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서로 마음을 열어 고민과 아픔을 나누고 치유하며 행복을 모아내는 게시판입니다.



돌목의 목회

――――― 

영혼의 고향을 찾아가는 중년의 야곱 




출처 : 기독교사상 8월호 http://clsk.org/gisang/



 

cover_644_s.jpg민간신앙이 남아 있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는 영혼 상실병이 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영혼 상실병에 걸린 것 같다고 여겨지면 사람들은 그 사람을 마을의 추장이나 어른에게로 데리고 간다. 그리고 그 사람의 병을 진단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고 한다.


당신은 언제부터 춤추기를 중단했는가? 

당신은 언제부터 노래 부르기를 중단했는가?

당신은 언제부터 홀로 있는 시간이 두려운가?

당신은 언제부터 사는 것이 시시하다는 생각이 들었는가? 


삶에는 두근거림이 있어야 한다. 비록 현실은 거칠고 힘들지라도 기대와 설렘이 있어야 한다. 신앙은 사람들로 하여금 노래하고 춤추게 만들고 삶을 신나게 해준다. 신앙은 삶에 진한 감동을 주고 삶을 두근거리게 하고 영혼을 떨리게 만든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사람들은 더 이상 춤추지 않고 노래도 부르지 않게 되었다. 홀로 있는 시간이 힘들어지고 삶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식은 채로 일상이 반복된다. 신앙도 더 이상 감동을 주지 못하고 힘이 되어주지 못한다. 사람들은 지치고 망가지고 메마른 모습이다. 존재는 오랫동안 집을 떠나 멀리 외지에 있고 영혼은 머물 곳이 없어 헤매는 모습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 중년이 되면 자기의 존재와 영혼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생각하게 되고 존재와 영혼의 소리를 듣기 시작한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소리의 요구에 응답하면 중년기의 삶은 풍성해지지만 그것을 무시하면 삶은 빈약해지고 초라해진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야곱

인생 여정의 중간 지점을 통과한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는 언제나 진하다. “어찌하다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겨우 올라 왔는데 떨어질 것 같아 늘 불안합니다.” “이제 한번 제대로 살아 보려고 마음먹었는데 암이라네요.” “홀로 있고 싶어서 막상 홀로 있어 보니 일하는 것보다 더 힘드네요.” “가족은 함께 같은 길을 가는 줄 알았는데 남편이 가는 길과 자식들이 가는 길이 각각 다르고, 내가 가는 길도 다른 것 같네요.” “다시 한 번 살 수 있다면 정말 잘 살 것 같아요.” “시간의 힘이 강력한 것 같아요. 나를 여기까지 밀어 냈네요. 시간이 어느 날 ‘너는 여기까지’라고 말할 날이 금방이라도 올 것 같아 두려워져요.” “중년이 되니 슬픔과 외로움이 제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 같아요.” “삶이 생각보다 시시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가끔 어릴 적부터 믿어온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일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말들은 표현은 다르지만 모두 인생의 후반부를 어떻게 살까에 대한 걱정들이다. 

중년기를 맞이하면 삶의 주제와 내용이 달라진다. 고민과 걱정도 달라진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인생의 전반부는 생의 에너지가 밖으로 분출하는 때라고 한다. 그래서 전반부에는 무엇을 만들고 소유함으로 자신을 확장하고자 한다. 그러나 후반부에 이르면 에너지가 안으로 향하게 된다고 한다. 자신을 바라보게 되고 ‘이게 정말 의미 있는 삶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전반부에 하던 대로 무엇을 계획하고 성취하다보면 내면 깊은 곳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온다. “이게 다인가? 이게 전부일까? 또 달려가야 하나? 계속 올라가야 하나?” 전반부가 외형의 집을 짓는 때라면 후반부는 내면의 집을 짓는 때이다. 즉 후반부는 존재의 집, 자아의 집, 영혼의 집을 짓는 때이다. 전반부가 외부의 소리에 다이얼을 맞추는 때라면 후반부는 내부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하늘의 소리에 조율하는 때이다. 후반부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하거나 소유를 확장하는 때가 아니라 존재를 보살펴야 하는 때이다. 행위로 망가진 존재를 치료하는 때이다. 전반부가 성공과 성취를 추구하는 시기였다면 후반부는 의미와 보람을 추구하는 시기이다. 전반부에는 좋고 필요한 것이 자신의 외부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후반부에는 그것이 자신 안에 그리고 하늘에 있다는 것을 안다. 

