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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양심 깨운 5·16장학회의 행패

2012. 07. 20
조회수 14008 추천수 0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국기에 대한 맹세, 1972~2007)

'국민'학교 2학년 때였던가, 어머니는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종이뭉치를 받아와 집에서 봉투를 접었다. 종이를 재단하고 밀가루 풀을 쑤어 봉투를 만들면, 이게 싸전에선 쌀을 담아, 구멍가게에선 과일을 담았다. 요즘이라면 인형에 눈알을 박거나 구슬을 꿰는 일처럼 장당 얼마씩 수공을 받았다. 동네 아이들은 학교를 파하면 우리 집 마루에 앉아 옥수수 얻어먹을 요량으로 봉투를 붙이고, 여름에도 군불을 지피고 방바닥에 봉투를 깔아 말렸다. 풀칠이 잘 마른 봉투의 수량을 세어 100장씩 끈으로 묶는 일은 내 몫이었다. 

20120720_3.JPG » 신동우 화백이 그린 <10월 유신의 미래상> 리플릿. 그 당시에는 길거리에 서서 '애국가'만 들어도 멀리 쭈삣하고 전기가 오르곤 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유신헌법' 홍보물을 주었다. 십년 후에는 '100억불 수출, 1000불 소득'과 더불어 마이카 시대가 열린다는 복음을 알리는 리플릿인데, 문화공보부에서 신동우 화백에게 그림을 맡겼다.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라는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우며 초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애국자'가 되고 싶었을까? 아무도 시킨 사람이 없었건만, 그날부터 옆집 3학년 형과 신동우 화백의 그림을 도화지에 베끼기 시작했다. 그림에 재간이 있던 나는 포스터를 만들고, 10월 유신을 찬양하는 표어도 숱하게 만들었다. 집에는 종이도 많았고, 포스터와 표어를 붙일 풀은 언제나 잔뜩 남아 있었다. 

수줍은 탓이었을까, 아님 자랑하지 말고 숨어서 기도하라는 성경 말씀 때문이었을까, 그 '장한' 일을 숨어서 하느라 밤에만 동네 골목을 누볐다. 손으로 풀을 집어 남몰래 포스터와 표어를 붙이면서 얼마나 가슴이 조이면서도 설렜는지. 그러나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우리를 잘 살게 해준다는 '미신'을 신앙처럼 간직했다. 그러나 우리집 살림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고, 그게 독재정권의 시작임을 나는 몰랐다. 

이른바 '유신헌법'은 일본 메이지유신에서 이름을 따왔으며,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과 모든 법관을 임명하고, 긴급조치권과 국회 해산권을 가지며, 임기 6년에 연임할 수 있으며, 대통령도 직선제가 아니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뽑는다는 내용이었다. 행정 · 입법 · 사법권을 모두 대통령에게 집중시킨 독재정권을 허용하는 법이었다. 유신헌법 아래서 중학교에 진학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했던 내게 성당에서는 '괴담' 같은 다른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문학의 밤'이라 해서 가톨릭센터에 갔다가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시를 처음 접하고 무서워했던 중학생이었고, 주보와 함께 성당 입구에서 나눠주던 '가톨릭농민회 오원춘 사건'에 대한 등사본 유인물을 받아 들고 경악했던 고등학생이었다. 

20120720_4.JPG » 지난 4월 30일 안동교구 정호경 신부의 장례미사에서 만났던 오원춘 씨. 그 선한 얼굴이 지금도 삼삼하다. 가톨릭농민회 오원춘 씨는 기관원에게 납치되었다고 양심선언한 뒤에 고문을 받고 허위사실유포죄로 1979년 10월 15일 법원에서 징역 2년이 선고받았으나, 그로부터 11일 뒤인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사살사건이 발생하였고, 오원춘은 그해 12월 8일 형집행정지로 정호경 신부, 정재돈과 함께 석방되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도 고문후유증으로 시달리고 있다. ⓒ한상봉 기자
     
지난 4월 30일 안동교구 정호경 신부의 장례 미사에서 만났던 오원춘 씨의 모습은 그야말로 '착하고 선량한 농부'였다. 내가 '애국심'을 발휘했던 나라는 선량한 백성을 고문하고 회유하고 다시 협박하는 나라였다. '대통령을 반대하면 나라를 배신하는 것'이라고 강요하는 나라였다. 엄마 등에 업혀서 성당에 다니던 내게는 '주교님도 삐끗하면 감옥에 보내는' 나라였다. 

1974년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연행 당했고,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1972년 10월 27일에 민주 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라는 <양심선언>을 발표해 구속됐다. 유신정권과 지학순 주교의 악연은 예고된 것이었다. 

