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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축복, 마음공부

월간 풍경소리 2019. 10. 13
조회수 2753 추천수 0

<푸른솔의 삶 이야기>

 


111-.JPG » 전남 순천사랑어린학교 학부모와 마을사람들이 마을인생학교라는 공부모임에서 하는 식사

 

부모님 

아빠는 무능한 할아버지 대신 열 살 무렵부터 생계에 뛰어들었다고 하셨다. 당연히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40세 이른 나이에 돌아가신 할머니를 대신하여 스물에 동생 셋을 둔 가장이 되었다. 아빠는 몸으로 사는 육체노동자이면서도 늘 배움을 즐거워하셨고 기품이 있었다. 할아버지, 삼촌, 고모들, 우리가족을 모두 묵묵히 정성껏 건사하는 존경스러운 분이었다. 막내고모는 그때를 못 잊어 지금도 당신의 오빠 제사에 꼬박꼬박 오신다.

엄마는 어릴 때부터 야무지고 똑똑해서 늘 칭찬을 받으며 살았다고 하셨다. 아빠도 엄마의 야무진 살림솜씨를 많이 칭찬하셨다. 나보고 너희 엄마처럼 되라고 하셨다. 엄마는 자존심이 세서 어디에서 허투루 보이는 걸 싫어하셨다. 완벽주의자 엄마에게 어릴 때의 나는 못마땅하고 답답한 아이였다. 느리고 눈썰미 없고 눈치 없고 욕심도 없었으니 말이다. 엄마가 너무 무서워서 어릴 적 어느 날, 엄마가 꿈에 귀신으로 나오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주사가 심하셨다. 술을 드신 날이면 우리 집은 공포의 도가니가 되었다. 아빠는 그저 묵묵히 참으셨고 엄마는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셨다. 우리 남매도 마찬가지였다. 1때 할아버지가 중풍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이제 우리 집에 평화가 오려나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빠가 술을 점점 더 많이 드시고 늦게 오셔서 엄마의 마음고생은 그칠 새가 없었다. 아빠는 내가 대학 1학년 때 중풍으로 쓰러지셔서 십년을 누워계시다 돌아가셨다.

 

혼자 잘 노는 아이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한 살, 네 살 아래 남동생 둘이 있다. 서울 셋방살이가 그렇듯 1,2년마다 이사하며 살다가 5살 때 경기도 화전으로 이사했다. 화전은 서울과 바로 인접한 곳이었고 시골과 도시가 섞인 곳이었다. 거기에서 부모님은 자기 집을 마련하셨다. 살았던 기간은 3년 정도지만 참 인상이 깊었다. 동네 뒤의 밭들, 덤불, 돌산, 개울, 오솔길은 갈 때마다 신비롭고 평화로웠다. 집 앞의 길도 좋았다. 그 곳이 그리워서 고 3, 그리고 몇 년 전 찾아가기도 하였다.

6살 무렵부터 엄마는 나를 밖에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셨다. 불안해 하셨다. 순순히 따랐다. 혼자 노는 법에 익숙해지며 지내게 되었다. 한편 동무들과 어울릴 기회를 잃어버리며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것은 나의 오랜 숙제로 남겨지게 되었다.

8살 때 다시 서울의 응암동으로 이사했다. 그 동네에서 십여 년을 살았다. 8~10세 사이는 내 의식이 깨어나는 시기였다. 꼬마에서 어린이로 가는 시기였다. 말귀가 점점 트이게 되었고 수업이 재미있어지고 학교 성적이 차차 올라갔다. 학교 가는게 즐거워서 4학년 때 어느 날 새벽 동트기 전에 학교 가겠다고 가방을 메고 나가는 걸 엄마가 말리기도 하셨다. 며칠 전 슈타이너 교육학의 연령발달에 대한 글을 읽었는데 초등학교 연령의 정신적 발달과정이 꼭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알프스의 소녀는 인생의 책이다. 알프스의 산 속 오두막 다락에서 작은 창을 통해 별을 보며 행복해하는 하이디를 읽으며 나도 덩달아 행복해했고 자연 속에서 소박하게 살고 싶다는 바람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게 자연스러운 것에 공감했다. 열 번도 더 읽었다.