중년기는 삶의 소중한 것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하는 때이다.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자녀들은 각자 갈 길을 찾아 집을 떠나가고, 가까웠던 사람들과도 멀어진다. 꿈은 작아지거나 상실되고 건강도 예전 같지 않게 된다. 중년기는 떠나가는 사람들에게 잘 가라고 손 흔들어 주고 가슴으로 우는 때이다. 중년기가 되면 삶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남겨질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내가 죽은 후에도 남겨질 무언가를 위해 헌신하게 된다. 유대인들에게는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자식을 낳아 키우는 것, 나무를 심고 가꾸는 것, 그리고 책을 쓰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은 비록 세상을 떠나지만 자신의 모습이 다른 형태로라도 세상에 남아 있기를 바라는 소원의 표현이다. 

중년기는 신앙여정에서도 중요한 시기이다. 중년기 이후는 존재와 영혼을 돌보며 하나님 앞에 설 때를 준비하는 때이다. 이제까지는 소유와 행위를 위해 기도했다. 많이 갖게 해달라고 잘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중년기에 이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존재와 영혼을 위해 기도하게 된다. 허물과 죄 많은 영혼을 용서해 주시고 받아 달라고 기도한다. 

중년기는 고향을 찾아가는 때이다. 젊은 시절에는 욕망과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부모와 집, 고향을 떠나지만 중년기 이후에는 존재가 머물 집을 찾아 가고 영혼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젊은 시절에 고향을 떠나 온 야곱은 타향에서 땀 흘리며 열심히 살았다. 고향의 형에게 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재산을 모았다. 고향이 그립고 부모님이 보고 싶을 때는 더욱 바쁘게 일했다. 그는 결혼했고 많은 자녀들을 두었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의 재산도 모았다. 그는 꿈을 이뤘고 성공하고 출세했다. 어느새 야곱은 중년기를 맞이했다. 인생의 반이 훌쩍 지나간 어느 해 가을에 야곱은 고향이 어느 때 보다 그리웠고 부모님이 보고 싶고 형이 궁금했다. 그는 그의 인생의 가을을 고향에서 지내고 싶어졌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이듬해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오기 전 그는 전 재산을 챙겨 식구들과 함께 고향으로 떠났다. 20여 년 전 빈손으로 고향을 떠났던 그는 이젠 수백 수천의 양떼와 소떼, 수 백 명의 종들, 그리고 아내들과 열한 명의 자녀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무리를 지어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야곱이 돌아가는 고향은 그가 떠나왔던 물리적인 장소만은 아니다. 야곱은 그의 존재와 영혼의 고향을 찾아 떠나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야곱 일행이 얍복강가에 이르렀다. 이제 저 강만 건너면 20년 만에 돌아오는 고향인 것이다.


소유와 존재의 분리

야곱은 고향에서 그의 인생의 후반부를 시작하기 위해 강을 건너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선뜻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는다. 빨리 강을 건너 고향으로 가려고 하는데 왠지 기쁘고 신나지가 않다. 누군가가 자기를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그리워하던 곳인데,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곳인데, 이제 저 강만 건너면 되는데, 야곱은 강 건너기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는 그 순간 자신의 영혼이 떨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존재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이 밀려왔다. 도저히 그는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소유를 먼저 강 건너로 보냈다. 가축 떼와 종들, 아내들과 자녀들을 모두 강 건너로 보냈다. 그리고 그만 강 이편에 홀로 남았다.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처음으로 존재와 소유를 분리했다. 이제까지 그는 사람들이 당신은 누구냐고 물으면 양이 몇 마리, 소가 몇 마리, 종들이 몇 명이 있는 사람이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는 자기의 소유로 자신의 존재를 설명했었다. 그의 소유가 곧 그의 존재였다. 그러나 그가 소유와 존재를 분리시키고 강 이편에 홀로 남게 되었을 때, 비로소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가 온전히 보였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와 마주했다. 그의 존재가 강물에 비쳐졌다. 그 순간 그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강물에 비쳐진 자기의 모습은 20여 년 전의 그 모습이 아니었다. 그것은 망가지고 상처 입은 모습이었다. 당당하고 성공하고 잘난 모습이 아니라 일그러진 모습이었다. 

