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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금강경 오해 22(금강경강해 p177~179)

‘제 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 하더니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다.(마가 15:33~34)’

- 성경의 숫자와 불경의 숫자는 같은 숫자인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분명 우연이란 대도 필연으로써의 진리의 진실을 숫자로 표상한 것이다. 그 정확한 사실은 수의 인문학적 개념이 종교에 투영된 것이지 싶지만 보다 심층적 논구는 이 쪽에 관심있는 이들의 일일 것이다. 지역과 민족에 따라서 그 개념의 편차가 있을 것이긴 하지만 그 궁극의 의미는 다를 것이 없지 싶다. 후대의 성경에 쓰인 숫자가 어떤 까닭으로 전대의 불경의 숫자와 같은 것인가? -

도올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는 분명 그의 삶을 인간에 대한 구원의 삶으로 이해했다. 예수는 분명 자기자신을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이라고 자각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예수는 빛(light)이었다. 그는 어둠속으로 진입한 빛이다. 그는 육체의 어둠속으로 受肉한 구원의 빛이요 영혼이다. 그는 제자앞에서 때로는 그 모습이 변형(transfiguration)되어 해 같이 찬란한 빛으로 되고 그의 옷조차 빛으로 化한다(마태 17:2)

“거지왕자”라는 이야기가 있다. 왕자가 우연히 얼굴이 똑 같게 생긴 거지의 옷을 입게 되고, 거지로서 오인되어 경험하는 온갖 수난과 열락의 이야기! 예수의 상황도 이와 같다. 예수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는 우리와 같은 윤회의 어둠속에 갇힌 존재가 아닌 자유로운 천상의 빛이다. 항시 해탈이 가능한 자유로운 빛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인간의 옷을 입었다. 거지왕자가 거지로 오인될 수밖에 없듯이, 예수는 윤회의 굴레속의 사람으로 오인될 수밖에 없다. 예수는 내가 왕자라 하고 빛이라 할수록 그는 조롱과 멸시와 핍박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그의 삶의 박해는 시작 되었다. 윤회의 굴레는 시작되었다.’

- 도올은 예수가 마지막으로 지른 비명의 의미를 말함에 앞서 ‘예수’라는 인물의 성격을 ‘마태복음 17:2’를 빌려 규정하고 있다. 즉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써의 자유로운 빛으로써, 어쩌다(하나님의 의지로?) 거지가 된 왕자처럼 사람의 삶이라는 옷을 입은 윤회의 어둠속에 갇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분명한 건 도올이 하나님이며 예수며 사람은 물론 윤회며 자유며 해탈 따위들이 실재의 실체임을 인정하는 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분명 옷이 거지지 속내는 알토란같은 왕자님, 그것도 지상의 유한한 임금이 아니라 사람으로썬 도무지 헤아릴 수조차 없는 천상의 하나님의 아들로써 자유로운 빛과 같음을 명토 박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가 어둠의 거지들, 사람을 구원하러 왔다고 외치지만, 예수의 속내를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들과 꼭 같은 옷을 입은 거지의 예수를 조롱하며 핍박하며 멸시하므로 사람의 옷을 입은 예수의 고통의 윤회는 시작 되었다는 것이다. 윤회는 사람의 고통으로써의 삶이란 것이다.

성경으로 기술된 내용들을 실재의 실체로 알아 예수의 옳다 좋다한 말은 믿어 따라하고 그르다고 손가락질 당한 사람의 일은 거부하는 윤리적 삶의 지침으로 여기는 데서 성경이 진리의 진실을 밝혀 증명한 冊임이 왜곡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예수는 자신만이 어둠의 너희들을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써 자유로운 빛’이라고 외치다 처형된 것일까? 그렇다면 이건 까마득한 옛날부터 무당이 자기만이 산신님과 접신하여 네가 모르는 너의 길흉을 알아왔다고 외치는 것과 하등 다를 게 없는 허접한 것 아닌가? 정말 오래된 윤회의 삶이 아닌가. -

