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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 : 의식의 진보

 

00427473601_20120423.jpg » 사회주의와 불교, 무소유사상(야마기시즘)을 거쳐 공자의 세계에 이른 이남곡씨는 자신의 사상적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한때 사회주의자였으나, 지금은 적어도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니다. 사람들은 나를 공동체주의자라고도 부르지만, 굳이 표현한다면 나는 업그레이드된 사회주의를 지향한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신인문운동’ 사상가 이남곡



전북 장수의 한 산골마을 폐교에서 매달 연찬회를 열며 ‘신인문운동’을 제창하고 있는 이남곡(67·논실인문학교 이사장)씨가 최근 <논어-사람을 사랑하는 기술>을 펴냈다. 한때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었던 그는 이순(耳順)의 나이에 본격적으로 손에 든 <논어>를 통해 인간 진보의 위대한 낙관을 발견했다. 그것은 그가 일찍이 말한 ‘인간의 성화(聖化)’가 가능하다는 믿음을 확인시키는 것이었다.


이씨는 초야에 숨은 사상가로서 처음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낸 책 <진보를 연찬하다>(2009, 초록호미)에서 인간의 성화, 즉 “보통사람들도 부단한 자각을 통해 과거 성인들이나 가능했던 높은 의식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인간에 대한 대담한 낙관론을 펼쳤다. 인간은 물질과 제도의 양면에서 이룩한 엄청난 진보를 바탕으로 마침내 ‘아집과 소유’라는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무소유에 가까운 사회에 도달할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인간의 자각과 노력 없이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사회적 실천과 함께 인문운동을 제창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씨는 25일 저녁 7시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논어…> 출판 기념을 겸해 자신의 사상을 들려주는 강연회를 연다. 강연회에 앞서 이씨를 만나 ‘이남곡 사상’의 개요와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봤다. 


-인간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전망하시는데, 과연 인간과 세계는 진보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21세기는 인류가 운명적인 갈림길에 직면할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인간화, 즉 인간의 성화가 이뤄져서 무소유 사회에 근접하는 진화를 이룰 것인가, 아니면 세계자본주의가 대안을 찾지 못한 채 붕괴해 다시 야만과 혼돈의 상태로 돌아갈 것인가? 머지않은 장래에 인류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인류는 멸망이 아니라 생존의 길을 선택할 것이며, 그 선택의 열쇠는 인간 의식의 진보에서 나올 것이라고 본다.”


-그런 전망이 21세기 중에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인가?

“나는 적어도 21세기 안에 전면적이지는 않더라도 일부 지역에서는 현재의 자본주의를 넘어 인본주의 사회가 도래하리라 보고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류 최고의 로망은 무소유 사회이다. 지금의 소유제도나 인간 의식으로는 파국을 면할 길이 없기 때문에 인류의 집단지성은 결국 무소유에 근접한 새로운 사회 모델을 찾게 될 것이다.”


-너무 인간이란 존재를 신뢰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을 것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인간은 자기중심적인 아집과 소유관념에 젖어왔기 때문에 머리로는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해도 실제로 실천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부단한 연습이 필요하다. 나는 대전환의 임계점을 향해 치닫고 있는 자본주의와 종교가 그 연습장이 되리라 본다. 자본주의 안에서는 ‘시장의 인간화’가 부단히 연습(사회적 실천)되어야 하고, 종교에서는 보통사람들의 성화(인간 의식의 진보)가 연습되어야 한다.”


-인간의 성화는 어떤 모습일까?

“나만 옳다는 아집, 내 것만이 소중하다는 소유로부터의 자유이다. 남을 배려하고, 남에게 양보하고 싶어하는 마음의 상태, 그것이 참된 인간화의 모습이다.”



지금 소유제도·인간의식으론 파국 못면해

자유욕구는 소유관념보다 훨씬 더

본질적 집단지성, 무소유 근접 새 사회모델 찾을것



-인간 의식의 진화가 가능하다고 보는 근거는?

“인류 역사는 자유의 확대라는 순방향으로 진행해왔다. 인간은 물질과 제도의 양면에서 엄청난 진보를 이룩했고, 지금도 진보를 거듭하고 있다. 아랍세계의 혁명도 한 예이다. 진보의 다음 단계는 인간 자신의 진보이다. 인간의 자유욕구는 소유관념보다 훨씬 본질적이고 뿌리깊은 욕구이다. 조건이 성숙되면 인간의 자유욕구가 마음속에서 소유관념을 밀어내는 시기가 도래할 것이다. 자본주의 위기가 심화되면 될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의식 혁명의 절박성을 깨닫게 될 것이다.”