야곱은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성공한 사람이다. 그러나 성공했다고 여겨지게 만드는 그의 소유물들을 강 저편으로 보낸 다음 자기의 모습을 보았을 때, 그의 모습은 축복받지 못한 모습이었다. 강물에 비쳐진 모습은 은총 없이 아등바등 사느라고 황폐된 모습, 상처 입은 모습이었다. 그것은 부모님과 고향을 떠나 힘들고 어려울 때 한 마디의 위로도 받지 못하고 외롭게 살아 온 모습이었다. 그는 자기의 존재가 얼마나 망가져 있는지 그리고 자기의 영혼이 얼마나 병들어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삶을 평가하는 척도에는 수평적 차원과 수직적 차원의 척도가 있다. 수평적 차원의 척도는 성공과 실패 혹은 행복과 불행이고, 수직적 차원의 척도는 축복과 저주이다. 이 수평적 차원과 수직적 차원의 척도를 열십자로 놓고 보면 삶을 네 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그것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행복하고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축복받은 삶, 세상에서는 성공하고 행복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축복받지 못한 삶, 세상에서는 실패하고 불행한 것 같지만 하나님 앞에서 보면 축복받은 삶, 그리고 세상에서 실패하고 불행하고 하나님 앞에서 볼 때도 축복받지 못한 삶이다. 야곱의 삶은 세상에서는 성공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축복받지 못한 삶과 같았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 축복받지 못한 영혼이라고 생각되었을 때 그의 가슴은 저려 왔고 그의 눈에는 굵은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20여 년 전 고향을 떠나 갈 때 거친 벌판에서 자면서 하늘 영광을 보았다. 그는 그 영광, 그 감동, 그 황홀함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황폐한 모습이다. 그는 강가에 홀로 남은 채로 울기 시작했다. 강변에 뒹굴면서 온 몸을 떨면서 한없이 울었다. 외로움, 슬픔, 아픔, 부끄러움, 죄송함, 그런 모든 것들이 뒤범벅이 된 채로 울고 또 울었다. 야곱은 또한 자신의 영혼의 모습을 보았다. 아직도 성장하지 못한 모습, 상처 입은 모습. 외로운 모습이었다. 야곱은 그런 자신의 영혼이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존재를 위한 은총

야곱은 하나님에게 축복해 달라고 간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많은 것을 얻었는데 또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야곱이 구했던 복은 물질적인 것이나 보이는 것이 아니다. 자기도 은총 받은 존재, 축복 받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간구이다. 하나님께 축복해 달라는 간구는 망가진 존재, 축복받지 못한 영혼에 은총을 내려 달라는 간구이다. 소유에 소유를 더해 달라는 간구가 아니다. 축복은 존재와 관련된 것이지 소유와 관련된 것이 아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께 간구한 축복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용서, 용납, 치유, 인도였을 것이다. 이것은 존재에 필요한 은총이다.

첫째로 야곱이 축복해 달라는 내용은 ‘용서’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먼저 용서받고 싶었다. 그는 하나님에게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라고 간구했을 것이다. 그는 성공한 사람이다. 성공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땀 흘려 일한 것에 대한 대가이며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는 성공하고 출세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를 속였고 형의 것을 빼앗았고 외삼촌의 가축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들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의 삶은 욕망을 따라 살아온 삶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하늘 영광을 보고 하늘 소리를 들은 사람으로 살아오지 않았다. 그는 강가에 홀로 남아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에게 용서 구하고 있다. 야곱은 자신이 잘못된 행위에 대해 용서받고 싶었다. 더 나아가서 그는 용서받은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는 죄의 용서와 함께 죄인인 자신이 용서 받고 싶었다. 

