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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금강경 오해 16

전편에서 云何降伏其心을 푼 말이 맘에 안 든다. 좀 고쳐서 부연 설명해 본다.

云何降伏其心, “그 맘으로 항복되어진 어떤 특별한 것이 있습니까?”라고 수보리는 묻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의 其心은 如來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임을 안 이 앎의 맘,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무상정등각이라는 맘을 지칭한 것이다. 如來와 菩薩은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이다. 여래도 보살도 연기의 실상을 표상한 언어문자이다. 단지 여래는 노상 석가여래 석가여래하니까 여래가 마치 부처와 같은 뭔가를 깨달아 완전하게 되어진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굳어 온 것이며, 보살은 육바라밀 따위 道를 닦아 완전한 사람이 되는 중이라는, 부처의 삶으로써의 佛性에 대한 설명에 사로잡혀, 부처가 덜 된, 부처가 되는 중의 뭔 구도자 정도로 아는 생각으로 굳어진 것이다. 여래는 보살이며 중도며 열반 등의 언어와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연기의 실상이란다고 진리의 진실이란다고 이 연기며 실상이며 진리며 진실이란 언어가 전혀 다른 것을 표상하는 게 아니다. 다만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은 이 성품의 삶으로 사로잡힌 자기동일체적 선정의 실상·진실이며, 이 성품의 삶으로 사로잡힌 자기동일체적 작동의 지혜인 연기·진리이다. 여래며 열반이며 중도며 보살 등의 이름은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이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임을 하나로 묶어 표상한 말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불교적 관용어만이 이를 표상한 말이 아니다. 바르게 보면 모든 언어문자는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을 표상한 것으로써 진리의 진실을 표상한 진리의 진실이다.

云何應住 云何降伏其心은 이를 묻는 것이다. 무상정등각이라는 생각의 맘으로 應住한 실상·진실로써의 보살은 어떤 것이며, 그 맘으로 항복되는 작동의 연기·진리는 어떤 것이냔 것이다.

降伏이란 말은 아무래도 후대의 삽입된 언어지 싶다. 항복이란 말을 빼야 오히려 문맥이 더 잘 통할 듯싶은데 애써 이 말을 붙인 건, ‘어떤 맘이냐’니까 맘으로써의 특별한 뭐가 따로 있는 건줄 사람들의 오해가 자심하므로 이 항복이란 말을 억지로 붙인 것 같다. 그런데도 이 오해는 멈추지 않고 오히려 더 심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도올 같은 대석학도 惡을 물리쳐 善男善女로 만드는 게 이 금강경이라고 할 정도니, 저자의 장삼이사들이야 오죽하겠는가.

도올은 말한다.

2-4. 佛言; “善哉! 善哉! 須菩提! 如汝所說, 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汝今諦聽! 當爲汝說.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如是住, 如是降伏其心.”

2-4.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좋다! 좋다! 수보리야! 네가 말한 바대로, 여래는 뭇 보살들을 잘 호념하며, 뭇 보살들을 잘 부촉해 준다. 너 이제 자세히 들으라! 반드시 너를 위하여 이르리라.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냈으면, 마땅히 이와 같이 살 것이며,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리라.”

[강해]

얼마나 강력하고 단호한 붓다의 말씀인가? 좋다! 좋다! 나는 네 말대로 뭇 보살들을 잘 호념하고 잘 부촉한다. 너 이제 자세히 들으라!(p157)

