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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았거나 퀴퀴해도… 냄새에 밴 그리움

이승연 2018. 06. 01
조회수 3009 추천수 0
어머니께서 처음 독일에 다녀가실 때, 저는 입으시던 잠옷을 두고 가시라 했어요. 엄마의 냄새를 맡으며 자고 싶었답니다. 엄마의 잠옷에 얼굴을 묻으면, 서른이 넘은 딸이 어릴 적 엄마의 무릎을 베고 잠들었던 그 아늑한 느낌으로 잠들 수 있었답니다.

딸애가 어렸을 때, 그야말로 자나 깨나 늘 함께 있는 한 ‘롱동’이란 이름의 곰인형이 있었지요. 마로 된 천으로 롱동의 원피스를 지을 때 아이는 신기해했지요. 밥 먹을 때도 같이, 잘 때도 곁에 끼고, 유치원에도 한국에도 데리고 가니, 롱동이의 털은 점점 눌려가고, 옷은 점점 해져서 찢어지기 직전이었지요. 그런데 어느 해 한국을 다녀올 때 그만 롱동이를 외할머니댁에 두고 나왔습니다. 공항 가는 차 안에서 뒤늦게 알아차린 아이는 엉엉 울었고, 손녀에게 롱동이가 얼마나 중요한 친구인지 알았던 외할머니는 우편으로 보내주셨지요. 기다리고 기다리던 롱동이가 왔는데, 글쎄 어머니가 롱동이 옷이 너무 더럽고 낡아서 버리고, 모직으로 새 옷을 지어 입혀 보냈지 뭐예요. 딸아이는 자기 냄새가 밴 낡은 원피스의 롱동이가 아니니 서럽게 울었습니다.

청국장 냄새와 얽힌 일이 있습니다. 미술대학을 다닐 때 기숙사에서 나오려고 집을 구하는데, 동포분에게서 학교에서 가깝고 싼 집이 하나 있다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집주인은 다시는 어떤 외국인에게도 세를 주지 않겠다고 하네요. 알고 보니 전의 세입자는 실직 뒤 혼자 사는 연세가 꽤 된 한국 남자분이었고, 부엌이 달린 방 한칸의 그 작은 아파트는 청국장 냄새로 찌들어 있었습니다. 이웃들의 불평이 심했고, 그분이 나간 뒤 냄새 때문에 아무도 들어오겠다는 사람이 없어 몇달째 비어 있었어요. 
soybean-1483809_960_720.jpg » 청국장. 사진 픽사베이.
주인에게 그 냄새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겠는데, 나는 그 음식을 만들 줄 모를 뿐 아니라 먹어본 적도 없다(이건 정말입니다), 벽지를 다 뜯어내고 수리해서 살 테니 비워놓고 있을 바에야 내게 달라고 사정했습니다. 제가 미더워 보였는지 결국 주인은 동의했고, 저는 약속대로 집수리를 하고 들어가 살았지요. 퀴퀴한 냄새가 들어박힌 벽지를 뜯어내며, 이역만리에서 실직까지 하고 괴로움과 외로움을 청국장에 담아 살며 이웃의 눈칫밥까지 먹어야 했던, 얼굴도 모르는 그 한국분 생각에 무척 마음이 아팠습니다.

쓴 약을 먹을 때 코를 막고 먹으면 덜 쓰게 느껴집니다. 그만큼 냄새는 우리 정신과 밀착되어 있다는 거지요. 너무 깊은 우울증에 빠져 있거나, 정신이 가닥가닥 쪼개져 있어 생각과 현실이 구별되지 않을 때, 냄새를 맡지 못하지요. 커피 향과 밥 냄새 등 냄새를 맡는다는 건 몸과 마음이 살아 있다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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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연
어머니는 압록강가에서, 아버지는 동해바닷가 흥남에서, 이승연은 한강가에서 자랐다. 서울에서 공업디자인과 도예를 전공하고 북독일 엘베강 하구의 항구도시 함부르크에서 회화를 전공한 후 30여년 간 작가로 활동하다 2011년부터 심리치유사로 일한다. 독일인과 혼인해 성년이 된 딸이 하나 있다.
이메일 : myojilee@t-online.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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