둘째로 야곱이 축복해 달라는 간구는 ‘용납’이라고 볼 수 있다. 용서는 행위에 관계된 것이고 용납은 존재에 관계된 것이다. 잘못한 행동, 잘못 살아온 삶을 용서받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험난한 삶의 여정에서 야곱의 존재는 망가졌고 영혼은 상처를 입었다. 망가진 존재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치료된다. 그는 20년 전 광야에서 아무 것도 없던 그 시절에 만났던 벧엘의 하나님이 보고 싶었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 가난한 존재에 비춰주시던 그 은총의 빛을 다시 받고 싶었다.

셋째로 야곱이 축복해 달라는 간구에는 ‘치유’가 포함되어 있다. 거친 삶을 살다 보면 몸과 마음이 망가진다. 영혼도 상처를 입는다. 강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망가진 모습이었다. 지치고 황폐해진 모습이었다. 그의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에는 흠 뿐이었다. 그는 하나님께 온전케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다.

끝으로 야곱이 축복해 달라는 간구의 내용에는 ‘인도’가 포함되어 있다. 이제까지 그는 자기 맘대로 살아왔다. 그 결과는 망가진 영혼, 축복받지 못한 삶이었다. 그는 “하나님, 이제 당신이 나를 인도하소서”라고 간구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다”보다 “하나님이시여, 나를 다스리소서”가 그의 바뀐 이름, 이스라엘이라는 말의 뜻에 더 가깝다. 

하나님은 인간이 드리는 간구에 응답해 주신다. 특히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위해 드리는 기도에 더욱 응답해 주신다.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분이시다. 한 영혼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할 때 하나님은 무조건 용서해 주신다. 하나님은 망가진 존재를 있는 그대로 용납해 주시는 분이시다.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꾸짖지 아니하시고 상처 입은 영혼을 어루만져 주시면서 용납해 주신다. 하나님은 갈 길을 인도해 달라는 간구를 들어 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사람들의 길을 인도해 주신다. 용서와 용납을 통하여 상처 입은 영혼이 치유된다. 용서는 잘못된 행동을, 용납은 잘못된 존재를 치료해 준다. 치유 받은 영혼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살 수 있다. 

용서받고 용납 받고 치유 받은 야곱은 다음 날 아침 햇살을 맞으면서 강을 건넌다. 야곱은 절룩거리면서 강을 건너간다. 용서받은 자로 강을 건너간다. 용납 받은 자로, 다시 인정받은 자로, 다시 축복받은 자가 되어 강을 건너간다. 영혼 없는 그의 얼굴은 이제 영혼이 깃든 모습으로 되었다. 그는 삶의 거룩함을 다시 찾았다. 그는 삶은 경쟁하고 투쟁하고 빼앗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삶은 숭고하고 거룩하며 신비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존재는 노력이 아니라 하늘 은총으로 빛난다는 것도 알았다. 

축복받은 야곱에게 삶이 다르게 보였다. 강물이 아름답게 보였다. 떠오르는 태양이 너무 신비로웠다. 그는 이미 강을 건너간 가족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 자기를 도와주던 종들도 보고 싶었다. 소떼 양떼들을 끌어안고 뒹굴고 싶었다. 아직도 두려움이 많지만 형이 보고 싶었다. 형에게 혼도 나고 야단도 맞고 싶었다. 형을 만나면 어떻게 대할까 하는 걱정은 사라지고 달려들어 목을 껴안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고 싶었다. 빨리 부모님께 달려가 품에 안기고 싶었다. 

20년 전 고향을 떠나올 때 거친 벌판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곳을 벧엘(하나님의 전)이라고 불렀던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을 다시 만나고 그곳을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라고 불렀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 야곱이 강을 건너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제 그에게 고향은 떠나왔던 곳이 아니라 영혼을 위한 고향이다. 그곳은 그가 영원한 고향인 하늘나라를 향해 출발할 때까지 잠시 머무르는 곳이 될 것이다. 

