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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코 오고야만 인도, 첫날부터 ‘꽃자리’ 잃다

조현 2009.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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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구경 뒤 호텔로 돌아가려는데 이름이 도통…
시크교인 무뚝뚝함 뒤엔 정직하고 성실한 ‘꽃웃음’
 
 
저 언덕으로 건너가려는가, 내 가슴이여.
여행자도 길도 없는데,

삶의 율동이, 영혼의 휴식이 저 언덕 어디에 있단 말이냐.
 
강물도 나룻배도 사공도 없다.
닻줄도 넉넉지 않고, 줄잡을 사람도 없다.
땅도, 하늘도, 시간도, 어느 것도 없다.
건너가야 할 언덕도, 강물조차 없다.
여기 몸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다.
 
영혼이여, 도대체 어느 곳을 아직도 갈망하고 있는가.
저 텅 빈 것 속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용기를 내라.
그리고 그대 자신의 육체 속으로 돌아오라.
 
반석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다.
가슴이여, 내 가슴이여.
이제는 어느 곳으로도 가지 말라.
 
모든 상을 멀리하라.
그리고 어서 그대 자신과 마주서라.
 
 
내가 사랑하는 시인 카비르(1440~1518)는 아무리 내가 그를 사랑하더라도 오지 말라고 했다. 아무리 카비르를 보고 싶더라도 인도에 오지 말고 내 안에서 카비르를 찾고, 나를 찾으라고. 시인 공초 오상순처럼 ‘앉은 자리가 꽃자리’임을 알라고 이렇게 직접적인 언어로 나를 깨웠다.
 
돌고 도는 게 인생이라지만 택시타고 돌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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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난 기어코 인도에 오고야 말았다. 그래서 난 첫날부터 철저한 업보를 받고 있었다.
 
싼 게 비지떡인가. 싼 비행기표를 골라 타고 왔더니 밤 11시30분에 캘커타공항에 떨어뜨린다. ‘세월아 네월아’인 입국수속을 끝내고 나오니 1시가 훌쩍 넘었다.
 
캘커타에 도착하면 우선 어느 숙소에 머물고, 어디를 어떻게 가야하는지 안내책자에 표시를 해두고 메모를 해두었다. 그런데 방콕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9시간을 머무는 동안 난 책을 잃고, 책도 나를 잃어버렸다.
 
캘커타처럼 위험한 도시에선 1시가 넘어지면 공항에서 밤을 새고 길을 나서는 게 상책이지만,  갈 길이 있다면 늘 하책도 마다않는 내가 공항에서 긴긴 밤을 보낼 리가 없었다.
 
간신히 첫 날 밤을 보내려던 숙소의 이름과 거리가 생각났다. 공항에서 미리 요금을 지불하고 출발하는 프리페이드 택시를 잡아타고 서더가의 한 게스트하우스로 향했다. 어둠의 도시 골목을 헤맨 끝에 도착한 그 게스트하우스엔 방이 없다고 했다. 새벽 2시30분이 넘은 시간이었다. 강도인지 거지인지 구분이 안 되는 남자들이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다 내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운전사는 “이곳에 이대로 있다간 큰 일 난다”며 자기가 아는 호텔로 데려가 주겠다고 했다. 바가지 쓸 것이 불 보듯 훤해도 어찌하랴 이 밤에. 
 
운전사가 다시 골목을 이러 저리 휘젓더니 호텔에 도착했단다. 터번을 쓰고 수염이 많이 나고 뚱뚱한 지배인이 맞았다. 시크교인이었다.  캘커타에선 깨끗한 호텔이었다. 그러나 나 같은 서민이 이용하기엔 숙박비가 턱 없이 비쌌다. 아무리 깎아주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네가 지금 이 시간에 어디를 가겠느냐는 눈치였다.  200~300루피에 하룻밤을 지내려다가 첫날부터 1600루피를 출혈했다. 그래도 시크교인은 어쩐지 제복을 입은 군인이나 경찰 같아서 더 신뢰가 갔다.  이 밤에 대안이 없어서 그대로 묵을 수밖에.
 
길 가는 사람 붙잡고 “여기가 어딥니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짐을 꾸려 지배인에게 맡겼다. 캘커타 구경을 하고 저녁 기차로 캘커타를 떠날 참이었다. 지배인은 전날 밤 쓰지 못한 숙박계와 여권, 비자 번호까지 쓰게 했다. 기차표를 구하러 간다고 했더니 어제 밤 팁맛을 본 호텔보이가 득달 같이 달려가 오토릭샤를 대기시켜놓았다.  10루피를 주자 그저 좋아 턱뼈가 거의 쪼개질 정도로 입이 벌어진 호텔보이와 “바이, 바이”하며 오토릭샤에 오를 때도 난 내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몰랐다.
 
