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님글방
휴심정의 멋진 벗님들이 전하는 나눔의 글 마당입니다.

의사 장기려의 역지사지

김경재 목사 2014. 11. 16
조회수 10252 추천수 1



의사 장기려의 역지사지


꿈에도 그리는 아내와 가족을 어찌 만나보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는 수많은 이산가족들의 자리에서 생각하고 아픔을 함께 느꼈다. 상대편 처지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한다는 것은 인격적 성숙 단계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역지사지 능력과 작은 실천이 곧 그 사람의 인간품격과 그 국가사회의 격을 결정한다.


장기려한겨레편집.jpg

*장기려 박사


간암 수술의 명의 장기려(1909~1995) 박사가 타계한 지 내년이면 20년이 된다. 그의 인격의 향기가 세월을 넘어 오늘의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그의 아호는 성산(聖山)이요, 평생 맑고 인자한 맘과 무소유의 청빈한 삶을 살고 간 한국의 슈바이처다. 1950년 12월 한국전쟁이 중공군 참전으로 다시 치열해지던 때, 모친과 아내와 다섯 자녀를 남겨둔 채 평양에서 야전병원 구급차를 빌려 타고 중학생 둘째 아들과 남하한 지 45년 만에 이산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타계하셨다.


인술을 베푼 의사로서의 봉사활동, 한국 최초 의료보험조합 창설, 고신대복음병원 설립, 여러 의과대학에서 외과교수로 후진 양성 등 초인적인 봉사의 삶을 기려서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1979)과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주어졌다. 그러나 그 모든 공적과 명예 훈장들도, 역지사지하는 그의 고운 맘이 드러나는 다음의 실화 앞에선 모두 빛을 잃고 우리들의 양심은 숙연해진다. 그의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품성이 어쩌면 우리 민족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그는 북에 남기고 온 가족을 애타게 그리워했다.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면서 재회의 날을 기다렸던 그는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당신인 듯하여 잠을 깨었소”라고 보낼 길 없는 편지에서 여든살 순정을 밝힌 순애보적 남편이었다.


북한에서 심각한 식량위기가 발생함에 따라 쌀 15만t을 동포애로써 전달하던 김영삼 정부 때 있었던 작은 가족사 이야기다. 경직되어 왔던 남북 관계가 노태우 정부 시절에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을 제정(1990)함으로써 남북 긴장관계가 다소 풀려가려던 시기였다. 그렇지만 이산가족 상봉 사업은 아직 공식적으로 시작되기 전이었다. 장기려님의 제자들 중 미국에 이민 간 많은 의사들이 주축이 되어 은사님의 북한 가족 상봉 기회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부산에 계신 은사님에게 미국의 제자들은 준비된 평양 방문 기획을 전달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장기려님의 응답은 보통사람들이 납득하기엔 쉽지 않은 것이었다. “1000만 이산가족 모두의 아픔이 나만 못지않을 텐데 어찌 나만 가족 재회의 기쁨을 맛보겠다고 북행을 신청할 수 있겠는가?”라는 답신이 미국 제자들에게 갔다. 스승의 의외의 응답에 백방 노력하고 준비한 제자들은 놀라고 한편 서운했지만, 은사의 성품과 인격을 잘 아는지라 고뇌 끝에 내렸을 스승의 결단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래서 장기려님은 생전엔 끝내 고향을 방문하여 가족 상봉을 이루지 못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5년 후 아들 장가용 교수가 이산가족 자원봉사 의료요원 자격으로 2000년 8월 고향을 방문하게 되었다.


마침내 아들은 평양에서 어머니(당시 89)를 상봉하고 생전에 전달 못했던 아버지의 절절한 순애보 편지와 유품을 전했다. “어머니를 부둥켜 안고 젖가슴을 만진 뒤에야 어머니를 만났음을 실감했다”고 환갑도 훨씬 넘은 아들의 모자 상봉 소감의 인터뷰 기사는 신문 독자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위 실화는 이산가족 중에서 발생한 가족사의 한 작은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의 우리 사회를 이렇게 삭막하게 만들고, 남북관계를 세계인들 앞에서 이렇게 부끄럽도록 만드는 근본 원인은 물질이 부족하거나 군사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이유는 오직 한가지, 우리 모두가 성산 장기려님이 보여준 인간성의 역지사지의 능력을 상실했거나 마비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장기려님인들 꿈에도 그리는 아내와 가족을 어찌 만나보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는 저명한 인사라는 사회적 신분 덕에 미국 제자들의 호의와 특혜를 받아 북한 가족을 만나고 오면 그렇지 못한 처지와 형편에 있는 수많은 이산가족들 마음에 생채기를 내어 그들의 슬픔이 배가되고 고통스러워할 것을 염려했다. 그들의 자리에서 생각하고 그들의 아픔을 함께 느낀 것이다. 그 맘이 바로 입장을 바꾸어 상대편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역지사지하는 마음이다.


역지사지할 수 있음은 놀랍고 신비한 인간다움의 특징이다. 역지사지 능력이 곧 휴머니즘의 본질이다. 고등동물에게서 우리는 감정의 교류 같은 것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아예 입장을 바꾸어서 상대편의 자리와 처지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한다는 것은 인격적 성숙 단계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역지사지의 능력은 사람이 높은 학력을 가졌다거나, 사회적 신분이 높다거나, 교육자나 종교인이라고 해서 당연하게 가능한 인간 능력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겐 감정이입 감수성, 창조적 상상력, 문화적 유전자(memes), 그리고 인간으로서 집단적 무의식 때문에 어느 정도 다른 사람의 처지와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역지사지 행위에서 처지를 바꿔 생각한다(思)는 것은 이해한다(解)는 것인데, 소를 잡아 칼로 각을 떠 분해하듯이, 단단한 ‘갑을관계’의 입장을 실천이성의 칼로써 분해하는 자기비판과 자기성찰의 의지를 전제한다. 언더스탠드(understand)라는 영어단어가 의미하듯이, 상대편 자리에 내려가 아래에 설 때 이해가 가능하다. 역지사지는 상대방에 관한 정보지식만으로는 안 된다. 열린 감성과 소통 의지, 타자 존재성과 차이의 존중, 생명의 연대성 자각, 그리고 인간의 본능적 이기심에 대한 연민의 마음까지 총동원될 때 발현되는 능력이다.


