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서로 마음을 열어 고민과 아픔을 나누고 치유하며 행복을 모아내는 게시판입니다.
운전하며 듣는 라디오에서 조하문의 '눈 오는 밤'이 흘러나오더군요. 애창곡이었죠. 통기타 치며 노래 부르기도 좋고,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첫구절만 시작을 해놓으면 알아서 다른 사람들이 정겹게 불러주니 이 보다 더 좋을 겨울밤 애창곡도 드물겠죠?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가사는 같지만, 표정은 제 각각입니다. 대부분 흐뭇한 표정이기는 하지만, 그 안에 교차되는 여러 회한들이 스쳐 지나가죠.
 
다음 이야기는 저에게 오래 도록 기억되 온 '응급실의 눈 오는 밤'입니다.
   
-눈 오는 겨울 밤, 응급실로 실려온 전신화상 환자
 
내과 전공의(레지던트) 2년차로 겨울을 보낼 때의 일입니다(여담 : 일반인들은 우습게 보지만, 응급실과 중환자실에서 레지던트 2,3년차는 최고로 뛰어난 의사입니다. 10 교수보다 잘키운 레지던트 1명이 더 많은 사람을 살립니다.).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이 내린 날이었습니다. 밀린 환자들도 정리가 안되는데, 멀리서 또 싸이렌소리가 들려오고...... 밖에는 눈이 쌓일 지 모르지만, 응급실 안에는 우리들과 간호사들의 한숨소리만 쌓이는 새벽 2시. 제발 지금 들어오는 환자는 다른 진료과 환자이기를 기도하는 시간이죠.
 
119 구급대원의 다급한 목소리. 전신화상환자랍니다. '앗사, 외과환자다.'란 안도를 하는데, 이내 매캐한 냄새와 함께 응급실로 들려오는 환자는 타다만 이불에 돌돌 말려 있더군요. 인턴선생님과 간호사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제 눈과 마주쳤는데...... 도저히 외면할 수 없어, '외과 올 때까지만 봐줄께.'하고 환자를 처치실로 옮기는 것을 도왔습니다.
 
카시미론 이불을 벗기자 70대 할머니가 들어 있더군요. 머리카락도 거의다 불타버렸고 온몸이 2~3도 화상(심한 화상)이더군요.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추워서 덮고 온 줄 알았던 이불이 알고 보니, 나이론이 녹으며 온몸에 늘어 붙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수액을 공급할 혈관을 확보하고, 온몸을 깨끗한 물로 씻어 내며 녹은 옷과 이불을 벗기는데, 이불과 함께 살가죽이 뚝뚝 떨어져 나가더군요. 통증도 통증이지만, 불 탄 피부라곤 해도 그나마 보호벽이니 떼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더군요.
 
-살과 함께 타들어 간 나이론 이불  
 
일단 급한대로 응급처치를 하고, 서울에 있는 화상전문센터로 보내야할 상황이었습니다. 화상센터에 환자를 보내겠다고, 자리를 만들어달라고 외과 전공의가 전화를 하였습니다. 저는 보호자들에게 전화를 했죠.
 
'김##할머니 아드님이시죠?
지금 응급실인데, 화상을 크게 입고 생명이 위중하십니다. 빨리 오셔야겠습니다.'
'아,,, 그래요? 난 대전이라 못가니, 청주 사는 누나에게 전화해봐요.'
'??? 예,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세요.'
 
'김##할머니 따님이시죠?'
'지금 응급실인데 할머니가 화상을 크게 입고 생명이 위중하셔서,,,'
'뚝, 띠띠띠'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더군요. 아드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짜증을 내며, 가는데 1시간 정도 걸리니 기다리라고 하더군요.
  