중년기를 맞이한 사람들은 다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아야 한다. 젊은 시절 타향으로 가다 거친 벌판에서 하룻밤을 지낼 때 찾아 오셨던 하나님을 다시 만나야 한다. 영혼의 고향을 찾아 가다 머무는 강가에서 하나님을 다시 만나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인 용서, 용납, 치유, 인도를 받아야 한다. 이 축복을 받아야 영혼의 고향을 찾아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의 전반부처럼 타향에서의 삶이 계속된다. 그렇게 되면 몸은 쇠퇴하고 마음은 메마르고 영혼은 피폐해진다. 여전히 소유형태의 삶을 추구한다. 나이가 더 들기 전에 축복받은 존재가 되어야한다. 


야곱과 씨름해준 천사

야곱이 이스라엘로 거듭날 때 긴 밤을 함께 씨름해준 천사가 있었다. 천사와 야곱이 씨름했다기보다는 자기 자신과 씨름하는 야곱 곁에 천사가 함께 있어주었다고 볼 수 있다. 목회자의 이미지는 다양하다. 목회자의 가장 전통적 이미지는 선한 목자이다. 목회자는 평상시에는 양들을 푸른 초장과 맑은 물가로 인도해주고 양들이 곤경에 처할 때는 목숨을 걸고 보호해 주는 목자와 같다. 목회자의 다른 이미지는 선한 이웃이다. 목회자는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해준 사마리아 사람처럼 위험에 처한 교인들을 건져 준다. 목회자는 상처 입은 치유자와 같다. 목회자도 한 인간으로 상처입기 쉬운 존재다. 목회자도 외롭고 고독하고 슬프고 때론 자신의 상처 때문에 고통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는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바탕으로 상처 입은 교인들을 보살피고 치유할 수 있다. 때론 목회자는 부모와 같다. 부모로부터 적절한 돌봄을 받지 못해 건강한 자아가 형성되지 못한 사람들이 목회자를 통해 좋은 돌봄을 제공받으면 그들의 자아가 건강하게 재구성된다. 그래서 목회는 재양육 과정이기도 하다. 목회자의 또 다른 이미지는 산파다. 산파는 아기를 낳는 사람이 아니라 아기가 태어날 수 있도록 산모를 도와주는 사람이다. 목회자는 산모처럼 아기를 낳는 사람이 아니다. 목회자는 교인들의 영적 자아가 탄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산파와 같은 존재이다. 산파는 산모 옆에서 밤을 새워가며 돌본다. 산모와 함께 진통하고 아기가 태어날 때 산모와 함께 기뻐한다. 천사는 산파처럼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야곱 곁에 있었다. 야곱이 울 때 어깨를 내주어 기대게 했고, 불안해하고 힘들어 할 때는 안아주었다. 

한 영혼의 탄생은 자연스럽게 일어나지 않는다. 한 사람이 먼저 하나님 앞에 빈 존재로 서야 하고, 소유에 대한 욕망만큼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갈망이 있어야 하고, 거듭나기 위한 몸부림이 있어야 한다. 그와 동시에 곁에서 산파처럼 도와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함께 진통해 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삶의 전반부에서 후반부로 넘어갈 때, 소유형태의 삶에서 존재형태의 삶으로 전환할 때, 한바탕 몸부림과 진통이 필요하다. 그러나 몸부림과 진통은 홀로 감당하기 어렵다. 야곱이 몸부림치고 진통할 때 천사가 곁에 있었다. 야곱은 천사를 붙잡고 몸부림쳤다. 엉엉 울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새로 탄생하기 위해 진통하는 그 순간 천사가 그곳에 있었다. 저주받은 것처럼 보이는 자신을 보고 몸부림칠 때 천사가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천사는 야곱을 위로하지 않았다. 괜찮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실컷 울게 놔두었다. 자기 자신을 마음껏 욕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단지 그 순간에 거기에 그와 함께 있었다. 곁에 있어준 천사 때문에 덕분에 야곱이 새로운 존재가 되었고 이스라엘이 되었다. 

