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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가르침을 다시 들으니

신상환 2018.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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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향만리(法香萬里)를 생각한다

- 삼동 린포체 서울 법문 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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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2월 18일 화요일, 서울 법련사에서 삼동 린뽀체 서울 법회가 열렸다. 이 법회를 후원한 자비선사의 지운 스님께서는 지난번 티벳 고승을 모시고 대론(對論)했던 ‘중론, 그 지혜를 논하다’의 두 번째로 이번 일을 기획하고 계셨다. 그러나 ‘스승의 스승’인 삼동 린포체와 대론이란 상상할 수도 없는 일, 그저 귀한 말씀을 들어보는 자리가 나을 듯해서 ‘밀교와 공사상’이라고, 어찌 되었든 티벳 불교에서 강조하는 공사상에 대해서 들어볼 기회를 마련하게 되었다.
 
 “제 이야기는 다음에도 들을 수 있으나 경주에서 열리는 삼동 린포체의 법문은 다시 접하기 어려운 일이니 그쪽으로 가시라!”
 
 1년을 계획표대로 움직이는 중관학당의 겨울캠프 일정과 겹쳐 경주에서 직접 배울 기회를 놓친 대신에 지운스님과 나란다 불교학술원 원장인 박은정 선생의 공덕으로 서울에서도 귀한 말씀을 들을 자리를 열게 되었다.
 
 삼동 린포체, 각기 다른 넓이와 깊이로 다가올 분이시지만 ‘나에게는 이렇게 들린 것(이다)’는 ‘에밤 마야 스루땀(evam maya srutam)’, 한역의 ‘여시아문(如是我聞)’을 흉내 내면, 반세기 동안 사부님의 친구이신지라 마음 한 쪽을 아리게 하는 분으로 다가온다. 녹야원으로 유명한 사르나스의 티벳 고등 연구소(CIHTS, Central Institute of Higher Tibetan Studies)의 부총장(인도의 대학 총장은 수상이 겸직한다)으로 재직하던 시절, 무수한 제자들을 배출하셔서 당신에게는 그저 그런 1/N로, 기억 너머의 1인이겠으나 사부님 인연 덕분에 20여 년 전부터 뵐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사르나스 출신의 선생들은 모두 당신의 제자들이니 샨띠의 인도-티벳학과의 사르나스 출신 동료 선생들은 모두 당신의 제자들, 당신의 ‘전설’에 대해서는 인이 박히게 많이 들었다. 떠나온 곳을 생각하게 만드는 분이시라 법문만 듣고 ‘스르르’ 사라질 생각이었는데 법련사 대법당으로 올라오는 계단에서 지운 스님과 동행하는 삼동 린포체와 마주쳤다.
 
 “게라, 로 니쑤 뇌라 나 샨띠니께따니 케랑 텔빠인. (선생님, 20년 전에 샨띠에서 뵈었습니다)”
 “로 니쑤 뇌라! (20년 전이라)”

 

삼동린초체1-.JPG
 
 스치기만 해도 느끼게 되는 ‘너희들 공부 안 하냐!’는 얼음짱 같은 냉기, ‘존재 자체로 쫄게’ 만드는 분이셨는데 당신의 손을 맞잡는 순간 느껴지는 기력이 쇄한 노친네의 기운,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노사(老死)를 통한, 그 육체적인 쇄함을 통해서도 다가오는 ‘항상한 것은 없다’는 그 깊은 여운을 뒤로 하고 시작한 법문은 ‘당신’다우셨다. 그나마 달라이 라마 존자님께서 강조하시는 불교를 먼저 받아들인 한국이 상가의 전통에 따르자면 사형에 해당한다는 것이 당신께서 하실 수 있는 유머라면 유머?
 
 청한 법문의 주제가 ‘밀교와 공사상’인지라 밀교 입문, 즉 관정(灌頂)을 받지 않은 이들이 들어도 되는 이야기만 하시겠다고.
 
 “전해진 것만 말해라!”
 