최근 박근혜와 관련해 논란이 되고 있는 '정수장학회'의 전신이 '5·16장학회'인데, 1970년 원주 문화방송국 설립을 둘러싸고 5·16장학회와 천주교 원주교구가 함께 방송국을 만들기로 했을 때, 원주교구는 분담금과 방송국 건물까지 내주었지만 장학재단은 한 푼도 돈을 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회계장부도, 영수증도 없이 공금까지 유용했다. 이 사실을 박정희에게 진정했으나 전혀 반응이 없었고, 5·16장학회는 오히려 협박조로 나왔다. 급기야 지학순은 1971년 10월 5일 원주 원동성당에서 부정부패 규탄대회를 열고 천주교회 사상 최초로 가두시위에 나섰다.

'애국심'을 조롱하는 유신독재.. "누구를 위한 국가인가?"

초등학교도 아닌 '국민'학교에 다니면서 10월 유신 포스터를 붙이던 것은 '독재에 대한 예방주사'였을까? 그 뒤로 '애국가'와 '국민교육헌장'과 '국기에 대한 맹세'에 담긴 국가주의를 체질적으로 거부하기 시작했다. 광주항쟁 이후에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준법정신'이라는 말이 제일 싫었다. 그래서 교통신호를 일부러 어기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10월 유신이 예방주사라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내게 '국가주의에 대한 백신'으로 작동했다. 부족동맹의 자유롭고 평등한 삶에 익숙했던 이스라엘 백성이 주변국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왕을 세워 달라고 요구했을 때 사무엘 선지자는 "왕이 너희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 알려주겠다"며 자녀들을 군대에 동원하고 "너희마저도 종으로 삼으리라"고 전한다. 그때에 가서 "스스로 뽑아 세운 왕에게 등을 돌리고 울부짖겠지만" 하느님은 들은 체도 하지 않을 것이라 전했다. 예수도 이른바 '국가보안법'에 걸려 십자가에서 죽어야 했으니, 이처럼 국가권력에 의해 밀려난 백성들에게 마음을 두는 게 예수의 제자 된 도리다. 

황지우 시인은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라는 시에서 예전에 영화관에서 듣던 '애국가' 감상문을 적었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날아가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가는데,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고 했다. 

유신 교육의 탓이었을까? 고등학생 시절까지는 하교 시간에 국기하강식을 하면서 스피커로 애국가가 흘러 나오거나 운동장에서 조회를 하며 애국가를 부를 때마다 머리가 쭈볏 하고 감전되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서 동료들과 이른바 '사회과학'을 공부하고 해방신학을 접하면서 달라졌다. 1994년 정월 한겨울에 문익환 목사님이 선종하셨을 때, 대학로에서 영결식을 하는데 눈이 펄펄 내렸던 장면은 지금도 가슴속을 묵직하게 만든다. 그날 가슴으로 불렀던 노래 <그날이 오면>이 어느새 애국가를 대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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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노래운동모임 '새벽'을 이끌었던 문승현이 작곡한 <그날이 오면>

이 마당에 30년 이상 시공을 뛰어넘어서 또다시 박정희 시대를 사모하는 이들이 출몰하는 현실은 참으로 안타깝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경선 후보는 최근 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5·16은 불가피한 최선의 바른 선택"이라고 말했다. "국민들이 초근목피로 보릿고개를 넘기면서 가난한 나라로 힘들게 살았고" "안보적으로도 굉장히 위기상황"이었다며 "오늘날 한국이 있기까지 5·16이 초석을 놓았다"고 평가했다. 허나, 그들이 재벌을 낳았으나, 노동자들은 '인간답게 살고 싶다'며 수없이 죽어갔다. GNP는 올라갔지만 민주주의는 참살 당했다. 그래서 묻게 된다. "누구를 위한 국가인가?" 

박근혜는 지난 7월 10일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이제 국정운영의 패러다임을 국가에서 국민으로, 개인의 삶과 행복 중심으로 확 바꿔야 합니다!"라고 했지만, 말만 조금 바뀌었을 뿐  유신 헌법 홍보 리플릿의 내용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박근혜는 이번 선거를 (국가폭력의) 아버지인 박정희의 신원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모양인데, 박근혜는 '국가와 국민이라는 말의 순서만 바꾸어' 우리나라를 다시 '유신'하려는 것인가? 

그나저나 이 국가가 국책사업으로 해군기지 만든다고 나서는 바람에, 제주 강정 바닷가를 떠나지 못하시는 문정현 신부님의 안부가 궁금하다. 장마전선이 예고되고 태풍이 불현듯 엄습하는 제주에서 부디 안녕하시라 여쭈고 있다. 

한상봉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isu@catholicnews.co.kr


 

본 글은 휴심정 벗님매체인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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