-붓다의 이 말이 단호하고 강력하게 느껴지는 건, 이 말을 명령이나 지시의 말이라고 듣기 때문이다. 설령 그렇더라도 이건 각자의 감정이니 이 감정을 구태여 단호하고 강력하게 노출시키는 건, 부흥목사가 대책없는 믿음을 선동하는 것 같아 좀 거시기하다. 善哉를 ‘좋다!’라고 영탄조로 풀이한 대도 구태여 이 금강경이 증명하고 있는 보리살타의 연기의 실상이므로 구태여 이 금강경이 있는 까닭에 어긋난 건 아니다. 수보리가 묻는 물음의 말이 진리의 진실인 금강으로 잘 말해진 물음이므로 이를 칭찬하는 말로 붓다가 ‘좋다’라고 한 것으로 알고 ‘좋다!’라고 풀이한 것이라면 이는 구태여 이 금강경이 있는 까닭에 어긋난 사유의 말은 아니다. 그러나 전편에서도 말했지만 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을 도올과 같이 이렇게, 상위계급의 여래가 하위계층의 보살들을 보호하고 위해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건 이 금강경이 구태여 있는 까닭엔 아득한 말이다. 또 如汝所說이란 말도 단순히 수보리가 앞에서 한 말만으로만 생각하는 건, 붓다 역시 평범한 인간으로써 일상적 언어생활을 한 이로써의 부처이므로 평범한 일상의 우리가 곧 이 부처의 삶으로써 부처가, 금강이, 여래가, 진리의 진실이 특별할 게 없음을 밝히는 것이어서 기분 좋게 들리는 말이기는 하지만, 이 평범의 일상 중의 하나인 문자 하나도 금강임을 밝히는 이 금강경이 구태여 있는 까닭엔 아득한 이해의 말이다. 如는 금강이다. 그러므로 如汝所說은 ‘수보리야, 네가 말한 것은 如의 금강이며 부처며 여래로써 善護念菩薩이며 善付囑菩薩이다.’란 말이다.

또 汝今諦聽이란 한문도 ‘너 이제 자세히 들으라’라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알아 말한다고 이것이 진리의 진실이 아닌 건 아니다. 분명히 다시 또 밝히건데 구태여 이 금강경이 있는 까닭을 말함에 있어 그 까닭에 가까운 사유의 말을 한 대도, 또 도올과 같이 아득한 이해의 말을 한 대도 이 모든 사유의 말은 금강경인 진리의 진실이 아닌 건 없다. 왜냐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은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로써, 이 삼세가 총체적 인연·인과로 작동하는 중도·여래·열반의 보리살타인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인 때문이다. 이를 알든 모르든 대책없이 믿으라는 강요의 명령이 아니다. 이를 밝히는 것이다. ‘너는 지금 진리의 진실을 알아 들었으니, 너의 말은 마땅히 진리의 진실이다.’-

도올은 말한다.

“汝今諦聽” ·····. 여기서 본동사는 “聽”이다. ·····. “聽”은 능동적으로 내가 들을 때만 쓰는 말이다. 그에 비하여 “聞”은 “들린다”가 아니라 “듣는다”이다. ·····. 있는 그대로, 들린 그대로 들은 것이다. 거기엔 객관성이 보장되어 있다. 그러나 聽은 다르다. 이것은 내가 들어야 한다. 내가 애써 힘써 주관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내가 능동적으로 발심하여 들어야 한다. 진리는 들리는 것이 아니다. 들어야 하는 것이다. 들으려는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만 들리는 것이다. 여기서 붓다는 바로 듣고자 하는 마음의 준비를 확인하고 있다.(p158)

