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서로 마음을 열어 고민과 아픔을 나누고 치유하며 행복을 모아내는 게시판입니다.

집시여인이 준 에피파니

일반 조회수 7566 추천수 0 2008.10.12 12:15:11
즐거운저항

 

더러운 집시여인이 나를 보고 있었다. 구걸도 쉬는 시간인지 손놓고 하염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라비안 신발과 인디언 사리와 티벳 창포같은 너울을 갈래갈래 휘날리며 바람속에 앉아 나를 보고 있었다. 세상의 때가 눈길마저 더럽히진 않을텐데 나는 그 눈길도 받지 않았다. 책을 보는 체하다 고개를 드니 여전히 나를 보고있었다, 미동도 없이.

 

짐짓 눈길을 돌려 여인의 앞을 사납게 지나치는 행인들을 보았는데 역시 쉬는 시간인지라 아무도 그녀를 눈여기지 않았다. 여인은 단 한 순간도, 단 한번의 일별로도 나를 놓치지 않았다. 다시 책을 보는 체했지만 나는 점점 불안해졌다. 따라올 것같아 그 자리를 떠나지도 못했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내 팔을 건들였다. 흠칫 돌아보니 조그만 여자아이가 내 옆에 서있었다. 아라비안 신발과 인디언 펀자비와 티벳 창포. 순간 나는 고개를 돌려 여인을 보았다. 여인은 마치 마무리짓듯 강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드디어 눈길을 거두고 제 할 일 채비를 했다. 하지만 나는 여인의 눈길에서는 풀려났지만 아이의 눈길에 다시 걸리고 말았다.

 

나를 인계인수한 그들은 어떤 사이일까. 두려운 긴장에서 풀려난 나는 문득 그런게 궁금해졌다. 그들의 숙련된 구걸에 주머니를 뒤져야 했던 나는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무엇이든 잘한다는 건 힘들이지 않는 거라는, 말없이 조용히 하는 거라는 다소 전율스런 에피파니를 느꼈다.  

 

올드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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