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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녀 탄생의 현대적 의미

일반 조회수 8108 추천수 0 2009.01.13 20:43:02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24)

 

기독교는 예수가 처녀에게 잉태되었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동정녀 탄생은 진리의 핵심을 표현하는 말씀이며 성경의 근간을 이루는 말씀이다.

신약성경 첫 책, 처음부터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족보가 등장하는데,

그 계보의 처음에 아브라함이 등장한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출발을 나타내는 초조(初組)이다.

마태복음의 족보는 그 겉의 형태가 얼핏 예수의 육신의 족보 모양을 띠고 있는 것 같지만,

믿음의 씨가 나고, 죽고, 나고, 죽는 과정에서 소멸되지 않고 이어져 가는

생명의 흐름을 나타내주고 있는 영적 생명의 계보이다.

 

한 개인의 영적 성장 과정에서도 이 족보의 전체는 담겨지게 마련인데,

그것은 믿음이 온 후로(갈 3:25) 살게되는 믿음의 계보라는 말이다.

한 개인이 육신으로는 한 세대를 사는 것인지 모르지만, 그

 내면은 한 세대를 사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세대를 살고, 죽고, 살고, 죽고 하는가.

인간의 육신은 한 세대를 살지만 그 정신은 다 세대를 산다.

물론 어떤 이는 그 정신마저도 한 세대를 사는 것으로 족하게 여기지만

의식의 세계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신학계에는 동정녀 탄생에 대한 설왕설래가 많다.

동정녀 탄생에 관한 기사는 그 독특성에서부터 이미 토론과 논쟁을 안고 있다.

수많은 논쟁을 야기하고 있지만 소거되지 않고 경전의 초두에 우뚝 버티고 있다.

어떤 이들은 마태복음에 동정녀 탄생의 신화가 있는 것을 보아

아예 경전적 가치를 부정하기도 한다.

그것은 기독교 발생 초기에 제자들이 예수를 지나치게 우상화 작업을 위해 만들어낸

조작된 이야기라는 것이다.

과잉충성으로 빚어진 웃지못할 어리석은 이야기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모든 종교의 태동기에 나타나는 신화적 기법이 여전히 기독교에도 나타나는 것으로 설명하려 한다.

 

하여 기독교의 주옥같은 진리를 마태와 같은 친위부대가 깎아 먹는다는 이야기다.

이 같은 주장에 따르면 마태복음은 위작의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이들은 마태복음보다는 마가복음이 가장 예수의 행적에 대한 사실적 기록에 가깝다고

마가복음을 우위에 두기도 한다.

애써 마태복음에서 산상수훈만을 경전적 가치 부여를 하려는 이들도 있다.

그만큼 동정녀 탄생에 대한 격론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다.

 

보수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이들은 동정녀 탄생에 대한 기사를 맹목적인 믿음으로 받아들인다.

다만 믿음으로 처녀에게서 아이가 잉태한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자가 철저히 이론이성적인 입장들이라면

후자 역시 동정녀 탄생에 관한 이해가 육신적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성경은 어쩌면 화염검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이 같은 관점으로는 접근이 불가능하도록 그 자신을 은폐시킨다.

그 같은 관점이 이미 화염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진리는 맹목적인 믿음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그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는다.

진리는 합리적인 분석론자들에게도 역시 그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는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설화가 구약의 예언서의 바탕 아래 발생한 지 이천 년이 지난 지금

우리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 기사는 합리론적 이성론자들과 맹목적 종교인들 사이에서

그들과 상관없이 아직까지도 면면히 자리를 고수하면서 우리들 앞에 놓여져 있다.

그것은 읽어내야 한다.

대충 읽고 지나칠 수 있는 한가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형식적으로는 이천년 전에 시작된 이야기일런지 모르지만

거기에는 시간과 세대를 너머선 생명의 초석이 담겨 있다.

이 기사를 애써 부정하려는 신사적인 엘리트 기독교 지성주의자들이

놓쳐서는 안 되는 무엇인가가 있다.

우격다짐으로 믿어지지 않는 사실을 억지로 믿으려하는

우매한 민중 기독교인들이 귀를 청소하고

다시 한 번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 귀를 기울이는 지혜가 필요한 때이다.

 

성경은 육신적인 이야기를 말하려는 책이 아니다.

새삼스러운 이야기이지만,

예수를 육체대로 이해하려할 때 얼마나 큰 비극을 초래했는지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도 우리는 잘 알 수 있다.

그리스도조차 육체대로 이해하려는 시도에서 파생되는 모순과 갈등은 오늘날도 여전하다.

 

처녀에게서 잉태했다는 말이 무엇인가.

여기서 처녀라는 말은 굳이 구약 예언서를 인용한다면, 알마(hm;%l][')인데

이는 처녀라기보다는 성적(性的)으로 성숙한 여인이라는 말이다.