중년기에 이르면 야곱처럼 빈 존재로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 한다. “하나님, 이게 저의 모습입니다”라고 보여드리고 아픈 가슴으로 울어야 한다. 그리고 야곱처럼 “용서해 주세요. 용납해 주세요. 치유해 주세요. 인도해 주세요”라고 간구해야 한다. 그 때 손을 잡아주고 함께 울고 같이 씨름하고 있는 천사를 보게 될 것이다. 


상처를 기억하라

유대인의 아버지는 야곱의 이야기를 자녀들에게 들려주면서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고 한다.


“야곱과 씨름하고 축복해준 천사가 길을 가다가 야곱에게로 되돌아왔단다. 

그리고 야곱의 상처에 손을 댔단다.” 

“왜요? 아, 야곱의 상처를 낫게 해주려고요?” 

“아니란다.”

“그럼요?”

“그 천사는 야곱의 상처에 손을 대고 이렇게 말하고 떠났단다.”

“뭐라고 말했나요?” 

“야곱아, 이 상처를 잊지 말고 꼭 기억하여라.”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지냈던 그 밤을 잊으면 안 된다. 그 아프고 슬픈 밤, 감동과 은총의 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저주받은 것 같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강가에서 뒹굴면서 엉엉 울던 그 밤을 기억해야 한다. 치유는 상처를 기억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치유는 상처를 다르게 해석하고 그리고 의미 있게 기억하는 것이다. 

야곱은 씨름에서 져준 천사를 기억해야 한다. 야곱은 천사가 왜 져주었을까를 잊어서는 안 된다. 한 아버지와 아들이 가위바위보 게임을 하고 있다. 그런데 언제나 아버지가 진다. 세 살 난 아이는 이길 때마다 신나서 다시 하자고 조른다. 아버지는 번번이 진다. 아이는 그 때마다 “아빠는 바본가 봐. 왜 매번 가위만 내?”하면서 좋아한다. 아버지는 왜 항상 가위만 냈을까? 아이는 날 때부터 손가락이 붙어 있었다. 손가락을 펼 수가 없었다. 가위바위보 할 때마다 내미는 아이의 손은 언제나 바위였다. 그때마다 아빠는 가위를 내어 져 주곤 했다. 아빠는 늘 이겼다고 좋아하는 아들을 보면서 “저 아이가 언젠가 자기 손가락이 붙어있는 것을 알고는 가위바위보 게임을 하자는 말을 하지 않을 때가 오겠지”하면서 굵은 눈물을 흘린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언제나 가위를 내신다. 야곱이 언제나 바위를 내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야 야곱은 하나님이 일부러 져 주신 것을 알았다. 그동안 야곱은 자기가 기도를 열심히 해서, 노력을 많이 해서, 자기가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되어서 하나님이 자기를 돌보아 주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야곱은 하나님은 자기가 바위만 내는 것을 아시고 언제나 가위를 내신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야곱의 마음이 더욱 아프고 슬펐다. 야곱은 이러하신 하나님 생각에 아픈 마음으로 절룩거리면서 강을 건넌다. 그의 인생의 후반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야곱은 강을 건너가 형과 화해하고 부모님을 만났고 고향에서 자신의 존재와 영혼을 보살피며 살아갔다. 