 인도로 망명 올 때 몸에 지니고 오셨다는 샨띠 데바의 ‘입보리행론’이 전해진 배경이 떠올랐다. 나란다 대학에서 ‘두쎄 쑴바’, ‘먹고 자고 싸는 것만 아는’ 삼식이, 즉 바보가 헛소리를 할까봐, 다른 도반들이 자신들이 모르는 이야기를 할까봐 전승된 것만 청한 덕에 샨띠 데바는 앞으로 올 법을 설할 기회를,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배울 기회를 놓쳤다. 청한 자들이 그것을 청했기 때문에. ‘당신에게 다른 주제의 말씀을 청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이 두루 존재하는, 편재(遍在)하는 법이다. 대중 법문의 주제로 ‘고수는 터칭이 다르다’는 것만 확인하면 충분할 수도 있었겠으나 ‘언제 다시 당신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있을까?’를 생각하니 청법의 수준을 깊게 생각하지 못한 것이 깊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티베트 고승의 법문을 들을 때 크게 가닥을 잡아야 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그가 어느 종파에 속한 가르침인지부터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현밀쌍수를 강조한다지만 닝마빠나 까귀빠는 밀교에 강조의 방점을, 그리고 샤카파나 게룩파는 현교의 전통에 강조의 방점을 찍는다. 쌍수(雙修), 즉 함께 닦는다지만 말이다.
 티베트 망명 정부의 총리를 역임하셨으나 삼동 린포체는 기본적으로 게룩파의 교학체계를 따르신다. 이것은 당신 말씀이 게룩빠의 전통에 따른 것으로, 격렬한 종파 투쟁의 시기에 승리하여 티베트인의 90%를 차지하는 절대적인 가르침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는 말이다.
 
 간략하게 현밀쌍수의 전통을 정리하자면 현교는 바라밀다승(波羅密多乘), 즉 지혜를 강조하는 점수적인, 그리고 밀승(密乘)은 이것을 축약, 압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어떤 종파가 되었든 티베트 불교에서는 보리심과 공성의 지혜를 강조하는데 게룩파에서는 현교의 바탕이 되어 있지 않는 경우, 아예 입문의 벽마저 높이 쌓아둔다. 즉, 보리도(菩提道), 그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보리심과 공성의 지혜로 나누는 데는 차이가 없지만 게룩파에서는 밀교 수행의 경우, 그 ‘축약과 압축’에 강조의 방점을 찍어두고 있는 셈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중생 구제’라는 서원을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하늘’이라는 도솔천에서 세워 삼아승겁 동안 복덕과 지혜의 공덕을 쌓아 금생에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불교 신화의 바탕이다. 밀교는 삼아승겁이라는 긴 세월 동안 중생이 당할 고통에 대한 강한 연민심으로 금생에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원력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만큼 강한 연민심이 바탕이 되어 있어야만 가능한 길, ‘중생 구제’라는 대승의 ‘더불어 함께’ 하고자 하는 길에서 그 원력의 크기와 근기가 현교와 밀교를 가르는 경계선인 것이다.
 

 티베트불교를 이루는 기본적인 틀인 ‘공덕=복덕+지혜’에서 강조되어야 마땅한 지혜는 번뇌장과 소지장의 소멸을, 즉 한역 전통의 아공법공을 적용할 경우, 명확하게 그 그림이 그려진다. 달라이 라마 존자님께서 강조하시는 ‘공성의 지혜’란 일상을 관통하는 지혜로운 삶, 항상 깨어 있는 그 삶을 뜻할 뿐, 그다지 특별한 가르침도 아니다. 그렇게 살지 못해서 문제지.
 
 2시간 동안 당신의 법문이야 본존불 수행, 죽음 그 이후까지도 수행의 영역을 확장하는 ‘바르도(Bar do)’ 수행, 법신을 위주로 한 삼신불 수행, 부처님의 32상 80종호를 그 대상으로 삼는 것 등, ‘과(果)로 인(因)을 삼는’ 수행법 등에 관한 것들이었다. 청법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시간이 지나자 모인 분들과의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다.
 
 ‘보리심과 공성의 지혜, 즉 바른 견해가 없는 수행은 사견(邪見)일 뿐이다.’
 
 순간, 한국의 티벳 불교에 대한 경향성, 기복과 밀교에 대한 경향성 생각나고, 티벳에서 유일무이하게 ‘판디타(현자)’라는 칭호가 붙은’ 샤카 판디타가 언급한 ‘짐승의 수행법’이 떠올랐다.
 
 ‘명상하면 듣고 (배울) 필요가 없다’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심지心地가 좁은 말이다.
 듣고 (배움이) 없는 명상이란 다만
 애써 (노력)해도 짐승의 수행법이다.
 -졸역, 『티벳 현자의 말씀』,  441. [9-43]번 게송.
 
 ‘사견’이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해 주시니 청법을 제대로 한 것 같기도 하지만 ‘공성의 지혜’라는 게 널리 알려지기에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경주에서 이곳 서울까지 올 때 매우 빠른 열차를 타고 왔습니다. ...”
 
