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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책속에서 순례를 마쳤다.

한종호 2011. 06. 23
조회수 10819 추천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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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책 속에서 순례 하나를 마쳤다


김기석 목사의 글은 언제나 잔잔하면서도 풍요롭다. 그건 참 묘한 경험이다. 침착함 속에 넘치는 열정과 그저 무심한 듯 지나치는 것 같으면서도 깊숙이 응시하는 성찰의 힘을 느끼게 된다. 그의 영혼 속에 마르지 않는 우물이 하나 있구나 하는 감탄이다. 대단한 독서가로 알려진 그의 글에는 그의 독서 편련이 묻어나고, 그것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인생사와 현실에 대한 생각의 무늬들이 그대로 손에 만져진다.


『일상순례자』는 제목 그대로 일상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어루만지는 글들로 채워져 있다. 신앙은 특수한 사건과 경험이 아니고서는 담아낼 수 없다는 식의 고정관념이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서 그의 일상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놓치고 살아가는 아름다움과 깨우침을 드러내준다. 그래서 그의 책을 읽고 있노라면 눈을 뜨고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눈을 감고 살고 있다는 실감을 하게 된다.


그의 책에 대한 서평을 따로 뭔가 하는 것보다는 그래서 그가 쓴 문장들을 음미하는 편이 훨씬 낫다. 자칫 그가 쓴 문장들을 추상화하고 그로써 글맛을 잃게 할까 싶어서다.


인생은 모국어처럼 자연스럽지만, 묻는 순간 갑자기 외국어처럼 낯설어진다.(9쪽)


그래도 그는 묻기 시작한다. 일상이 쌓여 인생이 되는 것이건만 우리는 그 인생의 일상적 의미에서 스스로 소외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일상은 기억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모국어는 물과 공기와 같아 새삼 의식하려는 순간 부자연스러울 지경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외국어”라는 표현을 쓴 모양이다. 그런데 그는 그 외국어를 놀랍게 잘 구사한다.

그에게 일상은 무엇일까?


물고기가 바다를 떠나 살 수 없듯, 소소한 일상을 떠난 삶은 상상할 수 없다. 덤덤함과 담담함이 일상의 풍경이다. 일상은 짜릿하지 않다. 우리를 흥분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주목받지 못한다. 하지만 일상의 담백한 맛이야 말로 모든 맛의 뿌리이다.(11쪽)


그렇지 않은가? 일상에 뿌리를 두지 않고 우리는 자랄 수 없으며, 그 일상의 시간 속에서 길러지지 못한 생각과 습관 그리고 성찰은 자연히 뿌리가 얕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일상의 자리로 돌아와 성찰의 시간을 익혀나가는 인생은 아름다워진다. 그건 마치 오랜 손맛으로 우리를 감동시키는 된장 맛이며, 그로써 우리의 일상에 건강함이 채워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그 일상으로 제대로 돌아오기에는 우리의 현실이 번거롭기만 하다.


문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간이 고여 있는 장소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느긋한 평온은 언감생심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공사 중이다. 어딜 가도 공사장의 소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인가? 우리 마음도 공사장에서 들려오는 기계음처럼 단속적으로 흔들린다. 고요함과 침묵의 사치는 허용되지 않는다. 많은 것을 누리고 살면서도 마음의 헛헛증이 가시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20쪽)


“대한민국이 공사중”이란다. 맞다. 그래서 우리는 대단한 것을 세우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마음과 영혼은 자꾸 폐허를 닮아가고 있다. 그의 표현대로 “시간이 고여 있는 장소”는 찾기 어렵다. 시간이 고인다는 것은 시간이 고인 물처럼 폐물이 되어간다는 것이 아니라 성숙해지는 영혼의 공간이라는 뜻일게다. 우린 그걸 일상에서 스스로 내치고 있는 중이다. 그건 공사 중이 아니라 파괴중인 게 도리어 옳을지 모른다.

그는 이 시간이 고인 자리가 갖고 있는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건 지거 쾨더 신부의 그림 한 장을 보고 쓴 이야기다.


오른 손으로 얼굴을 가린 엘리야의 왼손 바닥 위에 나뭇잎 한 장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세미한 음성’의 형상화일 것이다. 엘리야의 눈, 코, 입, 귀는 모두 손과 망토로 가려져 있다. 세상을 향한 감각의 창문이 모두 닫힌 상태, 자신의 내면만을 응시하면서 그는 신의 음성을 듣는다. 침묵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그 침묵은 세상의 어떤 소란도 깨뜨릴 수 없이 단단하다. 그리고 그 침묵의 소리는 그를 재창조하는 신의 숨결이다.(32쪽)


