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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를 남긴 금강경 번역 천재 구마라집

원철 스님 2014. 11. 06
조회수 26248 추천수 2


서안 여행기 초당사에서 금강경을 만나다



1. 구마라집 영정과 사리탑을 만나다 
천년 전에 두드러진 활약을 했던 인물을 모셔놓은 사당을 참배할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얼마나 실물에 근접한 얼굴일까 하고 반문하게 된다. 왜냐하면 본모습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린 상상화가 대부분인 까닭이다. 혹여 외형을 묘사하는 한 두줄의 기록이라도 남아있다면 그나마 실마리라도 삼겠지만 대부분 ‘맨땅에 헤딩하듯’그렸을 것이다.   


금강경 6종류 번역본 가운데 압도적인 인기 1위 자리를 천년이상 지켜 온 베스트셀러 번역가인 구마라집(鳩摩羅什 343~413) 법사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과연 언어학의 천재는 어떤 관상의 소유자였을까? 서안 초당사(草堂寺)에서 당신의 영정을 만났다. “외국어가 제일 쉬웠어요!”라고 말하는 샤프하게 생긴 모범생(?)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짙은 곱슬 수염에 다소 까칠한 인상인지라 미심쩍음을 거둘 수 없었지만 그래도‘그런가 보다’ 했다. 눈 인사 후 가볍게 목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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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찐한 감동을 준 것은 혀(舌)를 모셨다는 그 사리탑이었다. 대면하는 순간 환희심과 함께 온몸에 전율이 일어났다. 두 손을 모은 채 주위을 돌았다. 돌이라기보다는 옥에 가깝다. 신장위구르 지방에서 출토되는 여덟가지 빛깔이 나는 돌이라고 한다. 그래서 팔보옥석탑(八寶玉石塔)으로 불린다. 열반 후 제자들은 당신 고향지역 석재를 일부러 구해와서 부도탑을 만들어 드렸을 것이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의 또다른 모습이라 하겠다.(그런데 고향 사람들은 그가 떠난 천년 후 14세기 무렵 대부분 무슬림이 되었다) 표면에 새겨진 주인공 이름 4글자가 진품임을 증명해 준다. 게다가 우리에게 익숙한 한국형 부도 디자인이다.(물론 신라․고려 부도들이 모방한 것이겠지만) 1700여년동안 거의 원형 그대로 이 자리를 굳건히 지켜온 기적 앞에 합장하고 또 합장한 채 허리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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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다     
초당사의 원이름은 장안대사(長安大寺)였다. 아마 이 절 한갓진 자리에 짚풀로 얼기설기 엮은 소박한 초당(草堂)에서 있는듯 없는듯 머문 것에서 비롯된 이름일 것이다. 처음 장안에 왔을 때 머문 서명각(西明閣) 소요원(逍遙園)은 왕이 마련해준 임시거처였다. 대사(大寺)로 옮긴 것은 ‘범어(梵語)-한어(漢語) 동시통역학과’에 입학하겠다는 학승들이 구름같이 몰려든 이후의 일이다. 본의아니게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아내듯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이 절의 주인노릇을 하게 된 것이다. 타클라마칸 사막 언저리 작은 오아시스 마을의 소수 이민족  출신이라는 지역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과 물과 우유처럼 섞여 화합했다. 겸손하고 섬세했으며 늘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을 잊지 않았다. 덕분에 이 사찰은 ‘큰절(大寺)’이라는 화려한 본래명칭은 사라지고 그의 상징코드인 ‘초가집 절(草堂寺)’로 이름까지 바뀌게 되었다. (물론 현재 대부분의 건물은 벽돌기와집이다.) 개명은 그의 감화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 하겠다.  이 곳에서 402년 불후의 명작인 금강경 번역작업을 마쳤다.  

  

3. 일찍부터 어머니에게 천재교육을 받다
당신의 어머니는 한번 듣거나 보기만 하면 모든 것을 기억하는 영민한 여인이었다. 구마라집을 임신했을 때는 보통 여자들의 일반적인 입덧이 아니라 ‘기억력이 몇 십배 더 좋아지는’ 정신적 입덧을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신랑 복은 별로 없었다. 보상심리까지 겹쳐 아들교육에 전력투구했다. 모자(母子)는 인도와 중국의 교차지역인 쿠차(Kucha 龜玆:현재 신장위구르 자치구 소재)국 왕가 출신으로, 2개 국어는 처음부터 낯설지 않았다. 당시 문명의 통로인 실크로드를 따라 신 문물인 불교문화가 왕성하게 이동하던 시기였다. 모친의 지도아래 불경까지 암기했다. 어린 그의 외국어 실력과 학업속도는 만만찮은 지능지수를 가진 그의 어머니조차 놀랄 정도였다. 두 사람은 함께 출가의 길을 걷는 도(道)의 반려자이기도 했다.    

