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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아 떠난 봉암사 여행

일반 조회수 11772 추천수 0 2008.04.20 10:40:18

  '080420    일요일  <맑음>


 식구들이 곤하게 잠든 새벽 네 시, 5시 35분에 떠나는 첫차를 타기 위해 조용조용 길 떠날 채비를 서두르는 마음이 설렘으로 출렁거린다.


 서초구민회관 앞에서 초면의 일행을 기다리면서 많은 이들이 왁자지껄 몰려와 관광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고 떠나고 하는 풍경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다가, 마침내 나도 그들처럼 버스에 올랐다. 일행이 10여 명인 줄 알고 있었는데 거의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버스 안이 꽉 찬다. 열 명의 초대받은 사람들과 한겨레 신문 공고를 보고 참가하신 분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다는 걸 나중에 들었다. 가족 몇몇이 함께 하거나 지인들이 반갑게 만나는 것을 보면서 혼자인 것이 공연히 머쓱해지기도 했다.


  드디어 출발, 버스 안이 차분해지자 이번 여행의 진행자인 조현 기자의 여행 안내가 시작되었다. 봉암사와 정토회 수련원에 대한 소개, 그리고 이 여행의 취지 등등에 관한 내용이었고, 이번 여행의 주제가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는 설명도 들었다.


 우리가 찾아가는 봉암사는 일반인에게 문을 열지 않고, 오직 수행에만 정진하는 절이라는 안내자의 설명을 듣는 중에 몇 년 전의 가족 여행이 떠올랐다.


 아마 여름 방학 중이었을 것이다. 장대비가 억수같이 퍼붓는데, 어린 아이들 셋을 뒷자리에 태우고 가다가 가다가 들른 곳이 봉암사였다. 그 곳이 출입을 금하는 곳이라는 건 물론 알지 못한 채였다. 빗줄기가 하도 굵어 앞이 잘 보이지도 않는 길을 부지런히 달리고 있는데 절 문을 지키던 분이 나오더니 더 이상은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영문을 몰라 차를 길가에 세우고는 가족들이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며 조용히 쉬고 있자니 한참 후에야 들어가도 좋다고 알려 주었다.


 그렇게 해서 들어간 경내엔 우리 가족 다섯 외에 다른 관광객이 아무도 보이질 않아 비 때문인가 했었다. 각자 색색의 우산을 펼쳐 쓰고 조심조심 오른쪽 비탈진 길을 걸어 올라 비석과 탑 등을 둘러보는데, 스님 한 분이 아이들에게 다가와 장난스런 표정으로 이런저런 말을 걸어오셨다. 하지만 촌스런 우리 아이들은 쩔쩔 매며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이들의 그런 모습을 재미있어 하며 그 스님은 손목에 두르고 있던 향내 진한 염주를 벗어 큰딸아이에게 건네주었다. 저녁 공양을 하고 가라는 스님의 말씀에 나와 아이들은 좋아라 하는데 남편이 굳이 사양하는 바람에 그냥 돌아서서 나오면서 참으로 아쉬웠었다. 


 절 뒤쪽으로 서슬 시퍼런 희양산이 솟아 있어 매우 인상적이던 봉암사.

다시 봐도 희양산은 신비함 속에 기세등등한 기운이 서늘하다. 사람의 접근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 가파른 경사의 하얀 돌산은 바라보기엔 참으로 멋지나 푸근하게 사람을 받아 안는 산은 아니다.


 구수한 배추 된장국에 담백한 반찬으로 점심을 달게 먹고는 대웅전에 올라가 부처님을 참배하였다. 바쁜 일정이라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나 왼쪽으로 난 좁다란 산길을 올라갔다. 마애불 참배길이라는 작은 푯말이 방향을 일러준다. 계곡을 따라 바위 틈으로 핀 진달래 빛깔이 유난히 곱다.