-이렇게 聽이란 말의 개념을 잘 알면서도 어째서 구태여 불교가, 이 금강경이 있는 까닭은 외면하는가. 汝今諦聽은 앞의 如汝所說을 받은 當爲汝說과의 연기의 실상임을 보이는 말이다. 汝로써의 삶은 말하고 듣는 작동으로써 연기의 실상인 진리의 진실이다. ‘너는 지금 진리의 진실을 알아들은 것이며, 말을 하는 너는 마땅히 진리의 진실인 것이다.’란 말이다. 즉 너는 진리의 진실인 말을 진리의 진실로 듣고 있는 것이며, 너는 진리의 진실인 말을 진리의 진실로 말하고 있는 것이란 것이다. 듣는 것도 말하는 것도, 너도 나도, 지금 여기의 때도 온통 보리살타로써 진리의 진실이란 것이다. 뒷말도 아예 잇자.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如是住, 如是降伏其心. 그래서 진리의 진실인 어떤 남자 여자가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이 진리의 진실임을 안 이 무상정등각이라는 맘이 격발했다면, 응당 진리의 진실인 무상정등각이라는 이 생각의 맘으로 住한 것이며, 이 무상정등각이라는 이 생각의 맘으로 항복해 온 중도·여래·열반의 맘, 보리살타인 것이다. 곧 누구든 무상정등각이라는 생각의 맘, 구태여 불교가, 선이 선 까닭을 해결한 맘이 격발했다면, 이 해결의 맘은 如, 보리살타로써 진리의 진실이라고 석가여래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석가여래는 자신의 말뿐만이 아니라 모든 말은 온통 다 이 보리살타의 진리의 진실을 증명하는 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진리는 ‘진리는 들리는 것이 아니다. 들어야 하는 것이다. 들으려는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만 들리는 것이다.’라고 사유하여 말한 대도 이 사유며 말이 진리의 진실로써 연기의 실상인 것이다. 이 진리는 석가여래나, 또는 뭘 깨달은이들이나 할 수 있는 따로 있는 말이라서, 이 진리는 능동적으로 발심하여 들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만이 들을 수 있어 이를 석가여래가 확인하는 말이라고 진술하는 건, 석가여래를 삼세의 대도사가 아니라 사람의 선생으로만 아는 편벽심의 사람이나 하는 말이다. 이게 아니라 거창하게 ‘삼세의 대도사’라고 허황되게 추켜세우기만 하는 아부로 평범한 사람일 뿐인 석가여래를 신격화하는 게 오히려 소견머리가 편벽된 사람이란다면 다만, 이 사유의 이 말이 진리의 진실임을 바르게 보시라. ‘진리를 들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한단다면 이미 이 생각의 말이 진리의 진실임을 바르게 보시라. 말 한마디, 문자 하나는 구태여 불교가, 이 금강경이 있는 까닭인 진리인식이라는 한 생각을 멀게도 가깝게도 하는 마술사다.

도올은 말한다.

“너 이제 들으라!” 어떻게 듣는가? 그 “어떻게”를 나타내 주는 부사가 곧 “諦”인 것이다. 여기서 “諦”는 “자세히” “명료하게”의 뜻이다. 그리고 “진실하게”의 뜻도 들어 있다.

“汝今諦聽!” “너 이제 자세히 들으라!” ·····羅什이 여기 “諦”글자를 선택한 이유는 불교적인 眞諦의 의미가 분명 숨어 있다. 다시 말해서 듣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들으라는 것이다.(p158~159)

-석가여래는 보리살타로써 진리의 진실이다. 이는 석가여래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은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의 총체적 작동으로부터 오직, 이 성품의 삶으로 如來작동하는 지혜의 보리살타로써 연기의 실상인 진리의 진실이다. 諦는 이를 표상한 언어문자로써 진리의 진실이다. 도올처럼 이해하여 진술하는 건, 이 도올과 같은 이해의 빈깡통으로 오랜 세월 구태여 불교가, 선이 전해져온 까닭으로 이 빈깡통만 보고 말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빈깡통 소리를 듣는 이것이, 들리는 이것이, 말하는 이것이, 말이라는 이것이 진리의 진실임을 증명하는 이 기도가 구태여 불교가, 이 금강경이 있는 까닭이다.

汝今諦聽이란 말은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들으라’는 뜻의 말이 아니라, 듣는, 들리는 이것이 諦, 하느님의 말씀, 즉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의 총체적 작동인 이 하느님으로써의 진리에 의한 말, 진실임을 말하는 기도일 뿐,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들으라’는 강요의 말이 아니다. 기도와 강요는 전혀 다른 삶이다. 인의예지를, 사랑을, 자비를 실천하라는 강요가 아니라, 오직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이 이것임을 알라는 기도의 사람들이 저들이다.

“汝今諦聽”을 “너 이제 자세히 들으라!”라고 푼대도, ‘너는 지금 진리의 진실을 알아들었다’라고 푼대도, 이 풀이는 진리의 진실이다. 다만 어떤 풀이의 진술이 진리인식이라는 한 생각을 격발하는데 있어 가깝게 작동할 수 있는가 이다.-

도올은 말한다.