-호롱불을 쓰는 21세기의 청주 근교
 
기다리는 사이, 할머니와 함께 구급차를 타고 오신 할아버지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여쭤보았습니다.
할머니는 산기슭 외딴집에 혼자 사시는데, 전기도 안들어와서 호롱불을 켜놓고 사셨다는군요. 아마도 호롱불이 넘어져 불이 난 것 같다고 합니다. 아랫마을 사는 할아버지가 불이 난 것을 보고, 119에 신고를 하고 여기까지 따라 오신 것이라더군요.
 
그리고, 시간이 흘렀지만 아드님은 오지 않으셨습니다. 전화를 여러번 하였지만, 역시 받지 않더군요.
 
이 정도 전신화상을 입은 사람 중에 사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매연도 많이 삼켰고 기도에도 화상을 입은 상태였죠. 어짜피 돌아가실 것 같은데, 서울로 굳이 보내야하냐고 외과 선생님들에게 물어보았지만...... 보호자들이 이렇게 비협조적일 수록 원칙적으로 해야한다더군요. 나중에 나타나서 화상센터로 안보내서 사람을 죽였다고 딴 소리를 할 수도 있다는 말에 제 관할도 아니고(화상은 외과), 저도 비슷한 경우를 당해봐서 수긍도 가더군요.
 
결국 녹아서 몸에 늘어붙은 이불을 덕지덕지 붙인 채 할머니는 다시 구급차를 타고 서울에 있는 화상전문센터로 갔습니다. 다음날 아침까지 자식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 할머니가 어떻게 되셨는지는 모릅니다. 아마도 몇일 뒤에 돌아가셨겠죠.
 

눈 쌓인 시골집1.jpg

[눈 쌓인 어느 시골집, 사진:김진숙]

얼마간 동안 응급실에서는 이 불효자식들과 불쌍한 할머니 이야기가 회자되었습니다. 함께 지켜봤던 저 또한 그 자식분들을 욕하고 저주하는 주동자였죠.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그 분들을 욕했던 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저는 정의이 홍길동이 될 수도, 되어서도 안된다는 것을 너무 자주 잊어버립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신 조자 인간의 죄를 판결하기 어렵고, 참회와 용서의 기회를 주는데..... 저는 너무 쉽게 타인을 규정 짓고 저주해왔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경우에 따라 약간 착하거나/나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겠죠. 이 분들도 무슨 사정과 과정이 쌓이고 쌓여서, 여기까지 왔겠죠. 그날 그 분들이 전화를 안받는 동안 마음이 어땠을 까요? 평생 가슴에 죄책감으로 남아있지는 않을까요? 기억에서 지우고 싶을 수록 더 깊이 박히는 손톱 밑 가시 같이 되지는 않았을까요?
 
 
-예수는 십자가에서 무엇을 전하고 싶었을까?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실수와 잘못을 돋보기로 너무 커다랗게 보여주기 보다는, 때론 세상을 하얗게 덮어 주는 눈 같은 이해와 용서가 필요하지는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상처 받은 사람이 먼저 용서를 하는 것은 정말 큰 용기가 필요하다더군요. 인간의 죄와 배신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면서도 예수님은 '인간을 향한 복수와 저주'가 아닌, '사랑과 용서'의 말씀을 남기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간 스스로 구원할 방법이 '사랑과 용서'라는 것을 직접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은 아닐까요?
 
돌아가신 할머니는 이미 자식들을 용서하고 잘 살기를 기도하고 있을 겁니다. 천사가 있다면 크리스마스에라도 이런 용서의 소식를 전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천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직접 용서의 편지를 전하는 용기를 내어보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어떨까요?
 
???
크리스마스가 하루 밖에 안되서 힘들다고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온 세상 사람들의 마음의 평화를 위하여~~~, 성탄공휴일을 일주일로 연장하면 안될까요? ^^
 

... 폭력의 치명적 약점은 그게 악순환이란 겁니다. ... 폭력에 폭력으로 대항하면 폭력을 더 증폭시켜 ... 이미 별도 없는 하늘을 더 어둡게 할 뿐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

   내과의사 한정호의 의료와 사회(im.docblog.kr), 출처 포함 무단 재배포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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