재판정에서는 어떤 형태든 논고와 변론이 오고가야 한다. 살인의 성격을 규정하고 형벌을 결정해야 한다. 정의의 심판을 내려야 하는 것이 재판의 진정한 의미다. 따라서 재판정은 무슨 설명이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심판사와 검사는 뫼르소의 권총 살인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찾아내기 위해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뫼르소의 태도를 문제 삼는다. 뫼르소의 주변 인물들이 증인으로 불려오고 재판은, 배심원들은 사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유와 근거를 가지고 살인 사건을 규정하고 뫼르소에게 단두대의 사형을 내리게 된다.

재판정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선악의 세계를 그대로 반영해 준다.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해 정당한 이유와 설명을 통해서 행위의 당위성을 담보받고 스스로 정당화하게 되거나 혹은 비난을 피한다. 또는 명분을 확보함으로 비난을 벗어날 수 있다. 사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인생들은 명분에 살고 명분에 죽는다. 세상은 마치 이와같은 재판정이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철저히 ‘삶’, 뫼르소는 배제되어 있다. 소외되어 있다. 존재는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름대로 뫼르소는 정오의 태양 아래 소외된 채 있는 고독한 존재였다. 자신의 행위를 규정짓는 재판정이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논리와 근거를 들이대며 결정해 버린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간다. 그 같은 결정을 주도하는 자들에 의해서 세계는 장악되고 존재는 실종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뫼르소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문제에 다가선다. 어머니의 죽음이나 자신으로 인해 죽은 아랍인의 죽음은 타인의 죽음이지만 이번에는 자신의 죽음의 문제와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아랍인의 죽음은 태양 때문이지 뫼르소 자신 때문이 아니다. 적어도 뫼르소에게는 그렇다. 아니, 까뮈가 얘기하고 싶은 것도 그 점이다. 그러나 뫼르소는 어떠한가. 뫼르소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조차 일상적인, 그저 가장 일상적인 고민의 흔적만 있을 뿐 여전히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다. 그들의 죽음이나 나의 죽음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다. 지금 죽는다는 것과 단지 몇십 년을 더 살다가 죽는다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지금 죽어야 한다면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형벌은 그것이 형벌이 될 때 형벌이지만, 교도소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하는 것이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에게는 징벌이 될 수 있으나 어느덧 익숙해져버리고 담배를 피우지 않아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에겐 징벌이 되지 않는다. 자유다. 마찬가지로 뫼르소에게는 사형이 징벌이 아니다. 그에게 다가 오고 있는 죽음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단한 의미가 있는 이에게는 죽음은 최고의 형벌인 셈이지만, 뫼르소는 적어도 자신의 죽음이 중요하지 않다. 단지 죽을 때 외롭지 않게 군중들이 많이 모여줬으면 하는 정도의 바램만 있을 따름이다. 뫼르소에게는 그러했다.

그러나 이 세 죽음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해석과 설명은 실제와는 전혀 상관없이 진행되고 있다. 뫼르소를 둘러싼 정의의 심판관들은 죽음에 대한 끊임없는 설명, 설명을 요구한다. 뫼르소의 변호사조차 형량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유리한 판결을 위해 판결에 영향을 미칠 불리한 이야기는 하지 못하도록 뫼르소를 단속한다. 사실과는 다른 이야기를 강요 당한다.

따라서 재판은 뫼르소와는 상관이 없이 주변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다. 뫼르소는 여기서 철저히 ‘이방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뫼르소의 살인과 아랍인의 죽음에 대한 여러 형태의 설명들, 그리고 그 설명에 근거해서 단두대의 사형이 결정되고 있다.



“배심원 여러분, 이 사람은 어머니의 장례식이 있은 바로 그 다음 날에 해수욕을 하고 부정한 관계를 맺기 시작하고 희극 영화를 보고 좋아한 것입니다. 다시 더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뫼르소는 어느덧 재판과정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검사와 변호사가 벌이고 있는 변론을 즐기고 있다. 나와 상관없이 나에 대해 이야기되고 있는 것은 오늘의 법정이나 ‘이방인’의 소설에 등장하는 법정이나 다를 것이 없다. 오늘날의 언론이나 사람들의 모든 이야기 구조는 이 같은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은 사건이나 이벤트를 소비한다. 언론은 이들 소비자들과의 거래를 위해 뫼르소의 진실과 상관이 없는 이론과 논리로 이벤트를 극대화하고 사건을 팔아먹는다.

요즘 우리 사회만 해도 화제의 주인공에는 항상 대통령이 있다.언론의 속성상, 민중의 속성상, 항상 이벤트와 사건이 있어야 신문이 팔리고 거기서 목숨을 부지한다. 사냥감이 있으면 그 사건안에 있는 진실, 곧 뫼르소는 상관없이 부풀려지고 재단되고 평가가 내려지며 전문가가 동원되어 토론을 벌이는 것은 어느 시대나 똑같은 광대놀음이다. 한바탕 소동을 치루고야, 굿판을 벌리고 나서야 잠잠해진다. 새로운 이벤트를 찾아 여전히 심판자들은 눈을 부릅뜬다. 굶어죽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닌가.