그리고 붓다는 또 다시 반복하여 선포한다. ·····. 반드시 너를 위하여 이르리라! ·····. 이 문자 속에는 인간 붓다의 실존적 “결단”(entscheidung)이 숨어 있다. 반드시 내 너를 위하여 이르리라! 반야와 비반야의 갈림길, 고비길, 그 결정적인 순간의 선포인 것이다.(p159)

-當爲汝說을 ‘반드시 너를 위하여 이르리라’라고 이해하여 말한 대도 어김없는 진리의 진실이다. 석가여래가 너희 사람들은 진리이니 ‘진리를 깨달으라’고 사람들에게 이르며 산 사람이란 대도, 또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이 진리의 진실임을 기도한 이란 대도, 이 말은 다 진리의 진실이다.

當爲汝說을 ‘반드시 너를 위하여 이르리라’라고 이해하면 선생으로써의 평범한 사람냄새가 물씬 풍겨 석가여래가 실존적 인간임은 짐작하겠지만, 뭔 “결단”(entscheidung)이 숨어 있는지는 모르겠다. 여타 종교에서 풍기는 神의 향기를 없애고 평범한 사람으로 석가여래, 자기를 ‘결단’했다는 뜻인가? 석가여래가 평범한 사람이란 대도, 삼계의 대도사란 대도, 이렇게 아는 내가, 이 앎을 알게 한 저가 연기의 실상임을 석가여래는 말했을 뿐이다. 우쨌든지 석가여래가 ‘반야와 비반야의 갈림길, 고비길, 그 결정적인 순간’을 선포했다니, 어이가 없다. 어떤 것이, 무엇이 대체 반야며 비반야란 말인가?-

도올은 말한다.

여기서 “너”는 누구인가? 물론 외면적으로는 수보리 존자를 가르킨다. 그러나 그렇지 아니하다. 수보리는 수없는 뭇 보살들, 진리를 갈구하는 선남선녀의 피끓는 젊은 생령들을 대변하는 지시체일 뿐이다. 내 너 위하여 이르리라, 반드시! 반드시 너 위하여 이르노니 반드시 너 “자세히”(깨달을 때까지) 들어야 한다. 이 “들음”의 과정이 바로 금강경이라는 노래인 것이다.

그리고 또 붓다는 수보리의 질문을 반복한다.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냈으면, 마땅히 이와 같이 살 것이며,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리라.”(p159)

-도올의 검술엔 검법이 없다. 매우 자유분방하다. 다만 이런 내가 진리의 진실임을 말하지 않고 저기 저것만 진리의 진실이라고 말하니 진리의 진실이 어디 따로 있어 멀게만 느껴질 뿐이다. 이 금강경이 깨달을 때까지 들려주는 노래임을 눈치 챘다면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가 금강경임을 말해야지, 다만 이 금강경에만 머물러 있으니 참말로 안타까울 뿐이다.

수보리를 모든 사람들이란 대도 그 지시체를 본 눈은 뱁새눈일 텐데 ‘선남선녀의 피끓는 젊은 생령들’이나 지시한 거라고만 하니, 참말 구태여 불교가, 이 금강경이 있는 까닭의 검법을 바르게 알아 본 눈이랄 것이 없어 애달프다. 늙음도 설어라커든, 오히려 늙은이가 이리 젊은 애들을 대책없이 감싸고 드니 요즘 세상은 이렇게 버르장머리 없이 되어가고 있는 것 아닌가? 금강경으로써의 이 반야가 어찌 젊은 애들만의 일이란 말인가. 그럼 늙은이들은 비반얀가? 무상정등각이라는 진리인식인 진실의 ‘진리를 들을 수 있는 맘의 준비’는 금강 같은 체력의 젊은 애들이나 惡한 맘을 항복받아 할 수 있는 거여서 반야는 젊은 애들이나 살 수 있는 삶이란 말인가?-

도올은 말한다.