도올은 말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그가 그의 죽음을 예언하고, 그의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건은 바로 거지 왕자가 이제 그 진짜 거지를 만나 다시 자기의 본모습인 왕자로 되돌아가는 순간인 것이다. 인간의 몸의 윤회의 어둠을 버리고 다시 빛의 세계로, 천상의 하나님에게로 다시 돌아가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기나긴 오해와 박해와 수모의 시간들을 버리고 영광의 시간으로 진입하는 승리의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토록 기쁜 그 순간! ····· 그 기쁜 순간에,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되돌아가는 回歸의 기쁜 순간에 예수는 무어라 외쳤던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 도올은 예수가 자기만이 하나님의 아들로써 자유로운 빛임을 자각하고 있었고, 그래서 자신의 죽음조차도, 어둠의 윤회인 인간의 탈을 벗고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되돌아가는 것도 미리 예언할 수 있는 인간을 초월한 예수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를 버렸다니?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지나? 하나님이 자기를 부른 게 아니라 버렸다고?

도올은 여기서 말을 180도 바꾼다. 예수가 외친 건 하나님이 자기를 버린 게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이다. -

도올은 말한다.

‘나는 이 구절에서 항상 눈물을 흘린다. 왜냐? 나는 한 인간의 소름끼치는, 절망의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울부짖음을 듣기 때문이다. ·····. 성서의 기자들이 이것을 기록했다고 하는 이 사실이야말로 성서기자들의 위대한 대승정신인 것이다. @예수의 이 순간의 외침은 바로 자기의 삶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삶이라고 하는 자각의 전면부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기독교 교리에서는 이러한 해석은 무서운 이단을 낳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직한 사실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것을 어찌 달리 해석할 방도가 있을까? ·····. 주여! 주여! 나는 하나의 인간이로소이다. 나는 거지가 되어 태양보다도 더 찬란한 喜悲의 삶을 살았소이다. 날 그대로 두소서! 윤회의 어둠에 그대로 두소서! 어찌하여 날 죽이시나이까? 어찌하여 날 해탈의 허공속으로 버리시려 하시나이까?’(@는 필자의 임의)

- 도올은 앞에서 말한 성서에 대한 태도를 싹 바꾼다. 항시 해탈이 가능한 자유로운 빛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써 자신의 운명을 훤하게 꿰고 있는 예수가 갑자기 ‘소름끼치는 절망의 심연’에 빠져서 울부짖다니, 이 뭔 해괴한 시츄에이션이란 말인가? 다 아는데 하나님이 자길 버릴 줄만은 몰랐단 말인가?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는 순간에야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단 말인가? 그럼 예수는 어쩌다(?) 거지 옷을 입은 왕자가 아니라 거지가 왕자 옷을 입은 가짜 왕자였음을 죽음 직전에 알았다는 것이겠다. 그럼 바리새인들이나 예수를 핍박한 이들이 옳았네. 예수가 거짓메시아였음이니. 헐!

우짰든지 이건 ‘정직한 사실’이 아니다. 예수가 설령 죽음직전에 #자기만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님#을 알았단다면 좀 그럴듯하겠지만, 사실 예수는 이 사실을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전에 이미 깨달은 것이다. 예수는 자기만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적어도(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는 아니라도) 모든 이들이 온통 전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외친 까닭으로 처형된 것이다. 예수가 외친 말이 ‘사람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최초의 성서기자들이 기록했단다면 이는 기록자들이 예수의 말을 오해한 것이기 십상이다. 예수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가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까닭을 깨달은 이다. 그때야 뭔 세계에 대한 지적관념이 풍부했다고 인간이외의 것에 관심을 뒀겠냔다면 내가 예수가 아니니 할 말은 딱히 없다. 예수가 싯달타처럼 금수저가 아니라 가나한 목수의 아들주젠데 뭔 공분들 많이 할 수가 있어 해박한 지식을 축적할 수 있었겠냔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 대한 의문은 조금만 깊이 파고들면 곧 모든 존재와 현상의 문제임은 적어도 邪心없는 문제의식의 소유자라면 금방 알게 되는 일이다.

예수는 이미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이 진리의 진실임을 깨달은 이다. 예수가 돌팔매질로 죽임을 당하는 창녀를 살려낸 것은 무엇을 살려낸 것인가? 사람 창녀만을 살린 것인가? 창녀가 한 창녀질을 살려낸 것인가? 예수는 사람 창녀뿐 아니라 창녀의 창녀질조차도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함부로 단죄하여 죽이는 걸 막은 것이다. 천상천하의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일이므로. 이쯤 되면 예수의 깨달음이 사람에게만 머문 것이 아님은 짐작이 가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돌팔매질도 이건데 이건 왜 막은 거냐고 묻진 마시라. 이 물음조차도 이것이므로 예수는 이것이 아닌 자는 이 짓을 하라고 한 것이다.