종교인들이라해서 무엇이 다를까. 뫼르소가 재판을 받는 동안 판사와 주고받는 이야기나 소속 신부와 주고받는 이야기 역시 뫼르소의 삶과는 상관이 없는 동떨어진 세계이다. 

뫼르소는 종교적인 위로와 신과의 화해를 말하며 뫼르소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우리 모두는 죄인이 아니냐는 식의 종교적 언사에 익숙한 소속 신부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당신의 신념이란 건 모두 여자의 머리털만한 가치도 없다. 당신은 죽은 사람 모양으로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실한 자각조차 없지 않느냐? 나는 보기에는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그것은 당신보다 강하다. … 나는 이런 것은 하고 저런 것을 하지 않았다. 어떤 일을 하지 않았지만 이러저러한 다른 일은 했다.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나는 마치 이 순간, 나의 정당함이 인정될 저 새벽을 여태것 기다리며 살아온 셈이다. 아무것도 중요한 것은 없다. 나는 그 까닭을 알고 있다.”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이나, 아랍인의 죽음에 대해서 특별히 중요한 것이 따로 있지 않다. 물론 그 때 그 때의 상황에 반응하는 반응은 조금씩 다를지 모르나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하나도 없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무슨 중요성이 있는가! 당신의 그 하나님, 사람들이 선택하는 생활, 사람들이 선택하는 숙명, 그런 것이 무슨 중요성이 있다는 말인가 … 살인범으로 고발되어 내가 어머니의 장례식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고 해서 사형을 받는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중요성이 있다는 말인가.”



뫼르소에게 새삼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까 재판관이나 배심원들조차 이상한 논리로 사형판결을 내리고 있지만 그 말도 안 되는 논거에 대해서조차 그는 아무런 항변을 하지 않는다. 여전히 그러한 것들은 그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일 뿐이다. 이는 재판부에 대한 뫼르소의 냉소가 아니다. 냉소는 또 하나의 심판 기능이다. 그는 세상이라는 재판정에서 전락한 이방인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그는 세상이라는 의미체계와는 상관이 없는 고독한 존재다. 소외된 존재다. 아니 관여할 것이 없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해 그는 의미부여를 할 수 있는 자격도 권리도 없는 이방인이다. 아주 낯선 세계의 사람인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며 사형날만을 기다린다. 그의 남은 소망은 단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증오의 함성으로 맞아주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까뮈는 뫼르소라는 주인공을 통해 세상이 움직여지는 그 큰 거대 시스템이, 사람들이 저렇듯 핏대올리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든 움직임들이 결국 의미없는 움직임인 것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 사람들은 너에 대해서도 혹은 나에 대해서도 모든 행동의 동인에 대해 끝없는 설명, 설명을 요구한다. 왜 그러할까. 그것은 의미 있는 것은 무엇일까하는 것에 목매어 있다는 반증이다. 의미있는 일은 옳지만 의미없는 일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름의 이유가 있어야하고 설명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타당한 설명만 있으면, 합당한 이유만 있으면 그는 이방인이 아니다. 뫼르소는 그 점에 있어서 세상이 요구하는 그럴듯한 설명을 할 수 없는 존재이다. 뫼르소는 아웃사이더가 아니다. 아웃사이더란 비주류란 말일터이다. 비주류는 그 세계의 사람이다. 뫼르소는 비주류가 아니라 완전히 체제로부터 전락한 사람이요, 체제의 시스템과는 어울릴 수 없는 이방인일 따름이다. 체제가 수용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따라서 체제는 역시 그를 제거할 수밖에.

그의 삶은 설명될 수 없다. 설명되는 순간, 그것은 정답이 아니다. 뫼르소는 단지 본능적인 충동에 의해서 사는 사람의 유형이라고 혹여 누군가 말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검사나 변호사의 변론의 범주에 속한다.

뫼르소의 삶은 설명의 대상이 아니다. 단지 그의 생생한 삶만 있을 따름이다. 그것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뫼르소는 태양에 예속된 사람이다. 그도 역시 죽음의 태양이 내리쬘 때 권총의 방아쇠를 당길 수 밖에 없는 존재의 이중구조 속에 노출되어 있다. 또 다른 죽음의 그림자를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존재의 부조리를 드러낸다. 그는 전락해 있고 이방인으로 있으면서 동시에 태양 아래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고 보면 완전한 이방인이 아니라는 말(?)이 되기도 한다. 아니 태양은 언제나 그렇게 죽음의 빛을 내려쬐고 있다. 어머니의 장례식 때도 그랬던 것처럼, 누구도 죽음의 태양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이 태양 아래에 있는 사람은 살인할 수밖에 없고 그 태양은 또한 뫼르소를 살인한다. 재판정의 사람들과 저 군중들은 그같은 사실을 모르고 세계에 살고 있지만, 태양빛 아래 고독하게 서있는 뫼르소 그는 분명 ‘이방인’이다.

