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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금강경 오해 45

도올은 전분절의 [강해]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 (8-3의)“사구게”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사행시”를 가르키는 것이 아니요, “부처님 말씀이 함축적으로 요약된 어느 구절”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 “사구게”라는 말 때문에 어리석은 자들이 금강경의 4개의 사행시만을 낭송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데 이는 참으로 守株待兎의 宋人의 우보다 더 우매한 것이다. ·····. 嗚呼!’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석가여래부처님의 말씀이 함축적으로 요약된 구절이 꼭 사행시 형식의 사구게는 아니더라도 똑 떨어진 어떤 구절로 따로 있을 것인가? 석가여래의 말속에 함축된 그의 깨달음은 이런 특정형식의 구절로 있을 것이랄 것이 없다. 이 모든 구절로 드러난 모든 언어문자는 진리의 진실을 표상한 진리의 진실이다. 이를 안 옛사람은 이미 석가여래의 깨달음인 정법안장열반묘심인 진리의 진실은 不立文字란다고 못박아 어떤 언어문자로도 따로 세울 수 없는 거라고 한 것이다. 不立文字란 말은 어떤 문자로도 석가여래가 때달은 진리의 진실을 세우지 않는다거나 세울 수 없음을 말한 것이 아니라 어떤 문자로도 따로 세울 것이 없이 어떤 문자도 온통 전부 다 정법안장열반묘심을 표상한 정법안장열반묘심이란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 (8-3의)“사구게”라고 하는 것’은 도올의 말처럼 석가여래“부처님 말씀이 함축적으로 요약된 어느 구절”로 이해해서는 맞지 않는다. 이 사구게는 분명 소명태자가 각 분절마다 붙인 사구의 제목을 일컫는 말이다. 이 제목의 사구에 함축된 석가여래의 깨달음을 남에게 바르게 설명할 수 있단다면 그 복은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우는 보시의 德行보다도 더 큰 덕행의 복(其福勝彼)이란 것이다.

‘於此經中, 受持乃至四句偈等爲他人說, 이 經中에 수지되어 있는 사구게 등으로 남을 위해 설할 수 있는데 이른다면, 其福勝彼, 이 복은 저를 이기리라(이 복은 저 덕으로부터 일어난 상대적 인식의 반야바라밀이다).’

단지 이 금강경이라는 책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이를 보더라도 이 분절은 분명 석가여래의 말이 아니라 소명태자를 비롯한 그 후인의 삽입분이지 싶다. 그러나 其福勝彼란 말을 위 ()속의 말처럼 바르게 이해한다면 앞의 문장은 다른 해석이 되어야 한다. 이는 이 금강경이 구태여 있는 까닭으로 바른 이해의 말이지만 여기서 그친다. 왜냐면 설령 이에 올바른 이해의 말이 아니란다고 이 금강경이 서있는 까닭이 아닌 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까닭은 숱하게 이미 말했으므로, 솔직히 똑 같은 말을 왜 그렇게 자꾸만 하냐는 지청구를 듣기가 싫어서 여기서 그친다. 헐! 오직 이 사유의 이 말이 금강(보리살타의)반야바라밀임을 바르게 보시라.

도올이 말한 대로 석가여래의 ‘금강석과도 같은 이 지혜의 말씀’은 이런 인간의 세속적 삶으로 작동하는 지혜의 복덕 따위를 벗어난 비약이란 말인가?

8-4. 何以故? 須菩提! 一切諸佛及諸佛阿耨多羅三藐三菩提法, 皆從此經出.

8-4.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일체의 모든 부처님, 그리고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이, 모두 이 경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강해] 바로 이 금강경이 설하고 있는 대승의 지혜야말로 일체의 무상정등각의 깨달음의 원천인 것이다. 이 금강경의 설법을 떠나서 우리는 반야를 논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 붓다 최후의 도약이 이루어진다. 어느 누구도 말할 수 없는 최후의 심판, 그것은 무엇이었는가? 다음을 보라.

