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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번거롭다고 느낄 때면 빈들을 찾아야 한다

김기석 목사 2013. 11. 28
조회수 14924 추천수 0

빈들을 가득 채우시는 당신

눅8:4-8
[무리가 많이 모여들고, 각 고을에서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오니, 예수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니, 발에 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들이 쪼아먹기도 하였다. 또 더러는 돌짝밭에 떨어지니, 싹이 돋아났다가 물기가 없어서 말라 버렸다. 또 더러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지니, 가시덤불이 함께 자라서, 그 기운을 막았다. 그런데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자라나,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께서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외치셨다.]

 

낙엽거리.jpg

 

• 빈들 체험
입동이 지나면서 떨어지는 낙엽을 치우느라 환경미화원들의 손길이 바빠지고 있습니다. ‘만물귀근萬物歸根’이라는데, 아스팔트 위로 떨어진 나뭇잎들은 뿌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차에 실린 채 어딘가로 옮겨집니다. 쓸쓸한 헤어짐입니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은 텅 비어 있습니다. 빈 들판을 볼 때마다 고진하 목사의 시 <빈들>이 떠오릅니다.

 

늦가을 바람에
마른 수숫대만 서걱이는 빈들입니다
희망이 없는 빈들입니다
사람이 없는 빈들입니다
내일이 없는 빈들입니다
아니, 그런데
당신은 누구입니까
아무도 들려 하지 않는 빈들
빈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당신

 

오래 전 홍천 동막골에서 조그마한 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목사 시인 고진하는 가을걷이가 끝난 텅 빈 들판을 보며 존재론적인 쓸쓸함을 느낍니다. 그가 채택한 ‘빈들’이란 표현은 노인들만 남은 농촌 현실에 대한 은유일 수도 있고, 귀양 온 듯 쓸쓸한 자기 내면 풍경에 대한 은유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쓸쓸합니다. 그래서 그는 희망도, 사람도, 내일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시는 ‘아니, 그런데’라는 시구를 통해 전환됩니다. 시인은 텅 빈 들판을 가득 채우고 있는 어떤 분, 그 쓸쓸한 풍경을 감싸 안고 있는 분의 품을 느낍니다. 그것은 아마도 계시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잊혀진 것 같고, 뒤쳐진 것 같고, 미래에 대한 전망조차 불투명해 마음이 무거울 때, 하나님은 그렇게 찾아오십니다. 돌베개를 베고 잠을 청하던 야곱에게도 그러했고, 양떼를 몰며 광야를 떠돌던 모세에게도 그랬고, 너무도 괴롭고 쓸쓸해 죽기를 청했던 엘리야에게도 그랬습니다.

 

삶이 번거롭다고 느낄 때면 빈들을 찾아야 합니다. 2000년 전 로마 제국의 강압적인 지배 아래 신음하고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광야로 나갔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기 위해서도, 비단 옷을 입은 사람이나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을 보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예언자를 보기 위해서였습니다(눅7:24-26). 광야 혹은 빈들은 인간의 허장성세가 모두 무화되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그곳은 사람들로 하여금 본질적인 것에 대해 생각하게 만듭니다. 성경에서 위대한 인물로 담금질 된 인물들은 모두 광야에 머물렀던 것이 그 때문입니다.

 

뿌리는사람고흐.jpg 씨뿌리는사람고흐1889.jpg

*고흐의 '뿌리는 사람'(왼쪽)과 '씨뿌리는 사람(1889)'

 