사람 그리는 것과 집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엄마는 사람 그림이 귀신을 불러들인다며 무섭게 야단치셨다. 그래서 몰래 했다. 사람 그리기를 많은 여자 아이들이 즐겨한다는 것을 이미 그 취미가 사라진지 오래인 16살 무렵에야 알게 되었다.

집의 내부와 마당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거리에 가다가도 어떤 집을 한참 살펴보기도 하고 모양을 기억했다가 집에 돌아와서 그려보기도 하였다. 여러 해 지나 중학교 가사시간에 설계도면을 배운 뒤로 내부 평면도와 입면도를 열심히 그려댔다. 그 취미는 20대에도 여전해서 후에 나의 진로까지 결정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책읽기, 문제 풀기, 글씨 쓰기, 붓글씨, 그림그리기를 주로 하며 홀로 시간을 보냈다. 조용한 어린이였다. 동무들과 어울리는 게 제일 어려웠다. 목소리가 작고 부끄럼이 많아 아이들과 얘기하거나 노는 걸 힘들어했다. 그러나 그때만 힘들어했고 집에 돌아오면 나만의 세계에서 만족하고 즐기며 살았다.



112-.JPG » 순천사랑어린학교 학부모이자 공동체의 일원인 이들이 함께 피리를 불고있다.

 

정신적인 독립을 하는 청소년 시절

아빠와 엄마는 맏딸인 내가 서울여상에 합격하고 거기에서 졸업하여 바로 직업을 얻기를 바라셨다. 3이 되어 고등학교 진학을 결정할 때 부모님은 나에게 상업학교에 갈 것을 강권하셨다. 처음으로 부모님에게 반항하였다. 특별이 뜻이 있어서 인문계에 간다기보다 주판알을 튕기는 괴로움을 겪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부모님은 결국 수긍해주셨다.

중학생 시절의 나는 모순덩어리였다. 학교공부를 열심히 했었고 배운 대로 살려고 했다. 반공과 애국이 옳다고 믿으며 반공동아리에 들어가기도 했고 6시에 거리에서 애국가가 울리면 멈추어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착실히 하였다. 부모님이 고생하며 사는 게 안타까워서 돈을 아끼려 애를 썼다. 한편으로는 공부 못하는 동무들을 무심코 무시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한때 어떤 동무에게 타산적이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나의 취약과목은 음악 실기와 체육 실기였다. 음악은 필기시험으로 어느 정도 보충이 되었는데 체육은 체력장의 하한 점수를 따기가 정말 어려웠다. 그래서 중3 여름방학 때 매일 학교 운동장을 뛰어다니고 윗몸일으키기 연습을 눈물 나게 해서 겨우 성적을 맞출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첫 1년은 학교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학교는 미션스쿨이었는데 그 전까지 기독교에 대해 거의 접해본 경험이 없는 나에게 성경수업은 참 지루하고 재미없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어떤 날은 운동장에 전교 학생들을 앉혀놓고 특별초청 강연을 하곤 했다. 그 시간이 달갑지 않았다. 미션스쿨이지만 그 곳에 사랑이 보이지 않았다.

라디오로 팝송을 많이 들었다. 특히 비틀즈를 좋아했다. 전축이 없어도 버스비를 모아 엘피를 모으고 대학가 음반점에 찾아가서 비틀즈 음악을 테이프에 복사하고 수 백 번을 들었다. 들을수록 새롭게 들려서 좋은 음악은 좋은 책처럼 반복할수록 좋다는 것을 알았다. 뭐 하나에 호감을 가지면 깊이 빠지는 성향은 이 때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엄마는 그런 나에 대해 공부를 게을리 한다며 야단을 치셨지만 머리가 커가는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3때 아빠의 알코올중독은 점점 심해졌다. 엄마는 아빠를 붙들고 매일 우시고 우울해하시고 짜증을 내셨다. 나는 히스테릭한 엄마가 안타까웠다. 집안 분위기는 뒤숭숭했지만 무던한 성격의 나는 내 마음을 도닥이며 나름 공부에 집중하였다.