우리 사회의 온갖 문제 발생도 처지와 입장을 바꾸어서 상대편을 이해하는 능력이 거의 마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제 민주화가 물 건너가고, 사회에서 각종 갑을 계약관계가 항상 분쟁거리가 되고, 대북전단 살포에 대한 정부의 방조 때문에 남북고위급접촉 외교가 무산되고, 주권국가 국민으로서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하는데 한-미 방위조약 관련해서 ‘전작권’ 환수 시기를 정부가 쉽게 연기해 버리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역지사지하는 인간 품성을 상실했기 때문은 아닐까? 오로지 생존보존과 자기번영만 위해 고층건물 사닥다리 오르는 경쟁적 삶을 당연시하는 세상 풍조와 그것을 정당시하는 통치철학 때문이다.


한민족은 진정 약속을 지킬 줄 모르는 민족이던가? ‘7·4 남북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6·15 남북공동선언’ 등이 결국 휴지에 불과하단 말인가? 남북 국가대표가 악수하고 서명날인한 문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그 약속을 쉽게 뒤집는 성실성 없는 국민이라고 세계인들에게 멸시당해야 하는가? 민족의 양심이 살아 있는가 죽어 있는가? 부끄럽고 분하고 슬프다. 그러나 역지사지 능력이 우리 세대에 온통 상실되어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를 좋은 방송드라마에 몰입하여 공감하는 시민들의 시청자 반응 현상에서 확인한다. 예를 들면, 요즘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얻고 있는 방송드라마 <미생>에 대한 호평과 시청자들의 반응 능력에서 인간의 역지사지 능력은 겉으론 은폐되어 있을 뿐 건재하다는 것을 재확인한다. 하기야 무릇 문예작품에 대한 이해와 공감 자체가 인간의 역지사지 능력 때문에 가능하다.
 
역지사지 능력과 작은 실천이 곧 그 사람의 인간품격과 그 국가사회의 격을 결정한다. 세계 종교들은 사람과 짐승의 구별점이 역지사지 능력과 실천에 있다고 한입으로 말한다. 생명계의 실상은 고층건물 같은 구조가 아니라 그물망 같은 구조라고 강조한다. ‘갑을관계’에서 갑이 을의 입장을 역지사지할 수 있을 때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 갑이 을의 자리에 내려와 뒤틀린 생명질서를 아픔으로 느끼고, 고통을 분담하면서 고통의 원인을 함께 해결할 때, 갑과 을은 세속 한복판에서 함께 초월을 경험한다. 그러한 초월 경험은 인간성을 되찾은 기쁨, 자유, 행복한 뿌듯함을 갑을 모두에게 선물한다.


김경재 목사·한신대 명예교수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 메일
김경재 목사
근현대 한국 정신사의 한 획을 그은 함석헌 선생과 한신대·기독교장로회 교단 설립자 장공 김재준 목사 등 양대 거목으로부터 진리를 배운 신학자. 전 크리스찬아카데미원장이자 한신대 명예교수. 씨알사상연구원장을 지내며 삭개오작은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이메일 : jacobjae@chollian.net      

최신글




최근기사 목록

  • 양비론은 중도와 정도가 아니다양비론은 중도와 정도가 아니다

    김경재 목사 | 2019. 08. 06

    아침 어느 조간신문에 실린 “한일 두 정상에게 바란다”라는 제목의 컬럼을 읽었다.

  • 시간은 수예품일까 수채화일까시간은 수예품일까 수채화일까

    김경재 목사 | 2015. 07. 05

                         시간과정의 두 비유: 수예품(手藝品)과 수채화(水彩畵)         &nb...

  • 다가오는 시대 준비하는 기독교다가오는 시대 준비하는 기독교

    김경재 목사 | 2015. 04. 24

    날씨 분별에서 시대표적 분별로 오늘의 기독교가 사회치유 능력이 있다고 국민은 보지 않는다. 말로써 하는 예수 전도는 소음으로 들리게 되었으니, 예수닮기와 예수살기를 보이라고 한다. 흙 속의 씨앗처럼, 한번 죽고 다시 ‘정의로운 사랑의 종교...

  • 생명의 언어, 말씀의 실상생명의 언어, 말씀의 실상

    김경재 목사 | 2015. 03. 09

    생명의 언어, 말씀의 실상구상 선생의 <말씀의 실상>을 서가에서 꺼내 첫 구절을 읽어본다. “영혼의 눈에 끼었던/ 무명(無明)의 백태가 벗겨지며/ 나를 에워싼 만유일체가/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오늘은 겨울잠 자던 개구리가 깨어난다는 경...

  • 영적 치매와 생태론적 영성영적 치매와 생태론적 영성

    김경재 목사 | 2015. 01. 11

    [특별기고] 생태론적 영성과 영적 치매 자유와 평등,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 기업이윤과 보편복지는 상호충돌 관계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양극적 요소들은 ‘모순의 역설’로서 항상 동시적이고 상보적인 관계에 있다. 두 요소를 동시에 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