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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수도자의 사랑, 동성애

양태자 2015. 12. 18
조회수 25583 추천수 0
수도원 일하는 사람들 노려…회유와 협박으로 입막음
스캔들 이후 사라졌다가 10년만에 ‘수도원 개혁’ 동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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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삶의 극치점은 아무래도 ~답게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대입해보자면 학생은 학생답게, 선생은 선생답게, 어른은 어른답게…. 이런 정도가 무너지면 그리 아름답지 못한 향을 뿜어내는 듯하다. 수도자 역시 마찬가지다. 서약 끝에 수도복을 입은 자가 수도자답게 바로 살아갈 때 아름다움의 극치를 풍기리라. 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했던 수도자들의 자취가 법정 문서로 더러 남아있다. 독일의 뭴러 교수는 중세 수도자들을 많이 연구했는데, 그의 많은 연구물 중에서 이들의 동성애를 들여다 보기로 하자.

  초기엔 속죄 길 걷게…페스트 이후 ‘밤의 관청’ 둬 단속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당시(500-1500/1700) 사람들은 동성애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는지 잠시 보자. 세기마다 조금씩 다른 판단을 내렸다. 중세 초창기에는 동성애자들을 죽이지는 않고, 다만 교회 윤리의 잣대로 판단하면서 교회 차원에서 속죄의 길을 걷게 했다. 하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점점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선 엄한 벌, 말하자면 죽음으로 몰아 넣은 사례들이 수두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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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플로렌즈에 페스트가 휩쓸고 난 14세기 중반에는 인구가 12만명에서 4만명으로 줄어들자 이들이 내놓은 정책 중의 하나는 기이하게도 동성애자들을 찾아내어 처벌하는 거였다. 그 이유는 독자들도 짐작 할 것이다. 인구증가 정책 때문이다. 인구 증가에 기여하려면 아무래도 남녀 간의 사랑이 익어야 할 터인데, 이런 동성사랑이 더 설치자 인구 증가 정책에 걸림돌로 보았던 거다. 
 이러자 시는 ‘밤의 관청‘을 따로 만들어 동성애자들을 색출해 냈다고 하는데, 이런 ‘밤의 관청’이 생겼다는 자체가 동성애자들이 만연했다는 뜻이다. 오늘날의 서양에 경찰들이 밤에 동성애자들을 찾아 나선다고 쳐보면 아무래도 불가능할 것이다. 대도시의 개념이 당시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당시의 대도시인 플로렌즈의 인구가 최고 일 때 12만명인 걸 보면 오늘날로 치면 아주 작은 소도시 일 거다. 이런 적은 인구 수였기에 분명 동성애 색출이 또한 가능했을 거다. 
 본론으로 돌아와 그럼 결혼하지 않은 수도자들에게는 동성애를 허락한 것일까? 결코 아니다. 일반 남성들과 똑같다. 독일의 뭴러 교수가 1416년 바젤시의 고문서를 오늘날의 언어로 번역하고 주석을 달았다.