--- 도올은 앞 ‘소승은 뭐고 대승은 뭐냐?’라는 논술에서 대승은 나我를 無化시키는 無我의 실천자라고 이미 말했다. 그렇다면 이 무아를 실천하여 완전 我가 없어진 것이 무상정등각의 부처인 것이며 이 ‘일체의 무상정등각의 깨달음’을 이룬 모든 부처들이 이 금강경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인가? ‘여기 붓다 최후의 도약이 이루어진다.’면 이 我의 나가 없어진 無我의 상태가 된 붓다를 말하는 것인가? 나는 당연히 나라는 것이 없음에서 나라는 것으로 일어나 이 나라는 것으로 살며 나라는 것이 없어져 죽어버리는 이 당연함인데, 이 당연한 걸 내가 일부러 의지해야 한다는 건가 뭔가 모르겠는 이런 해괴한 이야기가 석가여래가 깨달은 거라고, 이것이 금강의 지혜라고 말하는 것인가? 또 ‘이 금강경의 설법을 떠나서 우리는 반야를 논할 수 없는 것’이라니, 저 阿耨多羅三藐三菩提法의 菩提(bodhi)도 지혜고, 도올의 般若(prajna)도 지혜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금강경을 떠나서 논할 수 없는 반야의 지혜라면 이 지혜는 어떤 지혜며, 저 보리의 지혜는 또 뭔 지혜란 말인가? 대체 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는 이 法은 뭔 법이란 말인가?

이 금강경을 講解, 풀어서 말한단다면 이런 이 까닭을 낱낱이 밝혀 말해야 한다.

이 말은 모든 존재와 현상이라는 이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으로써의 부동태인 아뇩다라삼먁의 부처들은 이 아뇩다라삼먁의 부처들로써의 삶의 지혜로 작동하는 이 삼보리·보리살타의 법이라는 뜻의 말임이 분명하지 싶다. ‘싶다’는 표현은 필자가 이쪽, 특히 언어문자에 대한 바른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없어 하는 말이다.

우리는 보통 달마를 보리달마라 하지 반야달마라 하지 않는다. ‘달마는 왜 동쪽으로 왔는가?’라고 아직도 묻고들 있지만 이는 뻔한 것이다. 달마는 석가여래의 깨달음을 전도하러 온 것이다. 그 깨달음이 뭔지 모르는 것이 겁나서 아예 ‘달마가 왜왔냐’는 데서부터 기며 어리버리하지 마시라. 알고 보면 별것 아니니깐. 헐!

우짰든지 이로 보면 一切諸佛의 세계는 제불의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인 아뇩다라의 관념적 부동태로써의 삼먁인 선정의 반야로써, 이 선정의 반야로 작동하는 지혜의 삼보리라는 뜻의 말이다. 이 말은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모든 성품이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로써 총체적 인연·인과로 작동하는 중도·여래·열반의 보리살타인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이라는 뜻의 말이다. 이 석가여래가 깨달은 이 법은 온통 다 이 금강경에서 설명하는 금강의 법으로부터 나오는 비약의 如來, 곧 이 分의 제목이 가르키는 依法出生임을 뜻하는 말이다.

석가여래는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일체 이 모든 존재와 현상에 대한 인식을 부정하고 이를 뛰어넘어 비약한 우리가 모를 이가 아니라, 오직 이것이 보리살타라는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인 금강의 법인 까닭을 이 법에 의해 비약한 말을 한 것이다.

何以故? 須菩提! 一切諸佛及諸佛阿耨多羅三藐三菩提法, 皆從此經出. 어째선가? 수보리야! 일체의 부처며 부처로써의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의 세계는 이모든 존재와 현상의 세계로 작동하는 삶의 법이다. 이 모든 삶의 법은 이 경으로 설명한 법을 좇아 나오는 비약의 법이다. ---

도올은 이렇게 말한다.

8-5. 須菩提! 所謂佛法者, 卽非佛法.”