• 사람은 누구나 씨를 뿌린다
빈들을 떠올리는 이 계절에 저는 엉뚱하게도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씨 뿌리는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고 싶습니다. 주님의 가르침과 사역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당시의 지중해 세계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무장한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도 감히 로마의 통치에 맞설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런 시기에 주님은 제국의 변방인 팔레스타인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제국의 한복판에서 들려오기 시작한 봄소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거의 다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도래하는지를 가르치거나, 하나님 나라에 속한 이들의 삶이 어떠해야 할지를 가르칩니다. 오늘의 본문인 뿌려진 씨에 대한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비유를 생각할 때마다 제게는 두 명의 화가가 떠오릅니다. 농민 화가로 유명한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입니다. 두 사람은 각각 <씨 뿌리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농민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던 밀레의 그림 가운데에는 <만종>, <이삭 줍기> 등 우리에게도 익숙한 그림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은 제작 당시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프랑스 상황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이 완성된 것이 1850년인데, 그 얼마 전인 1848년 2월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섰습니다. 하지만 정치 불안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고, 귀족들은 농민과 노동자는 언제라도 혁명에 뛰어들 수 있는 위험한 부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이 등장하자, 귀족들은 밀레가 혁명의 씨를 뿌리라고 사람들을 선동한다고 비난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씨를 뿌린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행위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역설적 에피소드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밀레를 매우 존경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밀레의 그림을 모사한 작품을 여럿 남겼습니다. 고흐가 <씨 뿌리는 사람>이라는 작품을 그린 것은 1888년입니다. 그 때 프랑스 사회는 어느 정도 안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일까요? 고흐의 그림은 사람들에게 불온하다는 의구심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의 일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그 작품 속에서 깊은 종교성을 읽어내곤 합니다. 노란빛 태양이 작열하는 한 낮, 농부는 씩씩하게 들판을 걸으며 씨를 뿌립니다. 그의 머리에는 마치 후광인 듯 환한 빛이 서려 있습니다. 여러 해 전 이 그림을 보면서 그 강렬하고 밝은 노란빛에 사로잡혔던 기억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작품은 다른 면에서 보더라도 참 중요합니다. 벨기에의 탄광 마을인 보리나주에서 전도사로 살던 고흐는 갈등 끝에 목회자로서의 꿈을 접고 화가가 되기로 작정합니다. 바로 그때 그린 게 이 작품입니다. 화가의 길로 접어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의 눈에 세상은 하나님의 신비로 가득 차 있는 곳이었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는 일상적인 행위에서 그는 성스러움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그림은 씨를 뿌리는 행위가 얼마나 거룩한 행위일 수 있는지를 넌지시 보여줍니다.

 

씨뿌리는사람밀레1850.jpg *밀레의 '씨뿌리는 사람'

 

 

씨를 뿌리는 것은 비단 농부의 일만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씨를 뿌립니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오늘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씨가 되어 누군가의 가슴에서 혹은 우리 역사 속에서 싹이 트고 자랍니다.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야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씨를 뿌리느냐 입니다. 아무 씨나 뿌릴 수는 없습니다. 귀하고 아름다운 씨를 뿌려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생명과 평화의 씨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주전 8세기의 예언자 호세아를 통해 "정의를 뿌리고 사랑의 열매를 거두어라. 지금은 너희가 주를 찾을 때이다. 묵은 땅을 갈아엎어라. 나 주가 너희에게 가서 정의를 비처럼 내려 주겠다"(호10:12)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너무나 많은 이들이 밭을 갈아서 죄악의 씨를 뿌리고, 반역을 거두어 거짓의 열매를 먹습니다(호10:13). 참담한 일입니다.

 

• 상투적 해석에 저항하라
오늘 비유는 우리 모두에게 익숙합니다. 농부가 들에 나가서 씨를 뿌렸습니다. 흩뿌리는 파종법이었으니 씨들은 다양한 환경 속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것도 있고, 돌짝밭에 떨어진 것도 있고,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것도 있습니다. 제자들의 요청을 받고 주님이 해주신 것으로 되어 있는 비유 해설의 내용 또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합니다. 주님은 씨는 곧 말씀이라고 하십니다. 길가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곧 악마가 와서 그 말씀을 빼앗아 가므로 구원에 이르지 못한 상태를 일컫습니다. 돌짝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잠시 동안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시련이 다가오면 곧 떨어져 나가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었지만 삶의 근심과 재물과 인생의 향락에 사로잡혀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들을 상징합니다.

 

매우 도식적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비유에 대한 이 해석은 예수님 자신이 하신 것이라기보다는 초대교회의 가르침이라고 말합니다. 초대교회의 가르침이라 하여 우리가 소홀히 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해석을 들으며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나는 어떤 밭일까?" 스스로 자책을 하는 이들은 그래도 좋은 사람입니다. 개중에는 이 비유 해석을 들으며 다른 이들을 떠올리며 그들에게 찌지를 붙이는 이들도 있습니다. ‘길가와 같은 사람’, ‘돌짝밭 같은 사람’, ‘가시덤불 같은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경우야말로 말씀의 오용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이를 판단하기 위해 말씀을 활용하지 말고, 스스로를 성찰하기 위해서만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비유는 늘 새롭게 해석되어야 합니다. 말씀과의 만남도 마찬가지입니다. 뭔가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익숙한 것들이 우리에게 편안함을 주니 말입니다. 하지만 익숙해진다는 것은 상투적이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성도들이 기록된 말씀을 읽고, 선포된 말씀을 들으면서도 삶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 까닭은 말씀과 교회생활에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아는 말씀’이 되는 순간 말씀은 힘을 잃습니다. 우리의 못난 자아를 깨뜨리지도 못하고, 우리 속에 있는 선의 가능성을 싹틔우지도 못합니다. 물론 똑같은 말씀이라 해도 상황에 따라 무심히 흘려들을 때가 있는가 하면, 우리 존재의 기반을 뒤흔드는 말씀으로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과 늘 처음 만나는 것처럼 만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진정한 만남은 사건을 일으킵니다. 말씀 앞에 설 때 우리는 어린 사무엘과 같은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종이 듣겠습니다.”