본래 처녀라는 말은 베툴라(hl;+WtB] a virgin)를 많이 사용한다.

알마를 70인 역에서는 파르테노스(parqevno")라는 말로 번역을 했고,

신약에서 그냥 인용하고 있다해서 논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두 단어는 혼용해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창세기 24장은 장차 이삭의 아내가 될 리브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24장 16절에서는 리브가에 대해 베툴라라고 지칭하고 있고(남자가 가까이 하지 아니한 처녀),

43절에는 리브가를 향하여 알마(청년 여자)라고 지칭하고 있다.

물론 그 뉘앙스는 약간 다르다.

 

어떻든 알마는 이삭이 우물가에서 맞이할 신부를 지칭할 때에도 사용한 것을 보면

처녀라고 일컫는다 해서 결코 틀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언어를 분석해보는 것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그것에 집착할 일 또한 아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처녀(알마)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처녀란 사내를 알만한 나이가 되었지만,

그래서 사내를 맞이할 만큼 성숙한 나이가(때가 찬) 되었지만

아직 사내를 알지 못하는 여자를 일컫는 말이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 이야기는

인간의 실존을 잘 나타내주는 대목이다.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주제는 샘물과 목마름이었다.

인생들이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찾는 야곱의 우물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시겠다는 예수. 다시는 야곱의 우물에서 물긷는 일을 청산하고 싶은 이 여인은 예수에게 청한다.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 4:15).

 

이 때 갑자기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네 남편을 불러 오라”

 

목마르지 않는 물과 남편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가.

이 여인의 대답은 더욱 걸작이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의 반응을 보라. 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성경에는 이와 같은 예수의 화법이 종종 나타난다.

인생은 수가성 여인의 삶과 같다.

인생은 목마름이다.

인생은 갈증이다.

목마름은 인생의 실존이다.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인생들은 수많은 남편을 영접한다.

육신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물이 필요하듯

인생은 일생 동안 목마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처녀에게 자궁이 있듯, 우리의 마음에도 자궁이 있다.

정신의 세계에도 씨뿌림을 받고, 씨가 발아하여 새로운 정신을 잉태하고 출산하여

새로운 나를 낳고 싶은 본능의 세계가 있다는 말이다.

 

어제의 나와 다른 오늘의 나를 낳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정신의 세계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가치와 깨달음을 찾아 씨를 받고자 하는 여성적 성충동이 있다. 자신의 정신적 성감대를 자극하고 깨달음의 씨를 뿌려줄 남편을 찾아

헐떡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이 인생이다. 노자, 공자, 맹자, 붓다, 크리슈나무르티 … 등등.

얼마나 많은 사상가들과 스승들이 있는가.

수많은 성자들과 인류의 스승들.

이들을 통해 정신의 자양분을 공급받고 새로운 인격과 사람으로 거듭나려는 무수한 시도들.

 

옛 사람들은 육신의 첩실을 두거나 기생집을 넘나드는 것은 쉽게 용인해도 지조를 꺾는다든지,

사상적 변화에 대해서는 쉽게 용납하지 않았다.

변절자란 가장 치욕적인 욕이다.

지사를 추앙하고 존경하는 것은 그만큼 뜻을 중요시 했기 때문이며, 정신을 높이 여겼기 때문이다. 하여 특정인을 중심으로 사상적 계보를 형성하기도 한다.

물론 오늘날에야 이 같은 것들이 한낱 패거리들의 힘겨루기 양태로 전락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변절에 그렇게 무게를 두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이처럼 인생은 자신의 정신세계를 지탱시켜줄 기둥 서방을 만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하다 못해 서낭당 나뭇가지라도 세워 놓아야 살 수 있다.

우리의 정신은 한 남편으로 만족할 수 없게 되어있다.

유치원 어린아이는 유치원 선생님이 그의 이상이 된다.

초등학생은 의로운 소방관이나 대통령이 꿈이다.

그들의 정신적 자양분을 공급해주는 존재가 그들의 남편이며 이상이다.

아이의 자람에 따라서 끊임없이 존경하는 사람이 바뀌는 것은

남편이 바뀌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하나의 목마름이 해소되면 또 다시 새로운 목마름이 찾아 온다.

 

신앙생활을 살펴 보라. 얼마나 많은 스승을 두고 또 갈아치웠는가.

대의 삶에 개입하였던 사람들이 하나 둘인가.

추억으로 간직하고 친구로 만날 수는 있지만, 그 시절의 선생님이요, 그 시절의 연인이요,

그 시절의 영향력이지 지금의 남편은 아니지 않는가.

또 다시 지금의 스승으로 역할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항구적인 스승을 만날 수 있다면 좋은 일일 게다.

허나 그런 스승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가.