8-5.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곧 불법이 아닌 것이다.”

[강해] 참으로 충격적인 최후의 一言이다. 불법은 곧 불법이 아니다. 여기서 佛은 곧 “깨달음”이다. 佛法은 곧 깨달음의 법이다. 이 최후의 충격적 一言은 바로 대승불교의 마지막 선포인 것이다. 그것은 바로 “깨달음” 그 자체의 부정인 것이다. 번뇌가 곧 보리다.

최후의 만찬에서의 대승예수의 최후의 일언은 이런 것이었다. “나 예수의 말은 예수의 말이 아니다.”

--- 8-3에서 도올은 ‘붓다의 언설(經)은 하나의 비약이다. 大乘은 小乘의 연속적 발전이 아닌 하나의 비약이다.’라고 말했다. 도올은 ‘비약’을 어떤 특정의 것으로만 본다. 여기서는 석가여래가 자기가 한 말을 말이 아니라고 부정한 말이 비약이란 것이다. 예수도 이와 같다는 것이다. 예수의 깨달음이나 석가여래의 깨달음이 같은 것이라고 이해하는 건 그렇다 차자. 그들의 말씀, 經은 온통 비약의 말이다. 그들이 깨달은 뜻의 정신이 비약한 말씀이 비약하여 이 경으로 비약한 如來의 반야바라밀이다. 이런 비약 작동의 삶을 사는 예수며 석가여래이긴 하지만, 이 비약작동은 이들만의 삶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물론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은 노상 시·공간적이며 불법·비불법적인 이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으로 작동하는 이 반야의 지혜로 비약하는 작동의 삶이다. 이 금강경은 이를 밝혀 증명하는 연기의 실상이다.

이 분절을 ‘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곧 불법이 아닌 것이다.’라고 이해한 이 해석은 이 금강경의 불법과는 아득한 이해의 진술이다. 이는 도올이 이 금강경이 무엇인지, 석가여래가 무엇을 말로 설명하고 있는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의 일도 이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말씀이다. 특히 오직 인간중심적 사유체계에서 한 발짝도 밖으로 내딛지 않으려는 도올의 집착이 집요하다.

이 분절이 당시 최고의 가치를 지닌 인식체로써의 말에 대한 최종적 一言의 선포인 건 맞다. 부처라는 인식에 대한 서가여래의 인식을 선포한 말이다. 佛法이란 말은 부처가 부처로써 작동하는 삶의 법을 이른 말로써 이는 부처라는 관념적 부동태며, 이 부처가 실제 시·공간적으로 작동하는 작동성으로써의 삶임을 이른 말이다.

수보리가 석가여래에게서 듣고 안 부처라는 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所謂佛法者, 卽非佛法. 이른바 이 불법이라는 것은 이 불법이라는 실재의 실체랄 것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나 석가여래는, 나 예수는 이 석가여래며 예수라는 이름뿐만이 아니라 삶으로써의 독립적 개체인 소승으로써의 바라밀로 실재하는 실체의 이 반야·지혜가 아니라, 이런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이 총체적 인연·인과의 대승으로 작동하는 살타의 보리·지혜인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임을 선포한 말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나我는 곧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로써의 一切的 존재며 이 일체로 작동하는 삶임을 선포한 것이다.

도올이 [강해]에서 ‘이 금강경이 설하고 있는 대승의 지혜야말로 일체의 무상정등각의 깨달음의 원천인 것이다. 이 금강경의 설법을 떠나서 우리는 반야를 논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 붓다 최후의 도약이 이루어진다. 어느 누구도 말할 수 없는 최후의 심판’이라고 생각한 말은 분명 연기의 실상으로써 진리의 진실의 말이긴 하지만 구태여 불교의 이 금강경이 선 까닭과는 아득한 사유의 말이다.