이런 재창조의 순간을 갖지 못한 사람은 날로 그 삶이 폐허로 변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 비극을 더욱 조장하고 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가장 큰 비극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개성 죽이기다. 사람은 누구나 하늘이 오직 그에게만 줄 수 있는 찬란한 선물을 품부 받아 이 세상에 온다. 그러나 제도의 틀에 갇히는 순간 그 선물은 무채색으로 변하고 만다. 김승희는 <제도>라는 시에서 색칠 공부 책을 칠하는 아이를 등장시킨다. 나비도 있고 꽃도 있고 구름도 있고 강물도 있다. 그런데 아이는 자기 색칠이 금 밖으로 나갈까봐 두려워한다. 온순한 아이는 책의 지시대로 금 안에서만 칠을 한다. 그래서 나비도 꽃도 구름도 강물도 선 안에 갇혀 있다. 엄마는 금을 뭉개버리라고 말하고 싶다. 자유는 위반하는 데서 얻을 수 있음을 알지만 엄마이기에 차마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엄마는 안타깝다. “나를 묶었던 그것으로 너를 묶다니!” 그렇게 엄마는 제도다. 어느 순간 시인은 절규하듯 외친다. 발랄하게, “엄마를 죽여라! 랄라!”(43-44쪽)


그렇게 그는 인간을 옥죄이는 것에 저항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지갑을 잃어버리면 즉각 알아차리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본디 마음은 다 잃어버려도 잃은 줄 모른다는 것이다. 나를 잃어버리고 살았다는 자각은 아프지만 그것은 새로운 희망의 시작이다. 회개란 부르짖는 게 아니라 일상의 초점을 바로 잡는 일이다.(75쪽)


아, “회개란 부르짖는 게 아니라 일상의 초점을 바로 잡는 일이다.”라는 문장 하나만 제대로 잡고 살아도 우린 얼마나 행복해질 수 있겠는가? 우리가 잃어버리고 사는 것에 대한 그의 단상은 또 이렇게 펼쳐진다.


모든 길은 단순히 이곳과 저곳을 이어주는 공간이 아니다. 길은 그 길을 걷는 이들에 대한 기억의 온축이다. 길은 지향이기에 희망이고, 기억을 환기시키기에 그리움이다. 현대인의 불행은 길을 잊었다는 데 있다. 도로를 질주하는 차들에 불안한 시선을 던지며 걷는 동안에는 희망도 그리움도 떠오르지 않는다.(47쪽)


우리는 사실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건 일상의 경치다. 그러나 경치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도 불안하다. 아니, 늘 아슬아슬한 인생을 살아내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우리의 현실에서는 이런 인간들만 자꾸 늘어나고 있다.


목소리 큰 사람, 똑똑한 사람은 많지만 사람의 향내가 나는 사람이 많지 않아 세상은 전쟁터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의 통로인 언어는 불통의 도구로 전락했고, 공론의 장은 공교한 말, 망령된 말, 냉소의 말들로 난장을 이루고 있다. 육체를 입지 못한 말들이 유령처럼 떠돌며 깃들 곳을 찾고 있는 세상이다. 군자가 사라진 자리에 소인들만 들끓는다. 시인 조정권은 시대를 이렇게 탄식했다. “아녀자가 기른 난(蘭)에도 향기가 없고 대장부가 기른 죽(竹)에도 기품이 없다. 세상 온 구석에 뼈를 찔러 넣는 한기(寒氣)마저 없다.”(55쪽)


그래서 그는 이런 세상에 가득 찬 것을 이렇게 질타하고 있다.


욕망의 터 위에 짓는 집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 욕망은 초조감을, 초조감은 적대감을, 적대감은 폭력을 낳는다. 폭력은 자기파괴와 외로움으로 귀착된다. 현인 노자는 “좋은 정치란 백성들로 하여금 생각은 텅 비게 하고, 배는 가득 채우게 하는 것”이라 했다. 물론 생각을 텅 비게 한다는 것은 삿된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게 한다는 말이고, 배를 채운다는 말은 그 내면을 튼실하게 한다는 뜻이다. 오늘 우리를 생각해본다. 욕망을 부추기면서 내면은 공허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데 감 빠른 사람들, 두 길 보기에 익숙한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안으로 거두어들임이 없으면 사람은 여물 수 없다.(73쪽)


주옥같은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그 주옥같은 이야기에는 진심이 있고 겸허한 자기 성찰이 있다. 그의 이러한 성찰은 교회, 기독교를 향해서도 가차 없이 쏟아진다.