  몸에 착 달라붙는 얇은 옷 입은 빵 굽는 남자에 특히 끌려
 이 안을 들여다보면, 도미니카 수도원 소속인 하인리히(Heinrich von Rheinfeldern)라는 수도자가 동성애 혐의를 받았다. 명망 있는 신학자인 그는 수도자였지만 육적인 갈망의 도가 넘어 수도원에 소속되어 일하는 사람들을 건드렸다. 근데 여자가 아닌 남자들을 사랑했던 거다. 당시는 수도원에 소속된 종(Knecht)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수도원의 허드렛일을 도우면 살던 이들이다. 오늘날로 치면 수도원에서 일했던 직원으로 보면 되겠다. 그의 동성애가 들통나자 이 종들이 법정에 서 진술을 하게 되었고, 그 진술들이 바로 이 바젤시의 아키브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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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수도자이 관계했던 종들의 이름을 보면, 짐수레를 끄는 종인 하인리히(Heinrich Knupe), 빵 굽는 직업인 하이니(Heini Bopplin), 베른하르트(Bernhart Fincke), 베른인(Wernlin Snuerler), 야콥(Jakob von Rheinfeldern)이다. 마지막의 야콥 라인펠더른(Rheinfeldern) 성을 가진 이는 하인리히 사제와 성이 같다고 해서 친척이 아니다는 상세한 기록도 끼어 있다. 
 위의 직업군을 보면 특히 빵 굽는 이들이 유독 많은데 그 이유가 뭘까? 이들이 빵을 구울 때 대개는 옷을 얇게 입는다. 이 수도자은 이런 얇은 옷을 입은 남자들을 보면 묘한 성적인 매력을 느끼고 접근을 하였다고 한다. 이 수도자이 여자도 아닌, 몸에 착 달라붙는 옷을 입은 남자 빵장이들로부터 묘한 성적인 감성을 느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아무튼 이들에게 접근한 그는 이들의 몸을 만지거나, 이상한 짓거리들을 했다 한다. 그에게 당한(?) 빵장이들도 법정에서 상세한 진술을 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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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이 종들을 이렇게 성적으로 엮은 다음엔 이들의 손에 서슴없이 돈을 쥐어 주었다. 좋은 옷을 사 입으라고 말했다지만 사실은 그가 품은 가장 큰 의도는 다른 데 있었다. 그의 이런 비정상적인 행위가 바깥으로 새나가지 않게 철저히 입 단속을 시켜 이 비밀이 영원히 지켜지길 바랐던 거다. 그리 입 단속을 하였건만 그의 행위는 들통나 버렸다. 이렇게 되자 수도원 측에선 이 일의 해결책보다는, 이 빵장이들에게 입을 열지 못하게 협박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바젤시가 이 사건을 들고일어나 이 일을 세세하게 파헤쳤기에 오늘날 서류로 남았던 거다.  
 

 문서에 기록된 6명의 법정 진술들을 다 열거하기엔 지면이 부족하니, 특이한 점만을 옮기기로 한다. 
  아래의 A.1,a,  A.1.b 등은 문서에 붙은 기호이니 그대로 붙인다.

 A.1.a: 종 하이니와 도미니카의 수도자인 하인리히의 첫 만남은 정자에서다. 오랜 기간 동안 도미니카수도원에서 빵 굽는 일을 했던 하니는 이 일이 터진 후 현재는 여자 수녀원에서 빵 굽는 일을 하고 있다. 법정 선서에서 그는 수도자 하인리히가 2년간이나 그를 도미니카수도원 정원으로 불러냈다고 진술했다. 이 장소에서 이 수도자은 두 팔을 그의 목을 감고선 빵장이 하이니의 ‘그것‘을 끄집어 내 보여 달라고 했다. 얼마나 급했던지 수도자은 그것을 끄집어내기도 전에 아직 속옷에 있는 성기를 만졌다고 한다. 