여기서 붓다의 신중함, 즉 주저가 들어가 있다. 이것은 엄중한 사태에 대한 붓다의 경고다. 이 경고는 상대방에게 마음의 준비의 시간을 허락한다. 붓다는 상대방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단순히 질문을 반복해서 대답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답이 이루어진 것이다. 붓다는 云何(어떻게)를 如是(이와 같이)로 바꾼 것이다. “이와 같이 살 것이며, 이와 같이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리라.” 이미 해답은 주어진 것이다. 이미 선포는 끝나 버린 것이다. “이와 같이” 이 한마디로!

그러나 우리는 이 “이와 같이”의 내용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다. 붓다는 그러한 갈구하는 심령을 확인한다. 이와 같이 살 것이다. 부처님! 제발, 이와 같이, 그 이와 같이를 더 말씀해 주십시요!(p160)

-결국 이럴 줄 알았다. 이렇게 허망으로의 반야, 지혜가 작동하는 보살님일 줄 알았다. 처음부터 싹수가 그랬다. 보리살타에 대한 작은 개념적 이해부터가 노랗더니, 결국 여기서 주저 앉아버리고 말았다. 석가여래가 이미 수없이 진리의 진실인 사유의 말로 진리의 진실을 증명하여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이 온통으로 진리의 진실임을 순간의 멈춤도 없이, 설령 순간의 멈춤이 있었다면 이 순간의 멈춤으로도 분명하게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뭘 신중하게 주저했다는 것이며, 어떤 말인들 구태여 불교며, 이 금강경인 반야로써의 진리의 진실인 손가락질로써 엄중한 사태의 경고랄 게 따로 없는데, 뭔 ‘상대방에게 마음의 준비의 시간을 허락’하고 자시고 할 것이 있다는 것이며, 더구나 ‘붓다는 상대방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는 해괴한 사유의 말을 하는가?

이렇게 엉뚱한 사유의 말을 해놓고는 ‘붓다는 云何(어떻게)를 如是(이와 같이)로 바꾼 것이다. “이와 같이 살 것이며, 이와 같이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리라.” 이미 해답은 주어진 것이다. 이미 선포는 끝나 버린 것이다. “이와 같이” 이 한마디로!’라고 말하는, 이 앞말과는 엉뚱하게 다른 뒷말로 단번에 초월하는 연기의 실상을 바르게 보시라.

如是, “이와 같이” 이 한마디로 끝난 것이긴 하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수보리가 물은 말하고만 같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수보리 니가 말하는 이것이 진리의 진실임을 말하는 것이다. 니가 말하는 이것이 진리의 진실로써의 住이며,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가 총체적 인연으로 죽는 항복작동으로부터 온 무상정등각이라는 이 맘은 이 항복작동으로써의 보리살타인 如來로써 연기의 실상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는 如是인 것이다.

구태여 불교가, 이 금강경의 노래가 있는 까닭은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이 부처며 금강의 진리의 진실인 如是임을 깨달으라는 손가락질이니, 이 如是의 말을 더 들어보겠단다면 더 들어 볼밖에.-

도올은 말한다.

2-5. “唯然世尊! 願樂欲聞.”

2-5.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즐겁게 듣고자 원하오니이다.”

[강해]

이 짧은 한마디속에는 무수한 명제가 중첩되어 있다. “唯然”은 단순한 “예”(唯)라는 대답의 音寫에 “然”을 붙인 것이다. 그러나 이 “예”는 붓다의 선포(케리그마)에 대한 보살들의 긍정이다. “그러하옵니다!” 즉 “이와 같이”란 내용이 설파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의 “열음”이다. 받아들이고 나면 우리의 마음이 편해진다. 긴장이 사라진다. 갈등구조들이 해소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진리를 즐겁게 들을 수 있게 된다. 진리는 “즐기는” 것이다. 그것은 향유(enjoyment)의 대상이다. 존재는 곧 향유, 즐김인 것이다. 즐길 수 있을 때 비로소 진리는 들리는 것이다.(p160~161)

