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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왕시루봉의 이면

월간 풍경소리 2019. 0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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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월간 풍경소리>(발행인 김민해 목사) 8월호에 박두규 시인이 쓴 글입니다


[지리산에서 온 편지 6]

선한 바람에 일렁이는 연두와 초록의 물결들

왕실봉 칠순 노인네 이야기



왕시루봉1-.jpg


모처럼 지리산에 오르니 어린 나무 건 고목이건 모든 나무들이 새잎을 피워 올리고 있다. 온통 연둣빛 초록물결로 산이 일렁인다. 바람이 한번 훑고 지나가면 초록의 파도가 한차례 밀려오는 듯한 서늘함과 그 상큼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초록빛은 마음을 가장 편안하게 해주는 색깔이라고 하는데 초여름의 산에 오르면 이 초록의 신록에 묻혀 몸 안에 쌓여 있는 스트레스와 강박과 두려움 등 세속의 삶이 만든 정신적 생채기들이 모두 치유될 것만 같다.


사람들은 보통 몸의 건강을 위해 산을 많이 오른다. 그리고 몸이 건강하고 편해야 마음도 편안해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요즘은 그 생각에도 많은 변화가 오고 있다. 몸과 마음은 분리될 수 없으며 오히려 마음을 잘 다스려 불치의 몸을 극복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선진의학에서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정신적인 영역을 치료에 활용하고 있으며 인간의 영성까지 의학은 확대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예전에는 별 생각 없이 산행을 했으나 요즘은 산을 오르는 일은 몸과 마음과 영혼이 자연스럽게 하나로 합일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특히나 요즘과 같은 신록이 우거지기 시작하는 계절이면 아무리 바빠도 산행을 한다. 숲의 모든 생명들이 가장 활발하게 생명력을 발현하는 시기여서 그런지 신록에 묻힌 나도 그 기운에 합류하여 내면의 에너지가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살아있음의 순수한 생명력을 깨인 의식을 통해 접할 수 있는 명상의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왕시루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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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그렇게 왕시루봉에 올랐다. 지리산 왕시루봉 정상 바로 아래쯤에 가보면 외국인 선교사들의 산장이 있다. 말이 산장이지 지금은 오래되어 거의 폐허 상태이며 남장로교회 쪽 사람들이 주도하여 문화재 등록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 외국인 선교사 산장의 문화재 등록은 사실 많은 생태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어 신중하게 처리해야 할 것이다.


왕시루봉은 정상이 해발 1240m이니 이 산장들도 해발 1000m는 넘나들 것이다. 원래는 노고단에 있었는데(선교사 산장 터는 노고단 대피소 바로 옆자리에 있었으며 아직 그 흔적이 남아있다.) 한국전쟁 때 폭파되어 비슷한 고도의 이곳 왕시루봉 자락으로 옮겨와 다시 여러 채의 방갈로를 짓고 삼각형의 조그만 예배당도 만들고 지형을 다듬어 작은 둑을 쌓고 물줄기를 막아 간이 풀장까지 만들어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 풀장이 연못처럼 남아있다. 이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와 산장을 지은 것은 외국인들이 무더운 여름에 풍토병을 피하기 위해 에어컨 바람 정도의 적정 온도의 높이에 피서지로 지었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지리산 호랑이라는 함태식 선생께 들은 이야기인데 구례에 살던 자신이 10대 초반 때 여름에 노고단 외국인 산장에 가면(당시에는 노고단을 동네 뒷산 오르듯 쉽게 올라 다녔다 한다) 놀랄만한 진풍경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우선 구례 사람들이 노고단 산장의 외국인 선교사 가족들에게 팔려고 나물이며 과일 등 다양한 먹을거리와 잡화를 이고 지고 가져와 작은 장이 섰다고 한다. 그리고 이 높은 노고단 산중에 발가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비키니 차림의 금발머리 여자들이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니 그 일제 강점기 시절에 어린 소년의 눈에는 별천지 세상에 온 것만큼이나 놀랐을 것이다.