교회가 추문거리가 되어버린 우리 현실을 돌아본다. 개신교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는 ‘배타성’이라 한다. 이웃 사랑을 신앙의 가장 중요한 원리로 받아들이는 기독교가 배타적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이러니 하다. ‘다른’ 이들의 세계를 향해 화육(化育)하기보다는 그들을 동화시키려는 것이 주류 기독교의 지향이다.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가차 없이 지옥을 선고한다. 교회는 점점 갑각류를 닮아간다. 경계선을 가로지르며 소통의 길을 열고, 인류와 생명세계의 궁극적인 하나 됨을 지향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소통을 지체시키는 권부 구실을 하고 있다.(161쪽)


그래서 그는 인문학의 역할을 소중히 여긴다. 그건 신학이 인간학임을 깨우치는 순간 이루어지는 감격과 통한다.


신학은 인간학이다. 얼마나 근사한 말인가? 나는 이 말이 좋았다. 포이에르 바하가 서 있는 자리가 신학사 좌표 평면의 어디쯤인지, 불트만이 이 명제를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는 몰라도 좋았다. 막연하기는 했지만 이 말이 칠십 년 대 중반 신학교에 머물고 있던 나에게 숨구멍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신에 대한 말들’이 너무 많았다. 교회의 설교는 인간을 지나치게 비하했고 복잡다기한 일상을 교리적 도식으로 단순화시켰다. 스스로를 소외시키지 않고는 설교를 들을 수가 없었다. 신학은 건조했고, 권위주의의 의상 속에 인간의 알몸을 숨겼다. ‘상황은 물음이고 복음은 답’이라는 신학적 진술을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인간의 마당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 마당에서 해결하지 않고 ‘절대의존의 감정’이라는 신앙에 맡겨버리는 불성실에 화가 났다.(227쪽)


이런 신학과 교회의 현실에 대해 그는 인문학적 소양과 상상력의 가치를 강조한다. 그런 까닭에 가령 기독교 문학에 대한 정의도 다르게 내린다. 신, 교회, 목사, 집사가 등장하지 않아도 작가의 문제의식이 기독교적 가치를 관통하고 있다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기존의 가치관에 순치된 문학, 한 시대의 이데올로기의 대변자 노릇을 하는 문학을 나는 경멸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이 땅에서 참된 기독교 문학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것은 철저하게 나의 주관적 평가이고, 나의 단견의 소치일 수도 있다. 아니, 그러기를 바란다.) 작가들은 가위 눌려 있다. 스스로 금제의 팻말을 내걸고, 절대로 넘어선 안 될 금줄을 임의로 설정해놓고는 그 한계를 지키려 한다. 에덴을 둘러친 화염검을 향해 돌진하는 작가가 없다. 물론 시늉은 있다. 그러나 화염검에 불타버리든 찔리든 개의치 않고 내달리는 작가가 없다. 예술로 형상화되지 못한 천박한 수준의 담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흘낏 기웃거린 것에 지나지 않지만 나는 이 땅에 기독교 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프다.(231-232쪽)


그러면 절망하기만 해야 하는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다음과 같이 털어놓는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를 꿈꾼다. 금제의 팻말을 몰래 치워버리거나, 가볍게 금줄을 넘어서서 이 땅의 작가들에게 놀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 그리고 공기구멍을 뚫어 척박한 땅에 산소를 공급하고, 박토를 삼켜 자신의 체액으로 기름지게 만든 후 분변토로 배출하는 지렁이처럼 기독교라는 척박한 땅에 문학의 성취를 소개하는 것. 써놓고 보니 외람되다. 가관이다. 하지만 꿈도 못 꾸랴.(232쪽)


그는 자신의 이러한 생각을 마이너러티가 되는 용기로 표현한다.


예수님을 길로 삼고 걸어가는 이들은 마이너리티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성도는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이 아니라 주류적 가치로부터 자유로운 이들이다. 주류적 가치에 틈을 만들고 그 속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 넣는 사람들이다. 경쟁과 폭력이 정상이 된 세상에 협동과 사랑의 숨결을 불어넣는 사람들이다. 평화 없는 세상에 사느라 지친 이들에게 평화의 복음을 전파하고, 그들의 일상의 자리에 평화의 씨앗을 심는 사람들이다.(239쪽)


이런 모든 의식과 자세가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가 순례자가 되는 길이다. 인간의 자유로움을 지켜내고 그 존엄한 권리를 옹호하며 생명의 세계를 평화의 영으로 가득 차게 하는 일, 그것이 이 땅에 살아가는 이들이 순례의 경건함으로 재창조되는 방식이다. 그의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고 나니 마음이 정갈해진다. 이미 나는 그의 책 속에서 순례 하나를 마쳤다.


우리의 일상은 이렇게 해서 성소가 되어간다. 우리 안에 이미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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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
목회자로서 기독교계의 <오마이뉴스>로 불리는 <뉴스앤조이>를 창간했으며, <씨알의 소 리>와 함께 민주화의 횃불이었던 <기독교사상> 주간이다. 오랜 신뢰를 바탕으로 깨어있고, 활력과 여유가 넘치는 이들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는 마당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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