 하이니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수도자의 태도가 너무나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하이니가 수도자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거절이라도 했었다면, 하이니는 그의 고발로 당장에 이단자로 몰릴 것 같았다고 한다.(당시는 이단자로 몰리고 나면 뻔했다. 당장 불에 태워 죽이는 시대였다) 그가 겨우 수도자에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양심에 호소하는 말이었다. ‘많은 학식을 지닌 수도자가 이런 짓을 한다는 게 어울리느냐’고. 하지만 수도자은 그런 것에는 대답도 않고 어느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위협만을 계속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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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1.b: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이 수도자이 정원 쪽으로 나 있는 빵장이의 창문 앞에 서서 빵장이를 밖으로 나오라고 불렀다. 정원으로 나가자 그 수도자은 그에게 물었다. 마지막으로 언제 여자와 잠을 잤느냐고, 그리고 그녀를 사랑했느냐고. 그는 이런 얘기를 하면서 그를 정자 밑으로 이끌었다. 그리곤 그에게 말하길,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느냐고, 나는 너와 아름다운 생을 보내고 싶다고 했다. 빵장이가 이 수도자에게 ‘나에겐 당신이 그리 중요한 존재가 아니다. 나는 당신이 나와 함께 살고 싶다는 그런 말에 관심조차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 수도자은 이 말을 들은 척도 않고 그의 ‘그것’을 꺼내 보였다. 그리고선 그에게 그것을 손으로 잡아 달라고 했다. 그는 동시에 그의 그것도 함께 꺼내서 자기가 볼 수 있게끔 해달라고 청했다. 그날따라 옷을 두텁게 입었다 보니 빵장이의 옷이 찢어지기까지 했다. 빵장이가 ‘당신이 그렇게 성관계를 하고 싶다면, 내가 즉시 여자 하나를 데려다 주겠다’고 분노에 차 크게 소리치자, 수도자 하인리히는 다른 사람이 듣는다고 목소리를 낮추어서 말하라고 명했다. 수도자가 겁내고 떨었던 것은 둘이 있는 것을 누군가가 보게 될까 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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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1.c: 빵장이 하이니가 이 수도자과 헤어져 돌아왔을 때, 니콜라우스(Nikolaus von Landau), 뷔르카르트와 콘라드 형제(Buerkhart und Konrad Wiltper), 페터(Peter Hueller), 니콜라우스(Nikolaus Swertveger), 호하네스(Hohannes von Bern) 그리고 디트리히(Dietrich Mantel) 등이 함께 작은 방에 모여 앉아 수도원 안에서 일하는 이들에 대한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 이야기 중에는 수도원에서 일을 그만둔 사람들의 얘기도 있었는데, 모두 다 하인리히 수도자의 지나친 요구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때 하이니는 이들에게 하인리히 수도자의 추잡스런 일을 털어놔버렸다. 이렇게 한다면 이 수도자은 적어도 수도원 안에서 엄한 벌을 받고 근신할 줄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A.1,d: 이 두 사람이 다시 빵 굽는 곳에서 세 번째 만났다. 하이니가 이들과 헤어져 작업장에 들어왔을 때 급하게 하인리히가 그에게 와서는 애석한 표정을 지은 얼굴로 떨면서 물었다. 그의 비밀스런 만남을 발설했느냐고. 하이느는 ‘그렇다! 다 말했다! 그런 추잡스런 짓의 비밀을 지키는 것보다 발설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 했다’고 말했다.
  