아빠는 술을 안 드신 날이면 야간학습을 마치는 시간에 학교 앞에서 나를 기다리셨다. 내 가방을 들어주시고 함께 집으로 걸었다. 아빠의 사랑을 한껏 느꼈던 아름답고 고마운 시간이었다.

 

이십대 시절

경희대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아름다운 경희대 캠퍼스에 반해서 선택하였다. 사학과를 더 가고 싶었지만 재수하기 싫어서 안전하게 철학과를 선택했다. 길게 보니 잘 선택했다는 마음이 든다. 87년 뜨거운 민주화 열기 속에 곧 깊이 빠졌다. 정말 열심히 사회과학을 공부하고 데모했다. 6.29선언이 나오자 어떤 선배가 상숙이 넌 이제 무슨 재미로 살래?’하고 물어서 기막혀하기도 했다.

그해 가을, 아빠가 쓰러지셔서 병원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래도 쉬지 않고 학생운동을 했다. 순진한 열정덩어리였다. 엄마와의 갈등이 엄청났다. 동생들과도 그랬다. 3학년 때는 집을 가출하여 몇 달간 밖에서 살기도 하였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대학 졸업에 의미를 못 느껴서 학교를 그만두었다.

학생운동이 점점 힘들어졌다. 누워있는 아빠를 대신해 식당에 나가며 생계를 꾸려가는 엄마를 그냥 두고 보기 힘들었고, 학생운동에도 지쳐갔다. 결국 동료들과 연락을 끊었다.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알뜰함이 몸에 배어서 박봉에도 꽤 목돈을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사장 돈을 벌어주는 기계에 불과하다는 자괴감이 점점 크게 들었고 몸과 마음이 약해져 갔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겠다는 마음도 들었다.

학교를 그만둔 뒤 3년 만에 다시 학교에 복학했다. 도피하다시피 돌아간 거라 여전히 우울했다. 하지만 우울한 마음을 깊이 속에 묻고 밝고 성실한 모습으로 살았다. 술도 많이 먹었다. 주머니에 돈이 있어서 후배들에게 술과 밥을 많이 사주었다. 복학한 다음 해, 학교 1년 후배인 남편과 연애를 시작했다. 연애를 하고 얼마 안지나서부터 콩깍지가 벗겨지고 자주 다투었다. 무심함에 많이 상처 받았다. 그럼에도 헤어지지 않은 것은 내가 그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오만에 가득 차서였다. 내가 좀 더 객관적이었으면 헤어졌을 것이다.

 

결혼, 출산, 육아

남편과 같은 시기에 졸업을 하고 건축기사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경영학과였던 남편은 직장을 쉽게 구하였다. 그는 광주지사로 발령받고 직장 생활을 시작하였다. 얼마 안 지나서 임신한 것을 알게 되고 아버님이 구해주신 광주의 한 아파트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둘 다 정신적으로 미숙해서 자주 다투었다. 내가 기대했던 부부관계가 아닌 것에 절망하고 매일 울고 남편을 미워했다.

첫 딸 혜일이는 나에게 구원자였다. 아기가 나에게 주는 배냇웃음이 그렇게 큰 위로를 줄 수가 없었다. 남편에게는 끊임없이 불만을 갖고 아이에게는 헌신적인 나의 이중생활은 둘째 승보, 막내 현보 때까지 오랜 기간 이어졌다.

98, 남편은 고향인 여수와 제일 가까운 순천지사로 지원했다. 순천으로 이사했다. 순천은 나와 우리 가족의 삶에 중요한 무대가 되었다.



115-.JPG » 매일 아침 해안길을 걸어서 등교하는 아이들과 김민해 교장과 학부모들

 

평화학교와 우리 집

위태로운 결혼생활 중 혜일이가 입학할 시기인 2003년에 평화학교가 개교했다. 나는 평화학교를 우리 가족을 구원해줄 동아줄처럼 붙잡았다. 대안교육에 대해 공부도 하며 학교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평화학교는 개교한 첫 해부터 삐거덕 거렸다. 그래도 열심히 함께 하고 싶었고 그렇게 했다.