그렇다. 우리들의 정신의 세계에서 처녀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들 정신은 끊임없이 남편을 만나서 어제와는 다른

새로운 나를 낳고자 하는 씨받이로 사는 게 인생인데 어찌 처녀라 할 수 있는가.

 

하나의 정신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 수없는 방황과 여행을 할 수밖에 없는 정신은

처녀이기보다는 수컷을 찾아, 먹이를 찾아 사막을 배회하는 승냥이와도 같다.

주린 배를 움켜잡고 먹이를 찾아 헐떡거리는 창기가 다름 아닌 나 아닌가.

되돌아보면 그 때, 그 시절, 참 진리를 만났다고 날뛰며,

영생과 천국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미쳐 있을 때가 한 두 번이었는가.

 

대개의 치열한 종교적 삶을 산다는 사람 치고 그런 시절이 없는 이는 드물다.

그렇다고 아무하고나 한 베게를 베는 것은 아니다.

정신의 세계일수록 그 때 그 때의 궁합이 맞아야 한다.

자신의 때와 맞는 사람을 스승으로 둔다.

그러다가 때가 차면,

의리와 예가 아무리 소중해도 정신적 자양분을 공급받지 못하면 살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세계를 찾아 길을 나서게 된다.

이 같은 것을 되풀이 반복한다.

 

다른 한편, 무엇인가 정신의 세계에서 자각을 이루었다는 사람들을 보라.

성경에 대해서 무엇인가 안다고 하는 이들을 보라.

그들은 스스로 남자임을 자청하고 씨를 뿌리려 혈안이 된다.

그리고 자신을 상대에게 정박시키려 한다. 씨(정자)들의 전쟁이 시작된다.

 

이 같은 속성 역시 인간의 실존이다.

내게서 흘러가는 정신적 자양분을 공급받아야 그대는 영생한다고 거짓 선전을 늘어놓으며

정신적 배출구를 찾아 방황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들의 특징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나 도를 빙자한다.

 

천국의 복을 미끼로 삼는다. 스스로도 그 같은 미끼를 덥석 물고 있다.

알지 못하는 것을 부여잡고 알지 못하는 것을 선전하며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먹이로 삼는다.

이들이 서로 서로 얽히고 설키어 사는 것이 세상이다.

세상은 난마처럼 얽혀 있다.

거기서 정절을 찾으려는 이는 순진하다.

정절을 요구한다는 것은 무엇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이다.

이러한 때를 일컬어 동양의 어떤 선사(禪師)는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저린 생선 단지를 처음 열면

쇠파리들이 윙윙 몰려든다.

 

헌데 성경은 신랑을 맞이할 정결한 처녀와 신부가 될 것을 요구한다.

이미 짓밟힐 대로 짓밟혀 있고, 지칠 대로 지쳐 있는 인생들에게

정결한 처녀가 될 것을 요구한다.

뭇 남정네들이 할퀴고 간 상처투성이의 인생들에게 정결한 처녀가 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아니, 예수는 처녀에게서만 잉태가 가능하다고 예언서는 말한다.

신약은 이의 성취를 선포한다.

인생은,

일만의 스승을 두고 그들의 가치와 깨달음을 씨로 받아서

마음의 세계를 새롭게 함으로 어제와는 다른 근사하고 존경받는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고자

몸부림치며 사는 것이 인생이다.

끊임없이 거듭나고자 애쓰고 수고하는 것이 인생이다.

 

이 같이 일만 스승의 씨를 받아내는 마음의 자궁이 있는가하면,

그것과 전혀 상관이 없는 거룩의 땅이 그대에게 있음을 알라는 것이다.

아무 남정네의 손길도 닿지 않은 ‘저편의 땅’(beyond land)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의 진정한 참 모습은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수많은 스승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인격을 수양하고 내면을 가꾸었는가.

그것이 그대의 진면목이라면 그 겉옷을 벗어 던져야 한다.

그것은 결코 참된 그대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것 너머에 어떤 가르침이나 남편으로도 더렵혀져 있지 않은 땅이 그대에게 있다는 사실을

왜 믿으려 하지 않는가.

 

아직도 남편이 그대의 갈증과 목마름을 해소해 줄 것이라는 믿음에 거하고 있는가.

아직도 스승들이 꾸며대는 거짓된 환상에 사로잡혀 밤새우는 줄 모르고 지칠 줄 모르는 요부의 삶으로 그대의 일생이 점철되고 있는가.

 

처녀란 마음 땅의 또 다른 숨겨있는 성지(聖地)이다.

이곳에 씨뿌리는 이는 ‘거룩의 영’이다.

이곳에 좌정하고 생명의 싹을 틔워내고 계신 이가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거룩의 씨로 당신의 자녀를 낳고자 하는 분이다.

선지자가 세례 요한까지라는 말은 선지자는 다만,

이 성지가 도래할 때까지를 예언하는 예언자일뿐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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