기차표를 끊고, 하루 종일 아수라장 같은 캘커타시내를 헤맸다. 밤 기차 시간이 가까워져오니 이제 호텔로 돌아가야 할 시간.  아, 그런데 어인 일인가. 호텔의 정확한 이름도, 호텔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한 밤중에 들어갔다가 아침에 호텔 명함 한 장도 챙기지 않은 채 호텔보이가 호텔 문 앞에 데려온 오토릭샤를 타고 나와 버렸지 않은가. 그제야 난 정작 ‘앉은 자리’를 잃어버린 채 목적지에만 정신이 팔려 있던 자신을 발견했다.
 
겨우 ‘인터내셔날호텔’이란 것만 기억났다. 내가 어제 밤 애초에 가려던 게스트하우스가 있는 서더가에 인터내셔널 호텔이 있는지 택시운전사와 함께 이 사람, 저 사람, 그 사람 다 잡고 물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택시 기사는 이미 눈치로 내가 가려는 호텔이 초특급호텔은 아니라는 것쯤은 알법하련만 2시간을 헤맨 끝에 캘커타에서 가장 좋다는 힌두스탄인터네셔널호텔로 데려다준다. 이곳이 바로 인터내셔널호텔이란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기차 시간은 다가오는데 속이 탔다.  도대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라 다급하게 묻는 이 이방인을 인도들에게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일단 서더가로 갔다. 거기에서 지나가는 릭샤꾼들에게 “인터내셔널이란 이름이 붙은 호텔을 들은 적이 있는지” 묻고 또 물었다.
 
지치고 지쳐 쓰러질 때쯤 늙은 릭샤꾼을 만났는데, 그가 “혹시 브이아이피 인터네셔널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제야 긴 비행과 피로로 비몽사몽간에 새벽녘에 호텔에 가서 시크 지배인과 주고받은 대화가 번개처럼 스쳤다. “요금이 왜 이리 비싸냐”는 말에 지배인이 “이곳은 브이아이피 인터내셔널이 아니냐”고 답했고, 난 “그런대로 깨끗하긴 하지만, 브이아이피가 이곳에 오겠느냐”고 웃던 기억이 난 것이다.
 
터번을 쓴 시크교인들이 좋아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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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빼 마르고 힘없는 늙은 릭샤꾼이 끄는 릭샤를 타고 가보니 과연 내가 묵었던 호텔이었다. 호텔이 있는 곳은 서더가 아니고, 서더가에선 한참 떨어진 프리스쿨로드였다. 어제 밤 서더가에서 한 참을 이동했던 모양이었다.
 
감정 변화도 없이 무뚝뚝해 보이는 시크 지배인 얼굴이 얼마나 반가웠던지. 더구나 손님이 많이 지나다니는 복도에 둔 배낭도 무탈하게 잘 있다.
 
몇 시간을 바싹 쫄았던 가슴을 쓸어내리며  배낭을 메고 나오는데, 그 시크 지배인이 활짝 웃었다.  내가 사랑하는 카비르의 시를 ‘그랜트 사히브’란 성전 안에 담은 시크교이기에 느낌이 남달랐는데, 그를 뒤로 하며 이제 터번 쓴 시크인들이 좋아지려고 했다.
 
두 번째 시크 친구를 만난 것은 델리 파하르간지 메인바자르다. 비베크호텔 안에서 혼자 여행사를 하는 시크인이다.  그는 외국인 여행객들로부터 상당한 신용을 얻고 있었다.  난 심심할 때면 그의 사무실에 내려가 이것저것을 묻곤 했는데, 늘 성실하게 답해 주었다. 그는 내가 시크교의 가르침에 대해서 묻자 더욱 신나 했다.
 
난 델리의 찬드니초크에 있는 구르드와라 방글라 사히브 사원을 찾았다. 하얀 대리석 위에 황금 돔이 세워진 건물 앞에선 터번을 하고 수염을 기른 시크 남자들과 사리를 두른 여자들이 바닥에 엎드려 사원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물을 손바닥으로 떠서 마시거나 손에 묻혀 혀를 적셨다.
 
시크교인들은 이곳엔 ‘암리트’라는 감로수가 있어 이 물을 마시면 병이 낫는다고 믿는다. 시크교의 8대 구루인 하르크리슈안 데브는 1664년 이곳에 머물 때 병으로 고통 받으면서도 치료받을 능력도 없는 병자들을 치료했다고 전해진다.
 
안내에 따라 신발을 벗은 다음 모자나 손수건으로 머리를 가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홀 앞엔 제단이 있고 그 위에 의식을 이끄는 이가 앉아있었다. 성스런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시크교인들은 제단을 향해 절을 하며 기도를 했다.
 
힌두사원이나 이슬람사원들이 비신자들에게 아주 까다롭게 굴고, 사진도 찍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은 데 반해 이곳에선 방문객들을 최대한 배려해 사진도 찍을 수 있게 했다.
 