 먼저 걷는 사람 발뒤꿈치를 보며 부지런히 오르다가 문득 고개를 드니 아, 드넓고 평평한 바위가 눈앞 가득 펼쳐진다. 다시 고개를 왼편으로 살짝 꺾으면 거기에 바로 마애불이 고요하면서도 친근한 표정으로 일행을 맞는다.


 깊게 합장한 후 너럭바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맑은 물소리에 심신을 내맡기고, 물결처럼 흘러가는 감정들과 느낌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평온함도 잠시, 목에 가시 걸린 듯 불편한 느낌이 탁, 걸려든다. 3월 내내 휘둘렸던 것. 그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하고 문제 삼기 시작하자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고, 마음은 한없이 피로해져 버렸던 그것. 어느 정도 벗어났다고 여겼던 그것이 봉암사 계곡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인정받고 싶고, 존중받고 싶고, 소외감에서 오는 두려움으로 떨고, 야속함, 노여움, 분노로 흔들리고... 그 말이 아니었어도 내 안에 그 갈망 있으니 언젠가는 드러날 그림자였구나, 남 탓할 일이 아니었구나...... .

이렇게 늘 뒷북을 치는 나 자신이 답답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현재의 내 모습인 것을. 이제라도 알았으니 갈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나마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고 간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다시 맑은 물소리가 들려오고, 따스한 기운이 온몸 구석구석으로 서서히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내려갈 시간입니다.'


 하는 소리에 눈을 뜨니 사람들이 벌써 저만치 내려가고 있다.


 다시 절로 돌아와 주지 스님을 뵈었다. 수술을 하신 지 며칠 되지 않아 긴 법문은 불가능하다신다. 일행 중 누군가가 '대운하' 에 대한 스님의 견해를 여쭙자 아주 단호하게 그 부당성을 말씀하셨다. 병환 중이라 목소리가 낮았지만, 오히려 그 나직함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결의가 암반처럼 굳다. 지극히 당연한 것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까지 바칠 각오를 해야 하는 이 기막힌 현실이 안타깝고 슬프다. 한강물은 한강으로 흐르고, 낙동강물은 낙동강을 따름이 마땅한 것을.


 정토회 수련원은 가파른 언덕배기를 한참이나 걸어 올라야 하는 곳에 있다. 가파른 길가로 노란 동백꽃이 정겹고, 누런 소가 느릿느릿 밭을 가는 풍경에 울컥, 어린 시절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이랴--- 길게 끄는 구성진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정토회 수련원은 그 곳을 거쳐 간 많은 이들로 인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진 곳인데, 허름한 건물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그 검소한 살림살이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 곳에서 참 반가운 이를 만났다.

지난 2002년 1월, 17일간의 인도 여행 중 전정각산 밑에 있는 수자타 아카데미를 방문했었다. 그 날이 마침 아이들 학예회여서 동네 사람들이 교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갈래 머리를 단정하게 땋은 아이들이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부채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갑자기 눈물이 펑펑 솟구치는 바람에 사람들 보기가 민망하여 슬그머니 밖으로 도망치듯 나왔던 곳. 그 바로 며칠 전에 한국인 봉사자가 학교를 침입한 강도의 총에 맞아 희생되어 추모식을 겸한 행사라고 했다.

 학교에 나오는 아이들이 매일매일 외우는 열 가지 항목 중에 ‘구걸하지 않겠습니다’ 라는 내용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 때 우리 일행을 안내해 주셨던 분이 바로 선주 법사님이었다. 나중에 아프가니스탄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한창 전쟁 중인 위험한 곳으로 가는 길을 말리는 이들에게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알면 가지 못할 곳이 없다’ 하셨다던가.

진정으로 나를 비우고 남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몸으로 보여 주는 삶이구나, 새삼 부끄럽다.


 따끈한 감잎차와 하얀 사각 접시에 담긴 정갈한 떡과 과일, 꽃나무 가지를 꺾어 운치 있게 상을 꾸민 그 정성에 일행 모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똑같은 일도 하는 이의 마음에 따라 드러나는 모습은 이렇게 다르다.