-선생님이 하고 있는 신인문운동도 연습의 한 과정인가?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앞서서 인간 의식의 개혁을 자각한 선구자들을 새로운 사회를 향한 21세기형 혁명가, 운동가로 양성해야 한다. 자본주의 폐단과 위기가 심화될수록 새로운 비전을 그려내고 그것을 조직하고 운영할 사람들을 준비하는 것만큼 절박한 과제는 없다. 내가 신인문운동이라는 의식의 진보 운동을 제창하는 것도 새로운 사회를 이끌 사람들을 키우자는 것이다. 사회주의가 실패한 바로 그 자리에서 진정으로 새로운 사회, 즉 자유롭고 평등하며 따뜻한 사회를 준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산업화와 민주화 다음의 시대정신은 선진화와 인간화의 조화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진보와 보수, 좌와 우라는 고정된 이분법을 뛰어넘어야 한다. 더이상 고루한 진영논리에 갇혀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개인적으로는 내 정서와 좀더 가까운 진보 쪽이 먼저 자신을 업그레이드시켜 시대를 이끌어갔으면 좋겠다. 지금 진보진영에는 큰 역사의 안목과 구체적인 비전이 절실해 보인다.”


-선생님이 말하는 인간화란?

“첫째, 물질(돈)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인간이 본위가 되는 사회로의 전화이다. 자본주의의 폐단이 일정한 한계에 도달하면 인간은 파멸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전망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둘째는, 인간 의식의 진화이다. 동물계 일반의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것이다. 자기만이 옳다는 아집, 완고한 진영논리, 이런 건 인간화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아직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사회적 불평등도 여전히 심각한 수준인데, 의식운동은 뭐랄까, 개인적 차원의 수행으로 비칠 수 있다.

“사회적 투쟁은 당연히 필요하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투쟁의 한편에서 더 높은 차원의 사회를 향한 비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거다. 사회적 실천의 영역과 인간 의식의 진보가 함께 갈 때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진보적인 사람들이 분노나 증오로부터 좀더 자유로워지길 바란다. 불의한 세력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에서는 분노나 증오의 힘이 상당한 역할을 했지만, 새로운 세상을 책임있게 열어갈 세력이 되고자 한다면 증오와 분노만으로는 안 된다. 사람들이 원하는 세상은 자유롭기만 하고 차가운 사회가 아니라 자유로우며 따뜻한 사회이다. 증오와 분노에 휘둘리지 않는 투쟁.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진정성을 가지고 깊이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


-인류는 전쟁, 양극화, 생태계 위기, 자원 고갈 등의 난제에 직면하고 있다. 어떤 대책이 있는가? 

“국가, 특히 선진국들의 자각과 정책적 실천이 중요하다. 그러나 더 근원적인 것은 인간의 ‘생활 양식’이 변해야 한다. 문제의 근원이 바로 인간의 엄청난 행위능력과 자기중심적 가치체계 사이의 모순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능력은 멈출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관계에서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다. 결국 소유와 아집을 넘어서는 의식의 변화와 자연친화적인 단순소박한 삶으로의 전환만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닐까 한다.” 


-올해는 대선이 있는 해다. 진보진영에 조언한다면?

“단순히 비판세력이란 이미지로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기 어려울 것이다. 현실적인 정치투쟁도 필요하지만 지금은 미래를 바라보는 근원적이고 철학적인 안목이 필요한 시기다. 대립구도와 편가르기에 편승하는 것은 책임있는 자세가 아니며, 선거에 유리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적어도 마음이나 정신 면에서는 강자라고 할 수 있는 진보 쪽이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본다. 갈등과 대립, 투쟁이 불가피한 상황에서도 상대방을 ‘우리’라는 더 큰 울타리 안에서 바라보는 인식의 확대가 절실하다. 그것이 업그레이드된 진보의 길이다.”


-여야 어느 쪽이 집권하든 향후 5~10년은 한국에 매우 중요한 시기라고 입을 모은다. 다음 집권자들에게 조언한다면?

“어느 쪽이 집권을 하든 가장 중요한 것은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정치철학의 정립이다. 그저 지금 정권보다 조금 나은 정도로는 안 된다. 보편적 복지냐 선택적 복지냐 하는 것도 결국 정부의 시장 개입 정도를 다투는 것인데, 그 수준에 머물지 말고 본격적으로 시장의 인간화를 향한 큰 걸음을 내딛는 출발이 되어야 한다. 사회 전반에 걸쳐 그런 기풍을 일으키는 정권이었으면 한다. 오늘날의 인문운동은 생활운동이다. 인간의 가능성을 믿고 보통사람들 스스로 의식과 생활을 물질 위주에서 인간 본위로 변화시켜 가자는 운동이다. 자유롭고 따뜻한 사회라는 미래의 비전을 꿈꾸는 여러 주체들이 시민사회 곳곳에서 자라나 새로운 사회를 조직하고 운영해 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새로운 정치철학, 새로운 통치의 방향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산업화와 민주화·동서양 요소 혼재된 한국

현대의 위기 넘어 새 문명 모색할 좋은 토양

진보, 진영논리 벗어나 ‘우리’ 인식 확대해야



-한국의 미래를 낙관하는가?

