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를 없애는 방법
선(禪)을 통해 정신력을 기르고 있는 원불교 교무들. 사진 <한겨레> 자료
- 선(禪)을 하게 되면 항상 사심 잡념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선을 할 때 평소에 보고 듣고 겪었던 일들의 생각이 오래가서 고통스러운데 어떻게 하면 됩니까?
= 그래서 선이 필요하다. 선은 정신력을 길러서 자기 주권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주권이 있는 사람은 철주의 중심이 되고 석벽의 외면이 되어 부귀와 영화도 능히 그 마음을 달래어 가지 못하고, 무기와 권세로도 능히 그 마음을 굽히지 못하며, 어떠한 유혹의 색과 소리에도 궁글려 가지 않는다. 또한 재색명리를 손아귀에 넣고 노복 같이 부려 쓴다.
그런데 정신이 점점 약해져서 주권이 없는 사람은 내 것이지만 내 자유가 없어서 재색명리가 이리 가자 하면 이리 가고, 저리 가자 하면 저리 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의 힘이 있어야 하며, 주권을 회복해야 한다.
요즘 정치 지도자들이 속속 교도소로 들어가는 것이 여러분의 생각으로는 잠깐 실수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불교의 차원에서 보면 정신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다. 정신이 돈에 먹힘을 당한 것이다. 사회지도층들이 무슨 돈에 구애를 받느냐. 돈이 왔을 때 사회사업에 사용했다면 한량없이 숭배을 받았을텐데, 돈에 자기주체가 먹힘을 당한 것이다.
우리의 죄와 복이 모두 마음에서 출발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선과 염불을 통해서 마음이 나갈 때마다 끄집어 들이고, 망념이 들어올 때마다 막아야 한다.
나는 예전에, 좌선을 하다보면 평소에는 전혀 생각이 안 나던 어릴 때 일이 생각나고 어제 저녁에 깜박 잊었던 중요한 일이 생각이 나서 어떻게 선을 해야 할지 스승님께 여쭈었더니, 그것 자체가 정신이 맑아진 증거라 하셨다. 예를 들면 물이 혼탁할 때는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모르지만 흙탕물이 가라앉으면 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훤히 보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좌선을 하면 약간 번뇌가 있다 해도 맑아진다. 가라앉으니까 맑아지고 맑아지니까 어렸을 때 일도 생각나고 잊었던 일도 생각나는 것이다.
번뇌가 들어올 때 들어오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살아 있으니 잡념이 생기는 것이다. 잡초가 땅에서 나니까 그 땅이 못 쓰는 땅이 아니라 잡초가 나는 땅이 옥토이다. 다만 부지런한 농부는 잡초 날 겨를이 없이 뽑아버리고 게으른 농부는 잡초가 나도 뽑지를 않을 뿐이다.
그래서 심전계발 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땅이 죽어 있으면 잡초가 안 나지만 땅이 살아 있기에 잡초가 나는 것처럼 사람도 번뇌가 일어나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이므로 번뇌가 일어날 때마다 보내면 된다. 한 번 보내고 두 번 보내는 것이 마치 당수를 하는 사람이 한 번 단련하고 두 번 단련해서 나중에는 벽돌을 깨는 것과 같다.
그러기에 우리는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에 의미를 가질게 아니라 번뇌를 내보내는 것에 의미를 가져야 한다. 하지만 정신력이 약한 사람은 번뇌하고 논다. 한참 데리고 놀다 보면 잠깐 사이에 죽비치는 소리가 나고 만다. 이것은 번뇌에 휘말려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번뇌에 휘말려 있지 않는 사람은 번뇌가 들어오면 머물러 있을 겨를이 없이 보내기에 바쁘다.
처음에는 번뇌가 힘이 있어서 쫓아 보내려면 젖먹던 힘까지 동원해야 하며 잡념 하나 내보내는 것이 팔만 대군을 보내는 것 같이 어렵다. 그러나 공부심으로 번뇌가 오면 보내고, 오면 보내서 정력을 갖추고 보면 번뇌 들어올 때 내보내는 것이 죽먹기 보다 쉽게 된다. 그리하여 일부러 번뇌를 쫓아 보내지 않아도 ‘번뇌구나!’ 하면 무서워서 도망가 버린다.
우리는 번뇌를 조복 받아 주권을 회복해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자기 주체를 회복하게 되는 것이니, 주권을 회복하기 전에는 내가 내가 아니며 다만 재색명리의 노예물일 뿐이다. 재색명리를 조복 받아야 비로소 내가 나이며 번뇌가 내 손아귀에 있는 것이 훤해진다. 그것이 근기 따라 빨리 되는 사람도 있고 늦게 되는 사람도 있지만 정성에 따라 달라진다. 정신일도가 되면 될수록 주권이 빨리 회복 되지만 정신일도가 되지 못하면 몇 겁을 지내도 주권을 회복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력을 기르고 주권을 회복할 때까지 정성스럽게 수행해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