 당신께서는 자비심과 공성의 지혜에 대해서 강조하시면서 현교에서 배우는 여러 교학적 바탕을 ‘중생 구제의 발원’만큼 빠르게 배워야만 밀교의 입문이 가능하지, 그것을 빼놓고는 결코 밀교를 수행할 수 없다고 반복 또 반복하셨다.
 한국 스님들에 대한 존경을 내려놓은 한국의 불자들은 그 대체제로 티베트 스님들을 찾는다. 즉 ‘Made in Korea’ 대신에 ‘Made in Tibet’를 찾는 셈이다. ‘공급자’가 백만 가지 상품을 팔 때 ‘수요자’는 오직 하나 상품, 즉 복만 바란다. 불자들이 ‘공성의 지혜’를 배울 자세를 갖추지 않으면 달라이 라마 존자님의 가르침, 공성의 지혜는 그저 그림 속의 떡일 뿐이다. 
 
 ‘스승의 가르침에 대한 존경이 좀 더 빨리 성취를 이루게 도와줍니다.’
 
 그 가르침에 따라 살려 하지 않고 그 스승을 경배할 뿐이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경주 법문 준비하기에도 바빴던 박은정 선생은 서울 법회의 통역을 준비하느라 얼굴에 주름 하나가 더 늘었다. 그 덕분에 무념무상에 대한 대중의 질문을 제대로 옮겼나 약간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삼동 린포체의 답은 간단했다. 마음은 언제나 분별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무념무상을 지법(止法), 즉 사마타의 경지라고 옮기고 청법을 했으면 어땠을까?’
 
 그럼 뒤따라 나오는 관법(觀法), 즉 위파사나까지 나가기 위한 전제 조건이라고 강조하시지 않았을까 싶어 드는 생각이다. 자신의 말씀이 아닌 용수나 미륵, 즉 인도의 전통에 따른 말씀과 그에 대한 해석이라는 ‘나란다 전통’에 그 근거를 둔, 성현의 말씀을 그 근거로 삼는 성언량(聖言量)에 따라 해석하셨는데, 한국에서 강조되는 이 ‘무념무상’이 ‘마음’에 관한 문제가 아닌 수행의 방법임을, 통역의 차이에서 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것도 그리 나쁜 게 아니기에.
 
 만약 삼동 린포체에게 남선생에게 ‘형’을 뜻하는 ‘무슨 무슨 다(da)’라고, 여선생에게는 ‘누나’를 뜻하는 ‘무슨 무슨 디(di)’라고 부르는 샨티니께탄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뵈었더라면, 느리고 빠를 차이가 있을 지언정 ‘보리심과 공성의 지혜’라는 그 지나는 길이 같음을  KTX에 대한 비유로 말씀하실 때 일단 한번 틀어보고 답을 기다렸을 것이다.
 
 ‘비행기를 타고 오는 방법도 있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티베트 불교에 빠져있는 ‘팔불중도 연기사상을 곧 공’으로 정리한 우리의 중관사상에 대한 전통을, 희론(戱論)의 타파를 강조하는 전통, 선종의 전통에 말씀드릴 기회조차 없었다. 다음에 뵐 기회도 없을 터인데.
 
 큰 스승의 가르침, 그 법향(法香)에 젖어 있는 사이 청전 스님께서 이메일을 보내오셨다. ‘스님께서 이야기 안 하셨다고 해서 제가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곧장 답장을 드렸다. ‘동종업종의 종사자’인 지운 스님에게 귀국 인사를 드린 것에 대해 이미 들었던 바라 언제 즈음 주변 정리 마치고 연락하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딱 열흘’ 후에 연락을 해오셨다. 전화를 드렸더니 ‘아직도 컨테이너에 사냐?’고 걱정부터 ...
 
 ‘청전 스님은 어떤 법상(法床)에 앉으실까?’
 
 ‘내 밥상 차리기도 귀찮다.’고 하실 게 눈에 선하다. 사부님과 은사 스님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입었으나 고작 여기까지 오지 못함을, 아직도 옮겨야할 저 무수한 말씀들을 생각해 본다. 법향만리(法香萬里), 정법의 그 향기 천하에 두루 퍼지길 바라며, 큰 스승님들이 좀 더 이 세간에 머물러 주시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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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환
1993년 이후 파미르 고원을 넘나들며 인도, 네팔, 티베트 등을 방랑하고 인도 ‘평화의 땅’ 샨티니케탄에서 석·박사 학위를 마쳤다. 한국인으로 최초로 타고르 대학으로 알려진 비스바 바라띠의 인도-티베트학과에서 조교수로 재직하며 티베트 스님 등에게 불교 철학, 중관사상을 가르쳤다. 귀국 후 ‘공성의 배움터 중관학당’을 열어 중관사상에 대한 역경과 집필, 대중 강좌를 하고 있다.
이메일 : patiensk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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