 정토회에서 준비하신 영상물을 보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시금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잠시 동안의 자유 시간, 차분해진 가슴으로 주변을 돌아보다가 조금 위쪽에 자리한 대수련장을 찾았다. 스무 명 남짓 수련생들의 절 수행이 한창 진행 중이었는데, 그 곳에 모셔진 불상이 바로 부처님 고행상이었다.


 고행상과 처음 맞닥뜨렸을 때의 충격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인도 수자타 아카데미 맞은편에 황량하고 가파른 돌산인 전정각산이 있다. 그 때가 정월이라 엄청난 인파의 순례객이 그 산을 오르고 있었고, 나는 앞 사람을 부지런히 좇아가다가 그만 일행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우리 팀은 이미 저만치 산등성이를 마저 오르고 있었다. 내 앞뒤로는 낯선 티벳 아주머니들이 간절한 표정으로 옴 마니 반메 훔을 계속 암송하고 있었다. 나는 어쩔 줄 몰라 황당한 표정으로 어디쯤에서 그 줄을 벗어나야 하나 두리번거리는데, 내 바로 뒤에 있던 아주머니가 내 옷깃을 자꾸 붙잡으며 그냥 그 자리에 있으라는 몸짓을 한다. 왜 딴 데로 가려 하는가. 여기가 맞는데, 하는 표정. 순박한 웃음에 마음이 놓여 그 줄을 그대로 따라 올라가면서도 지금 가는 곳이 어디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떠밀리듯 마침내 어두컴컴한 동굴 속으로 들어갔는데, 아, 나는 그 순간 너무 놀라 무릎이 부러진 듯 꺾이며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촛불 몇 개로 동굴 안은 여전히 어두운데, 앙상한 갈비뼈와 목뼈가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 듯한 부처님 고행상 앞에 너무 갑작스레 알몸으로 던져진 것이다. 그 때 내 입에서 무의식중에 나온 말이 ‘잘못했습니다!’였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절대로 엄살 피우지 않겠습니다…… .

 

 어느 새 해가 기울고,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다시 이동했다. 토박이 식당이라는 소박한 이름의 음식점인데, 된장을 바른 풋고추 맛이 산뜻했다. 다들 밥그릇을 뚝딱뚝딱 비우는 중인데 조현 기자님은 책자에 사인을 하느라 분주하고 한겨레에서 함께 오신 이들은 그 책을 나눠주느라 바쁘다. 그 자리에서 감사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지만, 오래오래 기억에 남아 있을 것임을 안다.

 하룻동안의 짤막한 여정, 다소 인원이 많고 구성원의 성격상 개인적인 만남을 가질 수 없었던 아쉬움은 남지만, 봉암사와 정토회 수련원이라는 특별한 곳을 만나면서 그 동안 잊고 있었던 지난 날을 돌아볼 수 있었다.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동안 얽히고 설켜 고단했던 일상사의 실타래들이 툭툭 끊어져 나가는 것을 바라볼 수 있는 복된 시간이기도 했다.


 새벽 첫차를 타느라 전 날 밤 세 시간 남짓 잔 터에 식곤증까지 겹쳐 버스에 오르자 곧바로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빡빡한 일정에 부지런히 버스가 달렸지만 춘천 가는 막차를 타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 참에 2년 가까이 만나지 못했던 지인께 잠자리를 부탁하여 하룻밤을 서울에서 묵었다.


 햇살 환하게 퍼져나가는 이른 아침, 경춘 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내다보는 초봄 풍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간밤에 비가 내렸는지 땅은 촉촉하게 젖어 있고, 강물 위로는 안개가 가득 피어오르고 있었다. 땅으로 내린 비는 개울을 지나 강물로 흐르고, 바다로 향하는 동안 안개로 구름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땅으로 스미고, 돌고 돌고 돌고... 그렇다, 얻을 것도 잃을 것도 따로 없이 그 자체로 이미 충분하고 온전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감사와 평안함으로 가슴이 충만하였다.

 이런 자리를 마련해 베푸신 한겨레 신문사와 수고해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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