도올은 ‘하나님은 왜 날 버리냐’는 예수이 이 외침을 ‘달리 해석할 방도가 없다’고 한다. 이러고 차라리 뒷말을 하지 않았단다면 정말 정직할 뻔 했다. 희비의 어둠의 윤회의 삶을 사는 인간으로 그냥 두시지 왜 해탈의 허공으로 날 없이하느냔 것이다. 아니, 자기 맘대로 자유로이 해탈할 수 있는 찬란한 빛이라더니, 자기 스스로 해탈하는 건 되지만 하나님이라도, 아버지라도 타율에 의해서 해탈하는 건 싫다는 건, 인간의 자유의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건가 뭔가?

解脫이 완전 없어져 버려 無我가 되는 것이란 대도, 이조차 연기의 실상으로써 윤회임을 도올은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를 주재하는 사랑의 신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는 보리살타다. 석가여래가 말한 보리살타는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가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이게 하는 작동태로 표상한 말이다. 실제 선불교의 공안에서는 이를 동사로 흔히 표상하는데 이를 에너지·힘의 작동이랄 수도 있다. 단지 석가여래가 보리살타에 대해 이런저런 실증을 들어 표상한 것을 후인들이 布施者나 부처가 되기 직전의 수행자 정도로 알아 뭔가를 열심히 수행하는 사람으로 오해했듯, 예수의 하나님에 대하여도 사람들이 오해한 것이지 싶다. 이는 아마도 인간이 갖는 미래의 희망에 대한 대책없는 집단적 사로잡힘이 크게 작동한 연기의 실상이 아닐까 싶다.

하나님도 보리살타도 분명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가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로 있게 하는 동력으로써의 주재자를 표상한 것이다. 이렇게 공명정대한 사랑의 보시자라면 희망에 굶주린 내가 굳이 따를 필요가 있는가. 나는 오직 나의 희망을 이루어줄 절대적 신을 희망한다.

예수는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아는 게 정직한 앎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삶이라고 하는 자각의 전면부정’이 이 예수의 오열에 대한 정직한 바른 앎이라고 아는 해석은 인간중심적 사유에 사로잡힌 또 다른 ‘무서운 이단을 낳’는 말이다. 도올은 대체 하나님을 무엇으로 어떻게 알고 있길래 예수가 하나님을 부정한 것이 정직한 거라고 부정탄 이단의 말을 하는가? 하나님이 무엇이관대. -

도올은 말한다.

‘예수의 십자가는 단순한 인간적 죽음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의 해탈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 해탈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我相의 전면부정이다. 예수는 십자가상에서 또 무어라 외쳤던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희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 23:34) 바로 이 “알지 못함,” 이것이 곧 인간의 무명의 윤회를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바로 예수의 무여열반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인간됨의 완성이었고, 신의 아들됨의 성취였다. 가만히 앉아 坐禪한 채 入寂하는 붓다가 아니라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인류의 무명의 굴레를 불사르는 삶속의 해탈이었다. 예수의 십자가는 삶속으로의 죽음의 실현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윤회가 곧 열반이라고 하는 대승적 삶의 승리였다.’

- 예수가 하나님을 한탄하는 외침으로 자신이 전면부정한 것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我相’이란 것이다.

석가여래가 말한 四相은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이다. 이는 四相으로써의 내가 연기의 실상이므로 실재의 실체랄 게 없는 無我임을 알라는 것이지, 이를 안 나를 없애 죽음으로 실천하라는 명령이라거나, 마땅히 이를 안 인간이 실천해야 할 윤리적 덕목이라고 한 것이 아니다. 보리살타를, 하나님을, 해탈을, 죽음 따위의 이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을 실재의 실체로 알아 이와 다를 것 없는 내 희망의 기도 대상으로 삼는 건 인간중심적 생각에 사로잡힌 邪心이다. 예수가 자살한 것이란 말인가? 헐!