2003, 추진력 짱인 남편이 학교가 자리한 상사의 연동마을에 집터를 샀고, 다음 해 크고 멋진 이층집을 지었다. 집 짓는 과정이 만만치 않았다. 아기인 현보를 포대기에 업고 새참과 밥을 지어 나르고 쓰레기를 치우고 목수님들 심부름을 했다. 거기에 남편의 직업에 위기까지 겹쳐 그의 부재 속에서 집을 지었다. 집을 지으면서 빚을 많이 졌고 그 무게감이 여러 해 동안 나를 짓눌렀다. 집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여러 갈래다.

2006년 평화학교는 일촉즉발의 위기였다. 그때 나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광주의 빛고을학교 교장이었던 양인목 씨를 평화학교의 새로운 교장으로 영입하는데 다른 학부모들과 뜻을 함께 한 것이다. 교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억지로 밀어붙인 것인데 그 결정이 잘못된 것임을 확인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07년 운영위원장이었던 나는 너무나 괴로웠다. 하지만 더 괴로웠을 교사들의 헌신과 밝게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며 힘을 얻었다. 양 교장은 한 학기를 못 채우고 그만 두었다. 그가 떠나고, 학교에 기대할 게 더 이상 없다는 입장의 부모들은 아이들과 함께 모두 떠났다. 1년 사이에 학생 수가 절반도 안 남았다. 남은 사람들은 서로를 도닥이며 살았다.

그 무렵 도라지, 해바라기, 함박꽃, 도라지 친구인 경미 씨와 함께 인문학 공부동아리를 꾸렸다. 당시 학교에서는 이런 형태의 책 읽는 모임이 없었다. 이 모임에서 여러 책을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누며 좋은 기운을 받았다. 여러 책 중 기억나는 책이 루소의 에밀, 신영복 선생의 강의, 융의 정신이론을 해석한 그림자, 딥스, 간디 자서전등이 있다. 해바라기는 떠났지만 모임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두더지, 노자, 마음공부

2009년 두더지 김민해 선생을 평화학교 교장으로 모셨다. 두더지가 오면서 시작한 것은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를 함께 읽는 것이었다. 그 책은 곧 인생의 책이 되었다. 내가 그동안 잘못 알고 살아왔음을 절로 깨닫게 해주었다.

또 하나의 인생의 책, 월간 풍경소리. 그 책을 읽으며 많은 위로를 받고 자극을 받았다. 풍경소리는 마음을 위한 병원이다.

그후 학교가 순천YMCA로부터 자립하고, 학교 이름도 사랑어린학교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사랑어린학교는 해룡면 바닷가 산 아래로 터전을 옮기게 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그 과정을 함께 했다. 그 길에서 내가 얻은 최고의 선물은 마음공부이다. 뭔가를 잘하고 싶으면 그것에 대해 열심히 배우고 익혀야 하듯 마음도 그렇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가장 우선이라는 것을 배웠다. 지금도 그 여정에 있다. 여전히 실수도 하고 마음챙김도 미숙하지만 배운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아픔을 받아들이는 것, 바보 이반, 바주데바, 간디, 달라이라마