왕시루3-.png



왕시루5-.jpg



 

80년대 후반 즈음이었을까. 내가 왕시루봉의 외국인 선교사 산장에 갔을 때 칠십이 넘은 산장지기 노인 한분이 계셨다. 하얀 수염이 덥수룩한 70대 중후반의 노인이었는데 작은 키에 산에서 다져진 다부진 몸을 가진 노인이었다. 산 아래는 고로쇠 물을 받아내는 2월의 봄이 시작되었건만 이곳은 아직도 한 겨울이었다. 식수로 쓰는 작은 물줄기가 꽁꽁 얼어 아직 다 풀리지 않아서 노인은 도끼로 풀장의 얼음을 깨어 물을 길어와 밥을 짓는다고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산장지기 노인이지만 이런저런 말을 붙여보니 산전수전 다 겪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사신 분이었다.


이 노인은 왕실봉 아랫동네인 토지면에 사시는 분이었는데 젊은 시절 토지에서 왕실봉 산장까지 지게에 외국인 선교사 부인들을 지고 올라왔다고 했다. 70년대만 해도 서울역에서 짐을 나르며 생계를 유지하는 지게꾼이나 리어카꾼들이 있었다는 말은 들었는데 사람을 지게에 올려 산을 올랐다는 말은 너무 충격적이었다. 지게에 널빤지를 올리고 방석을 깔아 편안히 앉도록 해서 종종 선교사 부인들을 산장까지 데려다 주었다고 했다. 돈벌이가 귀한 시절이라 몇 푼 안 되는 돈이지만 마다하지 않고 그 일을 했다고 하는데 맨몸으로 오르기에도 버거운 해발 1240m의 왕실봉을 올랐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상당히 비만한 선교사 부인을 지게에 싣고 올라가는데 너무 무거워 중간에 쉬는 일이 잦았다. 점심 먹고 한참 후에 오르기 시작했으니 산장에 갔다가 어두워지기 전에 내려올 일이 걱정이었다. 어디쯤에서 쉬어 가게 되었는데 부인을 내려놓고 나무 그늘에 앉아 담배 한참을 하면서 혼자 푸념처럼 아이고 뭘 처먹었는지 디지게 무겁네. 서양 년들은 다 저런가?’라고 내뱉었단다. 담배를 다 피우자 저만치에 앉아서 쉬던 선교사 부인은 아무 말 없이 다시 지게에 올랐고 다른 때보다 늦게 산장에 도착하여 내려가다가 지는 해를 볼 것 같았다. 그런데 지게 값을 달라고 하자 같이 올라온 그 선교사 부인이 한국말로 저 사람이 올라오면서 나한테 욕 했어요. 돈 주지 말아요.’ 그러지 않은가. 우선 한국말을 할 줄 알았다는 것에 깜짝 놀랐고 돈을 안 준다는 말에 사색이 되었다. 어디에 호소할 수도 없는 힘없는 백성이 되어 노인은 터덜터덜 어두워진 산을 내려왔다고 했다.



왕시루6-.jpg


그는 멀리 노을이 지는 아름답고 슬픈 섬진강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직도 왕시루봉 정상에는 낡은 방갈로들이 산재해 제국의 그늘이 가득하다. 나는 그 그늘 아래서 점심으로 가져온 주먹밥을 베어 물었다. 간단한 점심을 끝내고 지리산의 능선들과 계곡들을 바라보며 그 일을 떠올리니 새삼스레 아메리카라는 나라가 생각 속에 자리 잡는다. 인류 역사 속에서 가장 찬란한 문명이라는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종주국 아메리카, 한때는 우리도 아메리카 드림이라는 환상 속에 살았었지. 과연 인간이라는 종이 만들어낸 삶의 정답이 그곳에 있는 걸까? 나이 60을 넘어 알만큼 알고 살만큼 살아온 인생들에게 물어본다면 아마도 천만에라고 입을 모을 것이다. 돈은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에 매달려 돈보다 더 훌륭한 가치, 더 아름다운 가치를 모르고 인생을 다 소진한다면 그것 또한 우물 안의 개구리로 살다 가는 것하고 무엇이 다르겠는가.


나는 지는 해를 바라보며 산을 내려왔다. 저무는 빛을 받아 아스라이 보이는 섬진강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고 선한 바람에 연두 초록의 물결들이 일렁이고 있었다. 삶의 정답은 아마도 이 풍경의 어디쯤에 숨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은 <월간 풍경소리>(발행인 김민해 목사) 8월호에 박두규 시인이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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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풍경소리
순천사랑어린학교 김민해 교장이 중심이 되어 초종교 조교파적으로 영성 생태 깨달음을 지향하는 월간잡지다.
이메일 : pgsor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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