이를 모르니 도올은 예수가 ‘윤회의 어둠에 그대로 두소서! 어찌하여 날 죽이시나이까? 어찌하여 날 해탈의 허공속으로 버리시려’하느냐고 외쳤다고도 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我相’은 無我이니 이 무아인 자기는 없어져야 마땅한 거라고 자신이 선택한 방식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해탈한 것이라고도 하는 엉뚱깽뚱한 사유의 말을 하는 것이다. 대체 죽음이, 해탈이 자기가 죽고 해탈하는 것이지만 독립적 개체로써의 자기의지로 해야 하는 것인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희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의 ‘저희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 ‘인간의 무명의 윤회를 의미하는 것’이란 건 그렇다 치자. 그렇담 이 무명의 윤회를 하는 예수가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한 것은 무여열반으로써 ‘인간됨의 완성이었고, 신의 아들됨의 성취’며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인류의 무명의 굴레를 불사르는 삶속의 해탈이었다. 예수의 십자가는 삶속으로의 죽음의 실현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윤회가 곧 열반이라고 하는 대승적 삶의 승리였다.’고 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아들로써 하나님의 아들임을 전면부정하고 죽은, 자살한 예수였기 때문에 이렇다는 것인가? 坐禪入寂의 붓다는 물론 다른 모든 이들은 이 축에 낄 수도 없는 것이고? 그렇담 이제 예수가 죽은 이후로는 이 세상에 죄도 없고, 알지 못하는 무명도 없고 오직 대승적 삶만이 있는 것인가? 그렇담 대체 중동의 아이에스의 테러며 중국의 사드보복이며 김정은의 핵폭탄 위협 따위는 다 대승적 삶의 승리란 말인가? 하긴 대승이 무아, ‘나를 없애는 실천’이라고 이미 앞에서 진즉 도올이 말했으니, 대승의 죽는 꼴들도 참말 가지가지네.

예수가 말한 ‘저희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 무명인 건 그렇다 치자. 대체 뭘 알지 못한다는 것인가? 당신의 아들이면서 희한하게 당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아는 걸 모른다는 것인가? 당신을 부정할 줄을 모른다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들이 무아임을 몰라 무아를 실천할 줄을 모른다는 것인가? 우짰든 예수가 이 모름의 무명인 저들은 하나님께 용서를 빌고 자기는 이 모름의 자신을 십자가형으로 죽여 무여열반의 대승적 삶을 완성한 것이라는 사유의 말을 하는 도올은 참말 희한한 연기의 실상이 아닐 수 없다. -

도올은 말한다.

‘엘리엘리 라마사막다니가 예수의 죽음·해탈의 순간에 외친 하나님의 아들됨의 부정의 지혜라고 한다면, 우리의 주제도 동일하다. 만약 인간 붓다가 브라만들에게 잡히어 십자가형에 처해졌다면, 그 십자가에 못박힌 붓다의 최후의 말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무여열반의 죽음을 찬란한 삶으로 전환시킨 그 한 마디였을 것이다.

나는 헤아릴 수도 없는 가없는 뭇 중생들을 구원하였다. 그러나 나는 아무도 구원하지 않았다.’

- 하나님의 아들임을 긍정하는 것이 지혜이듯 ‘하나님의 아들됨을 부정’하는 것 역시 분명 지혜작동이다.

‘엘리엘리 라마사막다니’라고 외친 예수의 말을 도올의 이해처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삶이라고 하는 자각의 전면부정을 의미하는 것’이란 대도, 또 달리 이해한 대도 이는, 이 이해의 지혜로 작동한 진리의 진실이다. 모든 이해의 사유며 말은 단순한 이해의 사유며 말이 아니라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로써의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이 총체적 인연·인과로 작동한 중도·여래·열반의 보리살타로써 오직, 이 이해의 사유며 말로써의 선정으로 지혜작동한 연기의 실상인 진리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엘리엘리 라마사막다니’란 말이 예수의 육성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이란다면 실재의 실체로써의 아버지 하나님에게 함부로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일반 평범한 사람도 믿음이 좀 굳세다면 어떤 죽음에 임해서도 ‘믿습니다’를 외칠 텐데 하나님의 아들임을 자각한 예수가 저런 불신의 말을 했다는 건, 저간의 기독교적 입장에서 볼 때 정말 어떻게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아무리 ‘마태복음 17:2’의 자유로운 변형으로써의 예수라고 이해한 대도 아버지하나님에게 이렇게 디리대는 건 용서할 수 없다. 이는 계율을 어기거나 사제의 윤리를 깨버리는 自害스런 일, 일테면 고양이 목을 쳐 공개적 살생을 한다거나, 자기의 진리인식을 도운 스승의 뺨때귀를 갈겨 보리살타로써의 연기의 실상을 증명한다거나 하는 선문에서나 볼 수 있는 말이다. 이런 진리인식의 기도로 보지 않는다면 이 말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해괴한 말이다. 이것이 아니고 다른 어떤 이해의 말을 내놓는 대도 이는 예수의 정신을 증명한 예수의 뺨을 치는 꼴과 같은 자해의 행실이다. 이것이 이것인 줄 알면 좋으련만!