결혼 초부터 우리 시어머니는 늘 건강이 좋지 않았고 건강하기 위한 무수한 노력을 하셨다. 늘 낯빛이 어두우셨다. 중풍으로 쓰러지셨지만 다행히 크게 온 것은 아니라 곧 일어나셨다. 그러나 뭔가 완전치 못한 당신 몸에 대한 걱정이 크셨다. 확실히 암이라고 밝혀진 것도 아닌데 뿌리 뽑겠다며 힘들게 서울대 병원을 오고 가시고 결국 수술도 하셨다. 그리고 일 년 후 큰 교통사고를 겪으시고 병원에서 여러 해를 보내셨다. 드디어 퇴원하시는 날, 병원은 진저리가 난다며 병원 현관 바닥에 침을 퉤퉤 뱉으셨는데, 안타까운 마음이 일었다. 퇴원한 후에도 이런 저런 병으로 입퇴원을 반복하셨다. 종내는 중풍으로 크게 쓰러지시고 의식 없이 3년을 병원에서 누워계시다가 돌아가셨다. 어머니를 보면서 아픔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잘 사는 걸까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나는 둘째 며느리였지만 여러 형편상 사실상 큰며느리 역할을 하며 살아왔다. 어머니를 돌보는 것, 제사 등등. 조카들이 어릴 때는 방학 때 우리 집에서 지냈다. 초기에는 불만이 많았다. 남편에 대해 불만스러워하면서도 시댁 일을 챙겨야 하는 것이 마음이 불편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어느 날, 아이들에게 읽어주기 위해 마련한 톨스토이 민화집 속 바보 이반을 읽었다.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주변과 상관없이 행복하게 일을 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이반의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나도 이반처럼 살고 싶다는 열망을 품었다. 그래서 특히 시댁과 관련한 무언가를 할 때, 나는 바보 이반이다라고 염불을 속으로 되뇌며 내 몫을 성실히 하려 하였다. 염불이 효과가 있었는지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해서 참 좋았다. 그리고 덩달아 형님네 식구들과도 잘 지내게 되었다. 나는 요즘도 매일 바보이반을 하루에 여러 번 되뇌며 살고 있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 등장인물인 바주데바는 현장에서 어떻게 고요하게 살 수 있는가라는 영감을 주었다.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면서도 주변을 잘 살피고 각자의 걸음과 길을 존중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간디와 달라이라마 두 분 모두 치열한 현장에서 자신의 종교관, 진리를 평화로운 방식으로 펼쳐낸 분들이다. 두 분의 삶을 배우며, 사람이 무언가를 하려면 끊임없는 수행이 바탕이 되어야 함을 알았다. 배웠으니 그렇게 익히면 되는데 솔직히 두 분에 가깝게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가지껏 하며 살고 싶다.

달라이라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삶 자체에는 본질적인 의미가 없지만 삶을 긍정적으로 이용한다면 하루도, 한 달도, 영겁도 모두 유의미하다.” 그렇게 살고 싶다.

 

사랑어린배움터는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2003년 학부모의 입장으로 평화학교에 발을 들이고 2018년까지 학교를 열심히 돕는데 정성을 쏟으며 살았다. 중간에 이런 저런 이유로 배움터를 떠나거나 배움터와 거리를 두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2010년대 초반까지도 그들에 대한 원망과 애증이 꽤 있었다. 그러나 배움터에서 마음공부를 하면서 차츰차츰 그 마음이 부드러워졌다.

배움터에서 수행자라는 말이 나오는 시점에서 나도 스스로에게 물었다. 더 이상 학부모의 입장만으로 이곳에서 지내는 게 지쳐가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이곳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런 질문 속에서 이곳을 나의 수행처로 삼겠다 마음먹었다. 그렇게 또 몇 해를 지냈다.

책 읽는 모임-<바이세로제>에서 헨리 나우웬의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돌봄의 신비라는 말이 있었다. 서로를 함께 돌보기 위하여 공동체가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서로 함께 돌보는 일이 공동체를 만들기도 한다는 말이다. 그 구절 속에서 이곳이 느껴졌다. 느린 걸음이지만 그 쪽으로 가고 있다고 느껴졌고, 나도 그와 같이 걸음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라이라마의 반야심경을 접하면서 그 길을 제대로 가려면 보살수행이 필수적임을 배웠다.

그 길을 걷고 싶은 나에게 사랑어린배움터는 말 그대로 배움터이자 수행처의 의미로 다가온다. 마을인생대학 학생은 그런 걸음을 표현하는 이름이다.


이 글은 <풍경소리> 10월호에 게재된 것으로, <월간 풍경소리>를 만든 전남 순천 사랑어린학교 공동체 일원인 푸른솔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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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풍경소리
순천사랑어린학교 김민해 교장이 중심이 되어 초종교 조교파적으로 영성 생태 깨달음을 지향하는 월간잡지다.
이메일 : pgsor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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