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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 막을수없던 배움의 열정

원철 스님 2017. 06. 26
조회수 3525 추천수 0

지관스님-.jpg » 10대 때 원인 모를 열병에 걸려 절에 요양을 갔다가 옴마니밧메훔 주력으로 병을 낫고 출가해 20대부터 강사로 이름을 날려 38세에 해인사 주지를 하고, 동국대 총장을 거쳐 73세에 조계종 총무원장을 맡아 이명박 정부 하에서 불교계 자존심을 지키며 조계종을 이끌었던 대학자 지관스님. 그는 총무원장 재직시에도 매일 오후 6시 업무를 마치면 서울 대학로 가산불교문화원으로 가 매일 새벽 2시까지 불교종합대백과사전인 불교대사림 편찬작업을 몸소 해, 노구에도 대학자로서 초인적인 정신력을 보였다.



포항시 청하면 유계리에 있는 법성사(法性寺) 가는 길은 낯설다. 찻길마저 없다. 버스가 멈춘 자리에서 가산지관(1932~2012)대종사의 흔적을 찾아가는 일행들 속에서 함께 걸었다. A연구원은 고대 희랍의 소요학파는 걸으면서 사색하고 대화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 마디 보탰다. 오늘은 우리가 소요학파의 후예가 되는 셈이다. 불멸의 역경가 구마라집(344~413)스님도 인도말로 된 경전을 한문으로 옮길 때 글이 막히면 그것이 뚫릴 때까지 걸으면서 생각하는 방법을 선호했다. 그래서 머무는 곳을 소요원(逍遙園)이라고 불렀다. 걸어야 만사가 풀린다. 건강도 풀리고 번뇌도 풀린다. 길은 좁았지만 그리 가파르지는 않다. 숲길이라 진초록 나뭇잎들이 따가운 초여름의 햇볕을 가려준다.

 

드러난 것은 딱히 볼 만한 것이 없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사연과 들을만한 내력을 감춘 곳이다. 당신께서 2010년 마지막으로 이 길을 걸었다. 10대 때 열병으로 인하여 아버지 등에 업혀 이 길을 처음 지나간 뒤 수십년만에 다시 걷는 길이였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인하여 이 절에서 한동안 머물었다. 부친은 아들을 위해 이 길 따라 쌀과 부식을 지게로 날랐다. 부자가 함께 했던 길이였기에 당신께 더욱 각별한 감회로 닿아왔으리라. ‘옴마니반메훔기도를 통해 병이 낫는 영험을 입었다. 그 인연으로 해인사로 출가했고 이후 해인사 주지, 동국대 총장,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하였고 경전과 금석문의 대가로써 세상에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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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관스님이 10대때 열병을 치료하기 위해 갔던 포항 법성사로 가는 길


당시 경주 이씨 집안의 먼친척 어른이 그 절의 주지였다. 덕분에 쇠한 몸을 보다 쉬이 의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친족의 그늘은 시원하다. 석가족은 나의 잎이요 나무가지다.”라고 했던 붓다의 말씀은 여전히 유효하다. 조선 세종 때 신미스님도 동생인 김수온이 집현전 학사로 근무한 인연으로 대궐을 드나들며 한글창제에 힘을 보탰고 신라시대 최치원 선생도 형인 현준대사가 해인사에 머물렀기 때문에 자기집 정원처럼 가야산 홍류동 계곡에서 유유자적할 수 있었다.

 

답사의 길라잡이 역할을 자처한 친족 거사가 전해준 말도 들을 수 있었다. 70여년 전 이 절은 대웅전 조차 초가였다. 훗날 절을 수리하고 기와로 바꿀 때 집안어른들이 십시일반으로 경제적 힘을 보탰다고 한다. 그야말로 동넷절이요 문중절인 셈이다. 구전도 여럿이 들으면 그대로 역사가 된다. 그 시절엔 절이름도 제대로 없었다. 동네사람들은 그냥 황배기골 절이라고 불렀다. 몇년 전 법성사로 부임한 주지스님은 도량을 정비하고 길을 다듬고 가파른 곳에 잔도(棧道 다니기 험한 벼랑같은 곳에 선반을 매듯이 만든 길)를 설치하느라고 승복을 입을 틈조차 없이 살았다고 했다. 늘 작업복차림인지라 처음 온 사람들은 일꾼인줄 안다면서 멋쩍게 웃는다. 오늘은 삭발하고 깨끗한 승복으로 갈아입은 말쑥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았다.


절마당에 쪼그리고 앉은 채 B연구원에게 이미 수집된 또다른 구전을 들었다. 인근 마을에 벼루가 빵꾸난훈장이 살고 있었다. 십리 안의 초상집 만장을 쓰는 일은 온전히 그의 몫이다. 동시에 대서소도 겸했다. 동네의 온갖 편지를 읽어주고 대필하고 공문서를 처리해준 어른이다. 벼루가 닳아 구멍이 날만큼 열심히 먹을 갈았던 탓에 그런 별호가 붙었다. 그 집으로 다니면서 한문을 배웠다 여름장마에 개울물이 불어날 때는 옷을 모두 벗어 책과 함께 머리에 이고서 물을 건너 서당으로 갔다글을 배우겠다는 간절함 때문에 훈장님이 아침을 드시기도 전에 문 앞에서 기다리다 안주인과 마주쳐 무안함을 감춰야 했던 일도 잦았다.  이런 노력들이 뒷날 대학자가 된 씨앗이었다.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동네자리에는 저수지가 들어섰고 겨우 수몰을 면한 생가터에 보은원(報恩園)이라는 조그만 기념공원을 조성했다. 그 자리에 당신이 직접 설계 시공하고 글을 지은 고향방문기념비에는 탯자리를 찬탄하는 문장이 끝없이 이어진다. 출가 전과 출가 후를 이어주는 성지를 찾은 후학들은 정성다해 향을 올렸다. 사람은 가도 향기는 여전히 남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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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계종 총무원장 재직시 가톨릭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하자 명동성당에 가서 조의를 표하고, 불우이웃을 돕는 김치 담그기 행사에서 당시 기독교교회협의회의의장인 성공회 박경조 주교에게 김치를 먹여주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봉하마을을 찾아 아들 노건호씨를 위로하는 모습



-지관열반2.jpg -지관열반3.jpg -지관열반4.jpg --지관열반1.jpg  


 5년전 2012년 1월 지관스님 열반 다비식이 봉행된 경남 가야산 해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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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
해인사로 출가했다. 오랫동안 한문 경전 및 선사들의 어록을 번역과 해설 작업, 그리고 강의를 통해서 고전의 현대화에 일조했다. 또 대중적인 글쓰기를 통해 세상과의 소통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이메일 : munsua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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