살불살조조차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으로써의 無我로 보아 다만 이 선정으로 지혜작동하는 연기의 실상임을 깨닫는 기도의 선불교와 그 맥이 닿는 말이 예수의 ‘엘리 엘리 라마사막다니’라는 말이다. 이를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차치하고 이를 고대로 기록한 성서기자들은 그래서 위대한 정직인 것이다.

우짰든지 죽음이든 해탈이든 무여열반이든 유여열반이든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은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가 총체적으로 작동하는 중도·여래·열반의 보리살타로써 연기의 실상인 진리의 진실이다. 석가여래나 예수는 오직 이를 밝혀 증명하는 말씀의 삶이었다.

지금 우리가 논의하는 주제도 석가여래가 자신이 한 일을 스스로 전면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보리로써의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이 살타로써의 삶임을, 모든 존재와 현상이 오직 이 보리살타로써의 금강임을 밝혀 설명하는 증명의 말이다.

3-3.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 實無衆生得滅度者, 이와 같은 총체적 인연·인과로 작동하는 滅度로써의 무량 무수 무변인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라는 이 모든 성품의 삶, 곧 중생은 실재의 실체랄 것이 없는 중생이므로 멸도자로써 보리살타라고 하는 것이다.

滅度는 보리살타의 한역이다. 보리살타의 한역은 이 멸도뿐만이 아니라 여러 동사형 문자로 한역하여 표상하고 있다. 선불교의 공안이란 것은 석가여래가 육바라밀, 즉 六度로 예증한 이 보리살타로써의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이라는 성품의 삶이 보리의 선정이며 살타의 활발발한 지혜작동임을 단적으로 보여 이를 알라는 기도의 이야기다.

각설하고, 엘리 엘리 라마사막다니라는 말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이해로 있는 것은 저 선불교의 공안적 기사가 아니라면 예수의 정신이 예수 이전으로 회귀하여 되돌아 간 멸도자인 것이다. 마치 석가여래의 땅에서 석가여래의 정신이 브라만과 隨照返照한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의 빛으로 멸도하여 힌두이즘이라는 새로운 빛으로 탄생한 멸도자이듯.

예수의 저 말은 아버지 하나님께 묻는 말이 아니다. 자신을 단죄한 이들에게 묻는 말이다. 나는 오직 우리가 모두 다 하나님의 아들들임을 밝혀 말했을 뿐인데, 어째서 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느냔 것이다. 진정 우리가 모두 다 아버지 하나님의 자식인 줄을 모르겠냐는, 제발 이를 좀 깨달으라는 마지막 기도인 것이다. 이 의미이어야 예수의 정신이 직설로 드러난 것이어서 석가여래의 이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 實無衆生得滅度者라는 말과 같은 의미맥락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총체적 인연·인과로 작동하는 이와 같은 滅度로써의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 곧 무량 무수 무변의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라는 이 성품들의 삶인 이 중생은 실재의 실체랄 것이 없는 중생이므로 멸도자로써 보리살타라고 하는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이라는 오직 이 말을 했을 뿐인데, “나의 형제여 나의 형제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는 겁니까?” 이런 이것조차 진리의 진실임을 바르게 보시라는 기도의 말이다.

비록 필자가 도올의 말에 반연하여 기독교적 용어나 의미를 불교적 용어의 의미로 아무런 논리적 증명도 없이 억지로 견강부회하며 떠들기는 했지만 종교가 진리의 진실을 밝혀 증명하는 일이란다면 각 종교의 용어며 그 의미를 실재의 실체로 여겨 대책없이 다름으로 놔두는 건, 이 종교의 일이 아닌 것 같다는 믿음에서 한 것이니 크게 봐주시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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