-맞다. ‘이 짧은 한마디 속에는 무수한 명제가 중첩되어 있다.’ 이 한마디의 말은 말의 형상인 언어문자도, 그 의미의 뜻도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 곧 과거 현재 미래로써의 모든 존재와 현상이 총체적 인연·인과로 작동한 연기의 실상으로써의 한마디 말이므로 그 속에는 무수한 명제가 중첩되어 있다. 그러므로 唯然을 ‘예 그러하옵니다.’라고 한 대도, 아니면 ‘모든 존재와 현상은 총체적 인연·인과로 작동하는 이 보리살타의 然으로써 오직, 이 진리의 진실입니다.’라고 한 대도, 이는 진리의 진실이다. 또 世尊을 그냥 석가여래를 가르키는 이름의 ‘세존’이란 대도, 아니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서의 세상이 총체적 인연·인과로 작동하는 이 보리살타에 의하여 오신 존경스런 如來’라고 푼대도, 이는 이 연기의 실상으로써 진리의 진실이다. 이를 수보리는 긍정한 것이다. 누차 반복하지만 수보리는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이 진리의 진실임을 안 무상정등각이라는 이 한 생각의 내 맘은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의 총체적 작동인 보리살타에 의한 한 생각의 맘이라는 석가여래, 당신의 말을 긍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願樂欲聞, ‘즐겁게 듣고자 원한다’는 것이다. 이는 석가여래, 당신이 아직 진리의 진실을 말하지 않았음에도, 그런 당신을 뭘 믿고 즐거이 들을 것이 있다고 그걸 원한다는 게 아니라, 당신이 말한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이 진리의 진실임을 아는 게 무상정등각이라는 맘이다.’란 말을 내가 알아듣고 깨달아 긍정하니, 願樂, 내 스스로의 일을 즐기고, 欲聞의 바깥일로 들려오는 것들을 시랑하겠다는 것이다. 구태여 불교가, 이 금강경이 있는 까닭을 깨달았으므로 願樂欲聞으로써의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인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가 온통 오직 그러한 然으로써 진리의 진실임을 깨달은 맘을 표현한 말이다.

이런 언어문자들이, 이 언어문자로 표상한 실제가 연기의 실상으로써 진리의 진실인 까닭을 말해야지 단지 진리의 진실로 말만 하는 건 구태여 불교가, 이 금강경이 있는 까닭인 진리인식을 말하는 기도로선 아득한 말이다.

수보리는 매우 명석한 사람이다. 아무리 똑똑한 석가여래란 대도 그 똑똑함을 자기가 직접 증명하지 않았다면, 석가여랠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인정하려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 ‘즐겁게 듣잡고자 원요하삽난다’면 이는 증명되지도 않은 석가여래에게 넘 아부하는 태도가 아닌가. 뭐가 진짜인지 모름에도 불구하고 진짜라고 긍정해버리면 뭔 맘이 편하니 어쩌니 하는 사유의 말은, 진리가 어디 따로 있다고 향유나 하는 거라고, ‘즐길 수 있을 때 비로소 진리는 들리는 것’이라고 사유하는 말은 구태여 불교가, 이 금강경이 있는 까닭관 아득한 사유의 말이다. 존재의 그대를 그대가 즐기겠다면 즐기시라. 이는 그대 삶으로써의 자유의지인 반야바라밀이니.

이 금강경이 아무리 석가가 滅如來로 항복한 후에 결집된 거라지만, 이렇게 아부하는 말로나 기술된 금강경이란다면, 그 금강의 값은 이렇게 비쌀 것이 없는 짱돌에 불과할 것이다.

붓다의 똘마니들이 보살이 아님은 이미 여러 번 밝혔거니와, 붓다는 실재의 실체랄 것이 없는 붓다로써의 삶으로 작동하는 보리살타이다.

도올이 해박한 지식으로 엄청난 말을 하지만 ‘唯然’, 이 한마디에 얼마나 많은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가 중첩되어 있는지를 밝히려면 까마득하다. 어디 어느 때에서 唯는 선정의 표상이며 然은 지혜작동을 표상한 말로써 진리의 진실임을 알아 밝히는지 따라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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