“산업화와 민주화의 동시 성공 경험과 더불어 동서양, 근현대의 모순들이 집약된 한국이야말로 새로운 사회의 모델을 창조할 수 있는 대단히 좋은 곳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시급한 것은 진보-보수 이항대립의 극복이다. 이 함정에서 빠져나온다면 대단한 에너지를 발현할 수 있는 나라임에 틀림없다. 한국 혁명은 진행중이다. 지난 반세기와 앞으로의 반세기를 하나의 혁명기로 볼 수 있다. 분단조차도 남북이 하기에 따라서는 새로운 사회를 향한 희망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런 비전을 나는 진보 쪽이 먼저 선취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진보 쪽 사람들은 늘 이 점을 생각해야 한다. 왜 부르주아계급이 여전히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가를. 그것은 부르주아들이 부와 함께 교양을 갖췄기 때문이다. 부만으로는 세계를 지배하지 못한다.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은 무엇으로 그것을 이루려고 하는가? 포용력 있는 마음과 넓은 안목으로 인간과 세계를 통찰하고자 할 때 비로소 진보가 미래의 희망이 될 수 있다.” 


인터뷰/이인우 기획위원 iwlee21@hani.co.kr



 

이남곡이 살아온 이야기

‘남민전’과 결별 뒤 무아집·무소유·공자로 사상 범위 넓혀


이남곡은 1945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좌익이었던 아버지는 6·25 전란 와중에 죽었다. 그의 성장기는 가난과의 투쟁이었다. 5살짜리 막내 남동생이 갑작스런 사고로 죽자 어머니는 홀로 상경해 막일을 하며 자식 교육에 매진했다. 그런 상황에서 궁벽한 함평의 중학생이 경기중학 출신 외에 단 60명만을 시험으로 뽑던 경기고에 합격한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어머니, 여동생 등 세 식구가 시작한 서울생활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고교 3년 동안 한번도 친구를 집에 데려가지 못했다. 가난을 경험한 고학생이었지만 서울법대생 이남곡은 출세의식보다는 이상주의 성향이 강했다. 대학 1학년 때 사법고시 예비시험인 사법행정요원 예비시험에 합격했지만, 불과 1년도 안 돼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판검사가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가’로 규정했다.


아버지의 부재로 징집이 면제된 이남곡은 대학을 마치고 지하운동으로 들어간다. 농촌에서 협동농장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다가 교사자격증을 따면서 자연스레 교사운동과도 결합한다. 8년간의 교사생활 동안 그는 교육실천연구회와 농업문제근대화연구회라는 운동조직에 참여하며 사회변혁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이 무렵 그는 평생의 배필이자 동지였던 서혜란(2010년 별세)을 만났다.


그때가 70년대 중반, 유신독재가 기승을 부릴수록 이남곡의 사회변혁에 대한 욕구도 강렬해져 갔다.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과의 만남은 그런 점에서 필연이었으나, 그 만남은 오히려 이남곡의 사상 형성에 일대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가 된다. 그는 남민전 가입 3개월여 만에 조직과 사실상 결별했지만 이 사건으로 5년형을 선고받고 4년을 복역한 뒤 1983년 석방됐다.


감옥에서 나와 학원강사 등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이남곡은 이미 예견하였던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를 목도하면서 ‘새로운 인간, 새로운 사회, 새로운 문명’을 지향하는 자신의 사상을 더욱 가다듬어 갔다. 그는 자본주의의 대안이라 믿었던 사회주의가 실패한 것은 폭력혁명이나 계급독재와 같은 잘못된 방식과 무엇보다도 사회주의라는 이상을 제도로서 실현할 수 있는 ‘인간’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자본주의와 아집관념으로부터의 자유”라는 비전을 실제 삶 속에서 실현하고 싶었던 그는 자신의 생각과 흡사한 무아집·무소유 공동체인 야마기시 사상을 접하고 1994년부터 8년 동안 경기도 화성의 야마기시실현지에 들어가 생활했다.


00427473405_20120423.JPG 이남곡은 현재 전북 장수군 번암면에서 8년째 살고 있다. 지병으로 숨진 아내가 남기고 간 300개의 항아리에 된장과 고추장을 담가 파는 것이 그의 생업이다. 그가 사랑하는 <논어>의 말씀은 무적무막(無適無莫)과 무지야(無知也)이다. “군자는 세상 모든 일에 옳다고 하는 것이 따로 없고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이 따로 없다. 오직 의를 좇을 뿐이다.” “내가 아는 것이 있는가?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누구든 나에게 물어오면 어떤 편견도 없이 그 양 끝을 들추어서 끝까지 찾아보겠다.”


이남곡의 본명은 계천(啓天)이다. 하늘을 연다는 뜻이다. 이름이 너무 크다고 여겼던지 노모는 그가 감옥에서 나오자 어느 스님으로부터 남곡(南谷)이란 새 이름을 받아 왔다. 그를 이계천으로 기억하는 세계와 이남곡으로 기억하는 세계의 간극 사이에 험난했던 한 시대의 정신사가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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