간디의 정신적 스승, 죽을 때까지 베 짜며 신과 영혼 노래
 
인도에 1천800만여명의 신자를 가진 시크교의 창시자는 나낙(1469~1538)이다. 현재 파키스탄에 속하는 라호르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나낙은 30살이 넘어 명상 중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힌두인이 따로 있고, 무슬림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는 계시였단다.
 
인도엔 1001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유래된 이슬람 군주 마흐무드가 침략해 수많은 힌두사원과 불교 유적지를 파괴한 이래 힌두교와 이슬람이 죽고 죽이는 종교간 혈전이 계속됐다.
 
따라서 힌두교와 이슬람의 통합을 시도한 시크교는 이런 시대적 아픔을 극복해보려는 노력의 소산일 수 있다.
 
나낙의 시대를 예비한 인물로 카비르를 꼽을 수 있다. 힌두교 집안에서 과부의 사생아로 태어난 그는 태어나자마자 버려져 베짜는 직공인 이슬람 부부가 데려다 키웠다. 일찍부터 양쪽 종교를 넘나든 것이다.
 
당시 인도에선 의식과 권위를 과시하던 힌두 브라만 사제들에 맞서 이슬람 수피즘의 영향을 받아 신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 즉 박티운동이 불붙고 있었다. 박티운동의 선구자가 바로 카비르의 스승 라마난다였다.
 
카비르는 죽을 때까지 베를 짜며 신과 영혼을 노래했다. 그는 라빈드라나드 타고르와 마하트마 간디의 정신적 스승이기도 했다.
 
나낙은 종교 통합의 비전에 따라 세차례에 걸쳐 전인도를 순례했다. 이에 뜻을 함께 한 이들이 시크교의 출발이었다.
 
주검은 사라지고 꽃은 여전히 향기 품어
 
나낙이 임종할 때 시크가 되기 전 힌두교인이던 제자들은 시신을 힌두교식대로 화장시켜야 한다고 했고, 무슬림이었던 제자들은 이슬람식대로 매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낙은 자신의 주검을 천으로 덮고 양쪽 진영이 자기 몸 양쪽에 꽃 한 송이씩을 놓고 있다가 다음날까지 시들지 않는 쪽의 주장대로 하라고 했다. 제자들이 다음날 와 보니 양쪽 꽃 모두 싱싱했다. 그런데 천을 걷고 보니 시신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종교 간 조화와 평화에 대한 나낙의 염원이 담긴 신화적 얘기가 아닐 수 없다.
 
나낙 사후 법통을 이은 구루들이 무슬림으로부터 살해를 당하는 등 핍박을 당하면서 10대까지 이어져왔고, 마지막 구루인 고빈드 싱흐(1675~1708)가 살해된 뒤부터 구루는 사라지고, 성전인 그랜트가 구루를 대신하고 있다.
 
고빈드 싱흐는 시크교의 자기방어를 위해 힌두교의 죽음의 여신인 두르가 숭배를 도입해 ‘싱흐’(사자)라는 군단을 조직하고,  머리칼과 수염을 자르지 말고, 머리빗을 하며, 짧은 바지를 입고, 금속 팔지를 하며, 단검을 몸에 지니도록 했다. 이와 함께 술, 담배, 자극제들은 금하는 대신 육식을 장려했다. 오늘날 시크교인들이 덩치가 커 군인, 경찰, 경비원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데는 이런 육식 장려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시크교인들은 이런 용맹성으로 19세기에 인도 북서부로 자신들의 본거지인 펀잡지역을 통치했다. 영국이 침입했을 때 결사 항전했으나 결국 굴복하고, 전인도에 걸쳐 영국군의 군인과 경찰로 이용됐다.
 
그러나 1947년 영국이 인도에서 물러가고 인도와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으로 양분되면서 시크교는 특권적인 지위를 잃고 다시 갈등 가운데  내몰리는 신세가 됐다.
 
난 시크교인 여행사에서 마날리행 버스표를 구했다. 시내 여행사에선 500루피 달라던 것을 그는 300루피만 달라고 했다. 버스의 질이 낮으려니 했는데 타보니 훌륭한 버스였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이 기사의 자세한 내용은 <인도오지기행>(한겨레출판 펴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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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 한겨레신문 종교전문기자
걷고 읽고 땀흘리고 어우러져 마시며 사랑하고 쓰고 그리며 여행하며 휴심하고 날며…. 저서로 <그리스 인생학교>(문화관광부장관 추천도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누리꾼 투표 인문교양 1위), 숨은 영성가들의 <울림>(한신대, 장신대, 감신대, 서울신대가 권하는 인문교양 100대 필독서). 숨은 선사들의 <은둔>(불교출판문화상과 불서상), 오지암자기행 <하늘이 감춘땅>(불교출판상). 한국출판인회의에서 ‘우리시대 대표작가 300인’에 선정.
이메일 : cho@hani.co.kr       트위터 : hoosimjung       페이스북 : hoosim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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