 

4. 두 번의 전쟁 끝에 장안에 도착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천재적 능력은 중국까지 알려진다. 전진(前秦)왕 부견(符堅338~385)은 구마라집의 ‘두뇌획득’을 명분으로 선전포고를 했다. 전쟁치고는 비교적 수준있는(?) 전쟁인 셈이다. 위험부담이 덜한 스카웃 내지 납치라는 방법도 있을 터인데, 굳이 전쟁을 선택한 것은 물론 다른 꿍꿍이도 있었다. (그 내막은 동서교역 중개지 점령으로 짭잘한 통관세금을 거두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어쨌거나 현장 지휘관인 여광(呂光)은 정복의 명분인 전리품이 ‘별볼일없는 승려’라는 사실을 알고 적이 실망했다. 귀국도중 본국이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할 수 없이 고장(姑藏)지방에 터를 잡고 후량(後凉)을 건국했지만 정치·경제·군사적 모든 면에서 불안한 체제였다. 20여년간의 이런 생고생이 포로인 구마라집 때문이라고 여긴 그는 화풀이라도 하듯 스님을 엄청 구박했다. 뿐만 아니라 천재의 씨앗을 받아두어야 한다는 세속적 가치관까지 강요했다.  


예나 지금이나 인재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나라와 집단은 미래가 있을 수 없다. 얼마 후 후진(後秦)왕 요흥(姚興366~416)은 후량을 평정하였고,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어 구마라집을 장안(長安)으로 모셨다.처음 출병했던 전진(前秦)처럼 후진(後秦)역시 어지러운 국가의 통치이념을 정비하기 위한 일환으로 새로운 이데올로기인 불교사상의 도입을 원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를 잘 알면서도 세련된 중국어 를 구사하는 능력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살아있는 육신사리(肉身舍利 구마라집)를 얻고자 두 번씩 전쟁까지 치룬 경우는 종교역사에서 흔치않는 일이다. 자기를 알아주는 나라에 정착한 후 보은의 뜻으로 ‘요진(姚秦)스님 구마라집’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 국가는 오래 전에 사라졌다. 하지만 국명을 금강경 첫 페이지에 남겨, 현재도 수억명의‘독송 팬’들이 그 나라를 기억하도록 만들었다. 귀화한 다문화인(多文化人)인 구마라집식 애국방법인 셈이다. 


5.아난존자는 사리전쟁을 미연에 방지하다 
구마라집 법사는 “나의 번역에 오류가 없다면 내 시신을 화장한 뒤에도 혀가 타지 않을 것이다(若所傳無謬者 當使焚身之後 舌不焦爛)”라는 절대 자신감을 반영한 유언을 남겼다. 말씀대로 다비식 이후 오직 혀만이 그대로 남았다고 한다. 혀사리(舌舍利)인 셈이다. 여러 지역에 많은 사리탑이 현존하지만 혀사리탑은 초당사가 유일할 것이다. 생존시에는 두 번의 전쟁원인 제공자였지만 죽은 후에는 다행이도 사리 때문에 3번째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알고보면 사리의 분쟁역사는 결코 짧지않다. 붓다의 사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인근 8개 부족국가는 전쟁직전까지 가는 험악한 상황을 연출했다. 극적인 타협을 통해 사리를 8등분하자는 합의를 도출하면서 평화적으로 마무리되긴 하지만. 그런 과정을 두 눈으로 똑똑이 지켜 본 아난(Ananda 阿難)존자는 노파심으로 인하여 ‘당신의 사리 때문에 혹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부족간의 전쟁을 염려하여 그 누구의 땅도 아닌 갠지스강 한가운데서 임종하여 사리전쟁을 원천적으로 막았다’고 기록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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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금강경을 통해 항상 구마라집을 만나다
혀사리탑은 본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지만 법사리(法舍利)인 금강경은 동아시아 전역으로 분신(分身)을 거듭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 속에는 사리탑을 조각하듯 금강경을 목판에 새겨 법사리로 모셨다. 붓다께서 "법(진리)을 보는 자, 나를 보리라."고 하셨으니, 금강경을 읽는 자 역시 수시로 구마라집을 만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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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
해인사로 출가했다. 오랫동안 한문 경전 및 선사들의 어록을 번역과 해설 작업, 그리고 강의를 통해서 고전의 현대화에 일조했다. 또 대중적인 글쓰기를 통해 세상과의 소통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이메일 : munsua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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