이 금강경이 설하고 있는 것은 대·소승적 지혜로써의 보리살타인 一切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라는 이 모든 성품의 삶, 즉 이 無上正等이 보리살타에 의한 覺, 곧 깨달음의 부처인 반야바라밀임을 아는 이 깨달음의 금강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금강경의 설법을 떠난 어떤 설법의 말에서도 우리는 반야를 논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면 여기 붓다의 말뿐만이 아니라 모든 말은 오직 이 말의 한 생각이 최후의 도약을 이룬 초월로써의 진리의 진실인 때문이다. 이 한마디 말은 저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로부터 여래한 이 한 생각이 비약한 초월의 이 한마디 말인 것이다.

無上正等覺이란 말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범어를 해석한 말이라고 하지만, 그렇단 대도 이는 분명 보리살타라는 말에 담긴 석가여래의 특별한 깨달음의 내용을 격의한 말이다. 이는 언어전문가들이 밝혀야 할 일이겠지만 석가여래의 깨달음이 당시 인도지역의 여러 언어로 유포되어 문자화하는 과정에서 같은 의미의 다른 여러 말들로 기록되거나 음·암송되고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 후대에 찬술된 이 금강경이 그 여러 말들로 전승되는 석가여래의 정신을 일일이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 싶다. 아마 이 일은 원효 당시에 난립한 중구난방의 불법을 心의 보리살타법으로 통일한 和諍정신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지 싶다.

우짰든지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모든 성품의 삶이 진리의 진실인 금강임을 밝힌 이 금강경이 ‘대승의 지혜를 설’하는 것이긴 하지만, 이 경만이 ‘일체의 무상정등각의 깨달음의 원천’이며, 이 경의 ‘설법을 떠나서 반야를 논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이 생각이 도약한 이 말은 전혀 이 금강경이 선 까닭과는 아득하게 도약한 생각의 말이다.

도올이 자꾸 이 금강경을 오해한 말을 하는 건, 이 금강경의 문자들이 금강, 곧 석가여래의 깨달음을 가르키고 있음을 모른 까닭이 아닐까 싶다.

8-5의 所謂佛法者 卽非佛法이란 말을 “이른바 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곧 불법이 아닌 것이다.”라고 푼대도 구태여 이 금강경이 선 까닭에 이상할 건 없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해 놓고 마치 석가여래가 자신의 깨달음을 부정한 것으로 설명하는 건, 비록 이 해석이며 설명이 석가여래의 깨달음에 어긋나는 건 아니지만 석가여래의 깨달음을 이해하여 설명한 말로는 아득한 말이다.

도올은 계속 오해해 말해 왔듯이 무상정등각의 부처가 석가여래와 같은 뭔 지혜를 깨달은 이인 줄로만 아는, 또 무상정등각이 깨달음으로써의 뭔 실재의 실체랄 것이 있는 것으로 아는 이 앎에 사로잡혀 있으므로 이 8-5의 문장을 석가여래가 깨달은 대로의 바른 뜻인 삼보리의 文義가 아니라 반야바라밀인 삼먁의 文意로만 이해하여 설명한 것이다.

또 말하지만 所謂佛法者 卽非佛法은 ‘이른바 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을 실재의 실체라고 卽한다면 이 불법은 불법이 아닌 것이다.” 불법은 불법이라는 관념적 부동태며 실제 시·공간적 작동성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을 수보리가 했단 대도, 세존이 했단 대도 여래라는 법의 부처가 여래라는 법의 부처로 실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여래라는 법의 부처로써의 삶, 곧 지혜작동의 보리살타임을 밝힌 말이다. 즉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는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로 작동하는 삶으로써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임을 말한 것이다.

연기의 실상인 인간의 삶은 번뇌며 보리 따위, 이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의 선정으로 작동하는 지혜의 비약보살이다.

그렇다면 도올이 이 금강경의 말로부터 바르게 비약한 여래로써의 말 ‘번뇌가 곧 보리’인 이 까닭은, ‘예수의 말은 예수의 말이 아닌’ 이 까닭은, 굳이 설명을 안 해도 이미 밝혀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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