 A.1.e/A.1.f: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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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1.g: 빵 굽는 종과 수도사와의 4번째 만남. 이번은 수도원 곡식 창고에서 만났다. 이 날 하니니는 빵 굽을 때 입는 일상적인 짧은 저고리와 무명 앞치마를 걸치지 않고 밀을 체에 치는 작업 중이었다. 이때 하인리히 수도사가 이 곡식저장고로 왔다. 그는 두 손을 하이니의 목에 감으면서 그가 마치 여자인 것처럼 다루면서 성적인 행위를 시작하려 했다. 이때 하이니는 ‘나를 좀 조용히 내버려 두라. 이런 식으로 자꾸 나오는 좋지 못한 결과가 나올 것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수도자은 그를 계속 애무했다. 그는 땅에 떨어져버린 그의 정액을 발로 밟았다. 이런 행동을 그친 그가 하는 말이란 다름 아닌 다시 한번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엄포였다. 수도원의 수도자들 중에는 평소에 하인리히를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았던 몇몇 동료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이름까지 언급하면서, 특별히 이들의 귀에 이 사실들이 들어가서는 절대 안 된다고 강조 했다.

  A.1.h: 그 외에도 하이니는 위에 언급한 다른 동료인, 지금은 다른 곳에서 일하는 동료 야콥(Jakob von Rheinfeldern)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하인리히 수도자은 이 친구에게도 작은 오두막에 놀러와 하룻밤 자고 가라고 했다. 그렇지만 야콥은 난 여성과 자지 남자인 그와 자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위에 언급했던 것처럼 이 수도자은 다른 다섯 사람과도 동성애관계를 맺었는데 이들의 법정진술도 남아 있다. 지면관계로 여기선 한 사람인 빵장이 하이니만 소개하고 끝내기로 한다. 
 하이니의 이력에 대해서는 더 이상 밝혀진 바가 없다. 하지만 이 하인리히 신부에 대한 이력은 남아 있는데 바젤 출신으로 도미니카 수도원에 들어와서는 한때는 수련자들에게 신학을 가르치기도 했던 그야말로 유식한 사제였다. 그런데 법정진술은 그 반대다. 이렇게 당한 빵장이들의 법정진술만 남아있고, 정작 이 사제의 법정진술은 남아있지 않다. 그 이유는 이 빵장이들은 세속에 속했기에 세속재판에, 하인리히 사제는 수도원에 속했기에 수도원 판정에 따랐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그는 어떤 진술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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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자취는 이런 스캔들이 터진 후 그는 한 10년간 수도원에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10년 후에 다시 나타나 당시에 수도원 개혁에 추종자로 참여했는가 하면, 심지어 1432년 2월 25일 바젤의 종교회의에서 설교까지도 했다. 그는 53살이 된 해인 1433년 죽었다다. 자기 식구 챙기기가 여기서도 드러나는 듯하다. 그는 홀연히 어디론가로 사라졌다가 다시 10년 후에 수도원에 나타났다는 것은, 속죄하면서 어디에선가 근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좀 유감이다. 이 수도자도 함께 법정진술했다면 더 흥미진진한 얘기가 되었을 건데.... 아마도 도미니카수도원의 도서관 같은 곳에 문서로 어디엔가 보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소학교 종교선생이었던 대주교, 뒤늦게 성추행 드러나 직책 박탈
 이런 추한 얘기들이 지금은 가톨릭 안에서 사라져 버렸을까? 아니다. 수백 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가톨릭 수도자들의 이런 성적인 문제는 서구에서 일어나 매스컴의 공백을 메우고 있다. 뭴러 교수가 언급한 다음 내용은 이미 유럽 신문에 대서특필 되었던 내용들이다. 오스트리아에서 한스 헤르만 그로외어(1919-2003)라는 빈의 대주교의 얘기다. 그는 대주교가 되기 전에 남자 소학교(Knabenseminar)에서 종교선생을 역임했다. 이런 소학교는 장차 신부가 되겠다는 뜻을 가진 소년들이 다녔던 학교인데 요즘은 없어진 제도다. 종교선생으로서 늘 경건했던 그는 성지순례도 자주 다녔다. 그의 이런 종교적인 믿음 때문에, 당시의 교황은 그를 미래의 성인으로 점찍고 있었을 정도였다고 뭴러 교수는 밝혔다. 그 덕택에 후에 그가 대주교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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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많은 세월이 흐른 후 저명한 비판가인 우도 피셔라는 사람이 이 신부를 고발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학교에 다녔던 한 학생이 당시에 당했던 성추행 때문에 정신적으로 늘 끙끙거리면서 살다가, 성인이 되고 나서야 당시에 당했던 성적 희롱을 마침내 폭로했다. 당시 그 학생의 발언에 의하면, 신부는 이 학생의 청결검진을 한다는 구실로 샤워할 때 들어와서 성적인 희롱을 했는가 하면, 때론 소년의 방까지 들어와 침대에 누워서 강제로 혀로 하는 키스(Zungenkuesse)까지 했다. 이런 내용이 신문에 나자 말자 당시의 동기 학생들도 연락을 취해 왔다. 이들 역시 당시 이 신부에게 성추행 당했지만 말을 못하고 다들 가슴 속에 넣어두고만 살았던 터였다. 이 성추행을 발설한 용감한 옛 동료의 덕으로, 다른 동료들의 당시 성추행 사건도 물 위로 함께 올라올 수 있었던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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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의 이 신부의 나이는 60이 조금 넘었다 한다. 이렇게 되자 그는 대주교직은 물론 모든 직책을 박탈당했다. 그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말년에 한 수도원에서 정착해 살다 2003년에 죽었다. 뭴러 교수의 언급에 의하면 미국에서도 이런 유사한 일이 일어났는데, 미국에서는 어마어마한 돈인 10밀리오넨~100밀리오넨의 달러를 성희롱당한 사람들에게 지급했다고 한다. 고액의 달러인지라 우리 돈으로 금방 계산이 안 된다. 어쨌든 이런 추잡스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당시에도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들려주는 메시지가 큰 듯하다. 특히 종교라는 이름을 건 단체에서 일어날 때는 더더욱 큰 비극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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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태자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비교종교학과 비교문화학으로 석사, 예나 대학교에서 비교종교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천국과 지옥』 (독일인 교수들과의 공저), 『서구 기독교의 믿음체계와 전통 반투 아프리카에 나타난 종교 관계성 연구』, 『한국 기독교에 나타난 샤머니즘적인 요소들』 등의 연구 저서가 있다. 『중세의 잔혹사 마녀사냥』(2015년, 이랑), 『중세의 뒷골목 풍경』(2011년, 이랑), 『중세의 뒷골목 사랑』(2012년), 영성 번역서 『파도가 바다다』(2013년)를 출간했으며, 전문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글을 대중매체에 쓰고 있다.
이메일 : hanispecia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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