나가는 말 

이 시대의 야곱들이 강가에서 서성이고 있다. 그들도 너무 오랫동안 영혼의 고향에서 멀리 떠나 있었다. 타향에서 먹고 살기 위해 정신없이 살아 왔다. 어느새 인생의 가을이 되었고 고향이 그리워졌다. 그들도 더 늦기 전에 영혼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강 이편에 서 있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에 강가를 거닐면서 자신의 존재의 모습을 바라보고 영혼의 상태를 살핀다. 망가진 존재가 보이고 상처 입은 영혼이 아프게 느껴진다. 그때 그들은 삶의 아픔과 힘듦이 망가진 존재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삶의 흔들림도 상처 입은 영혼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된다. 알 수 없는 슬픔도 결국 상처 입은 영혼으로부터 시작된 것이고, 삶의 지루함과 답답함도 생명의 근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생의 후반부를 고향에서 지내려고 고향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온다. 그들도 야곱처럼 교회에서 망가진 존재를 붙들고 통곡하고 피폐해진 영혼을 감싸 안고 아픈 눈물 흘리고 싶어서다. 그들도 야곱처럼 하나님과 씨름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아야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그들도 야곱처럼 은총을 받고 축복받은 존재가 되고 싶어서 교회로 나온다. 영혼의 고향을 찾아가는 길에 대한 안내를 받고 싶어서다. 그들도 용서, 용납, 치유, 그리고 인도의 은총을 받고 싶어서다. 교회는 용서와 용납의 집, 치유와 인도의 집이 되어야 한다. 목회자는 교회에 용서의 방, 용납의 방, 치유의 방, 인도의 방을 마련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환영해야 한다. 교회에서 하룻밤 머물면서 은총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들은, 이튿날 아침 해맑은 얼굴로 영원한 고향을 향해 출발할 것이다. 따뜻하게 맞아주고 씨름하는 동안 곁에서 있어준 목회자에게 손 흔들어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먼 길을 향해 떠날 것이다.


손운산 l 교수는 미국 밴더빌트대학교(Vanderbilt University)에서 목회상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보문제일교회, 아현중앙교회, 시카고살렘한인교회, 이화여대 대학교회에서 목회했으며,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부 교수와 한국목회상담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수
공지 일반 중앙일보 교보문고, 올해 인문서 우린 다르게 살기로했다 imagefile 조현 2018-12-21 20378
공지 일반 조현의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 북콘서트 초대 imagefile 휴심정 2018-12-03 25071
공지 게시판 글쓰기에 관한 안내입니다 [3] admin 2011-07-08 770375
» 일반 영혼의 고향을 찾아가는 중년의 야곱 image [3] anna8078 2012-09-11 12728
1602 일반 넝마공동체 ‘자활의 꿈’ 내쫓기나요? image [1] 휴심정 2012-09-10 7422
1601 일반 '슈리 크리슈나다스 아쉬람'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깨달음이 아니라 "깨우침"이다. [4] repent00 2012-09-10 10435
1600 일반 남보기만 좋은 쇼윈도부부 image [1] 조현 2012-09-08 9932
1599 일반 <공동선>발행인 김형태 변호사의 `공부'… image [1] 조현 2012-09-08 14586
1598 일반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image [1] guk8415 2012-09-04 11655
1597 일반 한반도 통일, 기독교의 역할은 사라진 것인가? imagefile anna8078 2012-09-03 19675
1596 일반 김경/스피드를 넘어 스타일로 [1] dhsmfdmlgodqhr 2012-09-03 9433
1595 일반 사랑차 끓이는 법 yahori 2012-08-31 8307
1594 일반 반갑다 형제들아 wonibros 2012-08-30 6647
1593 일반 서초구민, 사랑의교회 도로점용허가 취소 소송 휴심정 2012-08-30 8615
1592 일반 혜민스님 <멈추면...> 출간 7달에 100만부 image [3] 조현 2012-08-29 11110
1591 일반 도법스님께 들어보는 1000일 정진의 의미 imagemovie kimja3 2012-08-29 8687
1590 일반 60기 생태귀농학교 모집 image pkkykk 2012-08-28 9088
1589 일반 큰 바람 속 차 한잔 imagefile [1] anna8078 2012-08-28 21939
1588 일반 함세웅 신부 은퇴 미사 imagefile [1] 휴심정 2012-08-27 15322
1587 일반 “스님, 저도 서방정토에 태어나고 싶어요” imagefile [1] kimja3 2012-08-27 17207
1586 일반 [긴급청원] 지하철 문화아이콘 <풍경소리><사랑의 편지> 철거를 막아주세요 imagefile 풍경소리 2012-08-23 11222
1585 일반 物質 現象 [1] repent00 2012-08-23 8111
1584 일반 오빤 MB스타~일 [1] wonibros 2012-08-22 8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