 

열매.jpg

 

• 허비된 씨앗들도 소중하다
사람들은 이 비유를 해석할 때마다 재빨리 옥토에 떨어진 씨의 운명에 집중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그저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고 말하지만 왠지 싱거운 느낌이 듭니다. 마가복음에 나오는 표현,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상승되어 가는 그 묘한 느낌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백 배의 결실을 거두는 인생을 살라는 메시지에 아멘으로 응답한 후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 옛 생활을 반복합니다. 여전히 투덜거리고, 불평을 내뱉고, 욕심 부리고, 원망하고, 좌절합니다. 말씀이 허비되었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서 잠시 관점을 바꿔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결과론에 집착할 때가 많습니다. 꿩 잡는 게 매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결과가 좋으면 과정이야 어떠하든 다 용납되는 것이 우리 사회입니다. 물론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결과라는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물음표를 붙여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제 욕심에 눈이 먼 사람들이 자기들이 추구하는 바를 공익을 위한 것이라고 호도하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회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말이 어긋나갔습니다만 세상에는 선을 위하여 애쓰다가 그 결과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이들이 참 많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사람이 참 많습니다.

 

지금 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우리가 누리는 다소간의 자유는 누군가가 대가를 지불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애썼던 애국선열들과 군인들, 잃어버렸던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해 헌신했던 학생과 시민과 노동자들 덕분에 지금의 우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치 허비된 씨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그들의 희생을 밑거름으로 하여 발전하고 있습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거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뿌려 놓은 씨가 자라난 결실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뒤에 올 이들을 위해 아름다운 씨를 심는 것입니다. 당장 결실이 보이지 않는다고 낙심할 것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지역의 교인들을 격려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갈6:9)

지금 나의 노력이 속절없이 물거품이 되고, 나의 헌신이 밑 빠진 독에 물붓기처럼 허망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심는 씨가 하나님의 마음에 잇댄 것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이 이 비유 끝에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메시지일 것입니다. 요즘 제 마음을 깊이 울리는 노래가 있습니다. 기도의 밤 때마다 부르는 곡입니다.

 

"우리 오늘 눈물로 한 알의 씨앗을 심는다
꿈꿀 수 없어 무너진 가슴에 저들의 푸른 꿈 다시 돋아나도록
우리 함께 땀 흘려 소망의 길을 만든다
내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했던 저들 노래하며 달려갈 그 길
그날에 우리 보리라 새벽 이슬 같은 저들 일어나
뜨거운 가슴 사랑의 손으로 이 땅 치유하며 행진할 때
오래 황폐하였던 이 땅 어디서나 순결한 꽃들 피어나고
푸른 의의 나무가 가득한 세상 우리 함께 보리라."

 

빈들에 서서 울고 있는 이가 있습니까? 그 빈들을 가득 채우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계시기에 우리는 희망의 노래를 부릅니다. 하나님 나라의 씨앗을 심기 위해 애쓰지만 결실이 없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우리 뜻보다 높고, 하나님의 길은 우리 길보다 높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우리는 절망할 수 없습니다. 시절이 어려울 때일수록 자기 일에 성실한 이들이 필요한 법입니다. 우리의 일,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씨를 심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일에 동참하는 기쁨을 한껏 누리며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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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목사
청파감리교회 목회자. 그리 큰교회는 아니지만, 교인들이 성서뿐 아니라 다양한 인문학적 소양을 쌓아 주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고력을 지니게 하고, 냄비같은 신앙이 아니라 무쇠솥처럼 은근하면서 끈기있고 깊이있는 신앙을 갖도록 이끌고 있다. 생각이 깨인 젊은 기독교인들의 멘토이다.
이메일 : vorblick@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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