이것이 어쩌면 그의 그리스도관이 그렇게 투영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까뮈의 작품에 등장하는 죽음의 태양이란 모든 체제내에 드리워진 설명의 세계, 논리와 합리의 세계에서 피어나는 인생들의 잘 짜여진 시스템을 일컫는다. 인생들의 정신은 바로 그같은 죽음의 태양빛에 의해 고양되고 키워간다. 그러므로 사망의 태양으로 비유되는 것이다. 그의 작품 곳곳에 등장하는 ‘태양’은 그의 소설을 이끌고가는 중요한 상징적 장치이다.

하나의 범죄를 논단하기 위해 얼마나 그럴듯한 설명으로 범인을 단죄하는가. 그 논고의 합리성이 사실을 말해주는 것인가. 어떤 경우도 설명으로 사실을 대치할 수는 없다. 선악의 가치, 도덕과 윤리가 전면에 얼굴을 내밀면서 생명을 죽음으로 내몬다. 정오의 태양이 내리쬐는 순간 얼굴에서는 땀이 흐르고 견딜 수 없는 더위에 순간 방아쇠를 당기고 있는 것은 바로 그같은 도덕과 윤리의 태양(당시 프랑스 사람들의 아랍인들에 대한 편견(?))이 무심코 아랍인을 죽이고 있는 것의 상징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방인으로 전락해 있는 뫼르소조차 뜨거운 태양의 뙤약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뫼르소의 이중구조이기도 하다. 설명의 세계는, 끊임없이 설명을 요구하는 세계는 그러므로 사망의 세계이다. 생명은 설명될 수 없다. 생명은 단지 전달되고 꿈틀댈 뿐이다. 더구나 이를 논리의 구조에 담아보려는 것, 그것이 타락이다. 인간은 곧 논리의 구조에 미혹되어 있다. 무엇이든 설명하려는 것이다. 그 설명을 바탕으로 문명의 바벨탑은 쌓아 올려진다. 그것은 모든 생명을 몰아낸다.

경건한 그리스도인을 자부하는 판사가 뫼르소를 ‘적그리스도 양반’이라고 비아냥대고 있지만, 까뮈는 도리어 뫼르소에게서 그리스도를 묘사하려 한다.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옷은 입었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인 셈이다. 체제를 따를 수 없는, 체제로부터 전락한 존재다. 로마법정은 그를 단두대가 아닌 십자가형을 언도하고 있다.

까뮈는 뫼르소에게서 오늘날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던 것은 아닌가. 소외된 이방인의 모습으로 말이다.

물론 까뮈에게 투영된 그리스도관이긴 하지만, 그래서 까뮈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에 이의를 달아볼 수도 있겠으나 그는 소설속에서 그리스도의 한측면을 그렇게 나타내보고 싶었던 것이다.

뫼르소의 고백처럼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들은 중요한 것이 너무 많다. 사람들은 의미를 찾아서 산다. 그 의미가 의미없어지기 전에 인간은 결코 안식할 수 없다. 의미를 좇아서 수고를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의미 있음’이 그대를 지배하고 있는 동안, 그것은 그대 자신의 에고의 몸짓일 뿐, 그리스도의 거룩이 깃들일 공간은 없다. 그대의 ‘그 의미하는 바’가 곧 그대 안의 생명을 내몰고 그대를 ‘의미 있는 것의 노예’로 만든다. 그것이 비록 ‘생명’이라는 이름을 뒤집어 쓰고 있다해도 그것은 생명을 노략하는 양의 털옷을 입고 있는 이리일 뿐이다.

우리는 다만 ‘의미 있음’을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게 주어진 삶이 바로 지금 이것이기 때문에 ‘의미 있음’과 상관없이 온몸으로 살 수 있다. 아니 다른 방법이 없지 않은가. 그대는, 지금 바로 그 일을 하라. 그것이 그대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혹자는 의미없는 삶은 곧 죽은 삶이라고 말하려 할 것이다. 의미없음조차 사실은 의미이다. 곧 의미와 무의미를 떠난 삶이 오늘 내게 주어진 온 몸으로 살아낼 수 있는 ‘지금 바로 여기’ 아니겠는가. 의미에 매몰된 삶은 의미 없으면 아무일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의미로부터 자유롭다면 자신에게 다가오는 삶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의미와 상관없이 살아 낼 수 있다. 비로소 죽음의 태양 때문이 아니라 자체의 동인 곧 사랑의 힘에 의해 살 수 있다. 의미있음과 없음을 기준으로 삶을 저울질하는 재판관의 일도 멈춘다. 성경이 말하고, 바울이 말하고 그리스도가 계시해주고 간 ‘사랑’은 바로 거기가 출발선이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역시 자신의 기운으로 에고를 행복하게 하기 위한 몸짓일 뿐이다. 그같은 것이 뫼르소로 하여금 자신의 사형집행 날에 대한 담담한 마지막 독백을 가능 하게하는 힘이다.



“이제 내게 남은 소망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증오의 함성으로써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비록 논리적이지는 못하지만, 세계는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하지만, 그 세계안에서 갑작스럽게 환영과 빛의 세계로 빠져들면 인간은 한 사람의 이방인으로 전락하는 자신을 느끼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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